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 이러면 안되는데...
7월달에는 에밀 졸라를 읽겠노라고 선언해 두고서는 오늘 도서관에 가서 망겔의 <밤의 도서관>을 빌려서 흠뻑 빠져들었다. 뭐 이 정도면 망며들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그나마 다행인 건 망겔의 다른 책들을 죄다 빌리진 않고, 달랑 <밤의 도서관>만 빌린 것으로 위안을 삼자.
어제 빗길에 쏘다니다 피곤한 탓인지 오후에 실컷 낮잠을 잤다. 아까 도서관에서도 거의 널부러져 있다시피 했었는데... 망겔의 책을 몇 장 읽다 잠이 다 번쩍 깰 정도의 각성이 왔다.
아, 이래서 책을 읽게 되는구나 그래.
망겔 샘은 우리의 책쟁이들의 대선배격이다. 그가 써대는 글들은 하나 같은 주옥 같이 염통을 파고든다. 한 90쪽 정도 읽었나? 아르헨티나 출신으로 터론토에서 살다가 프랑스로 거주지를 옮겨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이 바로 헛간을 사설 도서관으로 개조하는 일이었다. 도서관을 신화의 시대까지 끌어 올리는 것은 물론이고, 분류과 공간에까지 가히 전문가의 손길을 미치지 않은 곳이 없을 지경이다.
게다가 어려서 만난 책들을 반세기가 지난 이천년대 초반까지 끌어 안고 있는 몹쓸 기억력에 이르기까지... 정말 버릴 게 하나 없는 그런 진수성찬이다. 내가 이래서 지난달에 만났던 <끝내주는 괴물들>이 위험하다 그랬지 아마.
그에 따르면 밤이라는 시간은 생각의 아우성들이 끝없이 울부짖는 그런 환희의 순간들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보니 나도 낮보다는 사위가 조용하고, 잠이 드는 그 시간을 독서의 순간으로 더 애정하는 그런 느낌이다. 그렇지, 낮에는 세상살이에 속이 시끄럽다 보니 그렇게 생각들이 아우성을 칠 겨를이 없겠지. 밤에는 다르다.
오래전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으로 사라진 알렉산드리아의 전설적인 대도서관에 대한 이야기는 어찌나 황홀하던지. 성서에 나오는 바벨탑이 공간에 대한 인간의 이룰 수 없는 도전이라면,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은 시간에 대한 인간의 도전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야 멋지지 않은가 말이다.
그리고 우리가 계속해서 손에 떨치지 못하는 독서 역시, “재탄생을 위한 의식”이라는 사실에 격렬하게 공감하는 바이다. 지금 읽고 있는 에밀 졸라의 <꿈>에서도 프랑스 대혁명 시기를 지나, 전쟁이라는 두 세대에 걸친 격변기를 지나 비로소 도래한 평화시기에 프랑스라는 사회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타락상을 문학으로 형상화했다는 점을 목격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종래의 가내수공업에서 산업화의 물결로 이전되던 시기 역시 주목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일찍이 에릭 홉스봄이 <혁명의 시대>에서 이중혁명 중의 하나로 꼽은 산업혁명의 바람에서 프랑스 역시 예외는 아니었을 테니 말이다. 역시 혁명의 세례를 받긴 했으나 프랑스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종교로부터 탈피는 민중에게 난망한 주제가 아니었을까. 16세 고아 소녀 마리 앙젤리크는 사제복 제조장 집안인 위베르가의 수양딸이자 도제로 취업해서 곧 양부모를 실력으로 제압한다. 역시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프랑스 제2제정 시대에도 실력은 반드시 생존에 필요한 자본이었다. 거기에 그녀의 열정과 광기 그리고 종교적 성실함까지 더해졌으니 더 말할 필요가 있을까나.
우리 책쟁이에에게 책을 쟁여둘 공간은 언제나 부족하고 또 갈급하다. 나의 책방에 들어서 책들을 볼 때마다 나는 한숨이 날 뿐이다. 분류도 해야 하는데... 그게 또 노가다이지 않은가. 내친 김에 망겔 선배처럼 아무 것도 안하고 며칠씩 책 분류에 시간을 투자할 정도는 아니지만(그리고 책의 분량에서도 엄청나게 차이가 나겠지만), 조금씩 소장 책들을 정리하는 것도 시작해야지 싶다. 우리의 망선배를 따라서 말이다.
<밤의 도서관>을 읽을수록 무언가 바로 행동에 나서게 만드는 자극이 존재했다. 우리 책쟁이들에게 내리는 그런 죽비처럼 느껴지는 건 나만의 착각이려나.
[뱀다리]
어젯밤에 서가 정리를 하다가 망센빠이의 <책을 읽는 사람들>을 발견해냈다.
이럴 수가!!! 그러니까 책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몰랐다는 거지. 아마 내가 처음 만난 망센빠이의 <서재를 떠나보내며>와 같이 사들인 책이 아닐까 추정된다.
이래서 서가 정리를 해야 하는구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