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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여자는 체르노보로 간다 ㅣ 걷는사람 세계문학선 4
알리나 브론스키 지음, 송소민 옮김 / 걷는사람 / 2021년 4월
평점 :

우연히 러시아계 독일 작가라는 알리나 브론스키에 대해 알게 됐다. 사실 작가의 출세작이라고 할 수 있는 <쉐르벤파크>가 새로 나와서 전작을 찾아 보다 역사상 최악의 원전 사고로 알려진 체르노빌 원전 사고 그 후를 그린 소설 <세상의 모든 여자는 체르노보로 간다>부터 먼저 읽게 됐다.
그동안 그래픽 노블과 너튜브 동영상들을 통해 체르노빌에 대해 조금씩 알아 가고 있는 중이다. 원전마피아들은 계속해서 원전이야말로 미래의 먹거리이자 안전한 에너지 생산원이라고 말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그렇게 안전하다면 왜 전력에 대한 수요가 가장 많은 서울 한복판 강남에 짓자고 주장하지 않는 걸까? 편리는 좋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위험은 타인에게 떠맡기겠다는 이기주의의 발로라고 생각한다. 수년전 이웃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여파가 아직까지도 계속되고 있다는 걸 애써 외면하는 원전마피아들의 주장이 내게는 가소롭기만 하다.
각설하고, 소설 속으로 뛰어 들어가 보자. 우리의 주인공은 자그마치 82세의 바바 두냐 아줌마 아니 할머니라고 불러야 하나? 원전 사태 당시 간호조무사로 맹활약을 펼친 바바 두냐가 다시 고향인 체르노빌로 돌아가 그곳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사건 사고들이 알리나 브론스키의 손에서 마법을 닮은 판타지로 재탄생한 그런 느낌이랄까.
가장 흥미로운 점 중의 하나는 바바 두냐의 눈에만 보이는 망자들의 존재였다. 이미 죽은 지 오래인 남편 예고르가 수시로 그녀의 눈앞에 나타난다. 이미 방사능에 피폭되어 ‘작은 원자로’ 같은 존재들은 체르노보 사람들은 모두에게 기피의 대상이다. 그러니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바바 두냐를 비롯한 체르노보 사람들에게 망자가 따라 붙는 건 숙명일 지도 모르겠다.
바바 두냐의 딸인 이리나나 아들인 알렉세이 같이 젊은이들은 보다 안전한 환경에서 살기 위해 고향 체르노보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지만, 또 바바 두냐 같은 노친네들에게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그들에게 고향이란 곳은 그렇게 쉽게 등질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좀 고지식하게 수구초심이란 말을 동원한다면, 결국 인간이란 존재는 자신이 나고 자란 곳으로부터 영원히 자유로울 수 없다는 말일 지도 모르겠다.
여든 살의 노인네가 당차게 마을에 필요한 생필품들을 조달하기 위해 인근 말리치라는 마을까지 고난의 행군에 나서는 장면은 너무 짠하더라. 그녀 주변 인물들도 연민을 자극하기는 마찬가지다. 이웃의 마르야 아줌마는 왠지 <길버트 그레이프>에서 어니의 엄마를 떠올리게 만들고, 백세도 넘은 노인 시도로프는 바바 두냐와 마르야에게 잇달아 청혼하는 무모한 행동도 마다하지 않는다! 맙소사! 몸에 링거를 달고 죽을 곳을 찾아 체르노보에 흘러든 페트로프는 또 어떤가.
어떤 유의미한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죽음의 공간에 자발적으로 찾아든 이들은 모두 제각각의 사연들을 마음속에 품고 있다. 바바 두냐는 그렇게 사랑하는 손녀 라우라를 보고 싶지만, 혹시라도 사랑하는 손녀에게 ‘작은 원자로’에서 내뿜는 방사능이 해가 될까 두려워한다. 독일에 사는 라우라가 로씨야 어가 아닌 외국어로 적어 보낸 편지를 해독하지 못해 안절부절하는 모습은 왜 그리 슬퍼 보이는지.
멀리서 보면 소극처럼 보이던 체르노보 마을에 게르만이라는 멀쩡한 자신의 딸을 데리고 들어오면서 사단이 나고야 만다. 살인사건이 나고, 다시 바바 두냐는 매스컴을 타게 된다. 체르노보 마을 사람들의 안식과 평화를 위해 바바 두냐는 담담하게 타인이 저지른 죄까지 짊어지고 교도소로 향한다.
누구의 간섭도 없이 자유롭게 살고 싶어 하는 영혼들의 대표가 바로 바바 두냐라고 생각한다. 그녀에게 손녀 라우라의 존재는 어쩌면 방사능으로 피폐해진 육신을 버티게 해주는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교도소에서 복역 중에, 뇌졸중으로 쓰러진 어머니 바바 두냐를 찾아온 딸 이리나는 어머니가 모르고 있던 사실들을 전해준다. 라우라는 바바 두냐가 생각하는 그런 아이가 아니라는 전언과 함께.
원전사고로 엉망진창이 된 체르노빌처럼, 서방으로 이주한 뒤 의사로 성공해서 잘 먹고 잘 살고 있을 거라고 예상한 딸 이리나의 삶 역시 파편화된 지 오래였다. 그런 가정에서 바바 두냐의 딸 라우라가 잘 자랐을 거라는 상상은 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나마 외할머니가 라우라가 미워하지 않는 존재라는 사실에 만족해야 했을까나.
자연생태계가 완전히 파괴된 체르노보에서 바바 두냐는 희망을 잃지 않고 오이와 토마토를 심어 자급자족에 나선다. 자연과학자들에게 그곳은 죽음의 땅이었지만, 어떤 경우에도 희망을 잃지 않은 대자연의 딸이자 소비에트의 세례를 받은 유물론자 바바 두냐는 내일 당장 어떻게 될지 모르는 가운데 오늘도 텃밭을 가꾼다. 그런 진중한 바바 두냐의 모습에서 우리네 인간의 숙명의 단면을 살짝 엿보았다면 너무 거창한 표현일까나.
짧은 소설이었지만, <세상의 모든 여자는 체르노보로 간다>를 통해 알리나 브론스키가 던진 메시지는 묵직했다. 체르노보 마을과 교도소에서 여성 동지들간의 끈끈한 연대, 세대를 이어가는 어머니의 위대한 사랑 그리고 결국 자연은 스스로 치유하고 회복할 거라는 희망까지. 브론스키의 다른 책인 <쉐르벤파크>가 보고 싶어서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을 했다. 지금 조회해 보니 주문 상태로 떠 있더라. 곧 만나게 되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