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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자유 - 해직기자 김종철의 젊은이를 위한 한국 현대언론사
김종철 지음 / 시사IN북 / 2013년 7월
평점 :
품절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책 <폭력의 자유>는 '해직기자 김종철의 젊은이를 위한 한국 현대언론사'라는 부제에 걸맞게 일제시대부터 이명박 정권 시기에 이르기까지 한국 언론의 모습을 시기별로 나누어 추적하고 있다. 저자 김종철 씨는 그 자신의 삶이 곧 한국현대사의 일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는 1967년도에 처음 동아일보사의 기자로 들어가서 1975년 강제해직 당했으며, 그 이후 몇 차례의 옥고와 더불어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대변인과 사무처장을 지내다가 한겨레신문 창간에 동참하여 1998년까지 논설간사 및 편집부위원장으로 일했다. 그리고 현재에는 동아일보사 해직언론인 모임인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의 위원장을 맡고 있다. 즉 그의 경력 자체가 권력의 개입과 굴종, 또한 그에 맞선 언론인의 양심적인 투쟁으로 점철된 우리의 파란만장한 언론 현대사의 모습을 드러내보인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런만큼 그는 때로 이 책에서 시대별로 일어난 사건들을 그대로 나열하는 것에만 머물지는 않는다. 1960년 4월 혁명에서는 고등학생 신분으로 겪었던 혁명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고 1975년에 있었던 동아일보사 기자 및 직원들의 강제해직 사건, 80년대 전두환 정권에 맞선 해직언론인들의 투쟁, 1988년 국민 모금에 의한 한겨레신문의 창간 등에서는 자신의 목소리로 생생한 경험을 들려주기도 한다.

   

책의 구성 및 내용에 있어서 두 가지 점이 눈에 띄는데, 먼저 하나는 책의 이야기가 ('네오'님도 지적하셨듯이) 1910년도 일본의 강제 조선 병합과 제국주의 일본의 소위 '문화정책'부터 시작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은 강제병합 후 강력한 경찰력을 바탕으로 무단통치를 자행하다가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정책의 방향을 바꾸었는데, 그것은 이른바 '문화통치'로 사실상 그 이름의 의미와는 다르게 훨씬 더 교묘한 방식으로 조선을 통제하는 것이었다. 그 한 부분이 '합법적 언론'의 허용이었는데, 그것을 계기로 탄생한 것이 김성수의 '동아일보', 예종석(후일 방응모)의 '조선일보', 민원식의 '시사신문' 등이었다. 즉 근대 언론의 시작에서 흔히 언급되는 서재필, 윤치호 등의 '독립신문'을 건너뛰고, 일제의 사실상의 간섭과 통제 하에서 창간된 동아일보나 조선일보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 흥미로운데, 이는 아마도 특히 권력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언론의 역사를 보고자 하는 저자의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저자의 관점으로 본다면, 현재까지 위세를 떨치고 있는 동아일보나 조선일보를 포함한 한국의 근대 언론의 시작은 자유로운 의지의 탄생이 아닌, 사실상 관과 합작하여 탄생된 반쪽짜리 언론이었다. 동아일보나 조선일보는 현재까지도 자신들이 일제의 탄압을 받은 민족지였음을 자랑스레 내세우지만, 그것은 '일장기 말소사건' 등 일부의 경우 뿐이고(책에 따르면 이 역시도 젊은 기자들이 주도한 거사일 뿐, 사주와 고위간부들은 전전긍긍할 뿐이었다), 탄생부터 일제 말기까지 친일의 모습을 보인 '反 민족지'에 가까웠다. 저자는 책의 첫머리에서 밝히듯 한국언론의 역사를 '민중의 벗인가 공공의 적인가'라는 관점으로 살펴보려 했다고 밝히고 있는데, 이러한 구분에 따르면 한국언론의 역사가 결국 어디에 더 가까웠는지를 밝히는 것은 뒤를 굳이 읽지 않아도 자명한 일이다. 썩은 씨앗에서 올곧은 줄기가 나오기는 힘든 법이다.

 

다른 하나는 일제시대부터 이명박 정권에 이르기까지 각 정권 별로 챕터가 나뉘어 구성되어 있으며, 각 챕터가 다른 비중 및 분량으로 다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책에서 가장 큰 비중 및 분량으로 다루고 있는 것은 박정희 정권과 이명박 정권의 시기인데, 책의 성격 및 내용으로 비추어 볼 때 이것은 이 시기가 언론이 가장 큰 통제 및 고난을 겪었던 때였으며, 또 그에 따른 언론의 투쟁 역시도 가장 격심했던 때로 볼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박정희 정권 시기에는 기관원이 신문사 편집부에 상주하여 신문의 편집과 발간에 일일이 간섭을 하고, 동아일보사 및 여러 언론사에서의 대량 해직 및 그에 맞서는 기자들의 노조 창립과 복직 투쟁이 잇따르던 때였다. 또한 이명박 정권 시기에는 전례 없었던 방송사들에 대한 낙하산 사장들의 투입 및 마음에 안드는 언론인 솎아내기, 그리고 그에 대한 언론사 총파업 및 대 정권 투쟁이 불같이 일어나기도 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다른 정권 시기에 정부가 언론에 개입하거나 언론이 정부에 맞서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다른 정권 시기에도 여전히 언론과 정부는 충돌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그것은 폭압적 독재정권 시기에는 정부의 회유 및 간섭, 그에 따른 굴종이나 투쟁의 양상으로 또한 소위 진보정권 시기에는 보수언론과 정부의 대결이라는 양상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즉 한국현대사에서 언론은 사주 및 구성원들의 성향에 따라 다른 얼굴을 보여줬으며, 또한 동시에 각 시기별로도 재빨리 가면을 바꿔쓰는 경우가 많았다. 그것은 단지 대형 보수매체들의 문제만이 아니었으며, 소위 진보언론도 때로는 여론을 호도하기도 했다. 저자의 관점대로라면 지금까지 한국현대사에서 언론은 민중의 벗이라기 보다는 공공의 적에 가까웠으며, '압제를 극복하는 자유언론'도 아직은 멀다.

 

물론 그것은 언론인이나 이 책이 타겟으로 하고 있는 '언론인이 되려는 젊은이'들이 조금 더 고민해야 할 문제고 다시 책으로 돌아오자면 몇몇 아쉬운 점이 눈에 띈다. 먼저 한 가지는 책이 너무 정치와 권력과의 상호작용적인 관점에서만 언론을 보고 있다는 점이다. 언론이 정부와의 관계에 대한 부분만 있는 것도 아니고, 언론이 다루는 모든 내용이 정치에 대한 것만 있는 것도 아니다. '한국현대 언론사'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달고 있지만, 거의 모든 내용이 언론에 대한 정부의 통제, 그에 따른 투쟁, 또는 각 정치 사안에 대한 여러 언론사의 반응들로만 채워지다 보니 너무 한 쪽으로 치우친 느낌이다. 전체적인 사회의 감시자로서 여러 다양한 시각에서 각 언론들의 모습을 다루는 것이 보다 더 '한국 현대언론사'를 조망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각 시기별 주요 사건들이 너무 수박겉핥기 식으로 다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한국현대언론사의 격랑 한 가운데에서 여러 사건을 넘나든 저자의 이력으로 비추어 볼 때 아쉬운 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저자가 너무 전체 사건을 편년체 형식으로 기술하려다 보니 특정 사건들에 대한 자세한 분석이 결여되는 측면이 있다. 예를 들어 한겨레신문의 창간 과정에 있어서도, 당시 시작부터 깊숙이 개입했던 저자로서, 당시 내부의 이야기나 어려운 점들, 혹은 창간 과정의 문제점 같은 것을 자세히 들려줄 수도 있을 텐데, 저자는 너무 알려진 사실들로만 이야기를 이어나가고 있다.

 

그것은 여러 사건들에 대한 각 언론의 보도 양상을 다루는 부분들 같은 데에도 마찬가지인데, 정작 중요한 것은 어떤 사건에서 어떤 언론사가 어떤 보도를 하였는가가 아니다. 그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고, 보다 중요한 것은 그렇다면 '왜' 그런 보도를 하였는가의 문제일 것이고, 그것에는 언론사 내부의 경제,권력구조 및 여러 역학관계, 정부와의 관계, 사주의 성향, 기자들의 취재방식, 언론사 간의 관계 문제 등등 우리가 실상 잘 모르는 여러 문제들이 개입되어 있을 것이다. 언론사 내부에서 오랫동안 일했던 저자라면 이 '우리가 실상 잘 모르는 여러 문제'에 대한 이야기들을 (내부자의 목소리로) 자세히 들려줄 수도 있지 않았을까. 각 현안들에 대한 여러 언론의 상반된 리포트는 이미 수없이 알려진 내용이다. 이를 반복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읽다보면 이것이 한국현대'언론사'인지, 아니면 강준만의 '한국현대사 산책'인지 잘 모르겠다.) 즉 이 책은 사실 조금 어중간하다. 한국현대언론사라고 부르기에는 언론의 모든 내용을 세밀하게 다루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책에서 중점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내용, 즉 한국현대사에서의 권력과 언론의 관계를 그리 깊숙이 추적하고 있지도 못하다. (부록에서 보여주는 미국의 머독과 이탈리아의 베를루스코니 총리와 같은 권력과 결탁한 언론을 다루는 부분은 본문 내용의 반복에 가깝고, 위키리크스를 다루는 부분은 '압제를 극복하는 자유언론'을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는 알겠지만 좀 쌩뚱맞다.)

 

결국 중요한 것은 <왓치맨>에서 나온 것처럼 '감시자들을 어떻게 감시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언론이 사회의 감시자라고 했을 때 그 감시자들을 감시하지 않는다면, 감시자들은 곧 또다른 권력자가 되어버린다는 점을 지난 역사는 여실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소위 진보언론들은 물론이거니와 책에서 하나의 예처럼 제시된 위키리크스도 마찬가지이다(어쩌면 그들의 힘이 꽤나 강력하다는 점에서 보다 위험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감시자들을 어떻게 감시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결국 각각의 개인들이 감시자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보수언론들의 잘못된 보도 행태를 꾸준히 지켜보고 스스로 걸러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지난 이명박 정권이나 현 박근혜 정부 하에서 정부에 대한 언론인들의 투쟁에 지지를 보내는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지지를 보낸다는 것은 그들을 격려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들을 지켜본다는 것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언제까지나 민중의 벗인 언론은 없다. 그것은 그들이 나빠서가 아니라 그들의 생리이다. 꾸준히 그들을 감시하지 않으면 언제 감시자들이 우리를 억압할지 모를 일이다.

 

 

덧.

책 제목은 참 아리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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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9-23 21: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9-24 22: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9-26 12: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9-28 01: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연 2013-09-26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읽으면서 자꾸 뭔가 걸리는데? 라고 생각했던게 여기서 처음 지적한 부분인 이야기가 문화통치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점이었군요. 깨닫고 가네요.

맥거핀 2013-09-28 01:19   좋아요 0 | URL
아무래도 확실히 의도적인 부분이 있죠. 가연님도 말씀하셨지만 저자의 관점은 명확하니까요. 저는 그런 관점하에서 조금 더 '분석'에 가까운 내용들을 보고 싶었는데, 분석이 평이한 수준이라 아쉬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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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점점 허물어지고 있다. 현실에서는 소설이나 영화였다면 개연성이 떨어진다고 비판을 받았을 법한 일들이 줄지어 일어나고 있고, 반면 허구들은 어떻게든 현실처럼 보이게 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 현실은 '실물보다 점점 커져서' 점점 본래의 형태를 알 수 없는 거대한 구호들이 되어가고 있고, 반면 허구는 그 구호들에 가려진상들을 보여주려 애를 쓰(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그 실상은 한편으로 다른 구호를 가진 허상으로 작동할지도 모를 위험을 안고 있다.

