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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범들의 도시 - 한국적 범죄의 탄생에서 집단 진실 은폐까지 가려진 공모자들
표창원.지승호 지음 / 김영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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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표창원은 현재의 우리 사회를 '공범들의 도시'라 부른다. 표창원 교수는 지난 대선에서 불거졌던 몇몇 이슈들에 대한 지속적인 문제제기를 통해 보다 많은 대중들에게 알려졌지만, 그의 본래 주종목은 범죄심리학이나 프로파일링, 경찰행정 등 범죄학, 경찰학 전반에 대한 부분이다(사실 그가 국정원 사건 등에 깊숙이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도, 그 사건에 경찰이 깊숙이 개입되어 있었기 때문에, 즉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날 국정원 여직원의 오피스텔에서 (윗선 누군가의 지시에) 쩔쩔매며 우왕좌왕하던 경찰들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유명한 인터뷰어 지승호와의 인터뷰 전반을 담은 이 책은 최근에 불거진 정치적인 이슈에 대한 부분보다는 그의 주종목으로 돌아가 범죄, 경찰, 과학수사, 사법시스템 등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경찰과 사법에 대한 그의 평소 견해를 드러내는데, 그가 보는 우리의 경찰 시스템과 사법 시스템 그리고 더 나아가 이 사회는 결국 '공범들의 도시'라는 것이다.
 
먼저 눈에 보이는 공범층이 있다. 정치적인 경찰과 검찰, 정치인들과 재벌 총수와 가진 자들이 벌이는 그들만의 리그. 예를 들어 재벌 총수들이 벌이는 수많은 피해자를 양산하는 횡령, 배임, 탈세, 사기와 같은 경제적 범죄들은 언젠가 그 회사에 고문변호사로 들어갈지도 모르는 정치적인 검사와 판사들에 의해, 그리고 그 기업과 관계를 가진 여러 경찰과 검찰의 고위직 인사들, 정치인들에 의해 무혐의 처리되거나 솜방망이 처벌로 끝난다. 큰 정치적인 파장을 일으킬 수 있는(최근의 국정원 사건과 같은) 사건들은 '그분'에게 피해가 갈까, 미리 알아서 기는 경찰과 검찰의 고위직들에 의해 작게 축소되거나 아예 없던 일이 되며, 그 고위직들은 언젠가 '그분'의 은덕에 의해 더 좋은 자리로 영전한다. 그러나 이들은 사회적 약자들이 벌인 범죄에는 때로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주거나 범죄라고 볼 수 없는 일들도 때로는 범죄라고 단죄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눈에 보이는 공범층이 전부가 아니라는 점이다. 눈에 보이는 공범들이 전부라고 한다면, 그들을 솎아내면 된다. 그런데 만약 우리 사회 전체가 공범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공범들이 점차 우리사회 전체를 공범들로 만들고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즉 이 만연한 공범들이 무서운 것은 이들이 점차 우리사회 성원 모두를 공범들로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점차 기꺼이 공범이 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청소년 대상 조사에서 44%가 '10억 원을 준다면 징역 1년 정도 살 짓을 저지를 수 있다'고 답했다는 통계 조사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사회에서 점차 정의와 원칙에 따라 사는 것, 정의롭다면 자기 이익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것은 바보같은 짓이라는 견해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수없이 그에 합당한 예들을 보기 때문이다. 학교에서는 권선징악을 가르치지만, 실제 사회에서는 도리어 선인이 불행한 삶을 살고, 오로지 자기 이익만을 좇았던 악인이 행복한 삶을 산다. 이는 표창원 교수가 이야기하듯 한편으로는 경찰과 검찰 등의 사법기관이 만들어낸 것이기도 하다. 정상적인 사회에서 사법시스템은 사회의 약자가 걸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다. 부당하게 대우받았거나 가혹한 폭력에 시달리는 사람들도 사법시스템이 온전하다면 언젠가 저들에게 법의 심판을 받게 하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사법 시스템은 무엇이라고 답했는가? 예를 들어 그들은 그렇게 말했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 그러니 우리는 학교폭력을 저지르는 우리의 아이들에게 가서 사죄하고, 잘못을 빌라고 이야기하기보다는, 맞은 애한테도 책임이 없다고 볼 수 없고, 빌미를 제공한 면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되어간다. 이것이 사회가 어지러웠기 때문에 쿠데타가 어쩔 수 없었다고 이야기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그러니 그들의 논리라면 "성공한 학교폭력 역시 처벌할 수 없다."

즉 잘못된 사법시스템은 단지 한 사건에 대한 잘못된 판단으로 끝나지 않고, 추가적인 문제를 일으킨다. 그것은 그 사회를 점차 잘못된 사회로 만들어 나간다는 점이다. 그것은 영화 <화이>에서 석태(김윤석)가 화이(여진구)에게 제시한 괴물이 가득한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론을 떠올리게 만든다. 괴물이 가득한 세상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어서 빨리 괴물이 되는 것이라는 그의 진심어린(그렇기 때문에 더 무서운) 충고 말이다. 그렇게 우리들은 괴물을 보지 않기 위해 괴물이 되는 방법을 택한다. 그들이 윗사람들에게는 설설 기며 죄를 죄가 아닌 것으로 만들거나 솜방망이 처벌을 하고 일반인들의 잘못에는 필요이상의 가혹한 처벌을 할 때, 우리들은 가진 자들의 탈세나 학력위조 같은 것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대신 연예인들의 군대문제, 학력문제에는 기꺼이 'X진요'를 결성한다. 그들이 옛날에 친일 안 사람이 어디있어, 그 시절에는 어쩔 수 없었지,라며 그들의 행동을 정당화할 때, 우리는 군대가 다 그렇지 뭐,하며 후임을 괴롭히거나 선후배가 관계가 다 그렇지 뭐,하며 아랫사람을 괴롭힌다. 그렇다면 모두가 괴물이 되면 될까. 그렇게 된다면 모두가 괴물이니 상관이 없을까.

