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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를 하나 빼먹고 있었지 싶었는데, 신간평가단 추천 페이퍼를 쓰는 것을 잊고 있었다. 사실 나는 추천페이퍼를 조금 빨리 쓰려고 하는 편인데, 그건 성실도와는 관계가 없는 문제다. 단지 너무 늦게 쓰면 이미 모든 것이 결정나 있는 상황에서 책을 추천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다. 예를 들어 선거에서 탈락할 것이 거의 확실한 후보한테 표를 주는 기분이랄까. 물론 선거라는 것은 매우 중요한 정치 행위이기 때문에 탈락할 것이 확실한 후보라고 해서 표를 주는 것이 의미가 없을 리 없다. 그리고 어쩌면 신간평가단 책을 골라내는 것도 분명히 일종의 정치적인 행위이기 때문에 의미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조금 재미가 없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대체로 많은 일이 그렇듯이) 반대로 생각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내가 캐스팅 보트 같은 것을 쥐고 있다고 마음대로 생각하는 것이다. 마지막까지 최대한 기다린 다음 결정적인 한표를 던지는 잉여짓을 할 수도 있겠지. 뭐 누군가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도 아니니 뭐가 문제랴. (2000년 미국 대선에서 플로리다의 선거인단들은 자신이 이라크 국민들의 삶에 아주 큰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생각을 꿈에서라도 해봤을까.) 아무튼 그런 잉여짓을 한다고 해도 실물의 책이 내 손에 도달하기까지는 다른 요소들도 많이 작용하는 것 같고, 결정적으로 있다가 저녁에는 무엇인가를 쓰기에는 적절한 시간이 아니다. 그러니 재미가 많이 없더라도 지금 써야겠지. 이런 쓰잘데기 없는 이야기를 일부러 해도 잠이 안깨니, 잠이 더 몸을 덮치기 전에.

 

 

 

두 번의 자화상, 전성태, 창비

 

이제 어느덧 중견이 된 전성태 작가의 단편 작품집이다. 등단한지 올해로 20주년이라고 하는데, 여전히 활발한 창작활동을 보여주며, 다양한 수상작품집에도 계속 이름을 올리고 있다(올해 이상문학상 작품집에서도 작가의 이름을 본 듯 하다). 작품집에 올라있던 여러 단편들은 보았지만, 차분히 작가의 작품들을 본 기억은 없는데, 이번 기회에 읽고 싶다.

 

 

목숨전문점, 강윤화, 실천문학사

 

그리 기분 좋은 이야기는 아닐 것 같다. "강윤화의 청춘들은 모두 뚜렷한 목적을 보이지 않은 채 말 그대로 삶을 '연명'하고 있다. 붙어 있는 목숨 자체를 의문시하며 '살고 싶은가'라는 패배적인 자조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라니. 그들의 이 '자조'에는 무엇이 들어있는가. 그 이면의 것을 읽고 싶다.

 

 

괴테 문학 강의, 안진태, 열린책들

 

그간 독일문학에 대해 꾸준하게 천착해 오던 안진태 교수의 책이다. 강의실에 앉아서 차분히 공부하는 마음으로 읽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다음 서가를 장식하고 있는 괴테의 책들을 꺼내서 다시 읽으면 조금 달리 보이는 게 있을 것 같다.

 

 

과학 액션 융합 스토리 단편집, 김종일 외, 황금가지

 

제목이 약간 벙찌게 만드는 면이 있는데, 표지도 그렇고 컨셉인 것 같다. 원래 이런 컨셉은 피식피식 비웃음을 흘리며 보다가 몇 차례 크게 얻어맞고 급기야는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비웃어서 미안해!를 외치는 게 가장 최고급 코스인데, 이 소설들은 어느 정도의 코스일지 궁금하다.

 

 

형사의 아이, 미야베 미유키, 박하

 

<맏물 이야기>와 이 책 중에 가늠해보다가 이 책을 골랐다. 마쓰모토 세이초의 소설들을 즐겁게 읽고 있는데, 그의 적자인 그녀의 소설을 한 권 고르고 싶었다. 그 중에서는 아무래도 이 책이 조금 더 낫겠지 싶다. 

 

 

덧.

 

 

이 책을 고를까 말까 망설이다가 이 책을 읽은 후 어떤 리뷰를 쓰게 될지 불보듯 뻔할 것 같아서 빼기로 했다. 보나마나 이것도 죽이고, 저것도 죽이네 하며 감탄하다가, 근데 다 출간이 안 되었다고 징징대다가, 급기야는 한국 출판 문화를 성토하면서 이 책을 추천한 내 자신을 원망하는 걸로 끝나겠지. 누군가의 러브레터를 보는 것은 흥미롭지만, 그 러브레터의 대상을 보고 싶다는 욕망을 어떻게 이겨내나.

 

 

아 그리고 이 책도. '55세부터 헬로라이프'라는 제목의 이질감. 나이든 무라카미 류는 별로 보고 싶지 않은데. 더구나 "장기 침체에 빠진 일본 사회를 배경으로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대는 4050세대의 다섯 가지 가느다란 희망 이야기를 담고 있다"라니.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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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05 1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늦게 쓰면 이미 모든 것이 결정나 있는 상황에서 책을 추천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라는 말이 너무 공감되네요 ㅋㅋ... 하지만 저는 새로 나왔는지 조차 알지 못했던 좋은 책을 추천해 주시는 분들이 계시면 그분들의 추천을 받아서 제 신간 선정 목록에 넣기도 해요. 나름 이런 장점도 있는 것 같아요ㅎㅎ

맥거핀 2015-03-06 00:20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롸님! (`롸`라는 닉네임이 인상적이네요. 저는 MLB팬이라 쓸데없이 알렉스 로드리게즈, 일명 `롸동자`를 연상하고 있습니다.ㅋ) 아..그렇군요. 그런 장점도 있기는 하겠군요. 저도 신간추천하면서 늘 다른 분들의 추천을 봐요. 모두들 각자 나름의 색깔?이 있으신 것 같더군요.^^

희선 2015-03-06 0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봄이어서 잠이 오는가봐요 저는 철이 바뀔 때가 되면 잠이 많이 오더군요 어느 날 왜 이렇게 잠만 자고 싶을까 생각하면 그런 때였어요(그럴 때가 아니어도 기분이 별로면 잠을 자는군요) 겨울에서 봄으로 바뀔 때는 다 그럴 것 같습니다 한동안 움츠려 있어서 그것을 펴려면 좀 힘이 들지 않을지... 사람이나 그렇게 움츠려 있지, 식물은 겨울에도 봄을 준비하고 있었겠습니다

벌써 정해졌을지 몰라도 마지막에 쓴 것까지 확인해보겠죠 누군가는 저런 책도 나왔구나 하겠습니다 저도 그렇군요 ‘과학 액션 융합 스토리’라는 말이 재미있네요 제목에서 벌써 웃음이 나옵니다 실제 어떨지 모르겠지만... 무라카미 류는 오랜만이네요 지난해에도 책이 나오고 예전에 나온 게 다시 나온 것 같기도 한데...

몇 분 지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어제죠 어제 보름이었더군요 달이 잘 보일까 하는 생각을 잠깐 했습니다 달 보셨습니까


희선

맥거핀 2015-03-06 00:26   좋아요 0 | URL
하하..거의 실시간으로 댓글을 달게 되네요. 이런 경우 잘 없는 것 같은데...저는 솔직히 늘 잠이 와요. 잠을 적게 자도 잠이 오고, 잠을 많이 자도 잠이 오고..참 이상하죠?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어요. 제가 옛날에는 잠이 참 없는 편이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잠이 많아졌는지..남들은 나이들면 잠이 적어진다는데, 저는 이상하게 반대인 것 같아요.

네..저도 사실 과학과 액션이 어떻게 융합되었을지 궁금하기는 합니다. 상당히 괴랄한(?) 결과물이 나올 것 같아요. 저도 무라카미 류 이름 오랜만에 봐서(아주 오래전에 `공생충`이라는 소설을 본 이후로 거의 안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반가웠는데, 제목부터 내용까지 별로 땡기지가 않아요. 무라카미 류는 그냥 내 추억 속의 무라카미 류로 남아줬으면 좋겠어요. 예를 들어 커트 코베인이 살아 돌아와 포크 앨범을 낸다면 이런 기분일까요?

달 못봤어요. 올해는 정월대보름도 뉴스 보고 알았어요. 부럼도 못 먹었고, 오곡밥도 구경을 못했네요. 별 거 아니지만, 왠지 그냥 지나가니 섭섭하군요.

맥거핀 2015-03-06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지금 글을 다시 읽어보다가 발견했는데, 위에 <과학 액션 융합 스토리 단편집>은 표지에는 `단편선`이라고 되어있네...근데 알라딘 책 소개 페이지에는 `단편집`이라고 되어있고..이상하다....

2015-03-18 15: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3-20 16: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폭스캐처, 베넷 밀러, 2015

  

 

(영화의 전체 내용과 결말이 들어 있습니다.)

 

 

 

1.  

