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막 알라딘 부천점에서 찍은 사진.
누군가가 방금 팔고 간 오체불만족.
행동하는 알라디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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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16-03-25 1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분 오체만족의 삶이라고 누가 댓달았길래 엄청 웃었습니다만 ㅎㅎㅎ

책한엄마 2016-03-25 18:10   좋아요 0 | URL
오체 full만족이었다고 하더군요.ㅎ

맥거핀 2016-03-25 19:03   좋아요 2 | URL
며칠 사이에 아주 기상천외한 드립들이 난무하더군요. ㅎ 그 중에 몇 개는 그분의 장애와 연결지은거라 보기에 썩 좋지는 않았지만...

기억의집 2016-03-25 19:10   좋아요 0 | URL
저도 어제 오체대만족이라고 쓴 댓글보고 한참 웃었어요. 동시에 사람 참 바보 만들기 쉽구나 하는 생각도..

cyrus 2016-03-25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마를 부탁해>가 심심해하지 않겠어요. ㅎㅎㅎ

맥거핀 2016-03-25 19:05   좋아요 0 | URL
아마 곧 알라딘 중고서점에도 이책들이 꽤 늘어나지 않겠습니까..나중에는 안받아줄지도...근데 지금 중고서점에서 이 책을 과연 사실 분이 있을지..

기억의집 2016-03-25 1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런 자기계발서책은 예나 지금이나 별로여서....

맥거핀 2016-03-26 01:07   좋아요 0 | URL
저도 이 책 본 적이 없어요. 그래도 이 사건이 있기 전에는 나름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akardo 2016-03-25 1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핫. 저는 애초에 저 책은 사지도 읽지도 않았으니 이 사태가 참으로 흥미로울 뿐입니다. 산 분들은 속이 좀 쓰리실 듯.

맥거핀 2016-03-26 01:22   좋아요 1 | URL
반갑습니다, akardo님. 근데 책을 쓸 때의 또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는지 100% 알 수 없으니까요. 그 책으로 인해 읽은 누군가가 좋은 영향을 당시에 받았다면 그것은 그렇게 모든 것이 나쁘다고 할 수 만은 없겠죠.^^ 아무튼 대체로 책을 읽으신 분들은 꺼림칙만 면이 더 있으실 듯 합니다.

희선 2016-03-26 0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무슨 일인가 했습니다 뭔가 사기를 쳤나 하는, 팔 다리가 없는 걸 본 적 있으니 그건 아닌가보다 했어요 무슨 일이 있는지 잘 몰랐군요 안다고 해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찾아봤어요 무슨 일인지... 왜 그랬을까 싶네요 사람이 잘 되다보면 뭔가 잃어버리는지도 모르겠어요(어떻게 살았는지 자세한 건 모르지만) 잊어버린다고 해야 할지... 결혼도 하고 아이도 있던데 그러다니, 지금까지 좋게 생각한 사람은 배신당한 느낌이 들겠습니다 예전에 책 한권 보고 대단하구나 했는데... 그때는 그게 진짜였을 텐데, 그것까지 안 좋게 되었네요 사람은 잘못된 길로 가지 않기 위해 늘 애써야 하죠 누구나 그렇게 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렇지 않을까요


희선

맥거핀 2016-03-26 01:23   좋아요 1 | URL
아무튼 사람이라는 것은 (정말 이번 사건만 보아도), 알 수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합니다. 장애와 연관짓는 사람들도 있지만, 저는 장애와는 또 별개로 보고 싶습니다. 장애가 면죄부가 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그가 쌓아온 모든 일들이 또 이번 일들로 다 폄하되는 것도 그렇게 옳지는 않은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물론 그가 이번에 저지른 일은 분명히 나쁜 일이지만요. 말씀하신대로 사람이 잘못된 길로 가지 않기 위애 애쓰는 것,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저도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도 한편으로는 우리 모두들처럼 어떤 면에서는 나약한 인간이었던 게지요.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발간하는 <영화천국> 3/4월호에 '영화여행을 시작하는 시네필을 위한 안내서'라는 제목으로 정성일 평론가가 쓴 몇 편의 글이 실렸다. 100편의 영화, 영화사(史)의 순간들, <영화에 대하여 알고 싶은 두세 가지 것들>의 저자 구회영(김홍준 감독의 필명)과의 대담 등등 흥미로운 글들이 많은데, 그중 '10권의 책'에 대한 글이 있어, 나중에라도 찾아보기 쉽게 여기에 목록과 소개의 일부를 옮겨둔다. 모두 한글로 출판된 책이다. 개중에는 절판된 책도 있지만, 중고서점에서라도 찾아볼 수는 있겠지.

 

먼저 이 책들은 '바로 시작하면 좋은 책'으로 추천한 책들이다.

 

 

트뤼포, 앙투안 드 베크 & 세르주 투비아나, 을유문화사

카페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며 마치 소설처럼 읽기에 딱 좋은 수준의 독서라고.

 

 

STORY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 로버트 맥키, 민음인

영화는 결국 이야기라는 것을 생각할 것.

 

 

쇼트, 엠마뉴엘 시에티,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시점, 조엘 마니,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몽타주, 뱅상 피넬,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카이에 뒤 시네마>에서 출간된 일종의 가이드 형식의 책들. 가방에 넣고 들고 다니기에 부담없는 책들이다.

 


위대한 영화, 로저 에버트, 을유문화사

화장실에 꽂아두고 하루에 세 번(혹은 좀 더 자주) 틈틈이 그저 손 가는 대로 제목이 잡히는 대로 두서없이 읽으라고. (아..근데 큰 일을 하루에 세번이나 보지는...이라는 쓸데없이 더러운 첨언.)

 













세계영화사, 데이비드 보드웰 & 크리스틴 톰슨, 시각과 언어

마음의 준비를 하고 책상에 앉아서 볼 책. 그러나 여기에 두 가지의 난점이 있는데, 하나는 이 책이 3권으로 분절되어 있고, 게다가 절판이라는 점...그렇다면?

 

 

세계 영화 대사전, 제프리 노웰 스미스 책임 편집, 미메시스

위의 책의 대안. 정성일의 충고. 시험 준비를 하는 게 아니라면 절대로 처음부터 읽지 말 것. 당신이 관심 있는 영화들의 시대를 중심으로 읽을 것. 

 

 

세속적 영화, 세속적 비평, 허문영, 강

일기를 쓰는 기분으로 당신이 본 영화에 대한 비평을 써보라. 할 수만 있다면 그 글을 길게, 그 영화에 대한 생각을 밀고가면서 당신이 할 수 있는 끝까지 가보는 경험을 해보라고 정성일은 충고한다. 이 책은 일기처럼 쓰여진 영화비평이라고...(그러나 '나'는 이 글이 일기처럼..이라는 데에는 그다지 동의를 하기가..)