 

물론 그 적당한 타협점들도 있다. 예를 들어 허구(소설)의 형식을 빌려, 현실을 보여주기, 이름하여 '논픽션'이라 불리는 것들이 그것이다. 논픽션(non-fiction)이란 1912년 <퍼블리셔즈 위클리>가 베스트셀러를 발표할 때 '픽션과 논픽션'으로 구분한 데에서 유래한 말로, '픽션'의 반대개념으로서의 서사, 즉 소설 이외의 서사물로 르포, 역사서, 자서전, 전기 등을 포괄한다. 가라타니 고진의 저작을 국내에 꾸준히 소개하여 잘 알려진 조영일은 마쓰모토 세이초의 논픽션 <미스터리의 계보>의 해설에서 논픽션은 일종의 다큐멘터리라고 말하며 그것의 본질은 형식으로는 '영상화'이고, 내용으로는 '추적 혹은 추리'라고 밝히고 있는데, 이 '추적 혹은 추리'라는 것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고 있다. 즉 <그것이 알고 싶다>, <PD수첩>과 같은 시사 다큐멘터리는 기본적으로 추리소설의 서사구조를 따르고 있으며, 이것이 기존의 사회소설(노동문학/민중민족문학)의 상당부분을 대체했다는 것이다. 즉 이 서사구조의 유사성이 논픽션과 (TV) 다큐멘터리를 동일선상에 놓을 수 있는 근거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나의 흥미를 끄는 것은 이 서사구조의 유사한 부분에 관한 것보다도, 이 (TV) 다큐멘터리가 기존의 사회소설을 대체했다는 부분인데, 한 때 대체하는 것처럼 보였던 TV의 시사 다큐멘터리들은 요즘 들어서 이상한 양상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의 추악한 뒷모습을 세밀하게 추적하여 보여주었던 몇몇 진지한 프로그램들은 운명을 다한지 오래고, 그나마 살아남은 몇몇 프로그램들도 점점 김전일 소년의 기괴한 사건기록부가 되어가거나, 소비자 고발류의 프로그램들이 되어 착한 무엇인가를 추적하거나, 휴먼 다큐라는 이름을 가진 말랑말랑한 무엇인가가 되어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기존의 사회소설을 진정 대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독립(인디) 다큐들과 인터넷 매체들, 그리고 <현시창>, <삼성이 버린 또 하나의 가족>과 같은 르포 혹은 기록 노동들 뿐이지만, 지난 공지영과 기록 노동자 이선옥 사이에서 벌어진 일들에서 볼 수 있듯, 사회(노동)를 영상으로 혹은 글로써 기록하는 일 역시 또한 그 가치를 그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산체스네 아이들 / 오스카 루이스 / 이매진

안나와디의 아이들 / 캐서린 부 / 반비

 

이런 때에 최근에 출간된 몇몇 책들이 조금 흥미롭다. 비슷비슷해 보이는 논픽션, 르포들이 연이어 출간되었기 때문이다. 오스카 루이스의 <산체스네 아이들>은 1961년 처음 출간된 책으로, 멕시코의 어느 빈민가의 생애사를 세밀하게 추적하여 기록하였다. 각 가족들이 번갈아 화자로 등장하는 1인칭 서사의 구조를 가지고 있는 이 책은 35년 전 우리나라에서 처음 출간되었으며, 이번에 나온 것은 50주년 기념판으로 또한 이들 가족의 후기를 새롭게 담고 있기도 하다. (이 책은 또한 조은의 한 도시빈민 가족을 추적한 훌륭한 연구이자 책, 그리고 영화인 <사당동 더하기 25>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캐서린 부의 <안나와디의 아이들>은 인도 뭄바이 안나와디의 빈민가를 4년 동안 추적한 기록으로 인도라는 급격히 변화하는 사회에서 내버려진 도시 슬럼가의 모습을 세밀하게 묘사하여 보여주고 있다. 또한 한편으로 르포르타주라는 형식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작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전지적 시점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마치 소설처럼 이 이야기가 읽히는 효과를 불러오기도 한다.

 

 

노동 계급은 없다 / 레그 테리오 / 실천문학사

1942 대기근 / 멍레이 외 엮음 / 글항아리

 

레그 테리오의 <노동계급은 없다>는 미국의 어느 부두노동자의 르포르타주로 책 소개만으로는 오웰의 영국 북부의 탄광지대 노동자들을 다룬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이나 프랑스 노동계급의 현실을 다룬 플로랑스 오브나의 <위스트르앙 부두>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최근 미국 노동자의 생산성은 25%가량 높아졌지만, 도리어 노동 인구 60%의 실질소득은 13년 전보다 줄어들었다는 기사를 보았는데, 지난 월스트리트 시위에서도 보았듯 세계의 중심지라는 그곳이나 여기나 빈부격차는 점점 벌어지고 있으며, 노동 현장은 온갖 부조리와 횡포가 만연한 것 같다. <1942 대기근>은 역사서와 르포의 경계선에 위치한 책이다. 1942년 삼백만 명이 굶어 죽은 중국 허난성의 대기근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처절한 생존의 기록이면서 또한 중국 정부가 의도적으로 감춰 버린 사라진 역사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얘기한 네 권의 책들은 빈곤 혹은 가혹한 노동이라는 거대한 것에 맞선 생존의 기록이면서, 그 생존의 메커니즘을 세밀하게 추적한 기록 논픽션들이다. 또한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사회의 어두운 곳에서 가혹하게 살아간 수많은 사람들에게 비추는 작은 등불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빈곤에 맞서는 대응방안을 생각해 보게 하는 것으로서, 또한 하나의 기록문학으로서도 나름의 가치가 있다. 

 

 

다큐멘터리, 감독이 말하다 / 리즈 스텁스 / 커뮤니케이션북스

 

마지막 책은 조금 다른 범주의 내용으로 리즈 스텁스의 <다큐멘터리, 감독이 말하다>라는 책이다. 다큐멘터리와 독립영화 프로듀서인 저자가 세계적인 다큐멘터리 감독 13인의 인터뷰를 정리해 책으로 엮은 것으로 다큐멘터리의 감상이 일천한 우리에게는 조금 생소한 이름일지 모르지만, 오랜 시간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 수많은 경험을 쌓은 저자들의 이야기가 흥미로울 것 같다. (그래도 다이렉트 시네마의 아버지라는 앨버트 메이슬리스나 지난 EIDF에서 심사위원장을 맡았던 로스 맥켈위 등의 이름은 들어보신 분도 꽤 있지 않은지..?) 책 소개에서 이야기하는 대로 다큐멘터리 제작을 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물론이거니와, 한편으로 이 논픽션으로서의 다큐를 시청하게 될 대부분의 독자들 입장에서도 그 다큐멘터리를 보는 자신의 의자가 결국 어떻게 만들어져 그 스크린 앞에 놓여있게 되었는지, 또는 그 의자가 혹 부러진 의자가 아닌지를 생각해보는 것은 꽤 중요한 문제일 듯 싶다.

 

아무튼 논픽션에서 결국 우리가 보고자 하는 것은 진실이다. 그리고 진실을 보기 위해서는 기록한 자의 선의 혹은 다짐을 믿는 수밖에는 없다. 위대한 르포의 하나인<세계를 뒤흔든 열흘>의 존 리드는 서문의 마지막에 이렇게 적었다. "투쟁의 과정에서 내 감정은 중립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 중요한 날들을 설명함에 있어서 나는 꼼꼼한 취재기자의 눈으로 사건들을 보려 했고, 또한 진실만을 기록하는 데 주력했다." 그의 이 다짐과 그를 믿은 사람들의 진지한 독서는 결국 이 책을 오늘날까지 중요한 기록 문학의 하나로 남아있게 했다. 위의 책들에서도 저자들의 선의 혹은 다짐을 읽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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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3-09-10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체스네 아이들.....음악이 꽤 유명한 안소니 퀸 주연의 영화가 생각나네요. 같은 작품일까요?

시사프로그램의 연성화는 아무래도 정치적으로 작용하는 것 같아요. 그리고 왠지 모르게 요즘 다루는 소재가 고만고만한 도전자를 골라 방어전을 치루는 디팬딩 챔피언같은 느낌이 들곤 합니다.

(아 맥거핀님...서재 이미지가 바뀌셨네요..^^ 저 이미지의 영화도 혹시 페이퍼 생각 있으신가 궁금합니다..^^)

맥거핀 2013-09-06 18:33   좋아요 0 | URL
아..그런 영화가 있었나요? 전혀 몰랐습니다.^^

아무래도 보수 정권의 언론에 대한 공작들, 그리고 종편의 탄생들과도 연관이 있겠죠. 근데 그런 것 이외에도 TV라는 매체 자체의 특성이나 사회전반적인 분위기 등 여러가지가 또 관련이 되는 것 같아요. 아무튼 요즘에는 그리 '각잡고' 볼만한 TV 다큐들이 없더군요. 얼마 후에는 매년 하는 EIDF가 또 시작될텐데, 그 때나 좀 챙겨서 봐야겠습니다.

저 영화는 최근 개봉한 신카이 마코토의 <언어의 정원>인데 보기는 했습니다만, 아마도 쓰지는 않을 것 같아요. (별로 특별히 쓸 이야기도 없구요.^^) 힐링하는 기분으로 편하게 봤습니다. 사실 이야기는 좀 유치합니다만, 좋기는 하더군요.

날씨가 흐린 금요일 저녁입니다. 술을 먹으라고 권유하는 날씨군요.

아이리시스 2013-09-06 2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님, 저는 며칠 전에 사서 <안나와디의 아이들>이랑 <돈키호테, 부딪혔다, 날았다> 읽고 있어요. 에세이들의 표본이죠. 으하하. 이런 거 너무 좋아요. <흑단>도 좋은데요.. 내일 기차 타는데 아무래도 다 읽고오지 싶은데 냅다 잠만 잘지도 모르겠어요.. 비행기 타려다가 기차 타는 거니까 독서라도 보람이 있어야 할텐데요..

<산체스네 아이들>도 장바구니에 두고 책구입할 여유를 기다리는 중인데, <위스트르앙 부두>도 장바구니에 넣어야겠어요. 이 논픽션들 너무 제 스타일이에요. ^-^bbb


2013-09-06 20: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9-09 17: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Shining 2013-09-09 1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님이 신간평가단을 하시는 건 아주 바람직한 일입니다요, 암요. 저는 아무래도 평가단, 앞으로 안 하지 싶은데 지난 소설부문 선정책이 <파과>인걸 안 후 마음이 쓰리는 건 왜일까요_- 평가단이 됐든 아니든 책이 선정되든 아니든 저는 이 책을 샀을텐데요. 흐음, 묘한 심리에요.

저, 왔다갑니다. 음, 9월 9일 오전 11시 6분경이에요 :)

맥거핀 2013-09-09 17:12   좋아요 0 | URL
저는 사실 이번에 첫 두 권만 받고도 허덕허덕 하는 중입니다. 한 권은 거의 600페이지, 다른 한 권은 거의 700페이지..물론 늘 그렇듯이 중요한 건 두께가 아니라 제 마음가짐이겠습니다만.. 아무튼 서평단 하면서 역으로 좋은 점(?)은 평소에 잘 안 읽게 되는 책들, 손이 잘 안가는 책들을 억지로라도 읽게 된다는 점입니다. 독서의 편식을 줄일 수 있다고 할까나..뭐 Shining님 같은 분이 신간평가단이 되는 건 저로서도, 그리고 출판사로서도 환영할 만한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네.ㅋ 11시 6분경이라..제가 오늘 저 시간에 뭘했지?를 생각하게 되네요.