<폭스캐처>는 '역사상 가장 돈 많은 살인범'의 실제 사건을 영화화했다. 1996년 1월 21일, 세계 최대의 화학기업 듀폰의 직계 상속자인 존 E. 듀폰은 LA올림픽 레슬링 금메달리스트 데이브 슐츠를 자신의 38구경 권총으로 살해한다. 300만㎡가 넘는 펜실베이니아의 듀폰 사유지에는 '폭스캐처' 농장을 중심으로 승마장, 사격장을 비롯해 레슬링 전용 체육관과 선수들을 위한 사택이 있었다. 슐츠는 애틀랜타올림픽 준비를 위해 가족과 함께 이곳 사택에 머물고 있다가 변을 당했다. 출동한 경찰은 다양한 총기와 장갑차까지 보유하고 있는 듀폰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이틀 동안이나 대치를 벌여야 했다. 듀폰은 싱겁게도 보일러를 고치려 잠시 건물 밖으로 나왔다가 체포돼 별다른 저항 없이 수갑을 찼다. 듀폰쪽 변호인은 그가 정신질환에 의한 심신미약 상태임을 주장했지만 법원은 3급 살인죄를 적용했고, 듀폰은 2010년 감옥에서 숨졌다.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은 재벌이 살인을 저지른 데 대해 미국 사회는 들끓었고 살해 동기에 대해 갖은 추측이 난무했다. 한국에서도 <9시 뉴스>를 포함해 뭇 언론에서 비중 있게 보도됐다.

 

 <씨네21> 991호에 실렸던 송형국 평론가의 글 서두이다. 이 부분은 글의 서두이자, 이 사건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지만, 사실 영화 상에서 이 부분을 보기 위해서는 거의 2시간 가까이 기다려야만 한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이 '사건'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건이 '왜 일어났는가'를 보여주려고 한다. 그러나 이 '왜'를 설명하는 것이 그다지 간단하지만은 않다.

  

2.  

사실 이 영화의 구성은 조금 흥미롭다. 위에 언급되는 것은 사건의 당사자들인 존 듀폰(스티브 카렐)과 데이브 슐츠(마크 러팔로)이지만, 영화가 시작되고 오프닝이 지나간 후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은 데이브 슐츠의 동생 마크 슐츠(채닝 테이텀)이다. 그도 형과 같은 레슬링 선수이자, 역시 LA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기도 하다. 그를 보여주는 초반의 씬들은 인상적이다. 아무도 없는 레슬링 도장에서 인형을 잡고 혼자 연습하고 있는 그를 한동안 멀리 바라본 후, 장소는 어느 초등학교로 옮겨진다. 마크가 강연을 준비하는 모습이 보인다. 원고를 손에 들고 중얼거리며 앞을 노려보는 그는 긴장하거나 혹은 이 상황이 짜증이 나는 것 같다. 그리고 미국 국기가 걸린 강당에서 마크는 초등학생을 상대로 강연을 한다. 그는 오륜 마크가 그려진 자켓을 입고 목에 건 금메달을 보여주며, 레슬링과 조국 같은 이야기를 하려하지만, 아이들은 시큰둥하다. 그리고 서류에 날짜를 쓰는 어떤 손이 보인다. 1987년 3월 14일. 학교 행정실이다. 강연료가 20달러라고 말해주며 행정직원은 이름을 묻는다. 데이브인가요, 데이빗인가요? 그리고 마크는 답한다. 마크라고, 형 대신 왔다고. 행정직원은 약간 의아한 눈길을 보내지만, 그리 문제 삼는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마크는 덧붙인다. 둘 다 금메달리스트라고. (이 장면들에서 마크의 옆으로 당시 대통령 도널드 레이건의 사진이 언뜻 비친다.) 그리고 그 이후 찌푸린 얼굴로 낡은 패스트푸드점에서 마치 노동자들처럼 보이는 사내들 틈에서 음식을 주문하려 하는 마크의 모습이 보인다. 그는 굳은 얼굴로 차 안에서 햄버거를 먹는다.

 

이 장면은 그 자체로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있다. 예를 들어 이 장면은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마크의 불안한 심리상태를 말해주기도 하고, 마크와 데이브의 관계의 어떤 일단(예를 들어 형의 도움으로, 형에 의지하며 살아가는 마크)을 보여주기도 하며, 그들이 현재 처한 위치를 말해주기도 한다(즉 데이브는 강연을 초청받지만, 마크는 사실은 데이브가 받았어야 할 강연료를 받아, 낡은 차 안에서 싸구려 음식을 먹는다. 같은 올림픽금메달리스트이지만 데이브와 마크의 처지는 왜 다른가). 그런데 이 장면이 더 흥미로운 것은 이 씬들이 영화 마지막의 에필로그 씬들과 일종의 대구를 이루기 때문이다. 영화의 가장 처음에 등장하는 것도 마크지만, 영화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것도 마크이다. 그는 형이 죽은 후 UFC같은 격투기대회에 출전하는 것으로 삶을 이어나가고 있는 것 같다. 대기실에서 혼자 외롭게 고개를 숙이고 의자에 앉아 있는 마크의 모습을 비춰준 후(이 장면이 한편으로 마음을 건드리는 것은 이전의 레슬링 경기장에서는 그렇게 의자에 앉아 있는 마크의 옆에 그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건네고 힘을 북돋우는 형 데이브가 있었기 때문이다), 올림픽금메달리스트 출신이라는 등의 화려한 소개를 들으며 링으로 올라가는 여전히 굳은 얼굴의 마크의 모습이 나온다. 그리고 열광하는 관객들은 외친다. USA! USA! USA! 그리고 영화는 끝난다.

 

이 장면이 대구처럼 느껴지는 것은 이 두 장면 모두 관객을 상대로 한 어떤 무엇을 시작하려는 마크의 모습을 담고 있기도 하거니와 어떤 공통적인 요소들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시작부에 나왔던 강당에 걸려있었던 미국 국기와 행정실에 있던 레이건의 사진 그리고 마크가 강연에서 얘기하려 했던 조국과 같은 것을 기억한다면, 그것에 마치 화답을 보내는 것 같은 마지막의 USA!와 같은 외침들은 조금은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왜 그들은 마크의 이름을 외치지 않고, USA를 외치는 걸까. 마크는 국기가 걸려있던 초등학교에서 조국을 이야기했지만, 시큰둥한 반응을 받았고, 이제 몇 년 후 그 시큰둥한 반응은 열렬한 환호로 이상하게 귀환했다. 그러나 이전이나 지금이나 마크의 얼굴은 굳어 있고, 어쩌면 그 자리에 대신 섰을 수도 있는 데이브는 그 시간들 사이에 누군가의 총을 맞았다. 기의는 달라졌고, 기표는 여전히 비어있다. (그러니 재미있는 것은 이 영화의 끝과 마지막을 이 비어있는 기표가 장식한다는 것이고, 안타까운 것은 그가 형의 죽음에서도 그다지 배운 것은 없어보인다는 사실이다.)

 

3.   

이것이 조금 더 다층적이 되는 것은 그 이전의 오프닝(그러니까 마크가 등장하기 전의 오프닝)과 이것이 묘한 연결을 이루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오프닝은 사실 많이 이상하다. 영화가 시작되고 실화를 바탕으로 하였다는 문구가 지나간 후, 보이는 것은 낡은 기록사진과 같은 풍경들이다. 오래 전의 폭스캐처 농장을 보여주는 낡은 기록필름. 말과 사냥개들과 사냥을 하러 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실제의 기록필름(어린 시절의 존 듀폰과 그의 어머니의 컷이 있는 것도 같지만 확언은 못하겠다. 아마도 영화의 중간에서 존 듀폰이 마크에게 보라고 하는 비디오도 이것과 비슷한 화면일 것이다). 여우를 잡으러 뛰어가는 사냥개를 담은 기록필름의 컷 사이에 제목이 뜬다. '폭스캐처' 그러니까 여우를 사냥하는 무엇. 그리고 이어서 아까 이야기했던 인형을 붙잡고 텅빈 연습장에서 연습을 하는 마크의 모습이 여기에 붙는다.

 

그러니까 사실 여우를 잡는 사냥도구였던 말 혹은 사냥개와 그의 지원을 받아 레슬링 훈련을 하는 마크의 존재의 의미는 존 듀폰에게는 동일하다는 이야기인 것 같다. 실제로 영화 중간에 마크가 따온 메달이 결국 여우와 같지 않느냐는 듀폰의 말도 있다. 듀폰의 어머니에게는 여우사냥과 말이었다면, 듀폰에게는 그것이 레슬링과 마크였을 뿐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앞에서 말한 마크가 나온 오프닝 혹은 엔딩과 이것을 연관지어 본다면 여기에서 감독은 다른 질문을 하는 것처럼도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게는 마치 그것이 존 듀폰만 그런 것인가,라고 묻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존 듀폰이 마크가 따온 메달을 마치 자신이 딴 것처럼 자신의 진열대에 전시할 때, 혹은 더 나아가 듀폰이라는 가문이 (실제는 자신들이 획득한 것이 아닌) 여우와 메달을 자신의 것으로 간주할 때, 국가와 USA를 외치는 국민은 거의 비슷한 심리적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것에는 어쩌면 단지 규모나 사적소유(실제로는 아닐지라도 그렇게 믿는 것)의 차이만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니 어쩌면 이런 질문. 당신은 김연아가 딴 금메달을 왜 그렇게 자랑스러워했나.

 

  

4. 