 

 

필름메이커의 눈, 구스타보 메르카도, 비즈앤비즈

영화를 만들어보는 것도 일종의 다른 방법의 독서. 이 책은 거기에 매뉴얼 같은 역할을 할 것.

 

 

그리고 아래의 책들은 '지금은 독서를 말리고 싶은 책'. 물론 여기에서 방점은 '지금은'에 있다.

 

 

 

시네마 1 : 운동-이미지, 질 들뢰즈, 시각과 언어

시네마 2 : 시간-이미지, 질 들뢰즈, 시각과 언어

"당신이 철학 프로그램에 훈련되어 있다 할지라도 이 책에 등장하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제목과 영화감독 이름에 질릴 것이다. 반대로 시네필들은 첫 장부터 베르그송에 관한 긴 주석으로 진이 빠질 것이다." 두 권의 책의 번역 차이가 너무 크다는 것도 이유라고.

그러니까 먼저,

 

 

로널드 보그의 <들뢰즈와 시네마>(동문선)를 읽을 것.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발터 벤야민, 길

"브레히트로부터 받은 영향과 나치 시대의 파시즘 영향들을 바라보면서 영화와 대중 관객의 역할을 '기대하는' 미래의 영화를 위한 '서설(序說)'"이나 그 전에 좋은 안내자를 만나 먼저 설명을 들을 것.

 

 

 

삐딱하게 보기, 슬라보예 지젝, 시각과 언어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 : 할리우드의 정신분석, 슬라보예 지젝, 한나래

진짜 눈물의 공포, 슬라보예 지젝, 울력

"이 책들은 영화책인 척 하면서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의 용어를 해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먼저,

 

 

브루스 핑크의 <라캉의 주체>(비, 도서출판b)를 먼저 읽으라고. 자신(정성일)이 알고 있는 한 가장 쉽고 명료하게 소개하고 있다고.

 

 

영화의 맨살, 하스미 시게히코, 이모션북스

"이 책은 몹시 위험하면서도 유혹적인 무시무시한 책"이며 "읽고 나면 괴상하게도 하스미 코스프레를 하고 싶어지"나 "그건 하스미 '센세이(先生)'의 견해이지 당신의 생각이 아니"라고. 하하.

 

 

덧.

물론, '읽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보는 것일 테다. 어제 조금 지나간 영화, 오승욱의 <무뢰한>을 보았다. <무뢰한>은 몇 가지 것들(예를 들어 어떤 허세들 같은 것, 혹은 불친절한 생략들)을 견뎌낸다면, 상당히 흥미로운 구석이 많은 영화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이 순진무구해 보이는 남자감독이 만들어내는 여성 캐릭터' 김혜경(전도연)인데, 영화 속에서 끝내 바닥에 이르르는, 그래서 그 바닥으로 내려보내지는 것이 너무 잔인한 것처럼 느껴지는 이 여성캐릭터가 영화가 끝난 후 가장 기억에 오래 남는다는 사실이다. 사실 영화의 중심축은 정재곤(김남길)에게 끝까지 머물러 있는데도. 어스름에서 시작해서 어스름으로 끝나는 영화. 그러나 전혀 다른 두 개의 어스름이 있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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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12 01: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3-14 19: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3-12 22: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3-14 19: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3-15 23: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3-17 14: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nell-yuran 2018-02-06 0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뢰한 정말 좋은 영화죠!

맥거핀 2018-02-19 15:23   좋아요 0 | URL
아직도 마지막 그 김남길의 쓴웃음이 생각나요.
 
[그들]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그들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김승욱 옮김 / 은행나무 / 2015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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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가끔 그런 이야기들이 있다. 이야기의 의미나 교훈을 찾아내는 것을 포기하고, 그저 인물들의 삶을 따라 읽게 되는 이야기. 더 읽어내려가는 것이 고통스럽고 힘들지만, 그들의 삶을 누군가가 지켜봐주어야 할 것 같은 이야기. 사실과 환상, 실재와 가상, 나의 생각과 주인공의 생각이 얽혀들어가, 어느 것이 어느 것인지, 점점 분간하기 어려운, 종내에 이르러서는 그것을 굳이 구분하는 것이 별 의미가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이야기. 거짓이길 바라는 이야기가 실제이고, 실제이기를 바라는 이야기가 거짓인 이야기. 고통스러우면서도 읽어내려갈 수밖에 없는 독서. 나에게는 조이스 캐롤 오츠의 <그들>이 그랬던 것 같다. 

 

<그들>에게는 두 가지의 장치가 있다. 하나는 이 소설이 로레타라는 소녀의 어린 시절부터 그녀가 낳은 줄스, 모린, 베티 등이 성인이 되던 시기까지를 종(縱)으로 훑고 있는 소설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이 소설은 결코 한 가지의 사건이 중심이라고 말할 수 없다. 어떤 특정한 하나의 사건을 횡으로 펼쳐내, 그 사건이 중심이 되어서 이야기가 펼쳐지는 구조가 아니라, 이들의 삶을, 이들이 그려내는 삶의 궤적을 계속 지치지 않고 꾸준히 따라가는, 어떻게보면 사회학에서 다루는 종적 연구의 한 형태라고 볼 수도 있다(책 날개의 작가 소개에 이런 대목이 있다. "오츠는 생생한 심리 묘사와 사회 분석을 융합한 일련의 소설들을 통해 미국 사람들과 미국의 제도를 계속 탐구했다." 개인적으로는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다큐로도 제작되었던, 사당동의 한 빈민가족을 25년간 추적해 한국 사회 빈곤의 종적 영속성을 살펴보게 했던 사회학자 조은의 연구 <사당동 더하기 25>를 떠올렸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이 소설에서 로레타나 줄스, 모린 등등의 인물에 대한 특정적인 묘사 못지 않게 중요해지는 것은 이 소설이 다루고 있는 배경과 시기이다. 이 경우 어떤 의미에서는 로레타, 줄스, 모린 등의 인물은 특정의 '누구'라기 보다는 그 시대의 영향을 받은 인물상들의 어떤 특징들이 혼합된 '누구'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 소설 뒤 작가 발문의 한 대목 "세월이 흐르면서 나는 <그들>의 등장인물들이 내 소설에 나오는 대부분의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나와 다른 사람을 합친 '혼합물'이라고 간단히 대답하게 되었다. 이번에도 그렇다." p.716)

 

