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이지만 이른 아침에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서점에 왔다. 혼자서 즐길 수 있는 잠깐의 이런 시간이 나에겐 무척 소중한 휴식과 힐링을 준다. 우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12월과 1월에는 비가 거의 오지 않다가 상대적으로 비가 잦아드는 것이 보통인 2월과 3월에 그나마 비가 좀 왔다고 한다. 덕분에 이 지역에는 다시 여름가뭄주의보와 물부족주의보가 공표되었다. 캘리포니아의 suburban 중산층 life를 상징하던 luscious lawn이 사라지기 시작한 건 물론 2010년대 초반의 가뭄 탓이지만, 이번의 물부족이 내년으로 이어진다면 더더욱 이런 것들을 보는 건 어렵게 될 것이다.  


하루종일 비가 내려준다면 아파트에 틀어박혀서 잔잔한 재즈를 아주 낮은 볼륨으로 틀어놓고서 책을 읽고 노닥거릴 생각이었는데, 잠시 지나가다 들린 건지 비는 금방 그쳐버렸다. 요 2-3일, 밤에 내리는 빗소리, 지붕을 때리는 그 소리와 함께 재즈를 들으면서 누워있는 기분이 참 그럴듯했는데, 아마도 연말까지는 다시 즐기기 어려울 것이다.  John Coltrane이나 Chet Baker 또는 Miles Davis를 주로 들었지만, 관심을 갖고 재즈를 듣기 시작한 이후 갖게된 음반은 여럿이 더 있기 때문에 이곳으로 돌아온 이후 부쩍 늘어난 Classical 음악음반과 함께 기분에 따라 들을 수 있는 건 많이 있다. YouTube을 틀어놓을 수도 있는데 그게 어쩐지 기분이 나지 않고 불을 꺼놓고 음악을 듣고 싶어도 한 구석에서 환하게 빛나는 모니터을 불빛이 맘에 들지 않기에 음악은 되도록이면 CD로 듣는데, 가끔 사치를 부릴 땐 굳이 LP판을 꺼내서 턴테이블을 돌리기도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작가로 만든 책. '상실의 시대'와 '해변의 카프카'로 시작한 하루키의 작품세계에 본격적으로 파고 들어가던 2012년이 생각나서 자기 전에 가볍게 읽었다. 내용도 양도 그렇게 읽기에 무리가 없다. 한 세 번째 읽은 것 같은데, 여전히 묵직한 울림이 좋다.  일종의 문학수정주의 같은 관점에서 혹평을 받기도 하는 하루키지만 내가 강신주박사의 강의를 많이 듣고 공감하던 시절에도 그것만큼은 전혀 받아들일 수 없었던 unfair한 비평이 아닌가 싶다. 묘한 기시감을 주는 경우도 있고, 있음직한 나의 경험에 녹아들어 아련한 지난 시절을 추억하기도 하고, 사회현상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완전히 아저씨가 되어버린 지금 한 남자로서 내가 가질 수 있는 여러 가지 소망을 비춰보는 거울이 되기도 하는 것이 내가 보는 하루키의 소설이다.  


징하게 여름 내내 술을 마시면서 지낸 것이 지금와서 보면 남아있는 대학시절의 추억 몇 단락이지만, 생각해보면 아무런 걱정도 없이 줄창 놀았던 기억이 없지는 않다. 후까시를 잡는것에 눈뜨기 전이라서 비교적 가벼운 주머니로도 친구 한 둘이 모이면 호프집에서 젤 양 많고 비싼 안주로 생맥주를 마시다가 노래방으로 달려가서 술을 깨고, 다시 마시다 보니 지금까지도 3차로 달린 소주방은 어디였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시절 여름을 함께 달린 국민학교동창은 그 이후로 연락이 끊겼는데 지금은 어디서 뭘 하면서 살고 있을지.  성대 법학과였던 녀석은 사시 일차를 보고 떨어지면 바로 군대를 갔다와서 은행에 취직하겠다고 했었는데, 하필이면 97년 IMF로 금융권이 박살나고 회복하던 시절이 졸업시기와 겹쳤을 것이니 꽤 지난한 2000년대를 살아왔을 것이다.  이제 좀 살만하다면 언제 퇴직을 당할지 모르는 40대 중반, 50대를 향해 나아가고 있을텐데, 비단 녀석만의 일이 아니고, 나 또한 늘 고민하지만 해결은 요원한 문제일 것이다.  