물론 이 영화에서 이런 질문까지 나아갈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사실 굳이 우리까지 들여다보려 하지 않아도 존 듀폰과 데이브 슐츠, 마크 슐츠 이 세 사람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충분히 흥미진진하다. 존 듀폰의 비극은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어쩌면 그의 비극은 그가 그의 어머니 이상의 것을 바랬다는 것에 있지 않을까. 중간에 그가 레슬링 선수들에게 일종의 도취 상태에서 연설을 하는 장면이 있다. 그는 어머니가 애지중지하는 말들이 단지 먹고 싸는 것밖에 모르는 멍청한 것들에 불과하다고 조롱하며, 동물 위에 앉는 것이 뭐 그리 고상한지 모르겠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는 동물이 아닌 인간 위에 앉고 싶었다. 인간도 물론 먹고 싸지만, 인간은 한 가지를 더해 주니까. 즉 그를 존경해줄 수도 있으니까. 다시 말해서 그는 멘토가 되고 싶었다. 아니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멘토가 받는 존경을 받고 싶었다(예를 들어 그가 자신이 써낸 조류학 책을 보여주며 자신을 조류학자라고 소개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그에게는 조류학이든 뭐든 사실 상관이 없었다. 단지 그에게 필요한 것은 조류학자가 받을 수도 있는 존경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멘토가 될 수 없는 사람이었다는 데에 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그는 멘토가 되는 법을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것은 배워서 아는 것도, 흉내를 내서 알게 되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것은 듀폰이 어리석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문제였다. 아니 도리어 그 반대에 가까웠다. 듀폰은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다. 그것은 듀폰이 데이브를 쏘기 전에 보이는 행동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어떤 분노를 보이거나,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단지 그는 그 전에 자신을 본다. 자신이 마크와 데이브를 비롯한 레슬링 선수들의 멘토인 것처럼 만들어진 비디오. 이것이 단지 '만들어진 것'에 불과함은 무엇보다도 그 자신이 가장 잘 안다. 그는 그것을 모를 정도로 어리석지 않다. (예를 들어 어머니가 집의 운전기사의 아들에게 돈을 주며 자신의 친구로 '붙여줬을 때'에 그것의 의미를 누구보다도 잘 알았을 것이다.) 그는 그 '만들어진 것'을 견딜 수 없었다. 진짜(그러니까 진짜 '멘토')가 되고 싶었다. 그리고 그 방법은 사실 간단했다. 그것은 진짜의 존경을 받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했다.

 

5.  

즉 듀폰에게는 데이브의 존경이 필요했다. 마크의 존경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았고(아마도 마크는 그를 어떤 의미에서는 진짜 존경했는지도 모르겠다. 그가 형이나 형의 아내에게 듀폰에 대한 태도에 대해 불만을 표출하는 장면에서 이것이 잘 드러난다. 그러나 사실 이도 멘토로서의 존경이라기 보다는 그의 금력에 대한 존경에 가까웠을 것이다), 그는 데이브와 같은 진짜 멘토의 존경을 받고 싶었다. (멘토로서의) 존경을 받는 것은 다른 멘토의 존경을 받는 것이다. 이 얼마나 간단한가. 

 

그런데 정말 비극은 데이브는 그런 것을 모르는 사람이었다는 데에 있다. 즉 그는 누군가의 권위에 따르고 존경을 보낸다는 것을 하기 싫어한다기 보다는, 아예 그렇게 하는 방법을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마크 러팔로가 아주 훌륭한 연기로 이를 잘 보여주는데) 데이브에게 "존이 내 멘토입니다."라고 말하라고 비디오 연출가가 시킬 때, 그는 하기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의미를 수긍하고 하려고 하는 듯이 보이지만, 말 그대로 어떻게 하는지 방법을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 즉 그것은 그의 천성처럼 보이며, 그가 다른 사람들, 특히 듀폰에게 대하는 태도를 보면 이것이 잘 드러난다. 다시 말해서 비극은, 이 전혀 알 수 없는 것을 알려고 하는 혹은 알아야만 하는 사람들이 만났을 때 발생했다. 존 듀폰은 멘토가 되는 법을 모르며, 데이브는 멘토라는 것을 대하는 법을 모른다. 존 듀폰이 어떤 의미에서 아직 어린아이였다면, 데이브 역시도 어떤 의미에서는 어린아이같이 깨끗한 인물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김중혁 작가가 <씨네21> 993호에서 이 영화를 다룬 글에 데이브가 차를 고치다가 듀폰을 만나 총을 맞고 죽어갈 때 그의 팔에 쓰인 낙서 'P.U.KIDS'라는 문구를 보고, 혹 이것이 아이처럼 굴지 말자고, 더이상 아이가 아니라고 자신을 나무라는 의미는 아닐까,라고 쓴 구절이 있는데, 그런 해석이라면 위의 얘기가 통하는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도 영화와 이 글을 본 후 궁금해져서 이 부분을 찾아봤는데, 이 부분은 마크 슐츠가 데이비드 토마스와 사건 후 쓴 <Foxcatcher: The True Story of My Brother's Murder, John du Pont's Madness, and the Quest for Olympic Gold>라는 책의 시작머리에 나오는데, 차를 고친 후 아이들을 픽업(Pick Up)하러 가야한다고 자신에게 일러주는 의미였던 것 같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이 문구가 도드라지게 처리한 것은 이 영화에서 의미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6.  

<폭스캐처>는 이상하게도 영화가 끝난 후 잔상을 많이 남기는 영화다. 예를 들어 몇몇 기억에 남는 잔상들이 있다. "존이 내 멘토입니다."라고 말하라고 지시 아닌 지시를 받았을 때 마크 러팔로의 하고자 하는데 도저히 되지 않는 듯한 어색한 모습이나, 듀폰의 어머니 역을 맡은 바네사 레드그레이브가 짓는, 스티브 카렐이 어떻게든 어머니 앞에서 멘토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애쓸 때, 애쓰는 것을 알기는 하지만 도저히 못보겠다는 표정, 혹은 스티브 카렐이 고개를 약간 치켜 들고 동공이 비어있는 듯한 눈빛으로 자신이 멘토라고 만들어진 비디오를 보는 장면 같은 것 말이다. 내가 일부러 극중인물 대신 배우 이름을 쓰는 것은 이 영화에서는 이들이 모두, 이들 자신이 아니면 영화가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 같은 연기를 보여줬기 때문이다. 특히 포스터에도 있는 가짜 코를 달고 약간 고개를 위로 치켜 뜬 스티브 카렐의 연기에는 찬사를 보내고 싶다. 그의 눈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영화의 많은 것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영화는 사실 그렇게 흔하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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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5-03-05 0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자랄 것 없는 사람이 사람을 죽이면 ‘왜 그랬을까’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겠습니다 하지만 가진 게 많다고 해서 모자란 게 없다고 할 수 있을까요 가진 사람은 그 나름대로 모자란 게 있을지도 모르죠 그 마음을 다른 사람이 알 수 있을지, 어쩐지 가진 사람 자신도 자기 마음을 잘 모를 것 같기도 합니다 친구를 엄마가 돈으로...

왜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자신을 존경해주기를 바랐을까요 이게 알고 싶네요 사람 위에 서고 싶어서... 존경받는 건 누군가 위에 서는 게 아닌데, 그것을 잘못 알고 있었네요 그걸 모르는 사람이라고 했군요 데이브도 그걸 잘 몰랐다니, 만나지 않아야 할 사람이 만났군요 데이브가 모르는 것도 있었겠지만, 별로 존경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것이기도 하겠죠 존경한다는 것은 말로 하기보다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뚜렷한 동기가 있어서 누군가를 죽이는 사람도 있지만, 동기가 확실하지 않은 때도 있어요 이 일도 뚜렷하게 알기 어려울 듯하네요 그저 추측만 할 수 있겠습니다

많이 가졌다고 다 좋은 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하네요

여기 나온 사람들이 다 연기를 잘했군요


희선

맥거핀 2015-03-06 00:14   좋아요 0 | URL
뭐 물론 이 글은 영화를 본 제 나름의 생각일 뿐입니다. 영화를 만든 감독의 의도라는 것도 있을 것이고, 또 어쩌면 진짜 나름의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표면적으로 드러난 것은 존 듀폰이 데이브 슐츠를 사살했다는 사실 뿐이니까요. 말씀하셨듯이 동기가 확실한 사건도 있지만, 많은 사건들이 동기가 불확실하죠. 어쩌면 존 듀폰도 쏘면서도 자신도 그 이유를 몰랐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아무튼 (적어도 영화상으로 본다면) 그 마지막이 흥미로웠어요. 존 듀폰이 자신을 칭송하는 비디오를 본 후 데이브에게 가서 그를 쏘는 것. 아마도 사람이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자신일지도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보는 것을 견디기 힘들어하기 때문에 보다 쉬운 방식, 그러니까 자기자신에 대한 것을 다른 사람에 대한 것으로 치환하고는 하죠. 말은 쉽지만 자신이 전혀 존경 같은 것은 받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기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문제였겠죠. 꼭 존경 뿐만이 아니라 사실 많은 것이 그렇기도 할 것이구요.

연기의 합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볼 게 많은 영화입니다. 대사가 많이 나오는 영화가 아니어서 미묘한 느낌을 살려야 하는 부분들이 많은 영화인데, 세 사람 모두 상당한 호연을 보여줍니다.

네오 2015-04-29 0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잘 쓰셨네요!! 궁금한게 다 풀렸네요~

맥거핀 2015-04-29 15:13   좋아요 0 | URL
네오님, 고마워요! 네오님 칭찬 들으니 기분이 좋네요.

네오 2015-05-01 13:18   좋아요 0 | URL
네,,감사요,,사실,,이 글을 읽을때 전율비슷한,,마크가 수미쌍관적으로 왜 배치를 했는지를 설득가능하도록 이야기를 해주셨으니,,뭐,,더이상 이만한 리뷰글을 넘는글을 상상도 못할거고,,다 이야기를 풀어주셨으니 말을 더한다는 것은 낭비인것도 같고 해서요,,저는,,걍 느낌위주로 글을 써야겠아요^^ 아 단지,,베넷 밀러가 왜 중요한지는 말 하고 싶더군요,,
 

 

 

 

킹스맨 : 시크릿 에이전트, 매튜 본, 2015

 

 

(영화의 내용과 결말이 들어 있습니다.)  