그렇다면 소설에서 다루고 있는 시기는 어떤 시대인가. 소설은 사랑에 빠졌던 소녀, 로레타가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일에 휘말려 얼떨결에 원치도 않은 상대와 결혼을 하던 1937년 8월의 어느날에서 베트남전과 반전운동, 인종차별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폭동이 벌어지던 1967년의 디트로이트까지를 다루고 있다. (디트로이트 흑인 폭동은 1967년 7월 23일에 발생하였으며, 당시 사상 최대 규모의 흑인 폭동이었다. 검색하다가 알게 된 사실인데, 이 사건이 <허트 로커>를 만들었던 캐서린 비글로우에 의해 영화화되어 2017년에 개봉될 예정이라니, 이 책을 읽으신 분은 나중에 한 번쯤 챙겨보셔도...) 1937년에는 1929년의 대공황에서 벗어나 성장하던 경제가 다시 침체에 들어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것은 일시적이었고, 이후 제2차 세계대전 참전으로 미국 경제는 다시 급격하게 성장의 길에 들어서며, 이후 1960년대까지 미국 경제는 급격하게 발전하게 된다. 그러나 성장이 낳은 부작용들은 많았다. 빈부격차는 엄청난 속도로 가속화되었으며, 전후 매카시즘, 인종문제 등으로 사회의식 면에서는 성장의 속도가 더뎠다. 도시빈민은 급증하였으며, 도시의 슬럼화된 곳은 점점 늘어났으며, 낮은 의식수준 및 환경과 교육의 영향으로 빈곤의 대물림은 이어졌다.

 

로레타와 그녀의 아들 줄스, 딸 모린이 살던 1950년대의 디트로이트가 그런 곳이었다. 자동차 산업 등으로 도시의 일부는 발달했지만, 빈부격차가 심했고, 로레타 가족이 살던 곳과 같은 슬럼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로레타 가족은 이른바 중간계층이었다. 도시빈민, 백인 하층민 계급. 그들 위에는 안정된 직장과 직업을 가진 백인 상층민들이 있었고, 그들의 아래에는(더 정확히 말하면 '그들이 아래라고 생각하는') 그들이 상대하기를 꺼리고, 무시하는 흑인들이 있었다. 소설에서 그들 도시빈민 백인들과 흑인들의 관계는 정확히 묘사되지는 않지만(주로 '그들', 그러니까 로레타나 모린이나 줄스는 흑인들을 피한다. 아니 피한다기 보다는 그들에게는 이들 흑인들은 고려할 필요가 없는 대상이나 마찬가지인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그 '위'를 쳐다보기도 바빴으니까.), 반면 백인 상층민들과의 관계는 여러 관계를 통해 흥미롭게 보여진다. 예를 들어 줄스가 네이든, 혹은 페이와 버나드(이들은 발전하는, 사실 미쳐 돌아가는 미국 경제를 상징해서 보여주는 인물이라고 할 수도 있다.)와 같은 인물들을 만나서 벌이는 일들, 혹은 모린과 유부남 짐의 관계를 통해서 보면 꽤 재미있는 점들이 있다.

 

(사실 조이스 캐롤 오츠의 심리묘사는 너무나도 집요하고 다층적이기 때문에 이렇게 한 가지로 뭉뚱그려도 되나 싶지만) 나는 그것을 어떤 '양가(兩價)적 감정'이라고 말하고 싶은데, 줄스나 모린이 상층민 백인들에게 의도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접근할 때 보면 그들의 감정은 극도로 양가적이다. 그들은 상층민들을, 상층민들의 삶을 너무나도 동경하고 바라지만, 동시에 그들에게 가까이 가는 것을 너무나도 두려워한다. 그들은 상층민들의 삶을 너무나도 열망하지만, 그것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파멸에 가까워진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감지한다(반면 이들의 반대편에서 안주의 양상을 보이는 것은 로레타이다). 어쩌면 그것은 그들 사이의 경계가 너무 뚜렷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인데(조이스 캐롤 오츠가 이들을 대비하여 묘사하는 방식은 특징적인데, 줄스나 모린이 특히 이들이 사는 집을 겉에서 바라보는 장면들이 대표적이다.), 예를 들어 유리 상자안의 너무나도 가지고 싶은 보석을 바라보며 그것을 열망하지만, 그것을 억지로 열려고 하면 유리가 깨지고 말 것이라는 점을, 그리고 그 이후 어떤 일이 벌어질지 감당할 자신이 없는 자신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고 할까. 흥미로운 것은 이것이 반대편에서도, 그러니까 상층민 백인들에게서도 비슷한 양상으로 동일하게 나타난다는 점이다. 네이든이 줄스에게 대하는 태도, 혹은 짐이 모린에게 대하는 태도를 보면 비슷한 것을 찾아볼 수 있는데(특히 짐이 모린에게 접근하는 장면에 대한 묘사가 압권인데, 흥미롭게도 이 장면은 로레타, 줄스, 모린 이외의 인물로 시점이 이동하는 거의 유일한 장면이기도 하다.), 이들은 어떤 허위로 가득한 자신의 삶을 인식하고, 어떤 모험과 매력이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그들의 접근을 열망하지만, 동시에 그들의 접근, 그리고 그들과 삶이 연결되어 추락하는 것을 너무나도 두려워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는 동시에 로레타, 줄스, 모린 등의 서로서로에게서 비슷하지만 약간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것 또한 양가적 양상을 띤다. 그들은 가족으로서 기꺼이 서로를 사랑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기꺼이 서로를 증오한다. 어쩌면 그들은 서로에게서 결코 보고 싶지 않은 자신의 망가진 모습을 보지만, 동시에 그것이 어쩔 수 없이 버릴 수가 없는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기에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닐까.   

 

그녀(모린)는 앉는다. 그리고 거칠게 고개를 돌려 차창 밖을 바라본다. 자신의 다른 자아가 인도에 서 있는 곳을. 사람들이 지나간다. 사람들, 낯선 사람들이 그녀의 주위에서 갈라져 그녀를 건드리지 않고 지나가는 것 같다.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지만 그녀 자신은, 그러니까 그 다른 자아는 점점 생생하고 눈부시게 변해서 인도에 서 있다. 그녀가 고개를 고통스러운 각도로 돌려서 버스에 타고 있는 모린을 바라본다. 죄책감과 야성이 뒤섞인 얼굴이다. (p.300)

 

이 죄책감과 야성. 그렇게 그들은 그 사이에 끼어있다. 죄책감과 야성, 혹은 열망과 두려움, 상승의 열망과 추락에 대한 공포, 혹은 백인 상층민들과 흑인들 사이에서. 이와 관련하여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줄스와 모린이 이 추락의 공포를 안은 불안한 상승, 혹은 불안한 상승 비슷한 것을 조금이라도 만들어내는 것은 마지막 디트로이트의 대규모 흑인 폭동(소설에서도 묘사되었지만 그것은 단지 '흑인' 폭동이라고만 말할 수는 없었다.)과 맞물려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상층부의 백인들과 흑인들 사이에 '끼어'있었지만, 폭동으로 상징되는 흑인들과의 경계선이 더 뚜렷해지면서 상층부의 백인 사회로 진입할 실마리가 가느다랗게 생겨났다. 절도와 폭행, 포주, 심지어 살인까지 행한 줄스는 모트, 그러니까 빈곤 퇴치 행동 연합 회장이자 사회학과 조교수 피어시 박사와의 관계가 어느 틈에 만들어졌고, 모린은 야간대학에서 오츠의 수업(결국 <그들>이라는 이 소설은 모린이 '조이스 캐롤 오츠'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서 구성되었다. 여기에는 트릭이 있지만...)을 듣다가 짐까지 만났다. 로레타가 상층부의 삶을 비슷하게나마 짧게 '체험'하는 것도 이 때였다. 