모두가 괴물이라는 것은 '사회'가 아니라는 말이며, 이제 끝났다는 말이다. (고등학교를 나온 사람이면 누구나 알듯이) 그것은 홉스의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고, 사회 계약이 아직 탄생하기 이전이다. 즉 이는 사회를 해체시키는 것과 다름이 아니며, 시스템의 유지를 점점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표창원의 '안타까움'의 본질은 아마도 그것인 것 같다. 책을 읽다보면 느끼는 것은 표창원의 감정은 분노보다는 안타까움에 가깝다는 점이고, 그것은 이들의 이러한 공범만들기가 결국은 사회시스템을 붕괴시키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그가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는 (이렇게 나누는 것이 별 의미가 없을지 모르지만), 그를 진정한 의미의 보수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보수는 결국 시스템을 쓸만하게 만들어서 유지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며, 사실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진보와도 맞닿아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보수라고 혹은 진보라고 스스로 규정하는, 사실은 극단에 있는 자들끼리도 역시 서로 통한다. 모두를 괴물로 만들자고 하는 어떤 이들이나 혹은 폭력으로 사회를 탈취하여야 한다고 말하는 어떤 이들은 극과 극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동일하게 사회를 무너뜨리자고 말하고 있다.) 진보이든 보수이든 최종의 지향점에 있는 것은 결국 같다. 그것은 힘없고 약한 자들도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유지시키는) 것이다. 그것이 적어도 '사회'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쩌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은 결국 '애쓰는 것'일지도 모른다. 괴물이 되지 않으려 최대한 애쓰는 것. 괴물을 하나하나 쓰러뜨려 나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겠으나, 그러기에는 괴물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아니, 설혹 나머지 모두를 쓰러뜨릴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하고 있는 우리는 괴물이 아니라 말할 수 있는가. 다른 모두를 쓰러뜨린다고 해도 내 안에서 퍼지고 있는 괴물 바이러스는 어떻게 할 수 있다는 말인가. 나이브하다고 해도 우리에게 남은 것은 결국 애쓰는 것 뿐이다. 그저 어떻게든 애쓰는 수밖에 없다. 상대방 죄수의 선택을 모르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애쓰는 것 뿐이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를 쓰러뜨리고 돌아서는 화이보다는 다른 것을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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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3-11-12 0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슷한' 책에 질려서 말인데, 비슷해도 사례나 해석이라면 여러가지를 수평적으로 가질 수 있잖아요, 그런데 이분도 그 범죄심리 프로파일링 책을 몇 권 내시다보니 읽는 입장으로선 다 볼 수도 없고 그러기도 싫은데 몇 권의 책이 도대체 어떻게 다를까 생각하게 되는 저자분들 한 분이세요. 저로선.

이지아가 컴백한다는 기사 밑에 달린 조부모님대 친일 악플들.. 저는 '태왕사신기' 때부터 이지아가 싫지 않고(차라리 좋아서) 좀 다양한 생각이 들었는데요. 친일은 용서받거나 정당화할 수 없는 죄지만 그 잣대를 어디까지 들이댈까의 문제는 쉽게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고, 그걸로 사람을 벼랑으로 몰고 가는 것도 보기가 안좋고.. 결과적으로 모두가 돈 많은 자본가에다 부자고 강하다면 그럴 필요도 없을텐데.. 여튼 저는 거기서 댓글 달고 노는 사람들은 대체 뭘 하는 사람들인지 항상 궁금합니다.. 알라딘 서재에 와서 내가 올린 글에 댓글 달기도 벅찬 시간들인데.. ( '')

왜 또 끝이 이상하지..(..)(..)

맥거핀 2013-11-12 22:30   좋아요 0 | URL
한마디로 찌질한거죠. 물론 근원을 올라가면 친일청산의 문제부터, 연좌제 같은 문제까지 따져야할테지만, 말씀하신대로 그걸 댓글을 달고 씹고 하는 문제와는 또 약간 다르죠. 건드릴 수 없는 누군가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그 울분을 만만한 사람한테 푸는거죠. 암튼 참 이상해요. 친일파의 후손들이 정관계, 경제계 모든 것을 주무르는 나라이기도 하고, 심지어는 기꺼이 나라의 최고지도자로 뽑기도 하지만, 동시에 독도문제니 동북공정이니 뭐니 하면서 갑자기 민족주의의 기치를 드높이는 나라이기도 하죠.

아무튼 최근에 이슈가 많이 된 분이죠. 저는 또 정치적인 문제만 너무 많이 들은 책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범죄니 과학수사니 경찰내부문제니 하는 잘 모르는 분야의 얘기들이 많아서 좋았어요. 본인은 도리어 정치와 계속 약간 거리두기를 하고 싶어하는 듯하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이런 분은 계속 정치 안했으면 좋겠어요.

끝 좋은데요?

