-
-
어느 완벽한 2개국어 사용자의 죽음
토마 귄지그 지음, 윤미연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평점 :
벨기에 출신의 작가 토마 귄지그와 두 번째로 만났다.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된 <세상에서 가장 작은 동물원>이 단편 모음이었다면, 이번에 만난 <어느 완벽한 2개 국어 사용자의 죽음>은 장편소설로 아직 낯선 귄지그 작가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게 되는 작은 이정표가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게 해준다.
소설은 1978년 3월이라는 시간적 공간만을 제시한 채, 종잡을 수 없는 공간 속으로 독자를 안내한다.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화자는 ‘나’다. 왠지 정키를 연상시키는 주인공은 철저하게 비밀에 싸여 있다. 초반에 ‘완두콩’ 피에르 로베르를 ‘클린’했다는 고백과 함께 자신의 캐릭터 중의 하나인 교활함을 전면에 내세운다.
토마 귄지그는 1978년 3월의 사건을 계속해서 언급하면서도, 속 시원하게 알려주지 않는 전형적인 ‘인질극’을 벌인다. 도대체 그때 무슨 일이 벌어졌단 말인가? 주인공인 나에 이어, 슬로베니아 출신 하사관 모크타르와 훗날 그의 나이 많은 부인이 되는 (미망인) 마담 스카폰, 베트콩 해군 출신의 다오 민, 자신의 목숨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 미니트립, 모크타르의 여동생으로 수많은 남자를 유혹하는 수지, 그리고 최고악당이자 아티스트 짐짐 슬레이터를 차례로 소개된다. 아, 사건 전개에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는 19세 터보 포크 가수 카롤린 드몽시드를 빼먹었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플래시백 기법이 교차하는 가운데 나는 어느 날 다오 민이 제공한 술(혹은 마약, 각성제?)에 취해, 미니트립의 멀쩡한 이를 몇 대 날려 버린다. 그게 바로 재앙의 시작이었다. 미니트립은 가수인지 조폭인지 헷갈리는 짐짐 슬레이터의 애인으로, 나는 그야말로 죽을죄를 지은 것이다. 짐짐의 똘마니들에게 붙들려간 나는, 살기 위해 한 가지 거래를 제안받는다. 자신의 영역을 점점 잠식하는 신예 여가수 카롤린 드몽시드를 클린하라는 명령이다. 철천지원수에게 가장 어려운 일을 맡기라구? 그렇다면 이 일이야말로 나에게 적격인 셈이다. 그래서 나는 전직 군 출신인 모크타르와 함께 카롤린을 경호하는 역할을 맡은 키프로스 출신의 민병대 “가을비” 두목 어빙 낙소스의 부대에 정체를 숨기고 잠입한다.
그 와중에 간간이 삽입되는 나의 두 달이나 계속되는 군 병원에서의 생존 투쟁 역시 빼놓을 수가 없는 이야깃거리다. 1978년 3월의 사건과 짝을 이루는 병원 장면은, 인과관계 중에서 결과에 해당한다. 거의 전신을 다쳐서 말조차 못한 채, 의식만 있는 나는 과거에 벌어진 하나씩 사건을 재구성한다.
생뚱맞게도 귄지그는 전쟁의 실황중계라는 너무나 자극적인 소재를 서슴지 않고 선택한다. 이미 지난 걸프전에서 CNN의 텔레비전 중계로 익숙해져 버린 실시간 전쟁 중계가 이제는 케이블 텔레비전의 영역에까지 진출한 모양이다. 오로지 시청률의 상승과 광고의 폭주만을 원하는 제작자와 후원자의 결탁으로 가을비 민병대원들에게 자사의 로고가 찍힌 전투 점퍼를 입히고, 실시간으로 그들의 모습을 전파에 실어 내보낸다. 십 대 여가수 카롤린 역시, 계약에 의해 움직이는 마리오네트 인형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존재로 묘사된다.
도대체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어느 완벽한 2개 국어 사용자의 죽음>에는 정말 완벽하게 2개 국어를 사용하는 캐릭터가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토마 귄지그는 혹시나 바일링걸하는 주인공의 비극적 죽음을 그린 소설이 아닐까 하는 기대를 품고 책을 집어든 독자를 엿 먹인 걸까? 모르겠다, 이 소설에는 역시나 삶의 덧없음에 대한 니힐리즘의 향기와 더불어 실존의 부정(도대체 공간적 배경의 실마리를 조금도 잡을 수가 없다!), 정체를 종잡을 수 없는 나라는 인물의 허구성 등으로 뒤범벅되어 있다.
고전 누와르를 연상시키는 살인과 음모가 넘치지만, 어떤 장르에도 속하지 않는 탈장르성도 엿보인다. 소설을 읽다 보니 어디선가 본 듯한 영화의 장면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예를 들면, 나의 킬러적 고민에서는 뤽 베송의 <레옹>이 그리고 내가 군 병원에서 ‘부활’하는 장면에서는 타란티노의 <킬 빌>의 신부(브라이드)가 떠올랐다.
또 한편으로는 모든 것을 자본주의 법칙 아래 종속시켜 버리는 미디어 플래닝에 대한 신랄한 비판도 빼놓을 수 없다. 필연적으로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주제를 탐할 수밖에 없는 영상매체의 총아 텔레비전의 시선은 테러리스트와의 전쟁으로 향한다. 돈벌이가 되는 일이라면, 총탄이 난무하는 전쟁터는 물론이고 용병대장과 십 대 여가수의 조작된 연애까지도 소비자에게 실어 나르는 리얼리티 쇼의 파렴치함에 그만 혀를 내둘렀다.
전작 <세상에서 가장 작은 동물원>에서도 낯선 내러티브의 전개와 이야기의 구성에 어리둥절해하던 나에게, 이번 작품 역시 쉽게 이해와 동화 혹은 공감의 문을 열어 주지 않는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어쩌면 독자에게는 불친절할지도 모르겠지만, 꾸준하게 자신만의 문학 세계를 펼쳐 나간다는 차원에서 호감이 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