  

사회학과 조교수 피어시 박사, 혹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작가의 분신 '조이스 캐롤 오츠'.(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소설은 어떤 사회학의 종적 연구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줄스와 모린을 상층부로 연결시켜 준 가느다란 끈. 여기에 이 소설의 흥미로운 두 번째 장치가 있다. (처음 장치에 대해 너무 길게 이야기했으니 길게 이야기할 필요도 없을 것이고 물론 길게 얘기할 능력도 못되니 짧게 마무리짓겠다. 헤르메스님이 이 부분에 대해서 중점적으로 다루신다고 예고하셨으니 그 글을 읽으시는 게...) 다시 말해서,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이 작가 본인의 직접적인 개입, 혹은 모린의 독백. 조이스 캐롤 오츠는 소설 앞에 붙은 '작가의 말'을 통해 이야기한다. 이 이야기는 소설처럼 구성한 역사 기록이며, 거의 대부분을 실제 '모린'의 기억을 바탕으로 삼았다고. 실제 소설 중간에는 모린이 작가, 그러니까 자신에게 야간대학에서 글쓰기를 가르쳤던 '조이스 캐롤 오츠'에게 보내는 편지도 두 편 삽입되어 있다. 이것을 어떻게 이야기하면 좋을까.

 

모린은 편지에서 말한다. "저는 선생님이 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저의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시 외곽의 집에서 사는 저. 농장 주택 또는 식민지 양식의 주택인 이 집의 뒤편에는 울타리가 있고, 부엌에서 일하는 여자는 아마 바지를 입고 있을 겁니다. 아기는 아기 방의 요람에 있고, 창문에는 하얗고 얇은 커튼이 걸려 있습니다. 남편과 제가 함께 쓰는 침실, 거실 창문으로는 잔디밭과 길과 길 건너편의 집이 보입니다. 제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이런 삶을 아프도록 갈망합니다! 제 눈이 아프도록 갈망합니다.(p.462)" 모린은 아니라고 애써 부인하지만, 어쩌면 '이런 삶'은 '조이스 캐롤 오츠'의 삶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모린은 동시에 말한다. "하지만 그렇습니다. 저는 선생님을 미워합니다. 오로지 선생님만을. 심지어 그 남자들도, 펄롱도 미워하지 않습니다. 저는 선생님을 미워하고, 그것만이 제게 유일한 확신입니다. 결혼하고 싶은 남자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선생님에 대한 미움이. 선생님에 대한 미움, 책이 있고 말을 잘하고 결코 일어나지 않았던 일들을 완벽한 형태로 아주 많이 알고 있고, 남편이 차로 학교까지 데려다주고, 심지어 요즘은 가끔 신문에 사진까지 실리는 선생님, 지식을 지닌 선생님. 저는 이미 한평생을 살고 저 자신을 탈탈 뒤집었는데도 아무것도, 그 무엇도 얻지 못했는데 말입니다.(p.469)"

 

이에는 앞에서 말한 양가적 감정이 물론 들어있다. 그것을 다시 확인시켜주는 것이라면 별로 특이할 것은 없다. 그러나 한 가지 질문. 왜 이것이 편지의 형태로, 그러니까 모린의 기억을 바꾼 소설의 형태가 아니라, 작가에게 보내는 직접적인 편지의 형태로 여기에 위치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어쩌면 이 편지를 받는 작가의 위치에 이것을 읽는 독자를 바꿔서 위치시키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편안한 방에서, "책이 있고 말을 잘하고 결코 일어나지 않었던 일들을 완벽한 형태로 아주 많이 알고 있"는 이 책 <그들>을 읽고 있는 당신이 이 그들의 삶을 읽는 것. 이것의 의미를 여기에서 묻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혹은 존슨 대통령이나 롬니 주지사(오바마랑 붙었던 그 '롬니'의 아버지다)나, 로버트 케네디나, 마틴 루터 킹이나 모두 다 죽여야 한다고 외치는, 그러나 안전한 곳에 위치한, 그랬기 때문에 그런 소리를 지껄일 수 있는 사회학과 조교수 피어시, 혹은 모트, 아니 당신의 위치를 여기에 겹쳐내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러나 또 여기서 다시 질문. 그런데 이것이 작가가 모두 만들어낸 트릭이라면 어떨까. 사실 '모린'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으며, 결국 이 모린의 편지도 작가가 쓴 소설의 일부라면 어떨까. 그래서 나는 이 편지에 고개를 끄덕거리면서도 여기에 희미한 의심을 보낸다. 이것 또한 어떠한 의미에서는 작가의 견고한 방어막처럼 느껴졌으니 말이다. 편안한 방에서 이 책을 읽고 있는 자신을 돌이켜 생각해보는 자신을 보고 있는 흐뭇한 이 또다른 자신. 그 '자신'이라는 존재가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있는 견고한 방어막 말이다. 이 편지들은 어쩌면 그 견고한 방어막의 일부로서 다시 기능을 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어느 책 속 어느 곳에도 사실 진정한 '리얼'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아닐까(물론 영화에 대해서도). 작가가 만들어낸 방어막 뒤에 안전하게 숨어서 <그들>이라는 책을, 이 긴 꿈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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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6-03-09 0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러저러한 일들과 별개로)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다음부터는 더 빨리 읽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ㅠㅠ

2016-03-12 01: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3-15 00: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이리시스 2016-03-14 0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맥거핀님이 언제 리뷰썼지?222

맥거핀 2016-03-14 19:57   좋아요 0 | URL
리뷰 더 빨리 써야하는데, 너무 늦어서 몰래 올린 겁니다. ㅎ

아이리시스 2016-03-15 11:41   좋아요 0 | URL
몰래.. 이렇게 잘쓴 걸 왜 몰래.. 근데 왜 맥거핀님글 계속 놓치지..(운다)
 
소설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아침에 조선일보 기사를 잠깐 봤다. 평소같으면 지나칠 신문이지만, 책에 관계된 기사라 잠깐 눈길이 갔다. '한국인의 모순... "책도 안 읽으면서 노벨 문학상 원해"' (제목부터가 조선일보스럽다.) 지하철에서 인쇄매체를 들고 있는 사람이 (토익책, 전공서적, 신문 등등 합쳐서) 수백명 중에 12명 뿐이라는 이야기(왜곡과 과장이 심한 조선일보지만, 내 경험상 딱히 부인하기도 힘들다), 그리고 성인의 연간독서율은 점점 떨어지고 있다는 이야기. 

