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왕에 시작한 만화책 이야기를 조금 더 하려 한다. 거창한 것은 없고, 그저 내가 즐겼던, 만화를 소개하는 정도라고 볼 수 있겠다. 주로 소장하고 있는 것들을 위주로 써봤다.
그 당시 유행했던 학원물의 전형적인 스타일. 범생 여학생이 터프한 남학생을 좋아한다는 이야기. 사실 알고보면 더도 덜도 아닌 학생 깡패수준의 주인공인데, 악역과의 차별은 그저 의리가 좀 있고, 야비하지 않다는 것. 이런 것을 현실로 받아들이면 바보가 된다. 그저 즐기는 정도에 그칠 것. 그렇게 보면, 상당히 웃긴 만화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아류작들 중 질이 더 나쁜 것들도 많이 있는데, 90년대 중반에는 이런 것을 읽고서 일진회 같은 불량서클을 만들어 미니조폭질을 하다 잡힌 고교생들 이야기가 잊을만하면 뉴스에 나오곤 했다. 고등학교부터 특채로 입사하여 조폭생활을 시작하는 아이들이 넘치는 지금, 그리고 사채와 철거 등, 비교적 합법(?)을 동반한 조직활동에 깊숙히 담그는 아이들이 넘쳐나는 지금, 이 정도는 애교라고 하겠지만, 아마도 지금의 그 씨앗은 이때 파종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만화를 더 재미있게 보려면, 일본의 팝컬쳐에 대한 약간의 지식이 있어야 한다. 이때 나온 많은 학원물들이 '비바'라는 제목을 차용했던 것 같다. 누가 원조 '비바'인지는 모르겠지만, 비바 하이스쿨 같은 제목도 생각이 난다. '만세'라는 외국어인데, 블루스 만세는 조금 이상한 듯.
다카하시 류미코는 얼마 안되는 여성 만화가인데, 란마, 그리고 이누야샤 시리즈로 매우 유명하다. 여성 특유의 섬세한 캐릭터 설정, 그 이면 기발한 아이디어가 특히 돋보이는데, 이분의 작품들 중 '란마'는 예전 다이나믹 콩콩 시리즈의 표절작 '금봉이'시리즈로 일부 접한 바 있다. 당시 우리집에서는 만화책은 일절 사주지 않았기 때문에, 학교에 친구들이 가져온 책을 어렵사리 빌려 읽은 기억이 난다. 그 트라우마 덕분인지, 나이를 많이 먹어버린 지금에야 게임이나 만화를 맘대로 사들이곤 하는데, 역시 나이에 맞는 것을 그때그때 해버려야 뒷날 나같은 짓을 하지 않을 것 같다. 지금 내가 하고 싶은게 뭔지 고민해서 빨리 해보지 않으면 다음 10년에는 지금 했어야 하는 것들을 찾아다니고 있을지도 모를 일. '도레미 하우스'는 원제가 메종일각이라는 작품인데, 손전화는 커녕 삐삐도 없던 시절의 연애물이다. 하숙집 주인인 미망인을 재수생인 주인공이 좋아하는 설정으로 해서 나온 속칭 '누님물'의 전형이나 원조에 가까운 작품. 영어본으로 봤는데, 지금봐도 재미있고, 무엇보다 지나간 그때 그 시절의 향수를 느끼게 해준다.
코이케 카즈오 선생의 대표작인 Lone Wolf and Cub, Samurai Executioner, Path of Assassin, Lady Snowblood (슈라유키히메) 등은 모두 영어본으로 보았다. 이 분의 작품으로 더욱 유명한 Crying Freeman역시 영어본으로 보았는데, 어린 나이에 무지하게 야한 그림때문에 혼자 있을때 봤던 것 같다. Crying Freeman은 몰라도, 다른 사무라이 활극들은 상당히 재미있게, 로맨틱하게, 그러나 사실적으로 그렸고, 시대극으로써의 가치도 높았다고 기억한다. 그나저나 Wiki를 찾다가 알게 되었는데, 이분도 사숙을 운영했다고 하고, 이 사숙 출신의 유명한 작가들이 여럿 나왔는데, 다카하시 류미코 (란마 등), 키쿠치 히데유키 (뱀파이어 헌터 D), 하라 텟츠오 (북두의 권), 이타가키 케이스케 (바키) 등이 있다고 한다. 명사에 고제자가 난 셈. 이런 사숙제도는 잘 이용되면 좋은 시너지 효과를 보겠지만, 잘못 이용되면 젊은이 여럿을 모아 시중을 들게 하면서, 아이디어를 빼먹기나 할 것이니, 제도보다 사람과 문화가 먼저 확립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스타일의 운영에서 유명한 것이 내 기억에 오사무 테스카가 운영했던 초창기의 사숙인 것 같다. 이 Lone Wolf and Cub은 쌈마이 영화 스타일로 나온 것이 여러 편 있는데, '아들을 동반한 검객'이라는 다소 이상한 번역으로 한국에도 소개된 적이 있다.
이 작품도 상당히 유명한데, 내 기억에 아이큐 점프 출신의 어느 만화가가 이 작품, 그리고 비슷한 여러 작품들, 예를 들면 AD Police File같은 것을 이렇게 저렇게 도용해서 만든게 기억난다. 단행본도 있었는데, 제목이 생각나지 않는다. 내가 책은 거의 안 빌려주기 때문에 대부분은 가지고 있는데, 예전에 몇 번 누군가에게 떼먹힌 것들 중 하나였는지도 모르겠다. '비보호 좌회전'이라는 단행본도 학교 동기누나가 빌려가서 안 가져온 것으로 기억한다 (나쁜 x)...
한국 만화는 많이 빠져있는데, 내가 어릴 때만해도 이곳에서 한국 만화를 구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아직도 많은 작품들을 소장하지 못하고 있다. 허영만의 '식객'이나 '타짜'도 아직은 갖고 있지 않다. 사실 허영만의 유명세는 조금 controversial한데, 김세영이란 걸출한 스토리 작가의 credit을 상당부분 빼앗은 것이나 다름 없기 때문이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작화가와 스토리 작가가 따로 credit을 받는 일본 시스템이 이런 점에서는 훨씬 더 합리적이다. 그러고 보니,
요녀석들도 구매 예정.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절판되지 말기를 바랄뿐.
간만에 시간이 좀 많아서 이런 저런 옛날 생각을 하면서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지금은 자리가 없어서 모두 박스속에 고이 모셔져 있지만, 이담에 서재를 꾸미게 되면 꼭 다시 잘 정리해 놓을 녀석들이다.
여담이지만 최근에 '사채꾼 우시지마'라는 괴작을 보았는데, 조금 보다가 말았다. 아무리 극사실주의를 지향하는 망가라지만, 쓰레기스러운 이야기는 좀 그렇다. 다른건 몰라도 만화는 그저 즐겁고 희망차거나 용기를 주는 것들이면 좋다고 생각한다. 이런 만화를 보고 이상한 녀석들이 나올까봐 걱정될 정도로 내가 받은 impression은 무척 나빴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