 

 

<킹스맨 : 시크릿 에이전트>(이하 <킹스맨>)가 어떻게 재미있는지, 혹은 얼마나 글래머러스한 영화인지를 다시 이야기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또한 영화 속 소품들의 럭셔리함이나, 킹스맨 요원 해리 역을 맡은 콜린 퍼스의 수트빨 같은 것을 이야기하는 것도 내 능력을 넘어서는 일이다. 다만 나는 영화 속에서 나의 흥미를 끌었던 부분에 대해 그저 간략하게 이야기하고 싶은데, 예를 들어 영화 속에 등장했던 "현실은 영화와 다르다."와 같은 대사들이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이 대사는 영화에서 두 번 나온다. 처음 등장하는 것은 이 영화의 터닝 포인트라고 할 수 있는 해리(콜린 퍼스)의 교회 씬이다. 해리가 악당 발렌타인(사무엘 L. 잭슨)의 계략에 빠져 교회 안에서 광란의 살육을 벌인 후 어느 틈에 정신을 차리고 교회 밖으로 나오자 그를 기다리고 있던 발렌타인이 그에게 총을 쏘기 전에 그에게 빈정대면서 이 말을 건넨다. "현실은 영화와 달라." 두 번째는 영화가 끝나기 직전이다. 주인공 에그시(태론 에거튼)가 발렌타인의 경호원 가젤(소피아 부텔라)과의 최후의 일전을 벌이며 그녀를 제거한 후, 악당 발렌타인을 처치하기 직전, 발렌타인은 이게 영화라면 원래 이쯤에서 영화 속 주인공들이 악당에게 하는 대사가 있지 않느냐고 이죽거린다(이 영화에서는 '영화'라는 매체 혹은 다른 영화에 대한 언급이 자주 나오는 편인데, 예를 들어 악당 발렌타인은 그 언급의 빈번함으로 볼 때 스파이 영화 애호가 정도로 설정되어 있는 듯 하며, 해리가 에그시를 요원으로 끌어들이려 할 때 <프리티 우먼>이나 <마이 페어 레이디> 같은 영화들이 언급되기도 한다. 물론 이 영화가 <마이 페어 레이디> 같은 영화와 주제의식을 공유하는 지점이 있기도 하지만, 이 영화에 이렇게 '영화'라는 것이 언급되는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 때 에그시는 발렌타인에게 그 대사를 되돌려준다. "현실은 영화와 다르다." 그리고 발렌타인도 그 대사에 수긍한다.

 

위에서 언급한 광란의 살육 축제(적절하지 않은 표현이지만, 사실 이보다 적당한 말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가 벌어지는 교회에서의 씬은 어떤 액션의 구성이나, 카메라 워크, 혹은 씬 전체의 흐름 같은 부분에서, 많이 언급되었듯이 분명히 매우 인상적이며, 매혹적이다. 그러나 사실 내용적으로 보자면 조금 관객을 뜨악하게 만드는 부분도 있다. 흔한 말로 이를 일종의 반전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는데, 왜냐하면 여기에서 광란의 살육을 벌이는 주체가 지금까지 영화의 전반부에서 선(善)의 편에 선 좋은 멘토 해리이기 때문이며, 그에게 죽임을 당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비록 약간의 극단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해도) 그렇게까지 죽을 이유는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즉 여기에는 선한 인물이 무고한 사람을 (그것도 대량으로) 살상한다는 어떤 아이러니가 있다. 물론 영화 속에서 선한 인물이 어떤 계기로 인해(그것이 선한 인물 본인의 의지와 무관한 것이라도) 돌변하여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는 경우는 많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는 대부분 이전에 어떤 암시가 주어지거나, 혹은 그 장면의 처리가 상당히 조심스럽게 진행된다. 그런데 이 영화 <킹스맨>에서 가장 유쾌하게 묘사된 씬 중에 하나는 이 씬이다. 이 장면은 화려하고 즐거운 무엇처럼 묘사되었다. 그리고 이 뒤에 발렌타인의 부기가 따른다. "현실은 영화와 다르다."

 

즉 간단히 말해서 이 씬은 일종의 영화적 규약, 혹은 믿음을 무너뜨린다. 선한 이는 선한 이를 해치지 않는다는 그런 믿음 말이다. 물론 선한 이가 돌변하여 선한 이를 해칠 수도 있지만, 그렇다면 그 때에는 물론 그를 더 이상 '선한 이'라 부를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 <킹스맨>에서는 조금 다른 것이 이 장면이 이어진 후에도 해리는 여전히 선한 인물로 남으며, 영화적 서사흐름은 이 씬으로 전혀 깨지지 않는다. 아니 도리어 배가된다. 다시 말해서 이 씬이 건드리는 것은 인물이나 서사가 아니라, 어떤 '영화적 규약' 혹은 '영화'라는 것에 대해 물음이다. 즉 발렌타인이 이 때 현실이 영화와 다르다고 말할 때, 그것의 방점은 '영화'보다 '현실'에 찍혀 있으며, 발렌타인은 '이제 그런 것은 더 이상 영화가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해리의 세계, 즉 이 교회 씬 이전까지 이 영화의 기본 바탕에 깔려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스파이 영화의 글래머러스함, 즉 수트, 각종 소품, 매너, 느끼함, 단정함, 매력적인 여자, 신사, 예의, 술,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그 밑바탕에 깔려 있는 대의를 위한 희생과 같은 것들이다. 이는 단지 이 영화에 국한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위에 언급하였듯이 발렌타인은 스파이 영화의 광팬이며, 그가 지금까지 보아왔던 스파이 영화란 다니엘 크레이그 이전의 제임스 본드 시리즈로 대변되는 그런 스파이 영화일 것이기 때문이다. 즉 발렌타인이 현실이 영화와 다르다고 할 때, 이는 이런 스파이 영화는 이제 더 이상 '현실적인 영화'가 아니라는 말처럼 들리며(왜냐하면 결국 발렌타인도 영화 속 인물이기 때문이다), 현실적인 스파이 영화는 이제 다니엘 크레이그 같은 피로한 노동자 유형의 007이 등장하거나, 제이슨 본과 같은 보다 현실에 발을 디딘 것 같은 인물이 등장하는 영화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한편으로 그것이 물론 실제의 스파이 영화의 흐름에서 생겨난 '현실'이기도 하다. 이러한 새로운 타입의 007, 혹은 제이슨 본과 같은 새로운 유형의 스파이는 기존 스파이 영화에 대한 반동으로 생겨났으며, 이러한 류의 영화들은 항상 이것이 '리얼' 즉 현실임을 강조하며 기존 스파이 영화의 글래머러스함에 질린 관객들을 끌어들였다. 그런데 세상일이 늘 그렇듯이 반동은 반동을 불러오며, 첨단은 복고를 낳는다. 이 영화 <킹스맨>은 이런 반동의 흐름에 다시 반동을 꾀하는 영화다. 발렌타인이 영화의 중간에 '이러한 것은 이제 영화가 아니야. 현실은 달라'라며 기존의 스파이 영화들에 영화적인 죽음을 선고할 때, 다시 그 발렌타인에게 죽음을 선고하며, '아니 그렇게 말하는 너도 영화잖아. 결국 영화란 원래 그런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처음 발렌타인이 해리에게 "영화와 현실은 다르다."라고 말할 때 그 방점이 '현실'에 찍혀 있다면, 두 번째 에그시가 발렌타인에게 그 말을 건넬 때에는 그 방점은 '영화'로 옮겨와 있다.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몇몇 구성들이 있는데, 예를 들어 영화의 초중반부 에그시와 록시 등이 킹스맨이 되기 위해 받는 훈련들은 리얼인 것처럼 포장되었지만(훈련 중 죽을 수도 있다고 겁을 주며, 마치 실제로 그런 것처럼 보여지지만), 사실은 시뮬레이션이며(결국 영화는 일종의 고도로 조직된 시뮬레이션이다. 예를 들어 기차길에 묶인 상태에서 비밀을 털어놓으라고 강요받는 영화 속 훈련처럼 말이다), 해리가 교회에서 살육을 벌일 때에 그것을 모니터로 바라보는 에그시나 멀린(마크 스트롱)의 뜨악함이 있으며(즉 이 장면에서 이를 멀린이나 에그시, 그리고 악당 발렌타인마저도 마치 영화처럼 모니터로 바라본다는 것이 재미있다. 멀린이나 에그시의 화면을 바라보는 뜨악한 표정이 새로운 유형의 스파이물을 보는 관객의 뜨악함이라는 이 영화의 조롱이 여기에 들어있지 않을까), 결국 에그시는 기존 스파이 영화의 어떤 장면들을 비슷하게 재현한 다음, 악당을 물리치고 사랑을 쟁취한다(예를 들어 기존 제임스 본드 시리즈에서 상당 부분 영화의 마지막이 결국 007이 여자를 후리는 것(그다지 좋은 표현은 아니지만)으로 끝났음을 생각해 본다면 말이다. 에그시가 발렌타인의 소굴을 부수는 마지막도 기존 본드 시리즈들을 꽤나 떠올리게 하는데, 그 영화들에서 항상 마지막 최후의 대결은 적의 소굴 한복판에서 이루어지기도 하거니와 적들의 하얀 위장복 같은 것도 연상시키는 부분이 있다).