 

뭐 멀리 갈 것도 없이, 나만 해도 독서율이 점점 떨어지는 것 같다. 특히 요즘에 들어서는 책이 잘 읽히지가 않는다. 어디를 이동해야 할 일이 있을 때는 책 한 권이라도 가방에 들어있어야 안심이 되는 편이지만, 요즘에 들어서는 그 안심을 직접 꺼내 확인해보는 일이 드물다. 대신 반쯤 홀린 듯한 눈으로 멍하게 스마트폰을 꺼내, 새로나온 기사가 없는지 뒤적거리고 있다. 스마트폰에서는 계속 놀랄만한 이야기들이,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오니까. 예를 들어 2월 17일자 중앙일보 뉴스 '박 대통령 "모두 물에 빠뜨려놓고 꼭 살려내야할 규제만 살리도록 전면 재검토"' (오마이갓. 만약 9.11후 미대통령이 "건물을 무너뜨려" 어쩌구 하는 발언을 했으면 미국에서는 어땠을까. 아무래도 그분은 생각보다 교묘한 것 같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얘긴데, 이 정부의 기본 전략은 아무래도 '쓰레기에다 더 큰 쓰레기를 끼얹어 예전 쓰레기를 잊게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니까, 어쩌면 나는 거기 낚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몰아닥치는 쓰레기들에 정신이 팔려 가방 속의 안심을, 혹은 의식을 잃어가는 중은 아닐까.

 

 

책이 잘 읽히지가 않는다. 그런 와중에서도 책에 대한 욕심은 줄지 않아서, 쌓아놓은 책들의 탑은 점점 높아만가고, 도무지 낮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 서평단 도서를 두 권 또 추가하는 것이 잘하는 짓일까.) 다만, 가까운 세계에 조금 더 발을 디디고 있는 이야기들을 보고 싶다. 어딘가 붕 떠 있는 듯한 이야기들은 거기에 미끄러져 들어가는 데, 혹은 다시 빠져나오는 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카인>과 <그들>이 그랬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또 너무 가까운 세계에 깊숙이 들어가 있는 인문학이나 사회과학 쪽의 책들은 영 당기지가 않으니...나는 또 여전히 그 사이에서 어중간하게 미적미적거리고 있나보다. 의식을 잃어가면서, 현실에서와 마찬가지로. (정신을 차려야지, 정신을!)

 

 

 

피에로들의 집, 윤대녕, 문학동네

 

아무래도 윤대녕의 소설을 첫등에 꼽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윤대녕의 소설이라고 하면, 아주 오래전 어느 지방 소도시에 있을 때 윤대녕의 신작을 사러 돌아다니던 일이 떠오르는데(인터넷서점의 당일배송 같은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고릿적 시절 얘기다), 온 시내를 다 돌았음에도 결국 책을 구하지 못하고, 대신 윤대녕 소설에서 막 튀어나온 것 같은 쓸쓸한 모양의 도서관에서 아주 오래전부터 그 곳에 갇혀있었던 것 같은 사서에게 윤대녕의 예전 소설을 빌려 거기에 만족해야 했던 어느 날이 떠오른다. 윤대녕의 이 책을 읽으면 그 때의 책을 구하러 다니던 열정이 되살아날까.

 

 

지극히 내성적인, 최정화, 창비

 

처음 들어보는 작가인데, 책 소개를 보니 흥미가 생겨서 골랐다. (책 소개로 미루어보건대) 윤대녕의 키워드가 '쓸쓸함'이라면 아마도 이 작가의 키워드는 '예민함'인 것 같다. 하긴, 지극히 내성적인,이라는 말은 지극히 예민한,이라는 말로 바꿀 수도 있을 것이고, 예민함이란 소설가에게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덕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단길, 김원일, 문학과지성사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흘러도, 어떠한 것은 계속 남아있다. 이제 칠순을 훌쩍 넘긴 노작가가 소구하는 아직 끝나지 않는, 끝날 수 없는 풍경. 그 풍경 속에 조용히 들어가봐도 괜찮을 것 같다.

 

 

떠오르는 아시아에서 더럽게 부자되는 법, 모신 하미드, 문학수첩

 

이 책은 전적으로 작가의 전작 <주저하는 근본주의자>를 읽고 받았던 강렬한 인상에서 고르게 되었다. 책 소개를 보니 이야기를 펴나가는 방식에 있어서 언뜻 <주저하는 근본주의자>가 연상되기도 하는데, 확실한 것은 책을 읽어봐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나눔의 세계 : 알베르 카뮈의 여정, 카트린 카뮈, 문학동네

 

휘성이 부릅니다. '안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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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BBP 2016-03-04 1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나눔의 세계를 넣었다가.. 소설인지 아닌지 조금 헷갈려요. 그리고 떠오르는 과 윤대녕 두 권이 저랑 겹치네요. 화이팅 ~~

맥거핀 2016-03-04 16:10   좋아요 0 | URL
네..저도 guiness님 페이퍼봤어요. 떠오르는...은 사실 guiness님 페이퍼에서 처음보고 고르게 된 책입니다.^^ 나눔의 세계는 책분류를 보니 가능할 것 같아서 넣었어요. 물론 안될 것 같지만.

달걀부인 2016-03-04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서재에서 놀다보면, 나란 인간은 더럽게 책일끼에 게으르군, 생각하다 한발만 그 바깥 세상으로 나가면 상상불가능한 상태들을 보게 되곤해요. ㅜ ㅜ 일년에 책을 한 권도 읽지않는 사람들..그러니까 인문학서적 아니라도 계발서든, 레이디경향이든 아무런 읽는 행위를 하지않는 사람들이 많아요. 하지만 자영스레 주어지는 정보들은 또 너무많아 그런 정보들이 지식이겠거니 해서 뭘 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오히려 그 아집과 독선이 책을 통해 깊이 삶을 들여다보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되는 존재로 낙인찍히는 경우...암튼 알래딘서재안과밖이 때때론 천국과 지옥(소통의 문제에 있어서는)으로 느껴지네요. 글 잘 읽었어요.

