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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스파이
김숨 지음 / 모요사 / 2024년 7월
평점 :
2025년 나의 독서는 비교적 순항 중이다. 어젯밤에는 한 열흘 전에 구입한 김숨 작가의 <오키나와 스파이>를 마저 읽었다. 아마 <국수> 이래 김숨 작가의 책은 처음인가 싶기도 하고. 책을 읽으면서 작년 가을에 가서 읽다만 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가 생각나는지 모르겠다.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태평양전쟁 말기, 1945년 4월부터 시작된 오키나와 전역이다. 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오키나와 본토는 아니고 오키나와 인근의 어느 작은 섬이다. 사쓰마 번에 의해 일본에 복속된 이래, 오키나와 주민들은 본토인에 비해 2등 시민 차별을 받았다. 그 오키나와 사람들 아래에는 진짜 식민지 조선에서 이주한 '조선인 고물상' 아저씨 가족이 있었다. 소설에 나오는 이들이 대부분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조선인 고물상만 이름이 없다. 오키나와 언저리의 어느 섬에서 그는 그런 존재에 불과했다. 식민지 백성의 서러움이 드러난다.
섬에 압도적 화력과 병력을 자랑하는 미군이 상륙하고, 한줌의 일본군들은 옥쇄 모드에 돌입한다. 하지만 이전의 사이판이나 오키나와 본토에서 벌어진 옥쇄전에 비하면 이들의 결의는 이전만 못하다. 그들 역시 일본의 패전이 불가피하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30명 남짓한 해군통신대 기무라 총대장이 이끄는 패잔병들은 무엇보다 스파이 색출에 여념이 없다. 그리고 그들은 시민들에게 스파이 때문에 전쟁에 지게 되었다는 거짓 프로파간다를 퍼뜨린다. 전쟁의 책임을 타인에게 떠넘기는 전형적인 대본영으로 대표되는 일본 군부의 악질적 행태다.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하는 일본 국왕 역시 전쟁 후에 아무런 단죄를 받지 않았다.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몇몇 수괴들만 전범 재판을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갔다.
그건 모두 전쟁이 끝난 다음의 일이고, 지금 당장 스파이로 몰린 섬 주민들 9명의 목숨이 백척간두에 섰다. 기무라와 이케다 등은 마을에서 모집한 소위 "인간 사냥꾼"들을 동원해서 9명의 스파이 혐의자들을 잔혹하게 처단한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전쟁이란 말인가. 그들은 스파이들이 아니라 그저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에 지나지 않았다. 비겁한 패잔병들의 전형적인 책임전가가 이런 끔찍한 방법으로 재현된다.
초반부터 이런 사건으로 시작하다 보니,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어지러워진다. 전쟁이란 광기에 휩싸인 인간 사냥꾼들은 이제 눈에 보이는 게 없다. 게다가 그들은 심지어 어린 십대 소년들이다. 이런 끔찍한 짓을 저지르고, 멀쩡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넋을 잃는 게 당연할 지경이다.
기무라와 인간 사냥꾼들은 끊임없이 자신들의 죄를 대신할 희생양들을 찾는다. 그러다 1세 스파이까지 등장한다. 자신들이 저지른 죄값의 후환이나 복수를 걱정해서, 어린아이까지 예외 없이 처단하는 비인간적 처사에 기가 막힌다. 기무라 잔당들은 주민들을 약탈하고, 그들에게 공포를 조장하고 불만을 억누르기 위해 없는 스파이 만들기에 여념이 없다. 경방단장을 필두로 해서 누구도 예외가 없다. 기무라 스파이 리스트에 오른 이에게는 오직 죽음만이 기다릴 뿐이다.
그런 점에서 조선인 고물상과 그의 가족들의 운명 역시 시간문제다. 나치 치하의 유대인들의 운명이 그랬듯이, 일제 치하의 식민지 백성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로지 강자와 약자로만 세상을 구분하는 파시즘의 광기는 약자부터 공격하기 마련이다.
더 기가 막힌 건, 일본의 패전으로 종전이 되었음에도 전쟁광들의 광기는 멈추지 않았다는 점이다. 실질적 무력을 지니고 있던 기무라들은 마을에 내려와 행패를 부린다. 그렇게 정의는 지연된다. 그리고 인간 사냥꾼들의 학살은 계속된다. 전쟁 중이었다면 덜 억울했을지 모르겠지만, 전쟁이 다 끝난 마당에 왜 이런 비극이 벌어져야 하는지 우리는 알 수가 없다. 일본 국왕의 항복 선언으로 안도하던 독자는 호되게 뒷통수를 맞은 것 마냥 얼얼하다. 이게 다 끝난 게 아니었어?라고 말이다.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 혹은 외부인의 시각으로 서술되는 오키나와의 비극은 그런 점에서 위력을 발휘한다. 조선인 고물상이 처음 섬에 왔을 적에 주민들은 선량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전쟁이 계속되고, 무엇보다 해군통신대가 주둔하고 가혹한 스파이 색출과 사냥에 나서면서부터 마을의 인심을 달라지기 시작했다. 공포와 불안 속에, 그렇게 그들의 눈동자가 바뀌기 시작했다. 먹고 살기 위해, 한줌의 땅이 필요했지만 섬 주민들 누구도 조선인 고물상과 그의 아내 후미에게 땅을 내주기를 거부했다. 그리고 기무라도 대표되는 일본 군부가 심은 타자에 대한 의심과 증오의 씨앗이 뿌리 내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빌드업된 비극은 엔딩으로 치닫는다.
작가가 구사하는 거대한 비극의 서사에 그만 넋을 빼앗긴 느낌이다. 누구를 위한 전쟁이라는 물음에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죽을 때가지 싸우라는 공허한 대답만이 돌아올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기무라들이 말버릇처럼 되뇌던 대로 장렬한 방식으로 옥쇄를 했던가. 그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들은 전쟁이라는 이름의 광기에 편승해서, 어린 소년들을 노예로 만들고 조종해서 인간 사냥을 했을 뿐이다. 어쩌면 그들은 종전과 평화가 아닌 영속적인 전쟁 상태를 원했을 지도 모르겠다.
무고한 이들의 계속되는 죽음으로 점층되어가는 비극적 서사의 무게가 견딜 수가 없어서 잠시 책을 덮었다. 마치 작년 가을에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을 때처럼. 조금 용기를 내어 다 읽고 잠자리에 들었다. 각처에서 출현하는 이상한 지도자들 그리고 그들이 빚어내는 각종 일탈과 기이한 현상들 때문에 세월이 하 수상하다. 김숨 작가의 <오키나와 스파이>는 이런 혼돈의 시기를 경계하라는 그런 메시지처럼 나에게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