가연 2013-11-13 1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0억을 준다면 징역 1년 정도 살 짓을 저지를 수 있다, 는 부분은 좀 충격이었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10억이 아니라 100억이라면? 100억이 아니라 500억이라면?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하다보니 저 스스로는 과연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더군요. 그래도 그런 상황에 처하더라도 말씀하신대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애쓸 수 밖에 없겠지요.

맥거핀 2013-11-14 23:54   좋아요 0 | URL
네..저도 그런 식으로 생각해보니 자신이 없네요. 어떻게든 애써야한다,라고는 생각하지만, 그 '어떻게든'이 도대체 무엇인가, 그게 어떻게 가능한가,라고 묻는다면 사실 별다른 할 말이 없습니다. 아무튼 괴물이 되는 길은 괴물이 되지 않는 길보다 더 쉽죠. 아니 더 쉽다고 믿으면서 스스로에게 윤리적 우월감을 불어넣는 것밖에 방법이 없을 것 같기는 합니다(그것이 위선이라거나 혹은 고고한 척이라고 비난받는다고 해도요).
 

 

 

 

 

 

 

 

 

 

 

화이, 장준환, 2013

 

 

(영화의 내용과 결말이 들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기다려온 장준환의 신작 <화이>는 아직까지 회자되는 <지구를 지켜라!>와 마찬가지로 가히 캐릭터들의 열전이라 부를만 하다. 장준환의 영화는 사실상 스토리 중심의 영화라기보다는 캐릭터 중심의 영화라고 말할 수도 있는데, 전작에서도 일단 주목을 끄는 것은 특이하지만 매력적인 캐릭터들이었고, 이번 영화 <화이>에서도 (개인적으로) 흥미를 끌었던 것은 스토리보다는 그 캐릭터들이었다. 전작에서도 그렇지만, 이 영화의 수많은 캐릭터들도 사실 보통의 범주를 벗어나 있다. 영화의 중심축인 낮도깨비 강도단의 다섯 명의 캐릭터들은 물론이거니와, 이들과 한통속인 형사(박용우) 혹은 이들을 뒤쫓는 형사(김영민)도 그러하며, 또다른 갈등의 중심축인 진사장(문성근)이나 그의 수하인 실장(유연석)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보면 이들은 모두 일종의 괴물이라고 볼 수 있는데, 다시 말해서 영화 <화이>는 부러 영화의 모든 캐릭터들을 괴물들로 채우고 질문을 하는 영화다. 괴물이 가득한 세상에서 살아남는 두 가지 중의 길, 그 중의 어떤 길로 나아갈 것인가? 하나는 그 괴물들 중의 하나가 되는 것이다. 낮도깨비의 리더이자 화이(여진구)의 심리적인 아버지 석태(김윤석)이 제시하는 길. 그가 말하는 괴물이 되어야, 괴물을 보지 않게 된다는 말 자체는 그다지 잘못되었다고만 말할 수는 없다. 그것도 분명히 가능한 방법 중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다른 하나는 괴물과 맞서서 모든 괴물을 가능한한 제거하는 것이다. 주인공 화이가 결국 선택하는 길. 아직도 수많은 괴물들은 여전히 세상에 남아있지만, 화이에 의해 적어도 위에 제시된 괴물들은 모두 제거된다(화이가 직접적으로 제거하지 않았더라도 결국 이들 모두는 화이가 제거했다고 말할 수 있다. 창고에서의 대규모 총격씬이 이를 잘 말해준다).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하면 무엇인가 찜찜한 부분이 남는다. 과연 이 둘은 다른 길이라 할 수 있을까?

 

이 영화의 캐릭터들이 괴물인 것은 그들에게 맥락이 없기 때문이다. 맥락이 없다는 것은 그들의 행동 패턴이나 사고의 연원을 잡아낼 수가 없다는 말이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이러한 행동을 보여줬을 때 이렇게 나올 것이다, 혹은 이 행동 뒤에는 이렇게 움직일 것이다라는 어느 정도의 패턴과 맥락이 있다. 그런데 예를 들어 낮도깨비 강도단이 범죄 행각을 벌일 때를 보면, 이들은 거의 무정형적인 패턴과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움직인다. 그래서 조직의 브레인이자 설계자인 진성(장현성)은 이렇게 멋대로 할거라면 계획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화를 낸다. 즉 괴물이 무서운 것은 그들이 우리들과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여기에서 감독의 전작 <지구를 지켜라!>를 떠올릴 수도 있다. 외계인, 혹은 외계생물체의 가장 두려운 점은 그들이 본질적으로 우리와 다르다는 점이다. 아마도 외계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무엇인가가 미래에 온다면, 분명히 우리가 예상한 형태와 방식과는 전혀 다를 것이다. 우리의 예상은 결국 '인간의' 예상을 넘지 못한다). 그런데 맥락을 알 수 없는 것은 사실 이들 뿐만이 아니다. 사실 영화 <화이>는 언뜻 보면 매끄러운 플롯처럼 보이지만,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석연치않거나, 조금 더 설명이 필요한 부분들이 많다. 예를 들어 이들 낮도깨비 강도단이 이렇게 모이게 된 연원에도 여전히 조금 미심쩍은 부분들이 남아있고, 이들 각자의 과거들, 그리고 이들과 형사들과의 관계, 혹은 임형택(이경영)과의 관계에도 약간은 설명이 필요한 부분이 남아 있다(물론 풀리지 않는 가장 큰 의문 중의 하나는 왜 이들이 화이를 키우고자 했는가,라는 점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 연장선상에서 생각해 보면 맥락을 알 수 없는 것은 절대악, 괴물의 반대편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임형택도 마찬가지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영화 속 인상적이고도 기이해 보였던 장면 중의 하나는 임형택 부인의 병상 앞에서 펼쳐지는 석태의 과거 회상이다. 이 과거 회상에서 임형택은 그야말로 선한 인물이다. 그는 자신을 해한 인물마저도 감싸안으려 애쓰는 그런 인물이다. 즉 사실 여기서의 그의 행동 패턴은 보통사람들에서 벗어나 있다. 편의상 석태를 '맥락이 없는 악'이라 지칭한다면, 임형택을 '맥락이 없는 선'이라 부를 수도 있다. 즉 절대적이고 맥락이 없다는 점에서 석태와 임형택은 거울상이다. 어쩌면 석태의 임형택을 향한 증오도 그런 것에서 연원한 것이 아닐까. 당신과 나는 매우 다르지만, 어떠한 면에서는 같다. 다시 말해서 임형택은 맥락이 없다는 면에서 역시 다른 이름의 괴물이고, 석태는 그에게서 자신의 옆에서 계속 따라다니는 괴물을 본다. 하얀 괴물을. (그러므로 맥락이 없는 연결처럼 보였지만, 어떻게 보면 바로 그 시점에서의 석태의 회상은 적어도 그에게는 필요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거기에서 그렇게 묻고 있다. 사실은 당신들도 괴물이 아닐까?)     