 

물론 감독 매튜 본이 영리한 것은 복고가 단순한 과거의 재현이 되어서는 성공할 수 없다는 점을 알고 있다는 점이다. 거기에는 일정 부분 새로운 요소가 가미되어야 하는데, 그가 선택한 것은 이른바 병맛 컨셉, B급 감성이다. 예를 들어 발렌타인의 충복 가젤은 기존의 블랙플로테이션 영화 등에서 신체의 일부가 무기로 변형된 여성들의 계보에 넣을 수 있으며, 영화 속의 어떤 유머들(예를 들어 해리의 집 벽을 장식하는 선(SUN)지 같은 것들 말이다)이나 넘쳐나는 고어적 설정 등이 그러하다. 물론 그 고어적 설정들이 넘쳐나지만 잔인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또 한편으로는 그러한 B급 영화들이 기존에 구축해 놓은 구조에 빚진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이러한 B급 감성이 이러한 이 영화에 잘 결합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이 B급 감성과 이 영화의 이러한 메시지가 공유하는 지점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겠지만, 편하게 예를 들어 말할 수도 있다. 우리가 어떤 고어나 피칠갑을 즐길 수 있는 것은 결국 그것이 현실과 적절한 줄타기를 행하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현실과 적당하게 비껴서 있다. 현실이 영화에 비척비척 밀고 들어올 때 그 쾌감은 높아질 수 있지만, 그만큼 관객의 자리는 위협받는다. 줄이 높아질수록 줄타기의 쾌감은 올라가지만 떨어질 때의 충격은 더 큰 것과 마찬가지다. 그것은 결국 영화는 '현실'과 다르다는 것이며, 영화는 영화라는 것을 인정하는 한에서, 그 줄의 높이를 어느 정도로 유지해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줄을 높일 수 있는 기술은 점점 발달하고 있지만, 그 떨어질 충격파를 계산할 정신은 여전히 빈곤한 것 같다. 

 

  

덧.

 

내게 흥미를 주었던 캐릭터는 에그시나 해리보다는 악당 발렌타인인데, 이 영화의 발렌타인은 최근 몇몇 영화들의 캐릭터를 연상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이 천재 미치광이는 <인터스텔라>의 만박사나 <설국열차>의 윌포드와 같은 인물을 연상시키는데, 특히 윌포드와는 공유하는 지점들이 꽤 많다. 한정된 자원만을 소비하여야 하기 때문에 결국 인구를 줄이는 방법이 해결책이라는 그의 결론도 그러하거니와 그가 이를 위하여 내놓은 방법론, 즉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것도 그러하다. 그들이 공통적으로 자본주의의 끝에 서 있는 인물들이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설국열차'의 마지막 칸에 있던 윌포드, 그리고 0.1%의 플루토크라트 발렌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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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5-02-27 0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ㅊ ㅎ ㅎ ㄴ ㄷ

위에 쓴 것만으로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죠 조금 알아보게 쓰면,

ㅊ ㅜ ㄱ ㅎ ㅏ ㅎ ㅏ ㅂ ㄴ ㅣ ㄷ ㅏ

얼마전에 본 책에서 예전에 어떤 분이 우리말을 풀어쓰기로 해야 한다고 한 적이 있다더군요 첫소리 말만 쓰면 못 알아봐도 풀어쓰면 조금 알아볼 수 있죠 하지만 저것도 바로 알아보기 어렵죠 그때 우리말을 풀어쓰자고 한 사람이 많았다면 지금 어떻게 됐을지... 일어나지 않은 일이지만, 일어났으면 안 좋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중에 훈민정음 해례본을 찾고, 우리말은 풀어쓰지 않고 모아써야 한다는 것이 맞다는 것을 알았답니다

두번 나온 말은 어떻게 중요할까 하는 생각은 별로 안 해봤어요 앞에서 나온 말인데 또 나왔네, 하는 생각밖에... 얼마전에 본 책에도 같은 말이 두번 나왔어요 한번은 A가 다른 사람이 해주는 말을 들었고, 두번째는 A가 B한테 말한 거였어요 하지만 그 말 A한테는 맞는 말일지 몰라도 B한테는 맞지 않는 말이었어요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 A는 사람이지만, B는 사람 모습을 한 다른 생물이었거든요 실제로는 없는 동물이군요 A가 듣고 한 말은 사람에 대한 거였어요 A는 B도 자신과 같기를 바란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모습을 볼 때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네(A)가 그렇게 말해도 B는 너와는 달라’ 하고... 사람은 다 A 같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A가 한 말은(잘 기억나지 않지만), 사람은 자신을 먼저 생각하고 자신한테 좋게 생각한다는 말이었습니다 대충 이런 뜻이었습니다 그러면 B는 대체 뭐길래 그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겠군요 무척 자비로운 동물 기린(麒麟 중국에서, 성인(聖人)이 나기 전에 나타난다는 상상의 동물)이에요 그 책을 처음 보는 사람은 나중에야 그 일을 알기 때문에, B는 보통 사람과 다르구나 하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어요 저는 B가 뭔지 알아서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것도 중요한 말이라 생각해요

처음 영화라는 것을 만들고 그것을 본 사람의 놀라움이 떠오르기도 하네요 사실 어땠을지 잘 모르지만... 그것을 실제처럼 느끼기도 했다고 한 듯한데... 라디오나 텔레비전을 보면서도 그 안에 사람이 들어있는 거 아닌가 했잖아요 이런 생각은 어릴 때도 하는군요 자라면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아는군요 영화도 현실이 아니기 때문에 무섭고 잔인한 것을 볼 수 있는 거겠죠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무엇이든 공감을 잘하는 사람이 떠오르네요 이것도 영화나 드라마 같은 데서 본 거지만... 그런 사람은 영화를 현실로 느껴서 볼 수 없다고 하더군요 실제로도 그런 사람 있을까요

사람을 줄이기 위해 서로가 죽이는 방법을 생각하는 사람은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고 봅니다 더 깊이 생각해서 좋은 방법을 찾아내야 하지 않을지... 그것은 한 사람과 여러 사람에서 어느 쪽을 고를 것인가와 비슷한 문제네요 어느 쪽도 버리지 않는 쪽을 생각해야 할 텐데 말입니다 그런 게 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영화를 만들 때 많이 생각해야겠네요


희선

맥거핀 2015-03-02 11:05   좋아요 0 | URL
그냥 이렇게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써 본 글입니다. 물론 그게 별 의미가 없는 말일 수도 있고, 감독이 별 생각없이 그런 대사를 넣었을 수도 있죠. 하지만 뭐 생각이야 누구나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거니까.

네..영화를 처음 본 사람들은 많이 놀랐다고 하죠. 유명한 기차 얘기도 있구요. 현대의 관객들도 매체라는 것에 많이 길들여졌기는 하지만, 또 모르죠. 현대 관객들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놀라운 무엇인가가 나타날지도 모릅니다. 물론 3D라는 것도 그 중의 하나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3D는 아직도 사실 초기단계라 봐야겠죠. 개인적으로는 저도 예전에 3D를 처음 봤을 때(어렸을 때 대전엑스포에서 처음 본 걸로 기억하는데..^^) 매우 놀랐던 기억이 나요.

사람을 줄이기 위해 서로를 죽이게 한다..는 일종의 비유겠지요. 그러나 현실에서도 비슷한 것이 일어나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일단 그게 자본주의의 작동방식이기도 하죠. 흔한 말로 `경쟁`이라는 것 말입니다. 가끔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해요. 현 세상이 점점 약한 사람들끼리 서로 잡아먹도록 권유하는 세계가 되어가고 있구나, 하는 것 말이죠. 그게 강한 자들은 편하니까요. 자신들이 노력을 기울일 필요도 없고, 신경쓸 필요도 없죠. 무엇보다도 약한 자들끼리 그렇게 하도록 만들어놓지 않으면 필연적으로 약한 자들은 뭉쳐서 강한 자에게 대응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강자가 가장 원치 않는 것이겠죠. 그래서 자본주의는 점점 사람들을 수직계열화하고 사회를 점점 제로섬게임, 혹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식으로 만들고 있죠. 이 영화의 그런 장면도 이런 것들의 일종의 비유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단지 비유여야 하는데, 그 비유가 점점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죠. 무서운 세상입니다.

아..그리고 아무튼 감사합니다. 뭐 이런 저런 긴 말보다는 축하해주셔서 감사하다, (지금까지) 여러 글 읽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 밖에는 드릴 말이 없네요.^^

넙치 2015-03-04 2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에서야 봤는데 덧붙인 글이 흥미롭네요!
자본주의 중심에 있는 이들이 이미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닐까..하는 오싹함이..얼마전 생체이식 칩도 곧 도래한다는 기사를 봤는데. 영화가 현실이 되는 날이 오는 게 아닌지, 종말론적 비극이 떠오르네요, 저는.;;;