맥거핀 2016-03-04 16:22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달걀부인님. 저도요. 작년말에 알라딘에서 통계 같은 것 보여준적 있잖아요. 거기에 뭐 지역에서 상위 몇 %, 뭐 이런 거 나오던데, 제가 너무 높은 순위라 깜짝 놀랐습니다. 예전 수능에서 이런 % 정도로 나왔으면 참 좋았을텐데..이런 생각을 조금 했어요.^^ 사람들이랑 얘기하다보면 좋아하는 작가 같은 거 말할 때(사실 말할 때도 별로 없지만) 적당히 조절(?)해서 말해야하는거, 여기 알라딘에서 자주 왔다갔다하시는 분들은 아마 누구나가 느끼실겁니다.

그런데 솔직히 한편으로는 그런 점을 느끼기도 해됴. 그런 알라딘 서재 안과밖의 소통이 나눠지기도 하지만, 알라딘 내부에서도 여전히 소통의 지점은 멀구나, 아니 어떤 면에서는 도리어 더 매끄럽지가 못하구나 하는 생각을 (여러 지나가는 일들을 보며) 느끼기도 합니다. 달걀부인님 말씀 들으니 우리가 책에서 얻을 수 있어야 하는 게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고맙습니다.^^

2016-03-04 16: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3-04 16: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6-03-04 16: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래서 책을 사는 일을 멈출 수가 없어요. 여기 들어오지 말걸. 몰랐는데 모신 하미드의 신간을 알게 되네요. 제목이 저래서 제발 소설이 아니기를...바랐는데 소설이네요. 세상에 읽을 책이 많아서 설레이고 좋기도 하지만, 확실히 읽는 속도가 책 구매 속도를 못따라가고 있으니 답답합니다.

그리고 위의 댓글을 읽고) 저는 여태껏 학교 성적으로 그렇게 높은 순위를 차지해본 적이 없었어요. 수능 성적이 상위 0.2%였다면 지금쯤 제 인생은 완전히 달라져있을텐데..라는 생각을 잠깐 해보았었습니다. 아하하하하.

맥거핀 2016-03-04 16:48   좋아요 0 | URL
저도 제목만 보고 저게 뭔가 싶었는데, 소설이더군요. 제목부터가 아주 재미있을 것 같은 느낌입니다. 모신 하미드의 저번 소설은 처음 한 두장부터 우와..이랬는데, 이 소설은 어떨지..

그런데 다락방님이 0.2%밖에(?) 안되나요..그럼 그 위에 있는 분들은 뉴규? 궁금하네요. 저도 이게 성적표였으면..하는 꿈을 잠깐..꾼 다음..현실에서 쓸쓸히 모니터를 보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응?)

기억의집 2016-03-04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윤대녕의 책을 사러 돌아다니는... 저는 그 대상이 배수아였는데, 지금은 아예 한국문학을 안 읽고 관심도 없어지니, 책을 사러 돌아다니며 흥분되었던, 다음 서점에서 책을 샀으면 좋겠다는 기대감의 발걸음을 아직도 기억하는데... 휴, 지금은 페북에 배수아 보여도 친구신청 안 하게 되더라구요. 배수아씨가 친구요청 받아주시지 않겠지만서도...페북에 많은 문학종사자들, 출판인들이 많지만, 참 이상하죠. 막상 페북 들여다 보는 것으로 만족하니.... 친추 요청은 안하고 싶더라구요.

전 스마트폼 없애고 와이파이 전용 타블렛으로 사용하니 어디 다녀도 책을 읽게 돼요~

맥거핀 2016-03-05 00:20   좋아요 0 | URL
아..배수아 작가님 좋아하셨다니 저도 더 반갑습니다. 저도 예전에 한 배수아 했거든요.^^ 최근에 나온 유목민...그 에세이도 사놓기는 했는데 여전히 책탑 어딘가에 있답니다. Axt에서 요새 자주 보니 그것도 반갑더군요. 배수아 작가 페북도 있었군요. 저는 몰랐어요 뭐 그런데 저도 친추는 안할 것 같습니다. 아니, 아마도 무시당할 것 같다는 생각에 못할 것 같군요. 저는 소심하니까요.; 저는 그런데 맨날 출판사 페북 같은데만 돌아다녀서 그런지 맨날 `알 것 같은 친구`에 전혀 모르는 출판사 사람들만 뜨더군요.

아..그런 좋은 방법이..저도 스마트폰 그냥 피처폰으로 바꾸고, 이북 기기나 하나 살까요...라고 하지만, 사실 그렇게 못할 거 뻔히 아는 스마트폰 중독자..

비의딸 2016-03-04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히지 않는데도 쌓아놓은 책탑은 자꾸만 높아간다거나 하는 고민은 저만 하는게 아니였군요, 멍하게 스마트 폰을 뒤적이는 것도 그렇고. 이래서 이웃이 필요한 건데 라는 생각이 들어요. 자책이 줄어드는 듯 하거든요.. ^^ 추천하신 책, 다 좋지만 모신 하미드의 책은 꼭 선정되면 좋겠어요.

맥거핀 2016-03-05 00:23   좋아요 0 | URL
네..저도 선정이 되면 즐거운 마음으로 읽을 것 같습니다. 책탑 치워야하는데...한번 책탑에서 치워져 책꽂이로 들어가게 되면 한동안 잊어버릴 걸 잘 알기에, 일부러 압박감을 느끼려고 쌓아두기는 하는데 볼 때마다 저도 제가 한심스러워요. 그래도 자기 전에 어떻게든 한 권씩 집어들기는 하는데, 그 속도보다 항상 새책을 사는 속도가 더 빨라요.

cyrus 2016-03-04 20: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상한 게 언론에서는 도서정가제 시행 이후로 책 구매비용, 독서 인구 수가 점점 감소된다는 내용을 많이 보도하는데 정부는 꿈쩍을 안 합니다. 독자와 출판사는 법 하나 때문에 점점 힘들어져 갈 뿐입니다.

맥거핀 2016-03-05 00:25   좋아요 1 | URL
매출 자체는 줄었지만, 대형서점들, 인터넷서점들의 영업이익 자체는 늘었다는 뉴스는 봤습니다. 저는 예전에는 도서정가제에 찬성하는 입장이었는데, 현재의 도서정가제는 뭔지 모르겠어요. (그렇다고 `정가`로 파는 것 같지도 않은데..) 보완이 시급해 보입니다.

2016-03-05 01: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3-07 13: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에이바 2016-03-05 13: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들 너무 읽기 힘들지 않나요.ㅜㅜ 읽고 한달 정도 지나니 다시 읽어볼까? 하는 마음도 조금 들긴 하는데 엄두를 못 내겠어요. 윤대녕 작가와 관련된 맥거핀님의 추억이 좋아요. 저는 한국 소설을 많이 읽지 않아서 잘 몰랐는데 기다리던 분이 많으셨나 봐요. 막연한 호감이 싹트고 있어요. 나눔의 세계는 분류는 맞는데 소설이라 보기가 애매해서... 근데 진짜 요즘 카뮈 관련 책 자주 나오는 것 같아요. 몇 달 격차로.

