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과 비르지니
베르나르댕 드 생 피에르 지음, 안은주 옮김 / 썰물과밀물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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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타에서 우연히 <마리안느와 마가렛>이라는 글을 보게 됐다. 모두가 외면하는 남도의 어느 섬에서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을 위해 반평생을 보내고, 연세가 들어 더는 그들을 위해 봉사할 수 없게 된 이국의 할매들이 소리 소문 없이 이역만리 고국 땅으로 돌아갔다는 글을 읽었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주책없이 그렇게 펑펑 눈물을 흘렸다. 지금도 왠지 눈시울이... 오스트리아 할매들은 그렇게 희생과 봉사의 정신을 보여 주셨다. 지상에 천사가 있다면 아마 그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제 막 읽은 비르지니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난생 처음 들어보는 프랑스의 작가 베르나르댕 드 생피에르의 <폴과 비르지니>라는 책이 있다는 걸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시리즈로 알게 됐다. 그런데 정작 책은 그 출판사 책으로 만나 보지 않고, 중고서점으로 달려가 다른 버전으로 사들였다는 건 안 비밀이다. <폴과 비르지니>는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기 바로 1년 전(1788)에 발표된 작품이다.

 

때는 18세기, 프랑스에 아직 부르봉 왕가가 있던 시절의 이야기다. 소설의 배경은 프랑스 본국이 아닌 식민지 일 드 프랑스(지금의 모리셔스)라고 불리는 인도양의 외딴 섬이다. 자신보다 신분이 낮은 남자와 결혼해서 집안을 버리고 사랑을 좇아온 라 투르 부인. 젊디젊은 신랑은 객사하고, 유복자 미래의 비르지니를 낳는다. 그리고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이웃 마르그리트의 아들 폴과 함께 식민지에서의 험난한 일상을 헤쳐 나간다.

 

식물학자이기도 한 저자 드 생피에르가 묘사하는 일 드 프랑스의 자연은 그야말로 천국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흑인 노예 도맹그와 마리의 도움으로 가난과 무지 속에서 성장해가는 폴과 비르지니의 모습에서 왠지 그들이 성장하면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연인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불쑥불쑥 피어오른다. , <폴과 비르지니>의 서사는 일 드 프랑스에 간 화자가 현지에서 우연히 만난 현자에게 전해 듣는 구성을 따른다. 그러니까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그들의 삶을 옆에서 지켜본 이에게 들었다는 전통적 서술 방식의 재현이라고나 할까.

 

도망친 흑인 노예를 도우려고 했다가, 울창한 밀림에서 길을 잃고 위기에 빠지지만 폴은 기진맥진한 비르지니를 업겠다고 나선다. 기가 막힌 타이밍에 그들을 찾아 나선 도맹그가 나타나면서 그들은 집으로 갈 수가 있었다. 타인을 돕기 위해 앞뒤 재지 않고 선뜻 나서는 청춘들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던지. 그리고 소설의 어디선가 발견한 맨발의 아름다움은 비록 가난하지만 자연에 대한 사랑에서 얻은 미덕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폴과 비르지니의 아름다움을 칭송하는 문구가 아닐까 싶었다.

 

영원한 것만 같았던 일 드 프랑스에서의 행복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라 투르 부인은 본국에 있다는 백모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만, 가문을 버린 질녀에게 부유한 백모는 경제적 도움 제공을 거부한다. 그러다 무슨 마음이 들었는지 어느 날 갑자기 비르지니를 프랑스로 보내 교육도 받고, 윤택한 생활을 하게 해주겠다는 제안을 알린다. 라 투르 부인은 가난한 자신들의 처지에서 비르지니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겠다는 마음으로 비르지니의 프랑스행을 지지한다. 섬처녀가 된 비르지니는 사랑하는 가족들과 무엇보다 폴을 떠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훗날 폴과 결혼하게 된다면 자신의 부유함이 그에게 도움이 될 거라는 희생의 마음으로 프랑스행을 받아들인다.

 

그렇게 비르지니가 천국을 떠나는 순간부터 비극은 시작된다. 우선 가장 상심한 사람은 바로 폴이었다. 오누이 같았던 그 둘의 사랑은 영원할 것만 같았지만 가난이 그들의 사랑에 장애물이 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프랑스로 간 비르지니가 행복했냐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가혹한 백모의 처분으로 그녀는 1수조차 마음대로 쓰지 못하고, 수도원에 갇혀 따라가지도 못하는 수업들을 들어야 했다. 그러니까 모두가 불행하게 된 것이다. 잘못된 판단과 결정이 어떤 비극을 잉태하게 되는지 저자 드 생피에르는 <폴과 비르지니>를 통해 절절하게 독자에게 전달한다.

 

사랑하는 애인 비르지니의 부재를 계기로 각성하게 된 남자 폴은 현자를 찾아가 글도 배우고, 많은 대화를 나누게 된다. 내가 생각하는 소설의 핵심은 바로 이 현자와 폴의 대화 부분이 아닐까 싶다. 저자 드 생피에르는 속세 본국 프랑스와 부족한 것 투성이지만 천국 같은 일 드 프랑스를 비교하면서 사랑에 굶주린 폴을 달랜다. 모름지기 세상의 범사에는 모두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깨달음과 사랑도 예외는 아니다. 우리의 현자는 상실감에 시달리는 폴에게 문학을 권한다. 문학이야말로 하늘에서 내려온 구원 같은 것이라는 말로. 그런데 문학에는 순기능만 있었을까? 폴은 문학에서 구원을 얻기도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좌절을 맛보기도 한다. 사랑하는 연인의 배반, 돈 많은 늙다리 영감과 결혼하는 젊은 아가씨의 이야기들이 이미 당시에도 대유행이었으니 말이다.

