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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루덴스 - 놀이하는 인간
요한 하위징아 지음, 이종인 옮김 / 연암서가 / 2010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놀이하는 인간”이라는 부제가 붙은 요한 하위징아의 책을 읽었다. 그동안 놀이란 단순히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을 했는데, 저명한 문화 인류학자인 네덜란드 출신의 요한 하위징아가 풀이하는 인류가 그동안 영위해온 놀이에 대한 개념은 확실히 그 차원이 달랐다.
모두 12장으로 이루어진 <호모 루덴스>는 아쉽게도 역자 이종인 선생이 밝히듯이 원문인 네덜란드 직역이 아닌 영어 판본의 중역(重譯)이라고 한다. 하지만, 원 저자인 요한 하위징아가 직접 영문으로 옮기기도 하였으니 비록 중역이기는 해도 충분히 작가의 취지가 전달됐으리라고 믿는다. 원래 언어학자로 학문을 시작한 요한 하위징아는 중세사에 관심을 두면서 탁월한 역사지식을 바탕으로 한 문화인류학의 길을 걷는다. 특히 그가 1919년에 발표한 <중세의 가을>은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를 다룬 걸작으로 알려졌다. <호모 루덴스>는 1938년에 나온 책으로, 하위징아의 중요 저작 중에 마지막 방점을 찍는다.
자, 그렇다면 생각하는 인간 호모 사피엔스가 아닌 놀이하는 인간 호모 루덴스를 주창한 요한 하위징아가 생각하는 “놀이”란 과연 무엇일까? 우리가 흔히 말하는 문화보다도 우선한 놀이에 대해서 총체적 현상에서 접근할 것을 작가는 주문한다. 놀이에는 특별하면서도 사회적 기능을 담보한 의미가 담겨 있다는 것이 요한 하위징아의 생각이다. 동시에 이 놀이에는 인간의 원형적 행위들이 들어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놀이를 통한 ‘이미지 만들기’(imagination) 또한 쉽게 흘려 들을만한 주장이 아니다.
한편, 놀이에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놀이는 자유로운 행위이자 자유 바로 그 자체이며, 모두가 지켜야 하는 규칙을 가지고 있으며, 재현과 경쟁을 수반한다. 이런 놀이의 특징은 좀 더 고등화한 형태의 놀이로 진화해 가면서 의례, 축제 그리고 종교에까지 이르는 과정을 작가는 설명한다. 즐거움이라는 기본 베이스에서 시작해서 이렇게 고등 형태의 문화에 놀이적 요소가 배어 있다는 연구가 놀랍기만 하다.
다음으로, 그는 자신의 학문적 원류인 언어학에서 놀이의 뿌리를 캔다. 다양한 문화권에서 발견되는 놀이 개념의 추상화에 대한 그의 연구는 확실히 매력적이다. 우리 같은 범인들이 어찌 고대 그리스어 혹은 산스크리트어에 접근이나 할 수가 있을까? 어쩌면 언어학을 전공한 작가의 특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양한 층위를 가지는 문화권에서 발견되는 놀이의 ‘진지함’과 ‘심각하지 않음’이 갖는 상보적 관계에 대한 요한 하위징아의 언급이 인상적이었다.
승리와 부상이라는 측면을 통해 놀이의 경제성과의 연결점은 물론이고, 법률과 놀이 사이에도 놀이의 다른 모습인 경기라는 주장은 흥미로웠다. 다만, 그다음에 등장하는 놀이와 전쟁에서는 지나친 논리의 비약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대가에게 도전할 생각은 없지만, 놀이의 다양성에 대한 연구에는 찬성하지만, 과도한 확대해석에는 이견을 제시하고 싶다.
요한 하위징아는 놀이가 가지는 문학적 특성에도 눈길을 돌린다. 신화에 등장하는 의인화와 은유의 과정에서도 그는 놀이의 요소를 채굴해낸다. 막연하게만 가진 신화에 등장하는 알레고리와 은유에 대한 그의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속이 다 시원해지는 것 같았다. 철학과 예술에서도 그는 놀이의 개념을 캐내기 위해 계속 작업하지만 두 학문에 대한 알량한 지식으로는 도저히 대가가 보여주는 총체적 연구의 깊이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현대 문명에 대한 요한 하위징아의 예단 역시 찬란한 광휘를 발한다. 특히 의회 민주주의 역시 게임의 규칙과 페어 플레이라는 놀이가 가지는 요소들은 거세되고, 정치적 입장이라는 놀이답지 않음이 주류를 이루어 가면서 놀이라기보다는 한 편의 코미디가 되는 현실에 저절로 냉소가 뿜어져 나왔다.
마지막으로 요한 하위징아는 위대한 철학자 플라톤의 말을 인용하면서, 인생은 놀이처럼 영위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한다. 우리 문화를 관통하면서도, 도덕의 언저리에서 존재하는 놀이에는 개인적으로 중용이 벗으로 따라붙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는 즐거움의 방편으로서의 놀이에는 찬성하지만, 필연적으로 따라붙는 (심각한) 경쟁에는 반대한다. 서구학자가 연구한 놀이에 ‘정도를 지나침은 미치지 못한다’(過猶不及)는 동양철학이 어울릴지는 모르겠지만, 문득 떠오른 이 말로 맺음을 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