맥거핀 2016-03-07 13:48   좋아요 0 | URL
저도 사실 윤대녕의 소설은 읽은지가 몇 년은 된 것 같아요. 헤르메스님이 서평단 추천글에 윤대녕에게 최근에 많이 실망하셨다,고 쓰셨던데 저도 별로이면 어떡하나하고 살짝 걱정이 되기는 합니다. 영화든 소설이든 예전에 좋아했던 작가(감독)가 많이 나빠진 것을 보면 마음에 좋지가 않죠.

그들은 확실히 읽기가 어려워요. 심리묘사도 치밀하고, 평범한 삶을 사는 우리네들 입장에서는 어떤 공감을 느끼기가 쉽지 않은 부분들도 많구요. 아무튼 소설에 문체나 묘사나 독특한 부분이 있어요. 제가 리뷰가 늦어지고 있는 것은 꼭 그 때문만은 아니지만요.^^

프레이야 2016-03-05 2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책탑이 여기저기 쌓여가고
집중력은 덜해지고‥난감합니다. 확실히 예전보다 뭔가 떨어지고 둔해지는 느낌이예요. 아무래도 스맛폰탓도 좀 해야겠어요. ㅎㅎ

맥거핀 2016-03-07 13:50   좋아요 0 | URL
사실 스마트폰은 죄가 없죠. 그것을 보는 제가 죄가 있죠.^^ 그런데 사실 영화든, TV든, 스마트폰이든 요새는 읽을거리, 볼거리가 넘쳐나는 시대라 책이 그만큼 저한테있어서도 등한시된느 부분은 있는 것 같습니다.

잘 지내시죠? 여행기 잘 읽고 있습니다. 늘 부러움을 마음 한 켠에 담고...^^
 
[카인]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카인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15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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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카인>의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을 연결시켜 보면 재미있다. "하나님이라고도 알려진 여호와는 아담과 하와가 겉모습은 모든 면에서 완벽하지만 말을 한 마디도 못하고 심지어 아주 원시적인 소리도 내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자신에게 짜증이 났을 것이다.(p.9)" "우리가 한 가지 확실히 아는 것은 그들(하나님과 카인)이 계속 논쟁을 했고, 여전히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는 이제 끝이 났고, 더 할 말은 없을 것이다.(p.207)"

      

그러니까 이 이야기대로라면(다시 한 번 강조해두건대 '소설 <카인>의 이야기대로라면'), 하나님은 본인이 행한 이전의 일로 인해 마지막에 카인과 논쟁을 벌여야만 하는 셈이다. '하나님이라고 알려진 여호와'는 아담과 하와가 말을 못한다는 사실에 짜증이 났고, "다른 임시변통을 찾지도 않고, 다짜고짜 자신의 혀를 아담의 목구멍 안으로 밀어 넣었"고, 그 결과 아담과 하와는 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았다. 그리고 그로 인해 아담의 아들 카인은 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되었고, 그 결과 마지막에 이르러 하나님에게 따박따박 말대꾸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어떤 말을? 하나님의 혀가 할 수 있는 말을, 그러니까 하나님과 같은 말들을. 다시 말해서, 전적으로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것은 명백한 본인의 실수이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겉모습이 완벽하게 보이도록 창조한 이후에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로 만족했어야 했다. 굳이 그 겉모습에 말까지 부여해 화를 자초할 이유가 있었을까. 인간이 저지르는 모든 죄악의 90% 이상이 입에서 나온다는 자명한 사실을, 모든 것을 다 아는 하나님이 몰랐을 리는 없지 않은가? 그랬다면 카인에게 되지도 않은 대꾸를 따박따박 들어야 했을 이유도, 바벨탑을 쌓은 이들의 말들을 모두 뒤바꾸어야 할 이유도, 죄악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과 불을 내려야 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물론 어떤 잘못된 일이라도 한 가지 소득 정도는 얻을 수 있는 법이니, 그로 인해 하나님이 얻게 된 소득은 있다. 그것은 그의 분신과도 같은 자, 그러니까 창조주 아비를 꼭 닮은 자식 카인을 얻게 되었다는 점인데(모든 아버지들의 소망이야말로, 자신과 꼭 닮은 자식을 얻는 게 아니겠는가), 책을 읽다보니 어떤 의미에서는 카인이 곧 하나님이요, 하나님이 곧 카인이 아닌가 하는 되먹지 않은 의심마저 품게 되었다. 몇 가지 증거들이 있다. 첫째, 하나님과 카인이 벌이는 논쟁의 양상을 보면, 이 논쟁은 너무나도 합이 잘 맞는다. 무릇 어떤 논쟁이든, 논쟁이 이어지려면 논쟁을 벌이는 이들 사이에 수준이 맞아야 하는 법, 하나님과 카인 사이의 논쟁은 잘짜인 연극 대본처럼 손발이 딱딱 들어맞는다. 그래서 위에 인용한 바와 같이 "그들이 계속 논쟁을 했고, 여전히 하고 있"는 것일 테다. 어쩌면 하나님은 그 위에서 혼자서 너무나도 심심한 나머지 논쟁을 벌일 말 상대가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혀를 밀어넣어, 자신의 말을 할 수 있는 대상을 만들어낸 것은 아닐까. 아담은 과묵한 편이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잘못만은 아닐 것이다. 어떤 것이든 처음 만들어진 작품은 어딘지모르게 허술한 법이고, 종자는 개량되는 법이니. 둘째, 소설 속에서 하나 신기한 점은 카인이 하나님이 벌이는 중요한 일들을 모두 빼놓지 않고 관람한다는 점인데, 카인은 모세와 여호수아, 아브라함과 이삭, 욥, 노아 등등의 구약성서의 주요 인물들을 뒤죽박죽으로 만난다. 소설 속에서 카인이 이들을 만나게 되는 이유는 상당히 모호하게, 또는 의도적으로 허술하게 서술되어 있는데(그러니까 이런 식이다. "카인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나귀가 자신을 데리고 과거의 많은 길들 가운데 한 곳을 따라가는지, 아니면 미래의 어떤 좁은 길을 따라가는지, 아니면 그저, 아주 단순하게, 아직 드러나지 않은 어떤 새로운 현재를 통과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p.146)"), 이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물론 가장 간단한 해답은 하나님이 그를 그곳에 데려다놓았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곧 카인 자신으로서 이 모든 일을 직접 눈으로 보고 싶었다고 말하지 않을 이유는 없을 것이다. 셋째, 이와 관련해서 책을 읽다보면 한 가지 흥미로운 지점이 있다. 구약성서의 이야기들이 뒤죽박죽 얽혀 있는 이 이야기에서 서사적으로 기능하는 듯이 보이는, 그래서 조금 따로 외따로 떨어져있는 듯한 대목이 있는데, 그것은 카인이 릴리스에게 되돌아오는 부분이다. 창세기의 세계를 신나게 돌아다니던 카인은 나귀에게 이끌려 릴리스에게 돌아오게 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 대목에서 카인은 릴리스에게 어떤 자신의 정체성과 관련된 이야기를 몇 가지 하는데, 그것에는 카인의 흥미로운 고백이 들어있다.