 

 

그리고 그들의 중간에 있는 화이가 있다. 그의 선한 심성, 혹은 그림을 그리는 재능 등은 그의 생물학적인 부모로부터 물려받았지만, 그의 운전실력이나 냉철한 판단력, 민첩함, 혹은 어떤 잔인함 같은 것들은 그의 아버지들로부터 물려받았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말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아마도 가장 이상해 보이는 설정은 그가 석태와 마찬가지로 괴물을 본다는 설정일 것이다. 그런데 그가 보는 괴물의 형상은 특이하다. 그가 보는 괴물의 형상은 언뜻 나무 뿌리가 붙잡고 있는 괴물처럼 보인다. 나무 뿌리가 붙잡고 있는 괴물이라면 괴물이 되어가고 있는 그를 어떻게든 나무뿌리, 그러니까 선한 핏줄이 붙잡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혹은 어떻게든 괴물이 되기를 강요하는 석태에 맞서서 그의 근원에 있는 선이 붙잡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어찌되었던 간에 그를 지금까지 지탱해 온 것은 그의 근원에 있는, 그의 부모로부터 온 선함이다. 그런데 혹 이를 이렇게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것은 나무 뿌리가 붙잡고 있는 괴물이 아니라 나무 뿌리로 만들어진 괴물이다. 나무 뿌리가 어지럽게 얽혀서 만들어진 괴물이다(영화의 오프닝 크레딧을 보면 그렇게 말하는 것이 더 온당해 보인다). 다시 말해서 그에게 온 선함도 결국 맥락이 없는 무엇이며, 나무 뿌리가 붙잡고 있는 괴물이건, 혹은 나무 뿌리로 이루어진 괴물이건 본질적으로는 다를 것이 없다. 이렇든 저렇든 아무런 의미가 없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괴물만 존재하는 세계에서 사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자신도 괴물이 되는 것, 다른 하나는 괴물에 맞서서 최대한 괴물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런데 찜찜한 질문이 남아있다. 괴물에 맞서서 괴물을 아무렇지도 않게 제거하는 누군가는 괴물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도 결국 괴물이라고 답한다면 두 가지의 구분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렇든 저렇든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닐까...라는 질문. 영화 <화이>의 메인 카피는 '괴물을 삼킨 아이'이고, 그런 관점에서라면 이 카피는 중의적인 의미로 읽힌다. 괴물을 삼킨 아이는 괴물을 제거한 아이라는 뜻도 되지만, 괴물이 된 아이라는 뜻도 된다. 이것은 어느 쪽일까, 혹은 어느 쪽이라도 상관없다는 디스토피아의 전망일까. 괴물이 가득한 세상에서 결국 괴물이든 아니든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라는 얘기일까. 장준환은 쉽게 답을 주지 않는다. 그가 마지막 보여준 것은 바이올린 케이스 안에 총을 담아 떠나는 화이의 뒷모습 뿐이었다. 우리는 그들이 왜 키웠는지 그리고 결국 무엇을 길러냈는지 결코 알지 못한다. 

 


덧.
비유나 상징을 위해 너무 많은 것이 희생당하고 있지 않나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는 비유나 상징을 시각화해서 보여주려 애쓴다. 나무 밑에 들어가는 아이, 괴물의 형상, 다섯 개로 나뉘어진 아버지...이 다섯 개의 나뉘어진 아버지는 사실 원래는 하나다. 다만 그것을 눈에 드러나도록 하기 위해(두기봉이 <매드 디텍티브>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들을 다섯 개로 나누었을 뿐이다(화이는 이 아버지를 쓰러뜨리기 위해 그러니 인간을 쓰러뜨리듯이 먼저 머리를 겨누고, 팔다리를 제거한 후, 최종적으로 심장을 찌른다). 좋은 영화들은 탄탄한 서사 속에서 상징이나 비유가 자연스럽게 떠오르도록 하지만, 이 영화는 상징이나 비유를 풍성하게 하기 위해 스토리를 희생시키는 면이 있는데, 그 결과 <씨네21>에서 송효정이 지적했듯이 영화가 꽤나 산만해지고, 밀도는 점점 뒤죽박죽이 되어간다(사실 <지구를 지켜라!>도 스토리가 탄탄한 편은 아니었다). 아마도 이 이야기를 제대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또 한편의 영화가 더 필요할 것 같기도 하다. 그 '또 한편의 영화'이든 다른 무엇이든 장준환의 다음 영화도 빨리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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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단 활동이 슬슬 중반으로 접어들고 있다. 처음의 마음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슬슬 나태와 관성이 고개를 드는 때이기도 하다. 시간이 없다는 말은 늘 핑계에 불과하다. 조금 더 절실한 마음으로 책들을 보아야만 한다.