2013-09-17 17: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9-18 15: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우 유 씨 미 : 마술사기단>, <짚의 방패>의 일부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관객과 게임을 벌이는 영화들이 있다. 물론 사실 이 말은 약간 오해의 소지가 있다. 어떻게 보면 모든 영화는 관객과 게임을 벌인다고 말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게임이란 결국 참여하지 않으면 성립되지 않는다. 그리고 사실 (거의 모든) 영화는 결국 관객을 참여시키기 위해 애쓰는 무엇인가이다. 관객에게 이야기의 내용을 추론하게 만들거나, 이야기되지 않은 무엇인가를 상상하게 만들거나, 혹은 이야기된 무엇인가라도 일부러 오해를 하게 만들거나 하는 등등의 직접적인 참여가 아니더라도, 일반적으로 영화는 기본적으로 숏과 숏의 연결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렇다. 숏과 숏의 연결, 그 아주 찰나적 순간에 관객은 영화에 끊임없이 참여를 한다. 즉 어떤 숏의 이후에 다음의 다른 숏이 붙을 때 우리는 그 사이의 무엇인가를 아주 짧게라도 상상을 한다(그리고 그것이 영화가 이어지게 만든다). 그리고 그것은 이후의 숏들을 보는 것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이 때 우리는 감독이 제안하는 게임에 이미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영화의 내용에 대한 이해를 둘러싼 게임일 수도 있고, 어떤 철학적인 고찰에 대한 게임일 수도 있으며, 누군가를 사랑하게 만들거나, 혹은 누군가를 증오하게 만들거나, 아니면 결국 관객의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게임일 수도 있다. 그리고 물론 어떤 게임은 성공하기도 하고, 또 어떤 게임은 실패하기도 한다. 그것은 관객의 입장에서, 혹은 감독의 입장에서 다르게 작동하는 나름의 성공 혹은 나름의 실패이다(즉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것은 감독이 이긴다고 관객이 지는, 혹은 관객이 이긴다고 감독이 지는 그런 게임은 아니라는 점이다).

 

최근에 본 아래의 두 편의 영화는 일반적인 영화들보다 훨씬 더 게임의 위치에 가깝게 다가가 있다. 물론 나는 감독의 입장이 되어 본 적이 없으니 관객의 입장에서 제멋대로 성공하거나 실패할 뿐이다. 그 성공 혹은 실패의 기록들.

 

 

   

나우 유 씨 미 : 마술사기단, 루이스 리터리어, 2013

 

사실 이야기 자체로는 별로 흥미로울 것은 없다. 이 영화는 결국 4번의 마술공연을 관객에게 보여주는 영화이다. 4번의 마술공연이란 영화의 주인공들인 4명의 호스맨이 보여주는 3번의 마술 공연과 감독이 관객에게 행하는 1번의 마지막 공연이다. 이 마지막 공연은 지금까지 영화의 모든 트릭을 만들어낸 최종의 마술사(범인)가 누구인지를 맞추는 마술이며, 지금 이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과 벌이는 일종의 마술 혹은 게임이다. 즉 이 영화는 마술과 영화를 일종의 동일 선상에 놓고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있으며, 영화를 통해서 마술을 보여줌은 물론, 마술을 통해서 영화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그러므로 영화를 보다보니 이야기와 별개로 영화와 마술이라는 것이 꽤 공통점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영화와 마술 모두 기본적으로 수많은 관객을 앞에 놓고 벌이는 일종의 눈속임이다. 마술이 마술사의 현란한 손놀림이나 어떤 도구적인 트릭으로 관객을 속인다면, 영화는 배우의 연기, 카메라 트릭, 편집의 활용, 사운드나 기타 도구의 활용 등등 무궁무진한 방법으로 관객을 속인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속이기 위해서는 일부분을 관객에게 숨김없이 보여주어야 한다(혹은 숨김없이 보여준다고 믿게 만들어야 한다). 예를 들어 마술사는 카드를 섞는 모습을 일부러 관객들에게 보여준다. 카드가 어떤 트릭없이 섞였음을 관객에게 믿게 만들기 위해서다. 마찬가지로 영화도 추리물이라면 추리를 하기 위해 필요한 일정 정도의 정보를 관객에게 제공할 필요가 있다. 또한 모두 비슷한 수법을 활용하는데 예를 들어, 이 영화 속에서도 직접적으로 등장하지만, 마술은 기본적으로 관객의 시선을 다른 것으로 이끌면서 이루어지는 트릭이다. 예를 들어 마술사가 기를 불어넣는다며 특이한 동작을 하거나, 기합을 넣는 것, 혹은 늘씬한 미녀 조력자를 등장시키는 것 등등은 시선을 그쪽으로 유도시키고, 다른 곳에서 무엇인가를 벌이기 위함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영화들은 관객의 정신을 끌만한 장치(맥거핀)를 영화 속에 일부러 삽입한다. 또한 영화나 마술이나 철저한 사전준비가 필요하며, 그것에 이 공연의 성패가 달려있다. 영화든 마술이든 그 표면만 볼 때에는 말 그대로 일종의 마법이나 초능력처럼 보이지만, 그 숨겨진 내부에는 미리 철저하게 준비된 무엇 혹은 때로는 아주 복잡하거나 더럽고 이상한 무엇인가가 자리잡고 있으며, 그것을 얼마나 세심하게 준비하는가에 따라서 이 공연의 성패가 달려있기도 하다.

 

물론 이것은 표면적인 공통점이고, 보다 깊숙히 들어가 공통점을 찾아본다면 마술이든 영화든 결국 관객과의 일종의 규약으로 성립이 된다는 점이다. 즉 두 가지 모두 관객은 속을 준비가 되어 있으며, 속기 위해서 이 자리에 온다. 다시 말해서 여기서의 규약이란 이미 마술사와 사전에 약속을 한 특정의 관객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마술을 보고 있는 모든 관객들은 '저것이 마술이다' 즉 일종의 속이는 것이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잘 인지하고 있다. 예를 들어 영화의 앞 부분에서 보여주듯이 정해진 시간 내에 물이 가득한 수조를 탈출해야 하는 마술을 마술사가 벌일 때 모든 관객들은 마술사가 결국 빠져나오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혹은 빠져나오게 된다고 믿는다. 그것을 믿지 못한다면 관객은 마술을 즐길 수가 없을 뿐더러, 그 마술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과거의 어떤 마술사의 이야기처럼 금고에 갇힌 채로 강물에 뛰어드는 마술을 보여준다고 했을 때, 그 결말이 결국 마술사가 금고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것으로 끝난다면 그것은 이미 마술이 아니라 비극이다. 영화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영화 속에서 누군가의 죽음을 즐길 수 있는 것은 그 누군가가 실제로 죽지 않았음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영화와 관객이 맺는 일종의 규약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규약을 지키지 않고 즐기려는 자들이 생겨난다는 데 있다. 즉 실제로 어떤 이들은 마술사가 결국 수조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었다는 것에 더 쾌감을 느낀다. 또 어떤 이들은 누군가가 실제로 죽었다는 데에서 그 죽음을 보는 쾌감을 느낀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는 이미 마술도 아니고 영화도 아니다. 그저 (내 관점으로 보면) 참혹한 것일 뿐이다. 즉 이것을 즐기는 것은 마술이나 영화를 죽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마술을 하나의 영화로서 보는 입장에서 결국 이 영화 안에서 결국 가장 곤란을 겪을 자가 누구인지는 자명한 일이다. 다만 한 가지 첨언하고 싶은 것은 그런 관점에서 보면 마지막 비밀을 밝혀내는 과정의 아쉬움이다. 왜냐하면 관객의 입장에서 이 마지막은 상당히 치밀하지 못한 트릭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어차피 관객은 영화관에 속기 위해서 가며, 또한 감독과 관객의 게임 역시 기본적으로 상당히 불공정한 게임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카드 마술로 말하자면 카드를 섞을 때 관객의 눈앞에서 섞는 것이 아니라 모자 속에 숨겨놓고 섞는 식이다. 그런 상황에서라면 마술사가 내가 골라낸 카드를 아무리 맞춰도 아무런 감흥이 없다. 이 영화는 시작부에 관객이 가까이에서 볼수록 속이기 더 쉽다, 고 관객에게 조언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 조언은 맞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마술은 대신 면적 1 제곱미터의 방에서 이루어지는 마술이라는 점이다. 멀리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다.  

 

 

   

짚의 방패, 미이케 다카시, 2013

 

일곱 살 짜리 여자아이를 단지 쾌감을 위해 때려 죽인 연쇄 살인마가 있다. 그런데 그 죽은 여자아이는 재계 거물의 손녀였고, 그 재계 거물은 그를 죽이는 자에게 10억엔을 준다는 신문광고를 낸다. 실제적인 위협 앞에서 그 살인마는 도리어 경찰에 자수하는 방법을 택하고, 그를 심문하고 재판에 넘기기 위해 그가 자수한 후쿠오카에서 도쿄까지 이송하는데 경호팀이 동원된다. 이송 도중에 경찰 및 정예 경호요원이 포함된 이들 경호팀에게 끊임없는 공격(가장 위협이 되는 것은 일반인의 공격보다 주위 경찰들의 공격이다)이 이어지고, 이들의 위치가 인터넷에 노출되고, 미수자에게도 1억엔을 주고, 그 재계 거물의 관련 회사에 취업시켜 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사건은 겉잡을 수 없이 혼돈에 빠져든다. 특히 그들의 위치가 계속 알려진다는 점은 그들 경호팀 내부에 내통자가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데...

 

이런 것이 내용이고 보면, 여기서의 게임이란 과연 이들 중에서 내통자가 누구인지 맞추는 것처럼 보인다. 즉 이들 중에서 이 연쇄 살인마를 결국 죽이게 될 사람이 누구인지를 묻는 것이다. 영화 속 정예 경호요원인 메가리(오사와 타카오)의 말을 빌어서 보면, 정작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무런 훈련도 받지 않고 변변한 무기도 없는 일반인들이 아니라, 훈련받고 무기도 갖춘 경찰들, 즉 이 호송 차량의 경호를 위해 나선 주위의 경찰들이다. 그런데 그것을 확장하면 결국 가장 위험한 것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이들 경호팀이다. 이들은 그들이 이송해야 하는 연쇄 살인마에게 가장 가깝게 접근할 수 있을 뿐더러, 모두 무기의 사용이 용이하다. 또한 이들 조직은 여러 다른 배경을 가진 오늘 처음 구성된 조직으로 누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전혀 알 수도 없다. 그런데 여기에서 조금 걸리는 것은 감독의 이름이다. 감독은 (요즘 들어서 많이 약해졌다고는 해도) <비지터 Q>, <카타쿠리가의 행복>, <이치 더 킬러>의 소소한 변태 미이케 다카시니까. 그러므로 어쩌면 문제는 <씨네21>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나 어울릴 듯한 이 이야기에 이 미이케 다카시가 끌렸는가라는 점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포인트는 호송 과정의 스릴이나 스펙터클, 혹은 누가 내통자인가를 찾는 추리가 아니라 다른 것에 있을 것이다.

