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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들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 창비 / 2019년 3월
평점 :
4년 만에 제발트의 <이민자들>을 다시 읽었다. 알라딘 동지 그레이스님의 리뷰를 읽고서 그냥 이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바로 실천에 옮기게 되었다. 모름지기 독서는 외부의 자극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점에서 알라딘 북플은 우리 독서인들에게 매우 유용한 플랫폼이라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제발트의 <이민자들>과 상관없어 보이는 이야기지만 이 책을 읽다가 1987년에 나온 스팅의 <Englishman in New York>이 떠올랐다. 이 곡에서 스팅이 자신이 뉴욕의 합법적인 ‘에일리언’이라는 표현을 거침없이 사용한다. 내가 나고 자란 땅이 아닌 곳에 머무른다는 것 자체가 일종의 이질화가 아닌가라는, 그리고 그곳에 사는 나는 결국 에일리언일 수밖에 없다는 숙명이 연상됐다. 그리고 보면 우리가 사는 지구별에서 나도 역시 에일리언이 아닐까라는 엉터리 결론에 도달한다.
독일에서 나고 자라, 영국으로 건너가 에일리언이 된 작고한 제발트 역시 비슷한 처지가 아니었을까. 더군다나 아무리 전후라고는 하지만, 그는 한 때 적국이었던 나라의 시민이 아니던가. 어쨌든 1960년대 후반 영국 맨체스터에 새롭게 둥지를 튼 제발트 작가는 자신이 영국으로 가기 전 대략 이십년 전쯤에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나치 치하의 독일에서 이주한 에일리언 독일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이민자들>에서 들려준다.
어떤 식으로 그가 이야기를 직조하는지에 대해 너무 궁금하지만 이제는 작고한 지라 물어볼 사람마저 없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사진들은 제발트의 이야기에 많은 신빙성을 부여해 주는 동시에 진짜 이야기 속의 등장인물들과 매치되는가에 대해서는 알 도리가 없다. 아무런 설명도 요즘 같으면 반드시 기재해야 하는 사진에 대한 설명이 없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관광지나 미국의 야드 세일에서 습득한 사진들을 교묘하게 이용해서, 유사 사실을 만들어 내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민자들>에는 모두 네 명의 주인공들이 등장하는데 그 중에서도 맨 끝의 주인공인 프리드리히 막시밀리언 페르버(화가)의 이야기가 내게는 가장 매력적이었던 것 같다. 유대 가정 출신의 페르버의 어머니 루이자 란츠베르크의 비망록의 기록들은 아무 걱정 없이 제국에서 일상을 영위했던 시절의 단란한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물설고 낯선 그리고 한때는 제국의 번영에 기여했지만 이제는 쇠락해가는 공업도시 맨체스터에 새출발을 한 화자(제발트)가 만난 독일 출신 지역화가 막스 페르버를 통해 지난 세기 초, 크라이나흐라는 작은 독일 마을에서 벌어지는 이런저런 이야기에 대한 소회는 짙은 감흥을 빚어낸다. 말 장수였던 아버지 란츠베르크는 독실한 유대인 가장이었다. 초막절이나 하누카 같은 유대 명절을 엄수하는 동시에, 지역 사회에서 벌어지는 가면무도회 같은 행사나 바이에른 지역의 아름다운 자연 풍광에 대한 묘사들은 작가의 상상만으로 만들어 내기에는 역부족이지 않나 싶다.
참고를 하기 위해 읽은 <뉴요커>의 리뷰에서는 장황하게 1930년대 말, 독일에서 영국과 미국으로 유대인 가정의 아이들을 보낸 이야기가 등장한다. 만여 명에 달하는 아이들이 홀로코스트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 그렇게 타의반 자의반으로 고향에서 뿌리가 뽑혀진 채로 이주길에 나섰다. 대부분 그들은 호의적으로 이국에서 받아 들여졌으나 전쟁이 발발하면서 기묘한 상태에 빠지게 됐다. 어쨌건 그들은 적국 출신 아이들이 아닌가 말이다. 그리고 독일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그들의 부모들과 그들이 다시는 만날 수가 없었다는 건 비밀이 아니었다. 막스 페르버의 부모님들과 친척들도 크리스탈나흐트 이래 조국 땅을 떠나지 못하고 자살하거나 강제수용소에서 죽음을 맞았다.
또 다른 주인공인 암브로스 아델바르트 삼촌의 경우는 또 어떤가. 다자녀 가정에서 막둥이로 태어난 아델바르트 삼촌도 기구한 운명이었다. 어머니를 어려서 여의고,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어려서부터 생활전선에 내몰리게 되었다. 미국으로 건너간 아델바르트 씨는 다른 건 몰라도 언어 습득에 있어 거의 천재적 역량을 보여주었다고 했던가. 새로운 땅에서 그 곳의 언어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생존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 지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가 없으리라.
부유한 집안의 집사로 활약하면서 그 집안의 아들과 함께 도빌의 도박장을 누비고, 콘스탄티노플과 유대인들의 본고장이라고 할 수 있는 팔레스타인과 예루살렘까지 가서 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편안하게 살 수도 있었지만, 마다하고 요양원에 가서 자발적으로 강제적인 충격 치료를 받다가 어이없는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파울 베라이터의 기구한 삶도 제발트의 <이민자들>에서 한몫을 차지한다. 유대인에 대한 혐오와 배제가 독일의 작은 마을에도 전염병처럼 퍼지고 순진한 아이들마저 유대인 상점의 물건들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약탈하는 장면은 정말 충격적이었다. 그런 자신의 고향에 대해 오만정이 떨어진 베라이터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확실히 새로 나온 책이 구간보다 사진들이 나은 것 같다.)
그런 베라이터가 전쟁 중에 기갑 포병대원으로 징집되어 전 유럽을 누비고 살아남아 귀향했다는 점도 역설적이지 않은가. 그보다 운이 좋지 않았던 다른 전우들은 히틀러의 침략전쟁의 도구가 되어 다시 고향 땅을 밟지 못하고 이국땅에 묻히는 신세가 되지 않았던가. 베라이터의 마지막 선택에서는 프리모 레비가 연상되기도 했다. 그래서 그전에 사두고 역시 읽지 않은 레비의 <멍키 스패너>를 꺼내서 읽기 시작했다. 나의 연쇄독서는 그렇게 한 여름을 나고 있었다.
좋은 책은 모름지기 다시 읽는 법이다. 내가 처음 제발트의 <토성의 고리>를 읽을 적에는 뭐 이런 책이 다 있나 싶었는데 시간이 지나 제발트 작가의 스타일을 알게 된 다음에는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다. 수년이라는 시간을 두고 그의 책을 읽다 보니, 이제는 제발트의 작가의 팬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의 다양한 책들을 읽었고 이제는 재독의 단계에까지 이르렀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