 

 

 

광신 / 알베르토 토스카노 / 후마니타스

 

'설국열차'의 머리칸 부근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광신을 가진 자들의 대결을 본다. 환각물질인 크로놀에 취해 정신을 못차리는 남궁민수와 역시 환락과 크로놀에 취해있는 일군의 무리들의 대결. 아마도 우리의 시대는 지금 그 순간에 거의 다다랐거나, 아니면 그 순간을 넘어서 머리칸의 문을 열어제치기 직전일 것이다. 물론 머리칸을 연다고 해도 그렇게 나아지는 것은 없다. 거기에는 더한 광신자이자 열차성애자 윌포드가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렇다면 남궁민수처럼 어떻게든 문을 여는 것이 해결책일까. 모든 광신들의 근원인 크로놀을 합쳐서? 그가 창 밖에서 보았다는 무엇인가는 실제로 존재하고 있을까, 아니면 그의 환상에 불과했을까. 우리는 답이 없는 채 도박을 해야하는 위험한 상황에 점점 내몰리고 있다.

 

광신 없는 세계는 이제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광신에 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광신은 남궁민수의 그것처럼 우리를 새로운 세계로 이끄는 무엇인가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이 좋을지 나쁠지는 광신을 어떻게 이용하는가에 달려있다. 

 

 

일베의 사상 / 박가분 / 오월의봄

 

아마도 그런 광신의 한 단면이 '일베'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일베에는 온갖 것들이 흘러들어왔다가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결합되어 다시 흘러나간다. 그곳은 사회의 온갖 재료들이 흘러들어왔다가 다시 오염되어 흘러나가는 거대한 역정화조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마치 카오스처럼 보이는 그곳은 나름의 규칙과 나름의 패턴과 나름의 팩트로 중무장한 곳이기도 하다는 것이 이 책을 쓴 청년 논객 박가분의 말이다(사실 그 '일베(일간베스트)'라는 이름에서도 우리는 어떤 패턴을 엿볼 수 있기도 하다). 

 

청년의 시각으로 '일베'라는 '청년들의 공간'을 보는 것은 노땅들의 분석과는 또다른 지점을 던져줄 수도 있을 것이다. 또 개인적으로 박가분의 글들을 재미있게 읽기도 했다.

 

 

파멸의 시대 저항의 시대 / 크리스 헤지스, 조 사코 / 씨앗을뿌리는사람

 

물론 그러한 광신의 이면에는 망가져가는 절대다수의 삶이 있다. 무엇인가에 취해 있지 않고서는 버티기 어려운 현실의 그늘이 짙게 우리들에게 드리워져 있다. 그것은 우리나라 뿐만이 아니라 미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이 책은 미국의 자본가와 자본주의가 인디언, 흑인, 유색인종의 희생을 먹고 자라났다고 말하는 책이다. 물론 절대다수의 삶을 망가뜨리는 미국 기업 자본주의의 실상은 사실 그다지 새로울 게 없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코믹 저널리즘으로 잘 알려진 조 사코의 그림이 가미되어 있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그는 이미 팔레스타인이나 보스니아 내전의 참상 등을 코믹(comic)이라는 익숙하지만 새로운 방법으로 다루며, 이야기를 듣는 것과 보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증명한 바 있다. 아마도 이번에도 조금은 다를 것 같다.

 

 

리딩 / 크리스토퍼 히친스 / 알마

 

그러한 광신에 대해 가장 비판적이고 논쟁적인 태도를 취했던 이들 중에 크리스토퍼 히친스와 같은 이도 있을 것이다. 이번에 출간된 그의 유작 <리딩>은 전에 출간된 <논쟁>과 본래 한묶음이었던 글들로 <논쟁>이 주로 칼럼에 가까운 글들을 담고 있다면, 이 책은 주로 서평들을 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글의 성격은 조금 다를지라도 그가 치를 떠는 것들은 여전하다. 그것은 전체주의, 종교적인 독단, 테러리즘, 국가폭력 등등의 소위 '광신'이라고 부를 만한 것들이다.

 

어떻게 보면 그는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현실을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끄집어내기 위해 책을 이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어쩌면 폭압적인 현실에 맞서는 우리 시대의 책읽기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 영화 같이 볼래요? / 김영진 외 / 씨네21북스

 

조금 쌩뚱맞지만 솔직히 말해서 서평단이 끝나기 전에 영화에 관련된 책을 한 권 쯤 읽고 싶었다. '카쿠군'님이 추천하셨길래 이때다 싶어서 밀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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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3-11-04 0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베'가 하나의 단어가 되어버렸네요... ㅠ
저런 신조어가 생겨나는 사회가 조금 서글프네요.

맥거핀님, 잘 지내시나요?
이런 활동은 정말 부지런해야 가능한거 같아요, 홧팅~ 좋은 책들 골라내셨네요.