 

그 다른 것이란, 예를 들어 과연 악은 어디에 있는가,와 같은 물음이다. 즉 이 연쇄 살인마를 어떻게든 죽이고 돈을 받기 위해 필사적으로 달려드는 이 사람들을 악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가,와 같은 질문들. 여기 이 남자가 연쇄 살인마라면 그를 죽이는 것이 도리어 선의 실천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들을 경호하는 경호팀이 아무리 상부의 지시라고 해도 도리어 악행을 저지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와 같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질문들. 즉 명확해 보였던 선과 악의 경계는 점점 옅어지고 관객은 점점 명확히 판단을 할 수 없는 세계로 이끌려 들어간다. 이상한 변태 행위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줄줄이 이어나감으로써 그것이 마치 당연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던, 즉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흩뜨려놓고 관객을 점점 알 수 없는 세계로 이끌었던 그의 전작들처럼 말이다. 더 수상한 것은 연쇄 살인마 기요마루를 묘사하는 방식이다. 이 기요마루라는 남자는 마치 악 그 자체, 악의 극단의 끝까지 다다른 것처럼 보인다. 단지 쾌감을 위해 일곱 살 짜리 여자아이를 때려 죽였다는 사실로도 그러하지만, 자신을 보호하려던 주위의 사람들이 죽어나가도 그는 그 죽음을 즐기는 것처럼 보이며, 자신의 어머니가 자살한 소식을 탈출의 기회로 이용하는 등 그는 보호할 가치가 없을 뿐더러, 도리어 죽이는 것이 당연히 마땅한 인물로 보인다(이 기요마루 역할은 <데스노트>의 키라로 등장해 잘 알려진 후지와라 타츠야가 맡고 있는데, 그 이미지와 겹쳐서 더 사악해 보인다).

 

미이케 다카시가 수상한 것은 영화 내내 이 연쇄 살인마 기요마루의 사악한 반응숏과 그의 행동들을 세밀하게 묘사하여 관객들에게 보여준다는 점이다. 즉 이 때 미이케 다카시는 영화의 인물들에게만이 아니라, 관객들마저 이 게임에 동참시키고 있다. 이 기요마루라는 남자를 죽이는 게임, 혹은 이래도 이 남자를 죽이지 않을 거냐고 묻는 게임 말이다. 다시 말해서 영화 내내 이 기요마루를 죽이고 싶어서 혼났다, 혹은 왜 이런 살인마를 보호해야 하지? 영화의 설정 자체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와 같은 이 영화에 대한 짧은 100자평들은 영화평이면서 동시에 이 게임에 참가한 참가자들의 소감이기도 하다. 또한 이는 동시에 사형제에 대한 물음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이 영화 전체가 거대한 사형에 대한 비유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즉 영화 내내 충돌하는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충돌이 아니라, 이 살인마를 보호하려는 사람들 각자의 내부에 싹트는 가치관의 충돌이다. 이 당연히 죽여야 할 자를 죽이지 않고 살려두는 것, 혹은 국가기관이 보호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라는 질문은 사형제에 내재된 질문 중에 하나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사형제에 반대한다는 것은 어떠한 사람이라도, 그가 설혹 악마 그 자체라도 살려두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메가리를 비롯한 경호팀들이 그를 살려서 데려가도 결국 사형을 받는 것이 당연한 사실이라고 생각한다고 해서, 그를 여기서 죽게 내버려두는 것, 혹은 죽이는 것은 다른 범주의 이야기라는 말이다. 그것은 마치 이렇게도 보인다. 모든 인간은 결국 죽으니까 말이다. 아무리 사악한 살인마라도 말이다. 그가 '결국에 죽는다는 것'과 '그를 여기서 죽이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후회한다. 어차피 사형을 당할거라면 이왕이면 더 많이 죽일 걸 그랬다."라고 이 남자는 당신과 눈을 마주치며 말하고 있다. 당신은 그를 죽이고 싶어할까, 아닐까. 미이케 다카시는 당신에게 사악한 게임을 제안한다. 아무래도 그는 변태인가 보다.

 

(근데 '짚의 방패'라는 제목은 '짚으로 만든 방패' 등으로 바꾸는 것이 맞지 않을까. '~의'라는 사용이 아무리 보편화되었다해도 이것은 아무래도 어색해 보인다. 아무리 일본 영화라고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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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3-09-02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얼마 전에 악의 교전을 영화로 봤습니다. 근사하게 튀는 피와 살점을 보며 이거 다카시 영감 영화 같은데....하며 필모를 나중에 살펴보니.....다카시 영감 감독이 맞더군요...ㅋㅋ

맥거핀 2013-09-03 23:35   좋아요 0 | URL
오랜만에 영감님 영화를 봤더니 다 죽은 줄 알았더니 아직 결기가 살아있어요. 이 영화 볼 때 악의 교전도 시간이 되서 그걸 볼까, 이걸 볼까 고민했는데 <씨네21>에 이 영화의 평이 흥미로워서 선택했거든요. <악의 교전>도 괜찮을 것 같아요.

Mephistopheles 2013-09-04 09:49   좋아요 0 | URL
사실..호스텔에서 까메오 출"현"하실때 제대로 약한 모습을 보여주셨잖아요. 도살장 걸어 나오면서 넋이 빠진 모습으로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면서.....ㅋㅋ 이대로 그냥 후진양성만 하시나 했더니 여전히 건재하시다는 걸 몸소 보여주시네요..

맥거핀 2013-09-05 15:15   좋아요 0 | URL
아..호스텔에서도 나오셨군요. 역시 세살 변태 여든까지 간다를 몸소 보여주시는 영감님입니다. 마지막 은퇴하시기 전에 정말 센 거 하나 만들고 끝내셨으면 좋겠어요.

아이리시스 2013-09-03 0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 다카시 감독의 영화는 두 개가 동시에 걸린 거예요? 으흠. 둘 다 보진 못했지만 <악의 교전>이 이제 개봉하구나..한 게 얼마 전인데 다른 영화가 또 있네요?

제가 어제 영화 리뷰 썼거든요. 이 영화(나우 유 씨 미)의 감독과 스텝들은 관객을 현혹시키는 마술에 실패한 것 같다. 저는 이 글 제가 쓴 줄 알았네요. 물론 논리적 정렬은 맥거핀님 리뷰를 못 따라가지만. 날리듯 대충 흐느낌처럼 써서. 그런데 네 개의 마술이라고 쓰진 않았지만 비슷한 얘기를 언급했.. 우와..똑같다.. 이러면서 다 읽었어요. 이제는 못본 영화든 본 영화든 따지지 않고 리뷰를 다 읽기로 했습니다. 볼 때 보면 되고 읽을 때 읽으면 되고 상관이 없어요.

맥거핀 2013-09-03 23:40   좋아요 0 | URL
두 영화가 거의 동시에 개봉한 것 같아요. 근데 아마도 곧 내려갈 것 같아요. 미이케 다카시 영화 같은 건 한국에서 별로 볼 사람이 없어서 영화관도 할랑할랑하고 좋더군요.-_-

영화를 다 보고 난 이후에 이게 <인크레더블 헐크> 만든 그 감독 영화인 것을 알았어요. 미리 알았더라면 안봤을텐데. 그 영화보고 꽤 실망했거든요. 가장 중요한 것은 마지막 마술이었는데, 앞의 세 개 마술에 너무 힘을 쏟느라고 정작 중요한 것은 대강 처리한 듯한 느낌이었어요. 근데 왜 알라딘에는 영화 리뷰 안 올려요? 알라딘에도 좀 올려봐요.^^

마녀고양이 2013-09-03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과 악으로 명확하게 나눈다는 자체가 무리다.. 라고 얼마 전에 저는 결론내렸답니다.

상담을 하면서 제일 어려운 부분은,
제 신념으로는 용납이 안 되는 부분을 들어줘야할 때가 있다는 겁니다.
이 부분은 좀 미묘한 부분인데, 살인이나 범죄까지 안 가더라도 윤리적으로 음... 이런 것들,
하지만 사람이란게 워낙 복잡 미묘한 역사를 가지는 존재인지라, 어렵습니다.
나중에 제 페이퍼에서 정리해서 써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맥거핀님, 즐거울 가을되세요~

맥거핀 2013-09-03 23:52   좋아요 0 | URL
근데 사실 영화를 보면 대부분 우리는 쉽게 나누거든요. 얘는 우리편, 얘는 나쁜놈편, 그렇게 몇 가지 단서만으로도 나눠버리지요. (그 경계선에 있는 인물들은 또 대체로 관객이 좋아하지 않기도 하구요.)

근데 사실 현실은 안 그렇잖아요. 거의 모두들 선과 악의 중간 경계에 위치하고 있죠. 문제는 이런 상황에서 현실에 무엇인가 선택을 해야할 때가 온다는 겁니다. 가치들이 충돌할 때 어떤 것을 포기해야하거나 어떤 집단에 포함되어야 하는 경우가 생기는데, 그럴 때 결국 제가 가지고 있는 가치관이 드러나는 것 같아요.

그런데 그런 자신의 가치관과 내담자의 가치관이 충돌할 때 상담자가 어떻게 해야하는가, 혹은 할 수 있는가의 문제는 참 어렵네요. 나중에 정리된 얘기를 혹시 쓰신다면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좋은 날들 보내시구요.^^

2013-09-03 1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재밌게 읽었어요.진짜 마술하고 영화는 비슷하네요. 속으려고 간다는 것, 죽지 않는 걸 알기에 기꺼이 본다는 것... 그리고 <짚의 방패>도 흥미로워요. 볼 기회 있음 봐야겠다는 생각이.. 미야케 다카시는 이름만 많이 듣고, 하나도 본 영화는 없는데 왠지 맘에 드네요. 그치만 왠지 보기가 두렵긴 하네용. 요즘 들어 더더욱 센 영화는 안 보게 되어서.. 예를 들어, 공포물을 본지가 300만년은 된 거 같아요..-_-
+ <짚의 방패> 제목 오류, 동의합니다~. '~의'는 원래 우리말에 없는 구문구조라지요. '의'를 쓰면 문장의 애매모호함이 하늘을 찔러요.

맥거핀 2013-09-04 00:02   좋아요 0 | URL
얘기가 그렇게 약하다고는 볼 수 없지만, 충분히 보실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어요. 잔인한 장면이 많이 나온다거나 하지는 않거든요. (<악의 교전> 같은 거는 피가 난무한다니 피하시는 게 좋을 듯 하구요.)

저는 요즘에 영화의 리얼리즘, 리얼의 영화라는 것에 대해서 많이 생각을 하게 됩니다. 현재의 관객들은 리얼이라는 것에 극도로 노출되어있는데, 이런 시대에서 영화가 할 수 있는 것, 혹은 영화를 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라고 말이죠. 저는 영화가 그 영화 나름의 현실을 얼마나 잘 구축하는가에 영화의 성패가 달려있다고 보는데, 요즘의 영화들은 실제를 너무 따라가려고 발버둥쳐요. 영화는 최소 몇 개월, 길게는 몇 년을 통해 만들어지는 예술이니까, 뭔가 다른 게 있어야죠.

네..'짚의 방패'라는 말을 생각해보면 짚으로 만든 방패, 혹은 (내부의) 짚을 방어하는 방패라는 여러 뜻을 동시에 지니니까요. 그리고 영화 상으로 보면 두 가지 모두 다 말이 된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일부러 중의적인 뜻을 의도한 것 같지는 않구요.

2013-09-04 11:20   좋아요 0 | URL
아 그러고 보니, <짚의 방패>, '쎄서' 못 보는 게 아니라, 동네 영화관에서 상영 안 해서 못 보는 게 더 일차적 이유겠군요. ㅠㅠㅠㅠ

맥거핀 2013-09-05 15:16   좋아요 0 | URL
지방 영화팬의 비애로군요. 참 서울이 지긋지긋한데, 또 이럴때는 그래도 낫긴 나아요.

