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자 - 2009 제17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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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부터 지도를 좋아했다. 그래서 학교에 가기도 전에 사촌형의 사회과부도(지금도 이런 이름으로 있는지 모르겠다)를 끼고 살았다. 지도 속에서는 전 세계 어느 곳이라도 가보지 못하는 곳이 없었다. 나중에 역사를 공부하게 되면서는 지도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했다. 답사를 다니기 위해서는 정말 꼭 필요한 게 바로 지도였으니까. 그러면서도 19세기 우리나라 전토를 직접 발로 밟은 이가 그린 지도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이제야 비로소 그 지도를 그린 이와 만나게 됐다.

책을 읽으면서 두 단어가 계속해서 나를 따라다녔다. ‘미상불’과 ‘덴바람’, 오늘 미상불을 국어사전에 찾아보니 “아닌 게 아니라 과연”이라고 그리고 ‘덴바람’은 된바람의 다른 말이란다. 미상불은 지도 때문에 아버지를 잃고, 나라의 권력을 쥔 사대부들이 아닌 백성을 위한 지도를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평생을 바친 고산자 김정호의 신산한 인생 전반을 아우르는 말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다음으로, 덴바람은 고산자 선생이 일생의 역작 <대동여지도>를 만들기 위해 겪은 고초를 상징하는 말이라고나 할까.

홍경래의 난으로 대표되는 민란이 조선을 휩쓸던 19세기 당시의 암울한 시대상을 박범신 작가는 중인의 신분으로 지도 만들기에 자신을 내던진 김정호의 삶에 투영시킨다. 전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철저한 신분제 사회를 유지하던 조선에 사민평등 사상을 바탕으로 한 천주교를 도저히 조선 조정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에 따른 박해가 소설의 어느 순간 등장하리라는 예감을 받았다. 그것도 김정호의 외딸인 순실이가 독실한 신자임에야.

박범신 작가는 왜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만드는 데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게 되었는지 조심스러운 추적을 시작한다. 고향인 토산에 살던 김정호의 아버지는 삼정(전정, 군정, 환곡)을 면제해 주겠다는 토산 현감의 제안을 받고, 홍경래의 난 진압에 자원대로 나섰다가 관아에서 제공한 엉터리 지도 때문에 객사하게 되는 변을 당한다. 백성을 위무해야 하는 목민관이 자신의 영달을 위해, 억지로 백성을 동원한 사실도 그렇지만 백성을 수탈하는 삼정의 문란이 얼마나 혹독했으면 군사훈련이라고는 받아 보지도 못한 백성이 반란군 진압에 나서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답답해졌다.

이런 정치적 상황에, 신산하기 그지없는 김정호 개인의 삶은 소설화시키기에 부족함이 없는 것 같다. 실제로 어떤 삶을 살았는지 역사의 공백이 너무나 많기에 어쩌면 소설가로서는 실존했던 인물인 그를 주인공으로 삼아 예의 공간을 채우기가 매력적이지 않았을까 싶다. 아주 잘 알려지고, 다양한 역사의 기록이 남아 있다면 오히려 작가의 상상력이 침투할 공간이 부족하지 않을까? 팩션이란 기본적으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명백한 역사적 사실만큼은 조심스럽게 다뤄야 하니 말이다.

삶과 죽음은 종이 한 장 차이라고 했던가. 얼굴도 채 기억이 나지 않는 부용꽃 같았다던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의 연이은 죽음으로 고아가 된 김정호는 목수로 생업에 대한 걱정을 덜고 조선의 방방곡곡을 누비면서 지도 만들기를 구체화해 나간다. 그리고 그의 지기로 등장하는 혜강 최한기, 위당 신헌 그리고 묘허 최성환 등과의 교우 관계를 통해 파란만장한 역사의 현장을 달음질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유배에서 풀려나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위당을 찾아간 지기들이 한자리에 모여 우산도(독도)에 대한 토론을 하는 장면은 왜 <대동여지도>에 독도가 빠져 있는지에 대한 변론처럼 들리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했다. 팩션 장르란 바로 이런 맛이 아니던가! 아 그럴 수도 있겠다는.

수명을 다해 가고 있던 조선 왕조의 정치적 상황과 김정호의 개인사를 다루면서도 조선 후기 학문의 한 흐름이었던 실학에 대해서도 작가는 예리한 시선을 던진다. 조선후기 실학자들이 추구하던 실사구시, 다시 말해서 객관적 관찰과 연구를 통한 사실에 도달하려는 이 캐치프레이즈에 고산자의 지도 만들기만큼 딱 맞아떨어지는 소재도 없을 것 같다. 이 실사구시와 짝을 이루는 이용후생에 있어서도, 백성을 위해 지도를 만들었노라는 김정호는 선언하지 않았던가. 고등학교 국사 시간에 그렇게 죽어라고 실사구시와 이용후생을 외웠지만 그걸 어떻게 적용시켜야 하는지는 전혀 모르지 않았던가. <고산자>를 읽으면서 이해를 바탕으로 하지 않은 암기 위주의 교육방식의 폐해를 절감했다.

정말 능력 있는 기술자가 대접을 받지 못하고, 망국을 불러온 위정자가 호령하던 암울한 시절에 대한 이야기에 그만 마음이 헛헛해져 버렸다. 미상불 박범신 작가의 글을 처음으로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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