 

하루하루의 고된 노동을 마친 뒤에 비르지니를 만난다는 생각에 즐거웠던 시절은 이제 다시 돌아오지 않게 되었다. 폴은 자신이 가난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비르지니가 돈 때문에 그녀의 백모에게 팔려 갔다고 생각하고는 인도로 가서 돈을 벌거나 혹은 본국에 가서 성공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기도 한다. 하지만, 폴의 출생의 비밀을 아는 현자는 두 가지 모두 불가능하다는 말로 그를 설득한다. 절대왕권이 판을 치던 시절에, 사생아 출신 폴이 프랑스 왕국에서 출세하기란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라는 냉혹한 사실을 알려준다.

 

234년 전에도 이미 고착화된 신분제와 금권 때문에 비극의 씨앗이 뿌려졌다는 사실이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 놀라울 뿐이다. 결국 우리 인간의 역사는 형태와 방식만 바뀌었을 뿐 계속해서 반복되는 것일까. 그리고 소설은 비극으로 마무리된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으리라.

 

비록 흑인노예지만 가족 같았던 도맹그와 마리를 왜 자유인으로 풀어 주지 않았는지 의문이다. 가난 때문이라는 경제적 이유도 있겠지만, 정식 교육을 받지 않은 무지의 탓이라고 해야 할까. 현자를 통해 각성한 뒤에도 폴은 오로지 출세할 궁리만 하지, 주변 사람들을 돌보지 않는다. 물론 라 투르 부인과 어머니 마르그리트 때문에 선뜻 섬을 떠나지 못한 탓도 없지 않다.

 

은연중에 드러나는 문명과 야만이라는 어쩔 수 없는 식민주의자 이방인의 시대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베르나르댕 드 생피에르의 <폴과 비르지니>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모리셔스에 살았던 경험을 그대로 소설에 녹여낸 것 같다. 드 생피에르는 직접 난파선을 목격하기도 했다고 한다. 기후 위기의 시대에 천국 같은 자연에 대한 상세한 묘사들, 이제는 어디서고 찾을 수 없게 된 선행과 미덕의 화신 같은 캐릭터들의 조화, 마치 내가 대화의 상대로 착각할 정도로 만들어준 현자와의 대화 그리고 마음을 온통 뒤흔드는 처절한 비극으로 어우러진 한여름에 읽기에 최적화된 그런 소설읽기였다. 부족함이 없는 그런 작품이다. 나만 아는 작품을 만난 것 같은 즐거움도 빠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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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7-05 12:0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그분들 이야기 소록도 큰할매 작은 할매 그림책으로 봤던 기억납니다. 매냐님 선하고 좋다고 믿었던 선택이 최선의 결과를 가져오진 않는거 같아요. 매냐님 제목이 너무 멋집니다 ! *^^*

레삭매냐 2022-07-05 13:19   좋아요 1 | URL
할매들 이야기는... 정말
찡했습니다.

책으로도 한 번 만나볼까
합니다. 감사합니다 ~

stella.K 2022-07-05 12:0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오호, 저도 잘 모르는 작간데 매냐님을 통해 첨 아네요.
한 여름에 읽기에 최작화라니 읽어보고 싶네요.
글치 않아도 여름에 읽으면 좋을 책이 뭐 없나 했는데.^^

얄라알라 2022-07-05 12:49   좋아요 4 | URL
표지 초록 조차도 한여름스러워요^^

레삭매냐 2022-07-05 13:21   좋아요 2 | URL
분량도 단 240쪽!

아주 적당하니 감동의 도가니
탕을 맛보실 수 있으리라 믿슙
니다.

표지도 초록초록하니 좋습니다.

바람돌이 2022-07-05 14: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런 커플은 해피엔딩이었으면 좋겠는데 아니겠죠? 아닌게 개연성이 더 있겠지만 그래도 해피엔딩을 보고싶은 마음이라니..... 모리셔서 섬에서 자연과 함께 오순도순 살아가는 뭐 그런 그림을 막 떠올리고 있습니다. ^^

레삭매냐 2022-07-05 17:42   좋아요 0 | URL
세상의 선행과 미덕이 흘러
넘치길 기대하지만 현실은
반대로 흘러 간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타격하는 그런 작
품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엔딩은 참으로 처연했습니다.

moonnight 2022-07-07 10: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처연한 엔딩이라니ㅠㅠ 두려워집니다. 비극은 무섭ㅠㅠ;;;

레삭매냐 2022-07-07 11:44   좋아요 2 | URL
어쩌면 비르지니가 프랑스로
떠나는 순간부터 비극은 일 드
프랑스(모리셔스)에 자리잡고
있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참 아름다운 소설이었습니다.

그레이스 2022-08-10 16: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세상에 좋은 작가들과 아름다운 소설이 이렇게 많네요!
당선 축하드려요.

거리의화가 2022-08-10 16:2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 제가 이 리뷰 읽고 이 책 찜해둔 거 아시죠?ㅎㅎ
이달의 리뷰 당선 축하드립니다!!!

mini74 2022-08-10 16: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매냐님 리뷰 읽고 아담~~ 읽었는데 참 좋았어요. 그래서 저도 이 책 찜 했는데 ㅎㅎㅎ 당선까지!! 축하드립니다 *^^*

새파랑 2022-08-10 17: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 당선 경축 드립니다~!!

서니데이 2022-08-10 2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편안한 하루 보내세요.^^

꼬마요정 2022-08-11 0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선 축하드립니다^^

thkang1001 2022-08-11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삭애냐님! 이달의 당선작 선정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강나루 2022-08-12 0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 님, 이달의 당선작 되신거 축하드려요^^
즐거운 연휴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