Shining 2013-09-05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저런 개연성, 설명 부족에도 불구하고 저는 사실 제법 즐겁게 관람했어요, <나우 유 씨 미>. 워낙 속도감이 빨라서 그건 좋았고, 제시 아이젠버그가 의외로(?) 잘 생겼다는 생각(전 이 배우하면 사실 <소셜 네트워크>보다 <좀비랜드>가 떠올라서 완전 얼빵한 모습만 기억나나봐요;) 반전(?)은 맞추기 쉬웠고, 멜라니 로랑은 예뻤고ㅎㅎ <짚의 방패>는 잡지에서 읽고 뭐야, 이 내용은. 하고 뻥찐 기억이... 있는데 미이케 다카시 영화였군요.

음, 영화보다 맥거핀님 글이 더 좋은건, 매번 빠지는 함정.

맥거핀 2013-09-06 00:14   좋아요 0 | URL
저는 앞에 3개 마술 나올 때까지는 나름 좋았는데, 마지막에 좀 이게 뭐야, 싶더라구요. 이 영화 전체가 하나의 마술인데, 좀 복선을 촘촘히 쌓으시지, 갑자기 홀랑 그런 식으로 반전이 등장해버리니 이거 원 싶어서..

제시 아이젠버그는 그 특유의 떠벌이 캐릭터 잘 어울려요. 어째 보니까 매번 약간 비슷한 캐릭터인 것 같은게, 일부러 그런 배역만 맡는지 아님 연기가 다 그렇게 수렴되는 건지 모르겠지만...저는 우디 해럴슨을 오랜만에 봐서 반가웠습니다. <짚의 방패>도 볼만해요. 물론 제 기준은 헐렁헐렁합니다.^^

그건 그렇고 언제 댓글을 달고 가셨디야..

 

 

 

 

 

 

 

 

 

 

 

설국열차, 봉준호, 2013

 

 

(<설국열차>, <괴물>, <마더>, <살인의 추억>의 내용과 결말이 일부분 들어 있습니다.)

 

 

 

1.

봉준호의 영화는 늘 다른 층위, 혹은 다른 범주의 이야기를 동시에 해왔다. 예를 들어 이 영화 <설국열차>는 설국열차의 엔진을 차지하려는 열차 스펙터클 서사이면서, 동시에 세계의 비유이자, 인류역사의 축소판이며, 다시 거대한 시스템과의 대결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다만, 먼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것은 각각의 다른 카테고리이지, 일종의 수준이나 단계의 문제는 아니라는 점이다(그러니 '층위'라는 말보다는 '범주'라는 말이 나을 것 같다). 예를 들어 이것을 자꾸 어떤 정치로 읽는 사람들은 그 속도나 질주를 즐기지 못하고, 자꾸만 뒤로 돌아가 결국은 꼬리와 머리를 만나게 할 것이니, 그것 또한 한편으로는 딱한 일이다. 아무튼 그래서 봉준호의 영화들은 각각의 범주 안에서 각각 즐길만한 거리들이 있었고, 그래서 한편으로는 보다 넓은 대중들의 사랑을 받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봉준호의 영화들은 늘 시스템과 시스템에서 부서져 나온 개인들의 투쟁을 다룬다. 그 영화들은 항상 눈에 보이는 무엇인가를 추적한다. <살인의 추억>에서는 여자들을 살해하는 연쇄살인마를 추적하고, <괴물>에서는 한강에서 태어난 거대한 괴물을 추적하며, <마더>에서는 아정이를 죽인 진짜 범인을 찾아다닌다. 그러나 우리가 이 영화에서 만나게 되는 것은 결국 핀트가 어긋난 결과물들이다. 연쇄살인마로 믿었던 남자는 연쇄살인마가 아니었고, 괴물의 퇴치에는 환호나 즐거움보다는 쓸쓸함이나 이상한 허무가 감돌며, 죄는 몇 바퀴를 돌아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이 때 영화는 우리에게 다른 곳으로 통하는 길을 열어준다. 예를 들어 <살인의 추억>에서 여자들을 죽인 범인은 과연 누구인가? 으슥한 산길과 추수가 끝난 논바닥, 혹은 학교 뒤편의 야산, 하수구 속의 터널...여자들은 영화 속에서 결코 보이지 않는 범인의 손길에 의해 어디론가로 끌려들어가며, 다시는 그곳에서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 어두운 심연은 여자들을 집어삼켰고, 이때 여자들은 특정의 누군가가 아니라, 마치 영화 속 어딘가에 도사리는 무엇인가에 의해 잡아먹힌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한국의) 80년대라는 폭압적인 괴물에 의해. 그러니까 <괴물>에서도 그 괴물은 80년대라는 괴물이 진화한(몸집을 키운) 2000년대의 괴물이며, 시스템의 마스코트이다. 그러니 당연히 영화 속에서 시스템이 내내 쫓는 것은 괴물이 아니라 강두(송강호)와 그의 가족이다. 같은 편을 무엇하여 쫓겠는가. 그리고 다시 <마더>에서 여자아이는 희생당하고, 시체는 마을이 온통 내려다보이는 옥상에 화려하게 전시된다. 왜 이 때 도진(원빈)이는 시체를 옥상까지 끌어올렸을까. 아니 굳이 왜 마을의 가장 높은 곳까지 끌고 올라가 마을을 굽어보게 했을까.

 

 

2.

그러므로 <설국열차>는 사실 어떻게 보면 너무 쉬운 떡밥이고, 너무 물린 양갱이다. 우리는 그 양갱을 하도 씹어먹어서 그 말랑말랑한 갈색의 직육면체만 들여다보아도 그 맛과 먹고난 후의 느낌마저도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설국열차라는 폐쇄된 시스템 하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아 꼬리칸에서 머리칸까지 갈 테지만, 그 마지막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그리 쉽게 내주지는 않을 터였다. 봉준호의 다른 영화들이 늘 그랬듯이 말이다. 그러나 달린 떡밥을 물고기가 외면할 수는 없는 법(아니 바퀴벌레로 만들어진 단백질블록이라도 안 먹을 수 없는 것). 어차피 떡밥을 먹고 죽을 운명이라면, 이왕이면 다양한 떡밥을 다양한 방식으로 먹고 죽는 것이 그나마 나을지도 모른다.

 

먼저 첫번째 판본, 반복되는 아우슈비츠의 악몽. 영화의 문을 여는 것은 수용소의 풍경들이다. 좁은 공간안에 짐짝처럼 포개진 사람들과 제복을 입고 총을 맨 관리자들의 대비, 앉아번호로 하는 인원체크 점호와 식량배급과 바이올리니스트의 차출은 익숙한 광경들을 연상시킨다. 예를 들어 유대인 수용소에서 유대인 예술가들의 바이올린곡을 들으며, 스테이크를 썰고 있는 제복을 입은 독일 장교들의 모습들이나 메이슨 총리(틸다 스윈튼)의 모습 위로 겹쳐지는 괴벨스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중요해지는 것은 생존의 문제이다. 절멸의 위협에 맞서서 어떻게든 생존하는 것 말이다. 커티스의 고백도 여기에 연결된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극한의 생존의 위협에서 작동하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두 번째는 윌포드의 제안을 받아들여 이것을 세계의 축소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한정된 자원과 그 한정된 자원마저 독점하는 소수의 집단에 대한 비유로서 말이다. 즉 지구라는 하나의 생태계에 대한 은유로서 이 영화를 받아들이는 것인데, 영화 초반부의 설정도 역시 그러한 것에서 시작된다. 인류는 온난화를 해결하기 위해 CW-7이라는 물질을 살포하였지만, 그것이 도리어 지구의 빙하기를 초래했다. 즉 재미있는 것은 이 재난의 시작이 자연재해가 아니라, 결국 자연도 조절할 수 있다는 인간의 탐욕 혹은 오만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세 번째 판본을 생각해 볼 수도 있는데, 조절할 수 없는 것을 조절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여기에서 윌포드의 인구조절 같은 것도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은 다른 것에서도 마찬가지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 핵(혹은 비슷한 것으로서 원자력발전소)과 같은 것은 어떨까. CW-7의 살포로 빙하기가 도래했다는 것에서, 핵무기의 사용과 그로 인한 핵겨울을 떠올릴 수도 있지 않을까. 즉 CW란 'Clear Weapon'의 약자이고, 핵무기, 즉 Nu(New)Clear Weapon 이전의 보다 강력한 무기이다. 혹시 설국열차의 차창 밖으로 보이는 건물 위에 가득 쌓인 눈더미가 핵전쟁이후의 가득 쌓인 핵먼지로 보이지 않았는지?

 

네 번째 판본은 많이 이야기된 것처럼 이를 인류역사의 하나의 축소모델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기차칸들의 배열에 관한 문제인데, 처음 꼬리칸을 벗어난 인류가 먹을 수 있는 것이란, 고작 곤충들 정도이다. 곤충을 먹으며 한숨 돌린 인류는 암흑 속에서 자연과의 대결(복면을 쓴 자들은 물론 인간이 아닌 다른 것을 의미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을 통해 (오만한 표현으로) 정복에 성공한다. 바로 불의 발견 및 사용을 통해서 말이다. 그 댓가로 인류는 바다와 산과 들에서 물고기, 야생동물, 식물과 같은 것들을 먹을 수 있게 되는데, 인류가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은 더 많이 잡는 법을 가르치는 교육과 더 많이 잡을 것을 기원하는 종교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2차 전쟁, 그리고 지금까지도 지속되는 전쟁이 이어진다. 그것은 한정된 자원을 놓고 싸우는 대결이다. 그리고 그것은 종교와 교육(문명)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전쟁이었고(총을 쏘는 여교사와 달걀을 나눠주는 수도승 분위기의 남자), 보다 발달된 무기(총)를 가지고 이루어지는 많은 희생을 낳는 전쟁이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각종 다양한 문화 - 수영장, 사우나, 미용실, 카페 - 를 습득하며 오늘날까지 생존해왔다.

 

 

3.

그런데 많이 이야기되는 이 마지막 판본으로 영화를 본다면 몇 가지 잔여물이 생긴다. 그 하나는 이 싸움은 이제 마지막 단계로 넘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즉 2차 전쟁 이후에 살아남은 자들이 보게 되는 것은 점점 타락해가는 인류이다. 시끄러운 음악 속에서 춤을 추는 사람들, 환각(크로놀)에 취한 사람들. 엔진칸 앞에서 그들이 만나게 되는 것은 이 환각에 빠진 이들과의 마지막 전쟁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마지막에서 그들과 대결하는 사람은 커티스(크리스 에반스)가 아니라 역시 마찬가지로 크로놀에 취한 남궁민수(송강호)이라는 점이다. 즉 이 마지막의 싸움은 환각에 취한 자들의 대결이고, 이 설국열차를 끝장낼지도 모르는 싸움, 혹은 지구를 끝장낼지도 모르는 싸움은 이미 환각에 취한 자들의 손에 넘어가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이미 광기를 가진 자들의 손에 지구의 운명을 내맡겨야 하는 낭떠러지에 매달려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봉준호가 이를 혁명의 과정과 동일 선상에 놓고 있다는 점이다. 즉 우리가 인류 역사의 과정이라고 본 이것은 영화의 표면적으로는 커티스의 엔진칸 확보를 위한 혁명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혁명의 완수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엔진칸으로 '직선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인류의 역사가 곧 혁명의 역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 혹은 유물론적인 관점에서 맑스가 말한 자본주의 발전의 끝에 기다리고 있는 것으로 나아감을 말하는 것일까.