맥거핀 2013-11-04 21:52   좋아요 0 | URL
썩 유쾌하지는 않은 말이죠. '일베'를 막는다거나, 그들을 일종의 범법자 취급하는 것이 해결책은 아닌듯합니다. 지금 서평단 때문에 표창원씨의 <공범들의 도시>라는 책을 보고 있는데, 표창원씨가 강조하는 것이 처벌보다는 예방의 문제라고 하는데, 그에 공감합니다. 먼저 그러자면 그 메커니즘을 알 필요가 있겠죠.

부지런하지 않고 허덕허덕 하면서 하고 있습니다. 이번달 책도 지금 겨우 읽기 시작했군요. 마녀고양이님도 잘 지내시죠? 가끔 서재를 볼 때마다 느끼는 건데 참 부지런하십니다.^^

가연 2013-11-04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광신을 주제로 책들을 고르셨네요. 리딩이 겹치는데요ㅎ 광신, 은 저도 추천할까 고민했었기는 하지만.. 짐멜의 돈의 철학, 이 너무 눈에 띄어서 결국 놓아두었네요.

맥거핀 2013-11-06 18:25   좋아요 0 | URL
저도 돈의 철학,을 추천할까 하다가 결국 안되지 않나 싶어서..가라타니 고진의 책도 역시 그간으로 볼 때 안된다고 보는 것이 맞을 듯 하구요. (사실은 솔직히 말해서 제대로 서평을 쓸 자신이 없어서... ) 크리스토퍼 히친스 책은 일단 재미있으니까요. 즐거운(사실 그렇게 즐거운 내용은 아니지만) 마음으로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프레이야 2013-11-05 0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평단 활동이 그렇긴 하더라구요. ^^ 그렇게라도 읽으니 읽게되는 측면도 있고 좋은 책 소개도 이렇게 하게되구요. 마음에 들어오는 책 몇 권 담아갑니다. 좋은하루 보내세요.^^

맥거핀 2013-11-06 18:27   좋아요 0 | URL
네..이번에는 현재 추천도서 0권 선정의 위업을 달성중입니다만, 뭐 이 참에 안 땡기는 책도 보고 그러는거죠(분위기를 보니 잘하면 이번에 1권 될지도..). 그리고 영화도 그렇듯이 사실 기대하고 보면 실망하는 경우가 더 많아요.^^
 


EIDF(EBS 국제다큐영화제)에서 본 영화 단상들 첫번째.

 

 

 

부즈카시(Buzkashi!), 나지브 미르자, 2012

낯선 땅에서 벌어지는 낯선 스포츠에 대한 그러나 그렇게 낯설지만은 않은 이야기. '부즈카시'란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이 벌이던 놀이에서 유래한 전통 스포츠로 타지키스탄에 널리 퍼져있다. 이는 죽은 염소를 땅에 놓고, 달리는 말을 타고 재빨리 그것을 '잡아채서' 정해진 곳까지 이동시키면 득점을 획득하는 게임으로, 많게는 백명이 넘는 인원(과 말)이 동시에 참여하기 때문에 매우 격렬할뿐더러, 늘 사고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도 또 그렇다고 해서 또 그렇게 무모한 위험만이 있는 것만은 아니며, 박진감과 스릴이 넘치는 게임이기도 하다. 영화 <부즈카시>는 이 '부즈카시'에 선수로 참여하는 세 사람의 이야기를 축으로 하여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개인 대 개인으로서 게임에 참가하는 전통의 방식을 고수하는 베테랑 챔피언 아잠과 현대식 훈련으로 팀을 짜서 게임에 참가하는 크루세드, 그리고 새롭게 게임에 참여하는 젊은 유망주 아스카가 그들이다.

여기에는 익히 보아왔던 충돌 지점이 있다. 전통적인 훈련 방식과 전통적인 게임 방식을 존중하고 그에 최선을 다하는 아잠과 현대적인 훈련 방식으로 새로운 전환을 꾀하는 크루세드의 충돌이 그것이다. 아잠은 팀을 짜서 훈련하고, 팀을 짜서 게임에 참여하는 크루세드 측을 '마피아'라고 부르면서 비난하고(일종의 팀으로서 게임을 하게 되면, 당연히 유리할 수밖에 없다. 화투판에 팀을 짜서 들어오는 것과 마찬가지다), 반면 크루세드는 한꺼번에 백명이 넘는 인원이 뛰어드는 현재와 같은 방식은 스포츠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의 꿈은 이 '부즈카시'가 올림픽 정식종목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젊은 유망주로서 그 한 가운데에 놓여 있는 아스카가 있다. 그는 아잠의 방식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크루세드의 방식을 택할 것인가. 그러니까 이 <부즈카시>라는 영화의 미덕은 일종의 '이야기'가 살아있는 것에 있다. 특색을 가진 인물들과 그들의 충돌과 그 사이에서의 어쩔 수 없는 선택. 많은 영화들이 꿈꾸지만 사실 잘 만들어내고 있지 못한 것을 이 영화는 능숙하게 구사하고 있다.