나이가 들어도 늘 로맨틱으로 살고 싶은 건 나쁘지 않지만, 이런 소망은 나이가 들수록 추하게 비춰지는 것 같아 점점 더 가슴 속 깊숙한 곳에 묻어두고서 가끔씩 혼자 꺼내보는 것이 고작이다. 죽을 때까지 소년으로 살다 가고 싶다.  간만에 읽은 하루키는 이런 내면을 다시 끄집어 냈다.  이래서 내가 하루키를 읽는 것인지도.  내친 김에 잠깐 혼자의 시간이 생기는 늦은 오후에 하루키의 다른 초기작을 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밤엔 위스키나 소주도 좋고 맥주에 튀김도 좋겠지만 와인은 피하고 싶다.  다음 날을 생각하면 와인이 젤 좋은데, 뭔가 오늘은 좀더 저렴한, 그래서 젊음이, 젊은 시절이 떠오르는 걸 펼쳐놓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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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양장)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윤성원 옮김 / 문학사상사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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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한 울림, 돌아올 수 없는 이십대 시절에 대한 향수를 느낀다. 뭔가 아련하게 잡힐 듯, 기억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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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늘 섞어서 읽는다. 언젠가 시작되었는지 이제는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읽는 책이 늘 여러 권이고 장르도 제각각인지도 꽤 된 것 같다. 책을 좋아하는 것도 이유의 하나지만 더 중요한 건, 이런 독서방법을 잘 활용하면 여간해서는 책읽기가 지루할 수 없다는 것이다.  


뭐 하나에 푹 빠지지 못하는 경향이 나이가 들수록 심해지는 것 같은데, 책읽기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그나마 이렇게 중구난방으로 읽어대는 덕분에 가끔씩 침체기가 있더라도 큰 줄기에서 보면 '독서'라는 걸 계속 취미로 즐길 수 있는 것 같다.  이런 걸 거창하게 '다독술' 어쩌고 하는 책도 몇 권 읽었지만, 그리 대단한 건 없다고 생각한다. 그저 자연스럽게 책이 이끄는 방향으로 가면서 터득한 진리(?)가 아닐까 싶다.


무협지나 판타지는 거의 읽지 않는 요즘 머리를 식히는 데에는 추리소설만한 것이 없다고 믿어버린 듯, 쌓아놓은 추리소설들을 어디선가 찾아내서 하나씩 읽어가고 있다. 여러 모로 심란한 요즘이지만 그럴수록 용기를 내기 위해서라도 책을 읽는다. 무엇을 배우기 위함이 아니고 그렇다고 예전에 유행하던 '힐링'을 위한 것도 아닌, 더도 덜도 아닌, 독서 그대로의 독서라고나 할까?  그러더가 맘이 내키면 '고전'이나 '문학'으로 분류되는 명작을 한 권씩 찾아서 읽게 되니까 무척 자연스럽게 책에서 책 사이를 흘러다니게 된다.  나이를 먹은 덕분에 무엇을 읽으라고 억지로 권하는 사람도 없고 오히려 책을 좀 적게 읽으라는 사람은 있을 정도의 내공(?)을 쌓아가면서 터득한 나의 독서방법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묘하게도 예전에 읽은 듯한 작품도 몇 개 섞여 있었던 단편집이 두 권 (대답은 필요 없어; 홀로 남겨져), 그리고 장편 한 권의 미야베 미유키 소설을 읽었다. 모두 spin을 하거나 뛰면서 봤는데, 적절하게 시간을 보내기엔 딱 좋은 것이 추리소설 하고도 미미여사의 책이 아닌가.  짧은 이야기나 다소 호흡이 긴 이야기나 큰 무리가 없이 잘 이끌어 나가는 재주는 역시 대단하다.  작가공부를 따로 했거나 문학을 전공한 것도 아니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직장생활을 하다가 우연히 창작교실을 다니면서 데뷔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남들은 기를 써도 책 한 권을 쓰기 어려운 현실을 보면 원래 타고난 재주가 생활속에서 갈고 닦아진 것이 아닌가 싶다.  히가시노 게이고와 함께 다작의 작가로 생각되는데 둘 다 일정한 수준이상의 재미를 보장하지만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세계는 히가시노의 그것보다 더 치밀하고 묵직한 울림이 있는 것 같다.  