맥거핀 2015-03-06 00:17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 공짜를 좋아하면 안됩니다.ㅋ 라고 말을 하면서 아마도 영화 속 상황이었다면 저도 신나서 공짜유심을 받아 왔을 것 같아요. 사실 저를 포함해서 많은 이들이 점점 거의 돈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는 세상이니까요. 자본의 힘을 가진 사람들이 아주 쉽게 좌지우지할 수 있는 세상이 점점 되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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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너리 오코너 - 오르는 것은 모두 한데 모인다 외 30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12
플래너리 오코너 지음, 고정아 옮김 / 현대문학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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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플래너리 오코너는 1946년, 그러니까 스물한 살에 첫 소설 <제라늄>을 발표했고, 1964년, 그녀의 나이 서른아홉 살에 루푸스 합병증인 신장 질환으로 죽기 직전까지 2편의 장편소설과 32편의 단편소설을 남겼다. 이 책에는 총 31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그러니까 이 단편집을 읽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플래너리 오코너의 전 생애를 읽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사실 이렇게 한 작가의 전 생애에 걸친 작품들을 읽는 것은 흥미롭지만, 그렇게 녹록한 일은 아닌데, 작가의 삶의 흐름에 따라 작품들은 대체로 변화하며, 어떤 필연적인 불균질성을 가지고, 그 불균질성이 읽는 이를 내내 건드리기 때문이다. 연보로 추측해 보건대 이 단편집의 순서는 작품 발표 순서에 따라 배열되어 있는 것 같은데(사실 이 소설의 창작년도, 혹은 발표년도가 없는 것은 이 단편집에서 아쉬운 부분이다), 작품을 읽다보면 어떤 묘한 흐름 같은 것을 생각해 볼 수 있기도 하다. 예를 들어 후기로 접어들수록 이야기는 처음의 실험적인 경향에서 점점 어떤 구체성을 가지며, 묘한 종교성은 점점 강화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플래너리 오코너의 경우에는 그런 흐름도 흐름이지만 그보다는 이 작품들을 관통하는 어떤 공통점이 더 두드러지는 편인데, 그것은 번역가의 글대로 미국 남부 지방, 가톨릭 신앙, 루푸스병이라는 몇 개의 키워드로 정리할 수도 있고, 이 이야기들의 어떤 일반적인 흐름을 살펴보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그렇지 않은 작품들도 있지만, 대체로 읽는 이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작품들의 흐름은 어딘지 모르게 비슷하다. 먼저 편견, 혹은 자신만의 확고한 고집에 사로잡혀 있는 듯한 인물들이 나온다. 이들은 교육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기보다는 오랜 삶의 경험과 인습으로 고착화된 어떤 나름의 세계에 갇혀 있고, 그 나름의 관점으로 주위의 거의 모든 것을 재단한다. 그들의 세계는 작고 편협해보이지만 나름의 체계가 있으며, 그래서 그것은 아직 견문을 넓히기 전의 어린아이의 그것과 비슷하다(그래서 이 작품들에서 주인공들은 대체로 나이가 많으나, 기이하게도 그와 짝을 이루는 것은 어린아이들인 경우가 있다. <인조 검둥이>의 헤드 씨와 그의 손자 넬슨, 혹은 <숲의 전망>의 포천 씨와 그의 외손녀 메리 '피츠' 포천, 아니면 그의 반대로서 <죽은 사람보다 불쌍한 사람은 없다>의 타워터와 노인). 즉 그들의 작은 세계는 작은 만큼 확고하다. 그것은 나름의 체계로 굴러가며, 그렇게 쉽게 부서질 염려는 없어 보인다. 그런데 여기에 별 의미가 없어 보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불길한 무엇인가가 등장한다. 그것의 형태는 다양하다. 그것은 친근한 형태로 다가오기도 하고(<좋은 시골 사람들>의 선량해보이는 성경 파는 청년), 꺼림칙한 무엇의 형태이기도 하며(<가정의 안락>의 탕녀 스타), 때로는 인간이 아니기도 하고(<그린리프>의 황소), 때로는 자신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누군가의 변형물(<숲의 전망>의 메리 '피츠' 포천)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대체로 이질적인 타자 그 자체, 예를 들어 <추방자>에서 유럽에서 살길을 찾아 미국 남부의 농장에까지 오게 된 영어를 못하는 추방자 귀작 씨와 같은 존재이다. 이 이질적인 타자는 처음에는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일련의 사건을 통해 결국 주인공의 확고한 세계에 균열을 일으키고, 그의 존재성을 뿌리부터 뒤흔들게 되고, 인물들은 그들의 균열되고 붕괴된 세계를 불편하게, 때로는 참담하게 마주 보거나, 최악의 경우 마주볼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 

 

사실 이것만 놓고 보면 이는 일반적인 소설과 그리 다르지 않다고도 말할 수 있다. 상당수의 소설에서 주인공의 세계는 마치 부서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며, 세계가 균열된 후 주인공이 새로운 세계를 마주하는 그런 소설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일종의 성장소설이 변형된 형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플래너리 오코너의 소설에서 '성장'이라는 말을 쓰기는 주저하게 되는데, 이들의 세계는 어떤 균열과 봉합을 넘어서, 거의 완전한 붕괴에 이르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즉 이들의 세계는 작품의 말미에 이르러 그 근본이 부정되거나 흔들린다. 다시 말해서 주인공들은 죽는다. 물론 이는 물리적인 죽음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실제로 죽음에 이르는 인물들도 있지만, 그들은 죽지 않더라도 거의 죽은 것과 마찬가지의 상태가 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오코너 소설의 종교적인 면모가 드러나게 되는데, 이는 그녀의 전 생애를 받치고 있었던 카톨릭 신앙과 그 신앙에서의 종교적인 의미에서의 (정신적인) 죽음,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다시 태어남(부활)이다. 다시 말해서 엄격하게 말한다면 종교적인 의미에서는 특정의 종교를 가지면서, 동시에 가지지 않은 상태란 존재할 수 없다. 그것은 어떤 하나의 세계(예를 들어 육체와 욕망의 세계)를 죽이고,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며, 죽고 나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플래너리 단편들의 인물들은 (비록 다시 태어남은 아직 먼 곳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작품의 말미에서 상징적인 죽음에 이른다. 그리고 물론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결국 그 전에 죽어야만 한다.

 

조금 다른 얘기가 될 수도 있겠지만, 내가 플래너리의 소설들에서 느낀 종교성은 그 내용적인 측면에서만은 아니다. 도리어 그보다는 형식에 관련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이 더 컸다. 예를 들어 이 소설의 전지적 관찰자가 가지는 특유의 어떤 묘한 무신경함, 무심함 같은 것들 말이다. 약간 농담을 섞어서 말하자면, 나는 소설을 읽으면서 어떤 부분에서는 마치 성경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성경은 독특한 텍스트다. 성경에는 수많은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나오지만, 그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서술하는 어떤 특유의 무신경함이 있다. 그러니까 거기에는 우리가 놀라운 이야기를 볼 때 나오는 인간적인 정서의 어떤 부분이 결여되어 있다. 그것은 당연한데, 왜냐하면 (적어도 성경의 입장에서는) 성경은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지어낸 것이 아니라 단지 일어난 일들을 그대로 기술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여기에는 일어난 일들이기 때문에 그대로 기술한다는 (종교적인 의미에서의) 어떤 특유의 무심함이 있다. (혹은 그러므로 이것은 일종의 은유로 보이게 하는 측면도 있다. 예를 들어 오병이어의 기적을 축자적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혹은 어떤 연대와 나눔의 은유로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아무튼 내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성경의 사실성이 아니고, 다만 플래너리 오코너의 소설도 일종의 은유로 느껴지는 이야기들이 많았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예가 <좋은 사람은 드물다>와 같은 것일 것이다.) 그런데 플래너리 오코너의 소설들에서도 비슷한 무엇이 엿보이는데, 이 소설의 전지적 관찰자는 모든 것을 다 알면서도 사건들에서 한껏 물러나 있다. 다시 말해서 그는 모든 것을 어떻게 흘러갈지 알면서도 그들이 붕괴되어 가는 것을 무심히 기록하며 그 붕괴를 그저 지켜보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의 붕괴가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었다는 것처럼 말이다. 즉 그는 모든 것을 다 아는 예언자로서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기록한다. 

 

그러니까 이 기록은 사실 냉혹함 중에서도 더 냉혹할 수밖에 없다. 특히 자신에게 더 말이다. 왜냐하면 진정한 의미의 예언자라면 자신의 운명도 알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예언자는 자신의 운명의 끝을 알면서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저 냉혹하게 기록할 뿐이다. 예를 들어 이 소설들에서도 작가의 모습이 언뜻 비치는 때가 있다. 예를 들어 남편이 없이 농장을 경영하는 여주인들(<추방자>의 매킨타이어 부인, <그린 리프>의 메이 부인 등)에서는 아버지가 없이 어머니와 함께 남부의 농장에서 지냈던 작가와 어머니의 모습이 겹치고, 책을 읽고 글을 쓰는(혹은 글을 쓰려는) 인물들(<좋은 시골 사람들>의 조이/헐가, 혹은 <깊은 오한>의 애스버리, <파트리지 축제>에 나오는 캘룬이나 메리 엘리자베스)에서는 작가 생애의 어떤 부분과 겹치는 점이 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플래너리 오코너가 가장 잔혹하게 묘사하는 것은 바로 이들이다. 위에 제시한 편견으로 가득찬 좁은 세계를 가진 이들보다 작품 속에서 더 참혹한 결말을 맞이하는 것이 이 공명정대한 합리주의자들, 철학자들이다(도리어 좁은 세계를 가질 수밖에 없어 편견을 가지게 된 이들에게는 애정이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왜냐하면 이들의 합리성과 정의는 그것이 어떤 절대적인 무엇으로 떠받들어지는 순간 결국 편견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 무엇의 형태로밖에 남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이발사>의 레이버). 즉 플래너리 오코너의 소설은 이 소설을 읽는 자들(그러니까 바로 '소설'이라는 것을 읽는 자들)에 필시 깃들 수 있는 어떤 내면의 아이러니를 불길하게 잡아냄으로서 계속 우리 곁에 어떤 이물(異物)로서 남는다. 아니 그것을 자처한다. 그리고 동시에 작가 자신에게도 불길하고 냉혹한 예언으로 남는다. 