 

물론 봉준호가 영리한 것은 그는 결국 이것을 혁명이 아니라, 반(反)혁명이라고 본다는 것이다. 즉 커티스가 엔진칸에서 만나게 되는 윌포드의 이야기들이 바로 그것이다. 커티스의 혁명은 다른 여타의 혁명들과 마찬가지로 이미 예정되어 있었고, 거대한 조절의 다른 이름이라는 바로 그 얘기. 즉 커티스 일행이 마지막으로 만나게 되는 환각들, 그리고 환각들이 벌이는 싸움에는 혁명의 결과물이 아니라 반혁명의 결과물들만이 남아있다. 그리고 그것은 커티스의 혁명이 '그것 자체로는' 결국 반혁명에 머물 수 밖에 없음을 윌포드의 입을 통해서 재확인 시켜준다.

 

 

4.

즉 이 이야기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이 지독한 처음으로의 반복. <설국열차>에서 커티스는 엔진칸 앞에서 느닷없이 과거의 기억, 그러니까 꼬리칸의 탄생에 대한 기억에 사로잡히고(이 커티스의 고백은 왜 영화의 이 시점에서, 그리고 바로 이 공간에서 흘러나오는가), 엔진칸을 열고 들어가 만나는 것은 윌포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윌포드의 이름을 가진 길리엄이기도 하다. 끝에서 끝으로 들어간 유일한 자, 커티스 앞에 놓여진 것은 꼬리칸이라는 끝이 아니라, 엔진칸이라는 또 하나의 끝이며, 그는 여기에서 다시 물리적으로도, 그리고 이야기적으로도 영화의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것으로 보인다(그리고 그 설국열차 안에 그대로 남아있기로 한다면 그가 갈 곳은 결국 되돌가는 것밖에는 없다. 엔진칸 다음은 없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 처음의 반복은 봉준호의 영화에서 그리 낯선 것이 아니다. <살인의 추억>에서 처음의 논 한가운데에 있는 어둡고 질척한 하수구, 온갖 더러운 것들이 가득 들어찬 그곳을 나이가 든 박두만 형사(송강호)가 다시 찾아간다. 그리고 여전히 그곳에는 풀리지 않는 범인의 윤곽, 어떤 미스테리가 도사리고 있고, 형사는 조용히 스크린 밖을 응시하며 영화가 끝난다. <괴물>의 마지막은 언뜻 강두가 처음의 그곳에서 현서(고아성)가 대체된 다른 아이를 키우는 약간의 온기가 남아있는 곳으로 보이지만, 여전히 그 컨테이너 박스는 어둡고 눈내리는 밤 한강 둔치에 홀로 남아 있다. 언제 그 검은 강에서 괴물이 튀어나올지 모른다. 이야기는 하수구에서 시작하여 하수구로 끝나거나, 컨테이너 박스로 시작하여 컨테이너 박스로 끝난다. 즉 이야기들은 돌고 돈다. 돌고돌아 다시 처음의 위치에 와 있다.

 

그리고 그것은 <마더>에서도 비슷한 양상이다. <마더>에서 가장 이상한 장면은, 그리고 사실 봉준호의 영화를 통틀어서도 가장 이상한 장면 중의 하나는 처음 마더(김혜자)가 유치장에 있는 도진이를 찾아갔을 때 도진이가 넋이 나간 상태에서 중얼거리는 이상한 대사이다. 죄가 몇 바퀴를 돌아 자신에게로 온다는 그 말. 죄가 몇 바퀴를 돌아서 온다...그것은 사실 <마더>라는 영화, 혹은 봉준호의 이야기를 가장 정확하게 설명한 말이다. 죄는 몇 바퀴를 돌아서 도진이에게 왔고, 마더는 필사적으로 그 고리를 다시 돌려 다른 누군가에게 죄를 돌리려 했다. 그리고 춤을 춘다. 영화의 시작부에 있던 춤과 이제 고리를 필사적으로 돌린 후 돌린 자신을 잊으려 고속버스에서 마지막에 추는 춤. 그렇게 영화의 시작과 끝은 다시 만난다.

 

 

5.

봉준호의 영화에서 '죄'라는 놈은 그렇게 가장 약한 고리를 찾아 헤맨다. <살인의 추억>에서는 동네의 지체장애인, 가난하고 힘없는 사내, 손이 부드럽고 이질적인 타자를 맴돌다가 어두운 터널 안에서 미스테리로 남겨졌고, <괴물>에서는 강두의 가족이 표적이 되었으며, <마더>에서는 돌고 돌아, 엄마가 없는 아이에게로 갔다. 그리고 희생당하는 사람들 역시도 어떻게 보면 가장 약한 고리들이었다. <살인의 추억>의 가난한 동네의 여자들(살인의 위기에서 극적으로 살아난 여자를 묘사하는 장면을 보라), <괴물>의 현서, <마더>의 아정이. 즉 시스템은 가장 약한 고리가 부서졌을 때 그 약한 고리를 또 하나의 약한 고리를 부서뜨려 메운다. 그리고 그것은 이 열차 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달려야만 하는 기차의 부품(아마도 가장 약한 부품)이 부서졌을 때 그것을 메우는 것은 기차의 다른 의미에서의 가장 약한 고리이다. 그리고 그것은 시스템을 부숴야 하는 이유가 된다.............라고 쉽게 쓰고 싶지만 과연 그럴까?

 

어쩌면 가장 무서운 점은 마지막 윌포드의 이야기들이 어쩌면 맞는 이야기처럼 느껴진다는 사실이 아닐까? 열차 안에서의 자원은 한정되었고, 한정된 자원으로 남은 사람들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인구 밀도를 줄이는 방법 밖에는 없다. 열차는 달려야만 하고, 그런 열차를 달리게 하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희생 밖에는 없다. 그것으로서 남은 모든 사람들이 살 수 있다...그러한 것들은 논리적으로 맞는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적어도 '논리적으로' 말이다. 그래서 커티스는 거기에서 주춤거렸을 것이다. 그것은 커티스도 논리적인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는 감이나 요행으로 움직이는 인간이 아니다. 정확한 정보(단백질 블록안의 정보)와 치밀한 계획(문이 열리는 4초의 시간 계산)으로 움직이는 인간이다. 그런 커티스에게 윌포드의 그런 이야기들은 어느 정도 맞는 이야기로 들렸을 것이고, 그것은 길리엄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사실 나는 미안하지만 윌포드의 이야기에 좀 혹했다.)

 

그러나 논리가 있다면, 논리의 바깥에서 움직이는 것, 혹은 논리로서 결코 이야기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어 <괴물>에서 강두 가족에게 괴물이라는 결코 맞서기 어려운 것으로 보이는 거대한 시스템(정부마저 싸움을 거의 포기한)과 싸울 수 있게 해주는 동력은 가족이라는 '불가해함'이다. <마더>에서 마더의 마지막 선택을 영화를 보는 우리가 결코 비난할 수 없는 것은 그녀가 누군가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논리로서 어떻게 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끝까지 명철한 정신으로 고민한다고 해도 나올 수 있는 답이 아니다. 그리고 <설국열차>에서 거기에서 아이를 구해야 한다는 것 역시, 논리 바깥에 존재하는 것이다. 커티스가 그나마 그 지점에서 다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논리적인 것이 아니라, 논리의 바깥에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혁명에서 결국 필요한 것이란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논리의 바깥에 있는 휴머니즘, 혹은 사랑이다. 사랑 없이는 혁명이 완수될 수 없다. (다시 자본주의의 끝으로 돌아간다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공산주의가 이상한 결말을 내비친 것은 그것이 폭력으로 점철된 비논리적인 것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도리어 너무 도식적이고 논리적이었기 때문은 아닐까. 공산주의가 '발전'이라는 말을 쓰게 된 순간, 그것은 이상한 결말의 단초를 내비치고 있었다.)

 

 

6.

그러므로 위에서 이야기한 우리가 내몰린 처지, 즉 환각을 가진 자들의 대결이란 그렇게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어쩌면 도리어 필연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논리를 벗어났을 때, 우리에게는 시스템을 벗어날 가능성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환각을 가진 남궁민수는 시스템을 기어코 열어제친다. 그러나 물론 환각만으로 시스템을 벗어날 수는 없다. 바로 가장 강력한 환각(크로놀의 집합체)에 인류 문명의 결정체(불)을 결합하여야만 시스템을 벗어날 길이 열린다.

 

그리고 물론 이것은 봉준호의 영화답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그러니까 열차 안에서 커티스와 그의 혁명군 일행이 인류역사의 시작부터 끝을 보여줬다면, 두 아이는 다시 인류 역사의 시발점 앞에 섰다. 이것은 희망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모두 다 죽고나면 도대체 혁명인가, 아니면 반혁명인가는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나는 그 질문에 답하는 대신 너무나도 당연해 보여서 아무도 제기하지 않는, 그러나 사실은 생각해보면 볼수록 조금 이상한 질문을 하나 하고 싶다. 그리고 거기에서 답을 찾고 싶다. 설국열차는 왜 달려야하는가. 그리고 달린다고 해도 왜 예카테리나 다리를 1년마다 만나야 하는가. 즉 왜 설국열차는 1년을 주기로 같은 궤도를 '반복'하며 달려야만 할까.

 

용케 운이 좋다고 해도 아마도 인류는 다시 무엇인가를 반복할 것이다.

 

 

 

덧.

쓸데없이 써보는 봉준호와 박찬욱의 차이. 박찬욱의 영화는 특히 최근작으로 가면 갈수록 어둡고 파멸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그 안에 이상한 긍정의 기운을 내비치는 것처럼 느껴지는 반면에, 봉준호의 영화들은 가면 갈수록 희망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헤어나올 수 없는 음울한 쳇바퀴를 돌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 반복의 구렁텅이에서 어떻게 기어나올 수 있을까.

 

며칠 전에 우연히 임순례의 <남쪽으로 튀어>를 봤는데, 이거야말로 <설국열차>의 이야기구나, 간단한 이야기를 이렇게 복잡하게 했구나 싶어서 살짝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나는 임순례의 입김이 조금 덜한 것 같아 아쉬웠지만, 그래도 이 영화가 마음에 들었다. 사실은 <설국열차>보다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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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3-08-23 1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두 스틸컷이 하나의 영화 안에서라니.

Mephistopheles 2013-08-23 1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국 미지의 빅브라더는 존재하며 가까히 도달했을 때 강제성을 띈 도돌이표를 한대 쳐 맞는 것이 봉준호 영화의 공통점인가 보군요..

(덧, 줏어 들은 이야기지만 임순례 감독의 남쪽으로 튀어가 감독의 임깁이 덜한 이유는 주연 배우의 지나친 간섭 때문이라고 들었습니다.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요.)

맥거핀 2013-08-24 00:48   좋아요 0 | URL
댓글이 너무 재밌어요. 강제성을 띈 도돌이표를 한대 쳐맞는다라..(좋은 요약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봉준호 영화의 마지막들에서 대체로 망연해지죠. 우리는 이미 한바퀴를 돌아봤으니 말이죠. 그리고 앞으로 몇 바퀴를 더돌아야 할지도 모르니까요.

네..저도 김모 주연배우와의 불화설 같은 얘기를 듣기는 했습니다. 물론 저도 사실인지는 모르구요. 아..그런데 엔딩크레딧의 시나리오 부분에 그 김모 배우님의 이름이 들어가 있기는 하더군요.


2013-08-23 23: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8-24 00: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드팀전 2013-08-24 0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봤습니다. 전 봉준호가 '남쪽으로 튄 것'보다는 낫던데요. '남쪽'은 상상적 즐거움만 주지 성찰이 부족해보입니다. 갑자기 80년대 화염병이 나오는 신파는 그렇다구 쳐도요. 바틀비를 상상하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입니까?...정작 문제는 그 바틀비적 즐거움 역시 재입찰 시켜야한다는 것이 요체로 보입니다.