      

나는 카인이에요, 기억하죠, 동생을 죽이고 그 죄 때문에 벌을 받은 사람입니다. (중략) 하지만 하나님, 우리가 여호와라고 부르는 하나님이 먼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중략) 아우를 죽이고 이 침대에서 당신과 잔 것은 모두 같은 원인에서 나온 결과들이에요. 어떤 원인.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는 것, 운명의 손안에 있다는 것, 하나님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자면 말입니다. (중략) 글쎄요, 내가 다시 나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다면, 이렇게 내 의지와 전혀 관계없이 한 과거에서 다른 과거로 뛰어다니는 일이 멈춘다면, 나는 흔히들 정상 생활이라고 부르는 삶을 살 겁니다, (p.155~156)

      

즉 카인은 안다. 자신이 하나님의 운명의 손안에 있다는 것, 혹은 자신이 자신의 삶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마리오네뜨라는 것. 또한 카인은 여기서 다른 고백도 한다. "아니요, 내가 거기에 가 있었어요. 아무도 미래에 가 있을 수는 없어. 그럼 그걸 미래라고 부르지 않기로 하죠, 다른 현재, 아니면 여러 다른 현재라고 부르죠 뭐. (중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반대로, 미래는 이미 적혀 있어요, 우리가 그것이 적힌 페이지를 읽는 법을 모를 뿐입니다, (p.153~154)" 미래를 미리 보는 이, 혹은 다른 현재, 여러 다른 현재에 동시에 가 있을 수 있는 이, 그가 하나님이 아니면 도대체 누구겠는가? 물론 가장 흥미롭고도, 기이하고도, 명백한 사실은 하나님이 카인에게 표식을 주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이 대목을 읽고 나면 누구나가 의아해지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은 카인이 아벨을 죽인 것을 알고 있고, 그에게 얼마든지 벌을 내릴 수 있다. 그러나 왜 그에게 표식을 주고, 그를 죽음에서 면하게 해주는 것일까. 카인이 그 자신이 아니라면, 혹은 조금 덜 불경하게 말해서, 그가 그 자신의 분신이 아니라면 그럴 이유가 있을까.

      

다시 이야기를 진행시키기 위해 제 정신으로 조금 돌아오자. 이야기의 주인공은 카인이고, 이야기의 주된 얼개는 카인이 하나님의 이중성, 또는 악행, 모순들을 드러내는 구조이지만, 사실 엄밀하게 말해서 카인이 그렇다고 해서 의롭거나 선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가 아우 아벨을 죽인 것은 사실이며, 아벨이 죽을 죄를 저질렀다고 말하기도 힘들다. 그 뿐인가. 그는 이후에 노아의 가족을 몰살시키기도 한다. 그의 영혼은 비었다.("네, 당신은 내 영혼을 삼킨 적이 있지요.(p.207)") 그는 하나님의 이중성과 악행과 모순을 고발하지만, 그 역시 악행으로 점철된 자라고 말할 수도 있다. 소설 속에서, 그들은 묘한 데칼코마니이다. 악행과 모순으로 얼룩진 이들. 카인은 하나님을 죽이기 위해 이 모든 일들을 저질렀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의 논리대로라면, 가장 먼저 죽어야 하는 것은 그 하나님을 꼭 닮은 자, 바로 자신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표식을 받았기 때문에 그 누구에게도 죽임을 당할 수 없다. 심지어는 표식을 내린 하나님 자신에게마저도. 여기에 이 소설의 어떤 아이러니가 있다.

      

<카인>의 이야기대로라면(참 무지하게 강조한다), 결국 모든 인간은 살인자, 아니 연쇄살인마, 혹은 실은 자신을 가장 죽이고 싶어했던, 자신을 죽였어야했던 자, 그러나 죽일 수 없는 자, 카인의 후손이다. 어쩌면 주제 사라마구가 보는 인간이란 그런 존재가 아닐지 모르겠다. 자신과 꼭 닯은 하나님을 죽이고 싶어하면서도, 결코 죽일 수 없는 자들, 심각한 모순 속에 빠진 자들, 그래서 그에게 어쩔 수 없이 영혼을 내어맡긴 나약한 자들.

    

 

덧.

그렇게 유쾌한 독서는 아니었다. 사실 <카인>의 이야기는 어떤 종교적인 것과 분리하여, 이야기 그 자체로 읽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개인적으로는 이야기 자체로만 보아도, 조금 이야기들의 얼개가 많이 헐거운 것이 아닌가, 그 비판이나 풍자도 익히 예상할 수 있는 지점에 머무르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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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25 00: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2-26 13: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2-29 23: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2-29 21: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이리시스 2016-03-02 1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맥거핀님이 언제 리뷰 썼지? :)

맥거핀 2016-03-02 15:37   좋아요 0 | URL
쓰기 싫은데, 어쩔 수 없이 쓴 리뷰라, 내용이 지금봐도 참 부실하군요..<그들>도 리뷰 써야 하는데..

아이리시스 2016-03-02 15:48   좋아요 0 | URL
재미없었죠? <그들>도 그렇고 둘다 리뷰를 부르는 스탈은 아닌거 같아요. 맥거핀님 리뷰는 역시 조목조목 참 좋아요^^

맥거핀 2016-03-03 12:22   좋아요 0 | URL
재미가 없다기 보다는 아이리시스님 말대로, 리뷰를 부르는 스탈이 아닌 것 같아요. 그건 그렇고, 요새 책 진짜 잘 안 읽히네요..읽을 것 많은데..

아이리시스 2016-03-03 12:26   좋아요 0 | URL
저는 맘이 어수선해서 그래요. 저는 안그래도 대표님?이물러나서 맨날 마음이 무거웠는데.. 맥거핀님은 왜그래요? 저도 일주일째 읽은책이 거의 없어요..

맥거핀 2016-03-04 16:01   좋아요 0 | URL
특별한 이유가 있다기 보다는...위의 글로 대신합니다. :)

2016-03-04 02: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3-04 16:0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