 

그러므로 소설을 다 읽고 덮은 후 운좋게도 어떤 찜찜함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면 우리는 그 찜찜함에 감사의 인사를 전해야 할지도 모른다. 대체로 우리는 찜찜한 이물감을 느꼈을 때 정상이라고 여겨졌던 자기 자신을 불길하게 다시 들여다보기 때문이다. 운이 좋다면 우리는 그 거울에서 낯선 누군가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당신은 운이 좋지 않기 때문에 낯선이를 알아보지 못하고 하던 일을 그대로 할 터이고, 일어날 일들이 일어날 것이며, 거울 속에서가 아니라 낯선이의 방문을 실제로 받고, 먼 곳의 전지적 관찰자인 예언자는 무심하게 그것을 기록하겠지만. 그것이 플래너리 오코너의 세계다.   

 

그녀는 그를 뉴욕 시에 묻었지만 그러고 났더니 밤에 잠을 잘 수 없었다. 밤마다 뒤척거리며 잠을 못 자니 얼굴에 주름이 깊어졌다. 그래서 결국 그를 파내서 시신을 코린스로 보냈다. 그러자 밤에 잠을 잘 수 있게 되었고 아름다운 용모도 돌아왔다. (p.739) - <심판의 날> (이 단편집의 마지막 소설의 마지막 문장)

    

  

덧.

 

1호선 지하철에서 이 소설의 중반부를 한참 읽고 있는데 갑자기 나타난, 멀리서부터 멸치향을 풍기던 '멸치의 신'의 등장은 어떤 의미에서는 정확히 플래너리 오코너 소설 세계의 실사판이었다. 그의 등장은 <당신이 지키는 것은 어쩌면 당신의 생명>의 시프틀릿 씨를 연상시켰으며, 퇴장은 그 소설의 어느 인물들보다도 쿨했다. 거기에는 모종의 진실이 있었으며, 이 등장과 퇴장을 보며 나는 이 지하철의 세계도 결국 편견으로 가득했던 1950년대 미국 남부의 농장과 그렇게 크게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다. 아니 우리는 이제 그보다 더한 편견의 시대를 살아가야 할 것 같다. 이 소설들은 결국 불길한 예언서들로 앞으로도 계속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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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5-02-17 0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멸치의 신이라는 것은 진짜 멸치 파는 사람이 아니고, 다른 것인 듯하군요 처음에는 멸치 파는 사람인가 했습니다 이 말을 가장 처음 하다니... 단편 31편 읽기 힘들겠습니다 그리고 그게 어느 한때 쓴 게 아니고 죽 쓴 것이니... 그런 걸 읽어본 적이 있던가, 생각해보니 없군요 어떤 느낌일지... 그것보다 작가를 생각하고 책을 읽어본 적이 거의 없어요 지금도 잘 못하고, 그 작가를 조금이라도 알면 조금 다르게 보이기도 할 텐데... 다르게보다는 작가한테 있었던 일일지도 모르겠구나, 하는 것만 알겠군요

나름의 체계를 가지고 굴러간다고 해도 그게 삶이라면 어느 순간 무엇이 찾아올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거의 모든 사람은 그것을 생각하지 않고 살고, 어느 날 그게 찾아왔을 때 아는 듯합니다(모를 때도 있을지도) 소설은 그런 것을 잘 보여주죠

어쩐지 이야기가 다 어두워보입니다 죽음이 꼭 어두운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얼마 살지 못할 것을 알면 살아가는 게 힘들지도, 반대로 그때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지만... 그건 겪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일이군요 신앙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을까요

맥거핀 님, 다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명절 즐겁게 보내세요


희선

맥거핀 2015-02-17 17:18   좋아요 0 | URL
어둡다, 밝다로 나눈다면 분명히 어두운 쪽의 이야기겠습니다만, 이 소설들은 독특한 지점이 있어요. 그러니까 이상하게도 그 마지막이 어떤 모종의 쾌감이랄까, 깨달음이랄까 같은 것을 주는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종교적인 차원에서 말하면 어떤 종교적 각성이랄까요.

플래너리 오코너는 자신이 불치병에 걸렸음을 알았고, 죽음이 그렇게 멀리 있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듯 싶습니다. 이 소설들에는 죽음에 대한 모티프, 그리고 그 동시에 어떤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무엇이 있어요. 그런데 사실 모든 인간은 죽잖아요. 우리의 죽음도 그 멀고 가까움의 차이는 있지만, 분명히 우리를 기다리고 있죠. 그런데 또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죽음이 아주 먼 곳에 있거나,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니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아무튼 위에 잠깐 썼지만, 플래너리 오코너의 소설 속 풍경은 우리의 삶과도 그다지 다르지 않은 것 같아요. 우리 시대에도 심한 차별과 위선이 얼마나 많이 존재하는지요. 예전의 시대보다 더 나아졌다고 감히 말하기가 어렵지 않나 생각합니다(인류는 발전하고 있는 것일까요?).

긴 연휴가 왔군요. 그리 반갑지만은 않은 연휴지만, 그래도 명절은 명절이니까.^^ 희선님 평안한 날들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새해 복도 많이 받으시구요.

2015-02-24 14: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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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권수연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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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책을 다 읽은 후, 오래도록 책표지를 들여다본다. 저멀리 우뚝 솟은 에펠탑이 보이는 파리의 거리 풍경. '거리'는 파트릭 모디아노에게 상당히 중요한 키워드인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그의 몇몇 작품들의 제목만 보아도 이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는데, 그의 대표작이라고 일컬어지는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그리고 첫소설 <에투알 광장>, 혹은 <잃어버린 거리>, <잃어버린 젊음의 카페에서>, <외곽 순환도로> 같은 작품들, 그리고 이 소설 <지평>. 소설 <지평>에는 수많은 파리 거리 및 지명들의 명칭이 나온다. 콜리제 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로, 오페라 광장, 오퇴유, 센 가, 라지빌 가, 팔레 루아얄, 포부르 생토노레, 라 페루즈 가, 베르시 공원, 개선문...과장을 조금 보태, 이 책의 어느 페이지만 펼쳐도 거리나 지명들이 등장한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그런데 이 수많은 거리나 지명이 이 소설에 등장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수많은 실재하는 거리들은 이 소설에 있어서 무엇일까.

  

먼저 시간의 측면. 이 소설은 하나의 커다란 회상이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얼마 전부터 보스망스는 젊었을 적의 일화들을 머릿속에 떠올렸다.(p.9)"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나간 이후에 이루어지는 회상은 늘 단속적이다. 회상은 대체로 하나의 이야기가 되기 전에, 늘 조각나있다. 모디아노의 말을 빌리자면 이렇다. "그리고 그는 그 깊은 암흑 속에서 희미하게 명멸하는 불빛들의 이름을 수첩에 하나하나 적어나갔다. 명멸하는 빛이 너무도 희미한 까닭에 그는 전체를 재구성할 수 있는 소재가 될 만한 작은 실마리들을 찾기 위해 두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해 보았지만 거기엔 별의 파편과 부스러기들뿐, 전체는 없었다.(p.10~11)" 이 작은 실마리들, 별의 파편과 부스러기들, 그것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면 '거리'이다. 보스망스는 먼저 거리와 장소를 떠올리고, 그 다음 그 곳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린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그 거리나 장소는 아직도 그곳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며, 보스망스는 길 이름과 건물 번지수를 잊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 예를 들어 보스망스가 기억 속에서 찾아 헤매는 마르가레트 르 코즈, 혹은 그와 연관된 메로베, 페른 부부, 스튜어트, 시몬 코르디에..그런 인물들은 지금 그 곳에 없을지라도, 그 공간은 아직 그 곳에 남아있다. 예를 들어 앙드레 푸트렐과 수상한 남녀들이 있던 블뢰 가 27번지 아파트에 이십 년이 흐른 뒤, 보스망스는 찾아간다. 비록 그 곳에는 앙드레 푸트렐은 이제 없지만, 어떤 기억이 남아있다. 스무 명의 남녀가 잡혀가던 어떤 기억이. 그러니까 거리는 시간에 있어서는 일종의 지표이다. 과거의 시간과 현재의 시간을 연결하는 작은 지표, 혹은 별의 파편과 부스러기.

 

공간의 측면에서 보면 거리는 이중적이다. 거리는 그들을 만나게 해준다. 장 보스망스와 마르가레트 르 코즈, 그들은 거리에서 만났다. 오페라 광장에서 시위대에 휩쓸려 그는 그녀에게 본의 아니게 상처를 입혔고, 그로 인해 그들의 관계가 처음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거리에서 기다리고, 거리에서 만나고, 거리를 걷고, 다시 거리에서 헤어진다. 그러나 거리는 만남이 시작되는 곳만은 아니다. 그것은 동시에 위험한 공간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거리에는 그들이 만나고 싶어하지 않은 무엇인가가 있다. 보스망스에게는 그것은 빨간머리에 매정한 눈빛을 가진 아프간 코트를 입은 여자와 환속한 신부 혹은 가짜 투우사 모양의 남자라는 한쌍, 즉 만나기만 하면 돈을 요구하는 그의 부모이며, 마르가레트에게는 그것은 그녀를 언젠가부터 맹목적으로 뒤쫓는 위험한 남자 부아야발이다. 즉 거리에는 그들이 결코 마주치고 싶지 않은 것, 마주쳐서는 안되는 것이 돌아다니거나 지키고 있다. 거리에 나오지 않으면 그들은 안전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마르가레트의 아파트는 "그 누구도 여기 있는 당신을 찾아낼 수 없(p.37)"는 공간이며, 보스망스의 부모는 이제 그의 집주소를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안전에는 무엇인가가 결여되어 있다. 왜냐하면 거리로 나오지 않으면 그들은 서로를 영원히 만날 수가 없으니까. 그러므로 그들은 안전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거리로 나온다. 부모가 출몰하는 센 가를 피해다니거나, 혹은 누군가가 나타날까봐 계속 뒤를 돌아보며 말이다. 