논리 바깥을 '과잉'이라고 하는데, 그 과잉은 중요한 정치적 주제로 부각되고 있는 듯 보입니다. 왜냐하면, 적이 사라진 자리, 즉 자본주의로서의 영원한 중지라는 현체제에 균열을 낼 수 있는 것은 그런 비-합리성, 과잉의 정치학 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또한 근대 기획으로서의 자본주의적 합리성에 구멍을 내는 길이기도하구요. 결국 완벽한 합리성은 괴물이 될 수 밖에 없다는 셀리의 프랑켄슈타인의 신화가 반복이 됩니다. 윌포드의 합리적 담화와 그 속에 내재될 수 밖에 없는 근원적 심연사이의 간극을 커티스가 본 것으로 이해합니다.

... 그러니까 국내 몇 대 없다는 마이바흐를 볼 때 그 뒤에 가려진 것들을 보면 엔진칸 아래의 뚜껑을 한번은 열어본 셈이지요. 꼭 열었다고 커티스처럼 반응하는 것은 아닐테고. 대개는 모른 척 다시 닫습니다.(이게 진짜 짜릿한 정치적 지점 아닐까 하는데요. 제가 영화를 만들었으면 그렇게 했을지도.ㅎㅎㅎ )

전 사랑이나 휴머니즘은 봉준호가 그 '과잉'의 대중적 형식으로 사용한 것으로 전이하여 이해합니다.맥거핀님의 말씀처럼, 봉준호는 진짜 소박한 휴머니즘으로 썼을 겁니다. 봉준호의 첫 장편 <플란더스의 개>에서도 배두나는 그런 소박함의 진정성으로 강아지를 구출하니까요.

인류가 설령 반복한다고 할 지라도, <지구를 지켜라>의 외계 왕자 백윤식처럼, 폭발시키지는 말아주세요. 반복을 허무주의로 받아드리지 않는게 제가 사는 길인지라.ㅎㅎ 회색빛 희망도 없는것 보다는 나을 테구, 반복은 차이를 만들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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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3-08-25 15:29   좋아요 0 | URL
아..네 맞습니다. 반복은 분명히 차이를 만들지요. 봉준호가 반복을 만들기는 하지만, 마지막 놓여진 위치가 처음과는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살인의 추억>의 마지막에는 카메라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박두만 형사의 시선이 있고, <괴물>은 현서가 현서가 목숨을 걸고 살려낸 아이로 대체되었습니다. 즉 가족이 확장되었죠.

그리고 또하나 중요한 점은 그들이 그곳에 여전히 있는 것은 일종의 선택이라는 점입니다. <살인의 추억>의 나이든 형사는 일부러 그곳에 다시가고, <괴물>의 강두는 총을 옆에 두면서까지 여전히 한강변의 그곳에 머물러 있습니다. 여전히 그 지점을 바라보겠다는 시선은 남아있습니다. (반면 <마더>의 양상은 조금 다르죠.)

또한 봉준호의 영화에서는 비록 거대한 것에 희생당하는 희생자들일지라도, 그들은 그렇게 나약한 사람들만은 아닙니다. <마더>에서 범인으로 결국 지목된 소년은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을 짓는 마더에게 "울지마라"고 했었죠. <괴물>의 아이를 보호하는 현서나 <살인의 추억>의 형사와 대화하는 소녀도 그렇게 나약한 캐릭터만은 아니었습니다. <설국열차>에서 처음 커티스와 협상(?)을 벌이는 그 흑인소년은 또 어떻습니까.

합리성에 맞서는 작은 용기들이 여전히 봉준호의 영화들에는 남아있습니다. 모른 척 다시 닫지않고 기어코 그 뚜껑을 열어 맞서는 개인들이 그 영화 속에는 그래도 아직 조금은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합리적인 선택이 아니죠. 계산하면 답이 안나오는 싸움이죠.

남쪽으로 튀어에서 김윤석의 싸움도 결국은 계산해도 답이 안나오는 싸움 아닐까요. 물론 실제로는 바틀비적 즐거움의 끝에 남쪽의 미지의 섬이 없을수도 있다는 문제가 있겠습니다만...하지만 사실 설국열차도 나가보기 전에는 정작 추운 것인지 아닌지 모르지 않겠습니까. 7분이면 팔이 완전히 얼어버리는 곳이 당연히 무서운 혹한이 아니겠는가,라고 이 영화의 (메이슨 무리의 계산을 빌어) 대답한다면 그건 합리적인 설명에 스스로 투항하는 것이겠죠.

Shining 2013-08-28 0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할 말은 고작...... 맥거핀 님은 이런 글 어떻게 쓰시는거죠? 라니_- 이 빈곤함이라니. 같은 영화를 보면서도 얼마나 많은 시각차, 온도차, 시간차가 존재하는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드네요.

전 이 영화가 여러모로 참으로 이상한, 사실 괴상한 영화구나 싶었어요_-

최근 <마지막 4중주>를 봤는데, 이 영화 하나도 안 슬픈데 전 왜 그렇게 눈물이 났을까요(하하). 나쁜 캐릭터와 전형적인데다 나쁜 갈등구조에 꽤 뻔한 이야기. 그런데도 이상하게 뭉클해지는게 있더군요. 엉뚱하게도 감정의 권력구조를 생각해보기도 했고요.

여름감기라니. 그건 원래 저의 특기였는데... 왠지 억울하고 민망하고 꽤 힘들지 않나요?-_ㅠ 빠른 회복을 바랄게요(응?) 어서 나으세요 :)

맥거핀 2013-08-28 19:28   좋아요 0 | URL
저는 조금 실망하기는 했습니다. 물론 그것은 봉준호의 결과물임을 감안하고 하는 얘기입니다. 영화의 어떤 분절되는 리듬이라는 측면에서도 그렇고, 영화 외부적인 면, 특히 CJ식의 밀어붙이기에 이 영화가 올라타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습니다. (하기는 요즘 이 영화만 뭐라고 할 것도 아니지요. 저는 요새 영화 배급들이 약간 미쳐서 돌아간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좋은 영화라는 뜻 아닐까요. 저는 아무튼 보는 이에게 한 번이라도 눈물을 흘리게 만든다면 감히 좋은 영화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뻔하고 전형적인데 눈물을 흘리게 만든다면 무엇인가 전형적이지 않은 게 한개라도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그건 고도의 기술일지도 모릅니다.^^

여름감기는 이제 거의 나았습니다만, 요새는 거의 일년내내 감기의 증상이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가만히 있어도 도시의 공기는 정말 나쁘다는 게 느껴집니다. 걱정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제가 Shining님의 특기를 뺏아간 것이기를 바랍니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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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잘 외우기 힘든 소설, 들어도 금방 잊어버리고 마는 제목을 가진 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읽었다. 제목이 외우기 힘든 것은 단순히 길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한편으로 이 제목이 뭔가 일반적이지 않은 것을 담고 있기 때문에도 그렇다. 다자키 쓰쿠루는 그냥 다자키 쓰쿠루가 아니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란 무슨 의미일까? 이 말이 굳이 제목에 들어간다는 것은 '색채가 없다'는 것이 다자키 쓰쿠루라는 사람을 나타내기에 상당히 중요한 키워드라고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우리는 꽤 드물기는 하지만, 색채가 없다, 혹은 색깔이 없다는 말을 사람에게 쓰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을 '개성이 없다'와 비슷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전부일까. 아마도 그것만으로 이 이상한 말이 제목에 붙어야 할 모든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두번째.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라니? 일반적으로 보면 이것은 조금 이상한 문장이다. 이 문장과 동일한 의미의 무엇인가를 전달하고자 할 때는 '다자키 쓰쿠루가 순례를 떠난 해'라고 쓰면 된다. 즉 여기서의 '그'가 다자키 쓰쿠루라면 이 문장은 이상하게 중첩되고 낭비된 문장이다. 다자키 쓰쿠루와 다자키 쓰쿠루가 순례를 떠난 해라니.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의 가능성이 남아 있기는 하다. 과연 여기에서 '그'는 다자키 쓰쿠루일까. 이 제목만 봐서는 '그'가 그 앞에 있는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라고 확실하게 주장할 만한 아무런 근거가 없다. '그'는 다자키 쓰쿠루가 아닌 다른 사람일 수도 있다(그리고 그래야만 이 문장이 도리어 말이 조금 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아무튼 간에 하드 커버를 넘겨 소설을 들여다봐야만 할 것만 같다.

하루키의 많은 소설들이 그러했듯, 이 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는 한 가지 미스테리한 것, 혹은 무엇인가 기묘한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그것은 다자키 쓰쿠루가 대학교 2학년 때 겪은 일인데, 고등학교 때 친했던 친구들 그룹으로부터 아무 이유도 없이(다자키 쓰쿠루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추방당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 그룹의 나머지 친구들은 모두 이름에 색채를 표현하는 한자가 포함되어 있고, 다자키 쓰쿠루만 이름에 색채를 표현하는 한자가 없었던 것이다. 아오(靑)와 아카(赤)라는 두 사람의 남자아이, 그리고 구로(黑)와 시로(白)라는 두 명의 여자아이, 그리고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 그런데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렇게 느낄 테지만) 이 네 사람의 이름의 조합은 그 자체가 너무나도 기묘하게 여겨진다. 푸른색과 붉은색의 남자아이들과 하얀색과 검은색의 여자아이라니, 이 완벽한 대비의 구조라니, 이게 과연 가능한 조합일까. 과연 이들은 존재하는 무엇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일까. 아, 물론 나는 모든 소설이 허구라는 지극히 자명한 사실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비유의 구조가 너무 도식적이라 도리어 조금은 의아해하고 있는 중이다. 이들이 완벽한 구조인 것은 단지 색상표의 색채대비의 측면에서 뿐만이 아니다. 하루키의 묘사를 빌리자면 아카는 성적은 탁월하지만, 그것을 내세우지 않고 배려한다. 아오는 체격이 좋고 성격이 활달하며 운동을 좋아한다. 시로는 외모가 뛰어나고 피아노를 잘 치지만, 말수가 적고 차분하다. 구로는 외모는 그렇게 뛰어나지는 않지만, 애교가 있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잘한다. 그러니까 이 조합은 두뇌와 건강과 외모와 재치의 조합이다. 그러니 이것이야말로 완벽한 조합이라고 감히 이야기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시 말해서 색상대비표에서 각각의 색들이 어떤 완벽의 극단에서 무엇인가를 표상하는 것처럼, 이들 역시 각각 무엇인가를 표상하고 있다.

그리고 그 중간에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가 있다. 다자키 쓰쿠루는 그 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딱히 뛰어난 재능도 없고, 공부를 아주 잘하거나 특별한 면도 없고, 외모마저도 돌아서면 잊기 쉬운 외모이다.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는 다자키 쓰쿠루가 이 친구 그룹을 그야말로 완벽한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이 그룹에서 추방당하자 거의 죽음만을 생각하며 살게 되는 것도 어떤 측면에서 보면 그렇게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당시 쓰쿠루의 관점에서 보면, 이들은 자신이 가지지 못한 무엇인가를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들이었고, 이 완전한 존재들과 일체감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이 쓰쿠루에게는 일종의 자신의 존재가치를 느끼는 것이었다. 즉 쓰쿠루는 이들에게서 자신이 가지지 못한 어떤 완전함을 보았고, 그것들의 조화를 보는 것만으로 즐거움을 느꼈다. 그것은 쓰쿠루가 철도와 역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놓고 생각해 볼 수도 있는데, 철도와 역은 쓰쿠루에게 완전함이 어우러지는 조화의 공간이다. 정확한 시간에 도착하고 다시 정확한 시간에 떠나는 기차역의 열차들, 각자 도착하여야 하는 목표지점을 가지고 조화롭게 움직이는 역의 사람들, 이들이 어우러지는 철도와 역은 조화로운 물결, 이미 정해져있는 어떤 흐름이 반복되는 조응의 공간이다. 그리고 쓰쿠루는 머리가 어지럽고, 생각이 많아질때면 역에 가서 그 사람들과 열차들의 흐름을 바라본다. 그 정시 등장과 정시 퇴장의 정확한 흐름들을 말이다. 