영화가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이야기 상에서의 충돌 외에도 다른 충돌들도 잡아내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여기에는 모든 것이 느리게 흘러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유목의 공간과 빠르고 격렬한 부즈카시가 보이는 충돌 같은 것이 있다. 격렬한 부즈카시를 보여주는 사이사이에 느린 호흡의 장면들 - 예를 들어 아잠이 산등성이를 뛰면서 훈련하는 장면을 먼 전경에서 정지된 카메라로 잡아낸다거나 하는 장면들 - 을 삽입하고, 아주 가까이에 붙어서 말과 사람들의 충돌을 보여주다가도 카메라는 언뜻언뜻 아주 뒤로 물러나 먼 발치에서 그 스포츠를 지켜보는 관객들의 표정을 느리게 살핀다. 이러한 정과 동의 충돌은 어쩌면 이곳 타지키스탄의 현재를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 산과 양과 염소와 유목민만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곳에도 변화는 일어나고 있고, 느린 이곳에도 빠른 다른 것들이 점점 들어오고 있다. 크루세드의 훈련장에 울려퍼지던 빠른 비트의 음악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영화의 마지막에 무엇인가 쓸쓸한 기운이 감도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빠른 변화 속에 이들이 언젠가 사라질 운명의 것임을 우리가 예감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그러나 그렇게 슬퍼할 것만은 아니다. 영화는 또 마지막에 새로운 탄생을 보여주기도 하니까. 아잠의 아들은 언젠가 의사가 될 것이고, 새로 태어나는 새끼 염소도 있으니까. 사라짐과 탄생이 교차하며 삶은 이어진다.

 

 

 

100m 위의 고독(The Solitary Life of Crane), 에바 웨버, 2008

에바 웨버의 이 27분짜리 짧은 다큐는 고공의 크레인에서 외롭게 일하는 기사의 하루를 다룬다. 영화가 취한 방법은 조금 색다른데, 영화가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크레인 위에서의 그들이 아니다. 사람 한 명 앉으면 꽉 들어차는 그 공간의 답답함이나 폐쇄성이 아니라,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그들이 보는 세계이다. 100m 위의 좁은 공간에서 그들은 세상을 관찰한다. 지상에서는 누군가가 집을 나서고, 집안을 청소하고, 옥상 위에서 파티를 즐기고, 혼자 앉아서 식사하고, 놀이터에서 아이들과 놀아주고, 비오는 퇴근길에 우산을 쓰고 귀가를 재촉하고, 전화로 누군가에게 화를 내고, 아무도 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며 방에서 옷을 갈아 입는다. 영화는 우리가 크레인 기사의 입장에서 그 세계를 같이 보기를 바란다. 혼자 들어가서 24시간이 넘게 앉아있어야 하는 좁은 크레인 위에서, 사람들을 100m 위의 고공에서 멀리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좁은 크레인 위에서 그들은 누구보다도 고독하다. 그렇지만 아이러니한 것은 그들이 일 외에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밖에 없기 때문에 그 사람들을 도리어 가깝게 느낀다는 점이다.

때로는 100m 위의 고독한 크레인 기사들은 어떤 이의 생활에 대해 누구보다도 많이 알게 된다. 그들이 매일 집안을 언제 청소하는지 알고, 그들이 밥을 주로 누구와 먹는지 알고, 누가 누구와 친한지 알고, 언제 일어나고 언제 잠자리에 드는지 안다. 그리고 그들이 때로 보이지 않으면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닌지 걱정하게 된다. 즉 역설적인 것은 그들은 고독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타인들을 바라보고 생각하게 됨으로서 고독하지 않게 된다는 사실이다. 반면 대부분의 우리는 시끌복잡한 지상의 세계에서 고독하지 않지만, 나 이외의 타인의 삶을 거의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점에서 고독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어쩌면 진정으로 고독했던 것은 다른 많은 삶을 바꾸기 위해 그런 곳에 올라갔던 김진숙 위원과 같은 이들보다 한번도 그런 고공의 크레인을, 그리고 크레인 위의 사람을 생각해보지 않은 우리들일 것이다.) 마지막, 영화는 런던 시내에 올라가 있는 수많은 크레인의 모습을 보여주며 비춘다. 지상의 삶을 관찰하는 수많은 관찰자들이 그곳에 있다. 매일매일 어떻게 하면 새로운 것을 쌓아올릴까 고민하는 이곳 서울에는 아마도 그보다 훨씬 많은 크레인이 있을 것이다. 고공의 관찰자들이 거기에 있다. 그들은 우리를 보지만, 우리는 그들을 보지 못한다. 

 

 

블랙 아웃(Black Out), 에바 웨버, 2012

늦은 밤, 불이 켜진 공터에 청소년들이 삼삼오오 모여있다. 뭐 그다지 놀랄 건 없다. 어느 곳에서나 어두워질수록 나이든 사람들은 어떻게든 집으로 가고, 반면 청소년들은 집을 나와 집에서 할 수 없는 것들을 하고 싶어서 안달하는 법이니까. 그런데 가까이에서 본 아이들의 모습은 조금 색다르다. 그들이 하고 있는 것은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는 것 같은 일탈 행위들이 아니고, 책을 읽고 공부를 하는 것이니까. 이곳은 서아프리카의 기니. 인구의 80%는 전기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고, 그나마 가동되는 전기도 발전소 시설의 낙후로 번번이 끊기기 일쑤이며, 아이들은 '전기를 지원해주는 집'이 부럽다고 말하는 곳이다. 시험 기간이 되면 아이들은 공항 근처로 모여든다. 시험 기간이 되면 우리네 도서관이 붐비듯이 그곳에는 공항의 공터가 붐빈다. 늦은 밤까지 불빛이 공급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비행기 소음과 날벌레들 옆에서 그들은 수학 공식을 외우고, 인체의 기관을 살피고, 주요한 세계사의 사건들이 일어난 년도를 외운다. 그러므로 제기되는 것은 왜 이렇게 환경이 열악한가라는 물음보다도, 이러한 환경 속에서 그들이 왜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려고 하는가라는 물음이다.