  

그런데 사실 그들을 위협하는 이 존재들은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 전체적으로 꿈 같은 회상이 이어지는 이야기지만, 소설이 이상하게도 더욱 꿈 속의 꿈처럼 느껴질 때는 그들을 위협하는 이러한 존재를 묘사할 때이다. 예를 들어 보스망스가 부모라고 부르는, 그러나 부모라고 느껴지지 않는 오십대 남녀 한 쌍. 그들은 보스망스의 앞에 불현듯 나타나, 그에게 한껏 경멸감을 표출한 후 그저 당당하게 돈을 요구한다. 그리고 돈을 받으면 그들은 떠난다. 혹은 마르가레트를 쫓아다니는 부아야발. 예를 들어 마르가레트가 바게리안의 도움을 받아 부아야발을 피하는 장면은 마치 비현실적인 풍경의 일부처럼 묘사된다. 부아야발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앞에 그저 버티고 서 있을 뿐이며, 그녀와 바게리안이 그를 떼어내고 건물 안으로 들어간 후에도 밤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마른 얼굴과 체격이지만 육중한 느낌을 주는 남자, 손가락 사이로 칼을 꽂는 유희를 즐기는 남자, 갑자기 증발하거나 갑자기 나타나는 남자, 과연 그는 실재하는 무엇일까.

  

아니 나는 이 소설의 이야기가 허술하다거나, 비현실적이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들의 존재는 실재하는 무엇이라기 보다는 마치 어떤 것의 은유처럼 느껴졌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다. 예를 들어 우리가 흔히 '기억'이라고 말하는 것. 보스망스의 부모는 그를 "마치 이 세상에 살고 있다는 사실에 수치심을 느끼게 해주려는 양(p.40)" 노려보고 경멸감을 표출하며 그에게 돈을 요구한다. 그리고 보스망스는 마치 무엇에 홀린 듯 어서 그들을 보내버리겠다는 마음으로 돈을 준다. 또는 위험한 남자 부아야발은 마르가레트에게 묻는다. "나한테 그런 말을 하고 부끄럽지도 않아?(p.128)" 이 경멸, 혹은 부끄러움이나 수치심의 요구. 때로 기억은 수치심이나 부끄러움을 요구한다. 그것은 보스망스의 부모나 부아야발처럼 갑자기 찾아온다. 우리가 그것에 맞서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을 애써 피하는 것 뿐이다. 그러나 기억은 끈질기게 우리를 재방문하며, 계속 무엇인가, 우리가 줄 수 없는 무엇인가를 요구한다. 그것은 과거로부터 왔다. 부끄러운 무엇인가로부터 왔다. (너무 나아가는 것일지 모르지만, 이 소설의 배경이 1960년대 중반의 파리라는 점을 생각해 볼 때, 그 과거(예를 들어 그의 부모)는 독일에 점령당했던 파리를 말한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독일에서 태어난 마르가레트에게 독일인이냐고 묻는 그 질문의 무심한 긴장, 혹은 보스망스가 길을 걷다가 순간순간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 무엇이 미안해? 응? 살아 있다는 것이? 같은 것과 연관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부끄러운 과거라는 기억을 언제까지나 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결국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그것은 어떻게든 당신을 찾아내니까. 그리고 동시에 기억에는 부끄러운 무엇인가만 있는 것은 아니다. 기억에는 부모라고 부르는 남녀 한쌍도 있지만, 마르가레트 르 코즈도 있으니까. 다시 말해서 기억은 일종의 거리와 같다. 위험하지만 그곳에 나가야만 누군가를 만날 수 있었던 거리처럼, 기억에도 우리를 부끄럽게 만드는 무엇인가가 있지만, 그 기억의 거리에 어떻게든 나가야만 한다. 안전한 기억의 골방에만 갇혀 있으면 우리는 아무도 만날 수 없으니까. 즉 부끄러운 무엇인가를 대면해야만 그것을 넘어서 나아갈 수 있다. 예를 들어 그것은 보스망스가 부아야발을 찾아 그와 대면하는 것과 같다. 인터넷의 바다를 뒤져 만나게 된 부아야발. 그는 이제 더 이상 기억 속에 존재하는 위협적인 남자 부아야발이 아니다. 그저 늙고 잿빛 눈을 가진 부동산업자일 뿐이다. 기억 속의 부아야발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못하고, 그를 혹은 그의 기억 안에 있는 그녀를 다시 찾아오지 못한다. 그것은 이제 허물어진다.

  

무엇인가를 그렇게 재건하기 위해서는 먼저 대면하여 허물어야만 한다. 보스망스는 작은 별의 파편과 부스러기들만이 반짝거리는 기억의 골방에서 거리로 나와 기억들을 기꺼이 대면했고, 그것을 하나하나 허물 수 있었다. 이제 그는 보이지 않는 벽을 통과해 그녀에게로 간다. 모든 것이 재건된 도시 베를린에 이제 그녀가 있다. 거리는 재건되었고, 이제 기억도 재건된다. 새 지평에.

  

그는 그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는 바깥으로 나와서 얼마간 그 건물 앞에 머물렀다. 햇빛이 따사로웠다. 거리는 고요했다. 순간, 그런 확신이 들었다. 움직이지 않고 인도에 가만히 서 있기만 하면 보이지 않는 벽을 서서히 통과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그래도 자리는 여전히 같은 자리다. 거리가 더 고요해지고 볕이 더 잘 들었을 수는 있겠다. 한 번 일어난 일은 무한히 반복된다. 저쪽 길 끝에서 마르가레트가 꼬맹이 페터- 그녀가 즐겨 말하던 대로 그 녀석 -의 을 잡고 32번지와 그를 향해 걸어올지도 모른다. (p.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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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5-02-09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님, 안녕. 오후 네 시 사십 분에 간식을 먹나요? ... 리뷰 이제부터 읽을거지만 추천! 읽기도 전부터 좋을 것 같거든요. 지평 리뷰는 처음인데.. 좋나요?

맥거핀 2015-02-10 16:21   좋아요 0 | URL
읽으면서 독특한 느낌이 들었어요. 모디아노의 다른 책들을 더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은 오후 4시 20분이네요. 생강차 같은 걸 갑자기 먹고 싶네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이리시스 2015-02-11 0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교다닐땐가 여튼 어두운상점들의거리 예전에 한번 읽었는데 kbs책프로에서 노벨상발표나고 모디아노 다룰때 함정임샘 나온거 보면서 예전에도 김화영샘을 소개해줘서 읽었지하면서 다시 읽는데 주제의식이, 모호한 문체와 줄거리에 비해 너무 명확해서 토나올것 같았어요. 도서관 신간코너에서 몇번이나 모디아노 신간을 마주해도 선뜻 손이 안 가요. 독특하죠, 막막하고. 파리는 헤매기 딱 좋은 거리인가봐요.
[새벽 1시 2분, 쌍화차는 안 마시고 싶나요?]

맥거핀 2015-02-13 18:47   좋아요 0 | URL
저는 누군가의 꿈을 헤집어 보는 느낌이 들었어요. 어떤 것이 기억이고, 어떤 것이 실제이고, 또 어떤 것이 꿈인지 알 수 없는 그런 이야기 말이죠. 물론 어쩌면 그것이 `기억`이라는 것의 진실에 더욱 가까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예를 들어 내 기억 속에도 예전에는 실제 겪었던 일과 내가 만들어낸 기억 사이의 어떤 구분이 있었는데, 그 구분은 점점 옅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제는 잘 모르겠어요. 그 모든 것이 그저 제 기억의 일부분이 되어가고 있는 느낌입니다.

새벽 1시는 차를 마시기 좋은 시간이죠. 저는 커피를 마시면 심각하게 잠을 못자서 커피를 먹어서는 안되는 시간이기는 하지만.

희선 2015-02-11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작가와 여기 나오는 사람도 좋아하는 사람은 소설에 나온 거리에도 가 보고 싶겠습니다 공간은 남아 있다 해도 오래전과 아주 많이 달라졌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렇다 해도 그곳에 가면 옛날 일이 떠오르겠죠

아니 기억속 그곳은 그대로겠습니다

기억도 다시 만들어갈 수 있을까요 그냥 잊어버리는 것보다 싫어도 떠올리고 다시 생각해보는 것도 괜찮겠네요 그렇게 해서 그때보다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면... 잘 갔겠죠


희선

맥거핀 2015-02-13 18:52   좋아요 0 | URL
그래서 어떤 곳은 가기가 싫어요. 그 근처에만 가도 어떤 떠오르는 기억들이 있어서 되도록 피하죠. 반면 어떤 기억 때문에 다시 가보고 싶은 곳도 있기는 한데, 저는 잘 그러지를 못해요. 왠지 그 곳이 없어져서, 그 없어진 것이 제 기억도 무너뜨리게 될 것 같아요. 보스망스가 아무래도 저보다는 용감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글쎄요. 어떤 기억을 영원히 잊어버리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새로운 기억을 그것에 덮어씌움으로써 어디 한 구석으로 그 기억을 밀어버리는 것은 가능하다고 봅니다. 조금 다른 얘기겠지만, 예를 들어 컴퓨터로 (일반적으로) 파일을 지워도 실제로 지워지는 것은 아니라고 하잖아요. 단지 그 파일의 위치를 찾지 못하게 하고, 그 위에 새 파일을 덮어 씌우는 거죠. 우리도 그런 식으로(사실은 컴퓨터가 인간을 모방하여 만들어진 것이므로 그 반대겠지만) 기억을 덮어씌우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