그러나 조화로운 공간에서 조화롭게 존재하는 것이란 그 자체만으로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 모든 이야기는 도식적인 구조가 깨지는 데에서 긴장이 생겨나고, 새로운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색채가 없는 쓰쿠루가 완전한 자들을 위한 이 그룹에서 추방되는 것은 이야기의 내용에서 뿐만아니라 구조로 볼 때 어쩌면 필연적이라고 할 수도 있을 터이다. 그리고 죽음만을 생각했던 쓰쿠루를 죽지 않게 하려면 두 가지의 길이 있다(물론 "대학교 2학년 7월부터 다음 해 1월에 걸쳐 다자키 쓰쿠루는 거의 죽음만을 생각하며 살았다."라고 작가가 첫 문장을 쓰는 것은 그를 죽일 마음이 없다는 뜻이다). 하나는 그에게 색채를 부여하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색채가 없는 자신을 긍정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물론 다자키 쓰쿠루는 하루키 소설의 주인공답게 후자의 길을 간다. 색채가 없는 자신을 긍정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주위의 색채를 빼야한다. 다시 말해서 다자키 쓰쿠루만이 색채가 없는 것이 아님을, 주위의 모든 것들이 사실 색채가 없었음을, 혹은 모든 것이 나름의 색채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라고 했을 때, 이 말 앞에는 '완전한' 혹은 '눈에 띄는'이라는 말이 빠진 것이다. 누구나 색채는 있다. 노르스름하다던가, 희뿌옇다던가 하는 정확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색채말이다. 완전한 파랑이나 완전한 빨강이나, 완전한 검정이나 완벽한 흰색은 아니어도 말이다(그것은 실제보다는 이렇게 소설 속에 등장한다). 다만 대다수 사람들은 그것이 명확하지 않아서 눈에 잘 띄지 않는 상태 즉, 청과 적과 흑과 백이 나름의 비율로 섞여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하루키도 처음의 그룹을 보여준 후 이제 색채를 섞기 시작한다. 하이다(회색)와 미도리카와(녹색)의 등장이 그것이다(그것도 하필이면 흑과 백 사이에 있는 회색과 청과 적 사이에 있는 녹색이라니, 하루키 씨 정말 귀엽지 않은가). 그리고 그들을 만나고, 자신과 마찬가지로 이름에 아무 색채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라를 만나고, 그리고 다시 네 명의 옛친구들을 만나며 쓰쿠루는 자신을 긍정하게 된다. 그것은 후반부의 네 친구를 보면 잘 드러난다. 이제 그 친구들은 예전의 강렬한 그 색채가 아니다. 붉그스레한 무엇인가, 혹은 파르스름한 무엇인가라고 부를 수는 있겠지만, 고등학교 시절의 강렬한 색채를 가졌던 그들은 더 이상 원색의 그들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쁜 것이 아니다. 그들이 그렇다고 자신의 색채가 없는 것이 아니니까. 색상대비표의 가장 가장자리의 색들은 오히려 위험하니까. 예를 들어 흰색은 어쨌든 검어지는 길밖에는 남아있는 것이 없으니까. 흰색이 검어지지 않으려 발버둥친다면 오히려 그 반대편 낭떠러지에 있는 악령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그 친구들의 말대로 오히려 쓰쿠루에게 그들이 필요했던 것이 아니라, 그들, 그리고 그 그룹을 유지시키기 위해 쓰쿠루가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쓰쿠루는 만들다(作)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즉 쓰쿠루는 이 소설에서 역을 만드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을 만들어가는 존재이고, 그리고 동시에 색을 섞어 새로운 색을 만들어가는 존재이다(그러므로 쓰쿠루가 빠지면 그룹은 유지될 수 없다). 쓰쿠루는 그렇게 색채가 없는 존재가 아니라, 색채가 없는 자신을 긍정하는, 그럼으로써 도리어 동시에 자신만의 독특한 색을 만들어가는 인물이다.

그러므로 제목에서 '그'는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가 아니다. 왜냐하면 순례를 떠난 다자키 쓰쿠루는 예전의 색채가 없는(스스로 '완전한(원색의)' 색채가 없는 것이라 생각했던) 다자키 쓰쿠루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이 제목이 이해가 되며 외울 수 있게 되었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그는 이제 예전의 다자키 쓰쿠루가 아니다.


덧.
그래서 어쩌면 이 소설이 그렇게 많은 이들에게 읽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들 대다수는 다자키 쓰쿠루처럼 색채가 없다고, 혹은 자신이 뭔가 불완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기독교 식으로 말하면 완전한 에덴 동산에서 추방당하면서 예정된 인간의 운명이라고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이야기 역시도 에덴 동산에서 추방당한 인간이 자신만의 에덴동산을 찾으려 발버둥치는 이야기이다). 물론 소설은 불완전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아무런 답도 주지 않지만, 너무 실망할 필요만은 없다. 그것은 현실에서는 주인공이 아닌(혹은 아니라고 믿고 있는) 당신이 소설에서는 주인공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해주니까. 불완전한 시대의 불완전한 인간들은 그렇게 현대 소설에서, 특히 하루키의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여 왔다. 물론 하루키의 이런 인물들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아직까지는 이 소설의 다자키 쓰쿠루가 아닌, <노르웨이의 숲>의 와타나베이다. 

사실 구조상으로 보면 이 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는 <노르웨이의 숲>과 상당히 동일한 부분들이 있으며, 따라서 그 소설의 다른 버전, 혹은 2000년대 버전으로 보인다(나는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읽었다). <색채가 없는...>은 현재의 쓰쿠루, 즉 30대 중반에 접어든 쓰쿠루가 과거로 돌아가 과거의 사건에 맞닥뜨리는 이야기이며, <노르웨이의 숲> 역시 서른일곱 살의 '나'가 비행기 안에서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비틀즈의 음악을 들으면서 과거를 회상하는 데에서 이야기가 출발한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다자키 쓰쿠루에서 출발하는 이야기가 결국은 사라에게 전화를 하는 것에서 끝나는 <색채가 없는...>과 마찬가지로, <노르웨이의 숲>의 시작은 '죽음과 마주했던 열일곱살의 봄날'(2장의 제목)이며, 마지막은 미도리에게 전화를 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리고 마지막 전화에 담겨진 의미는 두 소설 모두 비슷한 것처럼 보인다. 즉 인물로 보면 <노르웨이의 숲>의 나오코에게 이 소설의 시로를 매칭하고, 미도리에게 사라를 매칭할 수 있다. 즉 열일곱살 혹은 스무살(<색채가 없는...>의 대학교 2학년)의 나는 죽음에서 시작하지만 각자 나름의 순례를 마친 후에 미도리와 사라에게 돌아간다. 그리고 그것은 하루키가 그들에게, 아니 소설을 읽는 독자들에게 무엇인가를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를 들어 자신을 긍정하는 것, 혹은 '그래도 된다'와 같은 것들이다.

하루키는 오랫동안 소설들에서 여러가지를 이야기해왔지만, 어쩌면 그것은 비슷한 것들이 아니었을까. 그래도 된다는 것. 그렇게 해도 괜찮다는 것. 지금 그러고 있어도 괜찮다는 것. 하루키가 대학교  때의 나에게 말해준 것도 그런 것이었다. 대학 어느날의 나는 도서관에서 네 마리 째의 '태엽감는 새'를 찾아다니고 있었다. 푸른 검색 화면은 그것이 그 안에 있다고 말해줬지만, 그것은 어딘가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아마도 누군가가 자신만이 아는 장소에 그것을 숨겨놓았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찾는다는 명목으로 도서관을 헤매고 다녔다. 도서관은 빠져나올 수 없는 미로와 같았고, 안쪽 깊숙한 곳에는 양사나이나 일각수가 있을 것 같은 어두침침한 방들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도서관 앞 광장에서는 연일 목적을 알 수 없거나, 애써 목적을 모른채 했던 집회가 이어졌고, 나는 소리가 점점 들리지 않는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하루키의 소설들을 읽었다. 들리지 않으면, 한 때 같은 목소리를 냈던 그들의 목소리들을 떠올리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그러나 아무리 깊숙한 곳에 가서도 웅웅, 웅웅 이상한 진동이 느껴졌고, 나는 그럴 때마다 창이 없는 것을 잘 알면서도 빈 벽을 살금살금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게 진짜 울리는 것일까, 아니면 내 머리 속의 무엇인가가, 혹은 하루키의 소설이 만들어낸 무엇인가가 아닐까 생각하곤 했다.

하루키는 그런 이들에게 오랫동안 '그래도 된다'고 말해왔다. 아카가 했던 이야기에서처럼 하고 싶어서 하는 선택들이 아니라, 어떤 것을 피하기 위해 할 수 없이 하는 선택들이 하루키는 정작 중요한 것이라고 말해왔다. 그런 것 중의 하나는 악령을 피하는 것이다. 완벽해지려는 악령, 일체감을 느끼려는 악령, 정확해지려는 악령, 누구보다도 뛰어나려는 악령들을 우리는 피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 시작은 일단 '그래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색채가 없어도 괜찮다고, 남들보다 뛰어나지 않아도, 무엇인가가 완전하게 조화되지 않아도 괜찮아고 생각하는 것. 불완전한 당신은 불완전한 선택을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는 것. 마음은 어딘가로 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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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3-08-18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쓸까말까 하다가 한 마디를 붙여놓는다. 그러니 사실 이 이야기는 (하루키의 많은 이야기가 사실 그러했듯이) 김난도 식의 <아프니까 청춘이다> 같은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다. 하루키의 이야기는 사회에 대한 분노나 성찰보다는 늘 개인의 내면으로 들어가 견디는 법이나 휩쓸리지 않는 법을 얘기해왔다. 그러나 나는 그것 또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위무와 분노는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지, 다른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우선될 것은 아니다.

그래서 대학 때 나는 하루키의 많은 책들에 끌렸던 것은 아닐까. 당시의 많은 책들은 분노하는 법을 가르쳐줬지, 자신을 스스로 위무하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래서 이 <색채가 없는...>은 하루키의 다른 많은 책들과 함께 여전히 뭔가 걸리는 부분이 있지만, 적극적으로 비판하지는 못하겠다. 그저 예전의 작은 위무에 대한 작은 보답이라고 해두자.

걸리는 부분 중에 하나는 예를 들어 책 안의 강조점과 같은 부분들이다. 하루키의 소설 혹은 에세이들에는 늘 강조점(글씨체가 바뀌는 것 같은)들이 있다. 나는 이상하게도 어떤 글이든 중간에 색을 바꾼다거나 글자체를 바꾼다거나 하는 강조가 들어간 글들을 잘 읽지를 못하겠다. 나는 여전히 강조는 결국 읽는이가 해야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Shining 2013-08-22 1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쓸까말까하다 (저도) 한 마디를 덧붙이자면, 이번 리뷰는 본문보다 덧과 댓이 조금 더 좋네요.

맥거핀 2013-08-23 17:3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Shining님 요새 많이 바쁘신가봐요. 서재에도 뜸하시고...바빠도 건강 잘 챙기세요. 저는 요즘 여름감기로 애를 먹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