시마다 소지의 책은 이로써 구할 수 있는 건 모두 읽은 것 같다. 다른 작품들보다는 조금 밀도나 집중도가 떨어지고 추리의 재미도 덜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무래도 좀 반칙 같이 느껴지는 트릭을 사용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일 것이다.  잔혹판타지처럼 셋팅을 하고 누가봐도 범인일 것 같은 사람을 내세웠지만 결국 진범은 너무 많이 가려진 탓에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어느 정도의 clue는 줘야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냥 활극이 되어버린 것 같다.


카잔차키스는 전집을 다 갖추고 나서 조금씩 읽고 있는 작가이다. '그리스인 조르바'가 훨씬 더 유명하지만 이야기라는 면에서 볼 때 어쩌면 좀더 흥미진진한 것이 '크노소스 궁전' 같다. 내가 워낙 고대 신화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불핀치의 그리스 신화에서 아무리 길게 다뤘어도 책 한 권이 나올 분량은 아닌 것이 테세우스가 미궁에서 미노타우로스를 제거하고 아리아드네공주와 함께 도망치는 정도의 짧은 이야기이다. 그런 것을 역사적으로 추론과 상황을 곁들이고 흥미진진한 드라마로 빚어낸 것이다. 평범한 작가였다면 이런 것들을 서술로 끌어가려 했겠지만, 이런 극화의 구현은 작중인물들의 인격, 생각, 대화, 행동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렇기에 한 권을 이야기가 지루하지 않게 적절한 기승전결로 흘러간다.  도리아인을 등장시킨 건 정말 신의 한 수가 아닌가.  그 짧은 내용에서 크레테-아테네-도리아-그리스로 이어지는 힘과 역사의 흐름을 볼 수 있었다. 역시나 대가의 솜씨라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다.  별 것이 아닌 듯 하지만, 중수와 고수의 차이는 종이 한 장이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소재의 흥미, 짧지만 다사다난했던 대한민국 닭요리의 역사가 책 한 권에 담겨 있다. 나아가서 IMF이후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4050의 창업 붐과 그 한 가운데 위치한 치킨프랜치아이즈의 현황을 다룬다.  왜 치킨인지, 어떤 형태로 발전해서 지금의 종합산업의 위치에 서게 되었는지, 그 와중에 간간히 등장하는 추억의 이름들이 너무도 반가웠다.  멕시칸치킨이나 페리카나치킨으로 시작되었던 치킨전쟁, 그 이전에 성업했던 림스치킨, 그리고 내 기억으로도 가물가물한 영양센터의 전기구이치킨까지 익숙한 먹거리의 이야기. 그런데 가볍게만 볼 수는 시대의 현실까지 오롯히 연구해낸 결과의 산물이다.  팟캐스트에서 들은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저자가 계획하고 있는 시리즈를 계속 눈여겨 볼 것이다.


서경식선생의 책은 계속 구해서 읽어왔고, 이번의 신간도 비교적 빨리 보았다. 그런데 어인 일인지 이번의 책은 그 울림이 느껴지지도 않고, 치열한 과거의 지적, 현실적, 역사적 고민이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문제인지, 다소 편해진 우리의 정치현실이 그 이유인지 모르겠다. 상당히 중구난방, 호흡을 유지하는 것도 많이 어려웠다. 문고판처럼 한 손에 들어오는 작은 사이즈가 맘에 들었고, 책장을 처음 넘길 때만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려 있다는 이야기는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지만, 어떤 것들은 분명이 내 마음상태에 따라 좌우된다.  이번의 사례가 그 증거라고 생각한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한 주가 흘러간다.  이번 주 또한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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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미야베 월드 (현대물)
미야베 미유키 지음, 권일영 옮김 / 북스피어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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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말이지만, 김이 빠지는 건 사실이다. 글을 짓고 엮어 이야기로 만들어내는 솜씨는 여전히 탁월하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는 미미여사. 월간 히가시노 만큼 다작인 듯 싶지만, 늘 새롭게 느껴지는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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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탈리아 인문 기행 나의 인문 기행
서경식 지음, 최재혁 옮김 / 반비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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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식 선생의 가장 최근 책. 이번에는 조금 힘이 빠진 건지, 아니면 읽는 내가 문제였는지, 화두가 잡히지 않는다. 읽는 내 자신의 모습을 한 걸음 물러나서 바라본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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