사실 어떻게 보면 그 두 가지의 물음은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는데, 그것을 영화는 두 가지의 교차하는 축을 이용해서 보여준다. 하나는 기니의 열악한 현실이다. 정치는 군부 쿠데타 등으로 불안정하고, 발전소를 비롯한 제반 시설들은 낙후되어 있으며, 풍부한 자원들은 거의 모두 외국으로 반출되고 있다. 그리고 다른 한 축은 그러한 현실을 보고 공부하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들이다. 그러므로 아이들의 꿈은 대부분 공무원이나 정치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나라가 정치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안정되기를 바라며 그런 세상이 오게 하기 위해 나름대로 애쓰고 있다. 공항의 불빛 속에서 공부를 하면서 말이다. 그것을 영화의 마지막은 보여주는데, 학교의 최종 시험일에 아이들은 시험을 치르고 성적은 학교의 벽에 나붙는다. 그러나 바로 그 날 라디오에서는 대통령궁이 괴한의 공격을 받아 파괴되고, 대통령은 피신했다는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다. 불안정한 정치에 조그마한 희망을 가져오리라 여겨졌던 대통령이 말이다. 그렇게 희망과 절망이 교차한다.

희망은 늘 무엇인가에 공격을 받는다. 아이들의 공부를 하겠다는 희망은 때로는 블랙 아웃(정전)에, 그리고 때로는 공부를 하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부모들의 뜻이나 가족을 돌보고, 돈을 벌어야 하는 경제적인 부분 같은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힌다. 그러나 그러한 아이들을 가르치는 학교의 늙은 선생님은 힘주어 말한다. 삶의 본질은 희망이며, 희망 없는 삶은 죽음이라고 말이다. 희망의 친구는 늘 신념이다. 그 희망이 이루어지리라는 신념에 희망은 살아남고 삶은 이어진다. 

.................

무엇인가가 교차한다. 느림과 빠름, 정과 동, 전통과 현대, 이전 세대와 미래의 세대. 혹은 고독하지만 타인을 보는 사람들과 고독하지 않지만 타인을 보지 않는 사람들. 혹은 희망 없는 현실과 희망을 만들어내려는 노력. 좋은 다큐멘터리는 그렇게 교차하는 것들을 잡아내 그 교차점들과 가까워지는 것 혹은 멀어지는 것을 지그시 살펴보도록 함으로서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숙고하게 한다. 물론 그 무엇인가 중의 하나는 그 다큐멘터리를 보는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서 교차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게 하는 것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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넙치 2013-10-29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단락 격하게 공감해요. 영화를 보는 이유기도 하고.

맥거핀 2013-10-30 21:24   좋아요 0 | URL
다큐는 특히 더 그런 것 같아요. 생각을 하게 해주는 다큐들이라 좋았습니다.

아이리시스 2013-11-03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블랙아웃]은 제가 맥거핀님이 말씀해주셨을 때 보려고 기억했는데 정신차리고 보니 첫째날에 편성되어 있어서.. 이후에 또 재방이라든지 해서 다시보기가 가능했는지는 모르지만, 여튼 제가 정신을 차린 게 둘째날이라 못..( '') 뭐 이게 자랑은 아니고 하고싶은 말도 아니고.. 제가 하고싶은 말은요, 첫번째 사진 엄청 좋아요. 말이 사람 밟고(자세히보니까 말도 밟힌 ㅠㅠ) 그래서 좋은 거 아닙니다..활력이 느껴지고 뿌연 게 뭔가 역동성이 느껴져서요. 하지만 역시 저는 저 작품을 못볼 거예요, 아마도. 저는 경기시키고 경주하고 돈걸고 스포츠하고 그런 걸 못보겠어요. 오랜만에 읽어도(요즘 좀 뜸해서) 맥거핀님 글은 글자체까지 좋네요(뭔 상관?). 뭔가 맘을 꽉꽉 채워서 가는 것처럼요.

1분만 더있음 내일입니다!

맥거핀 2013-11-04 21:56   좋아요 0 | URL
오..그래도 볼려고 했다는 얘기죠..? 좋아요, 좋아요. 위에 올린 것 말고도 몇 편 더 본 게 있어서 리뷰를 남기려고 하는데, 계속 미뤄지네요. 조금 미리미리써야 사람들에게 알리는 효과도 있고 좋을텐데...이렇게 뒤늦게 올리는 게 자기만족 외에는 무슨 효과가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저 '부즈카시'란 작품 참 좋았어요. 사진만 보면 엄청 격렬하게만 보이는데, 이 다큐멘터리에는 또 무척 정적인 장면들이 있거든요. 그게 멋있기도 하고, 일종의 리듬도 만들어내고 해서 꽤 좋았습니다. 사람 사는 게 참 다양하다는 생각을 해요. 우리는 저들의 삶을 보면서 뭔가 이질감을 느끼지만, 저들은 또 우리의 삶을 보면서 왜 저렇게 피곤하게 살까 하겠죠..

오랜만에 아이리시스님 댓글을 보니 좋아요, 좋아.

아이리시스 2013-11-05 12:44   좋아요 0 | URL
자기만족..그게 좋은 거죠.. 좋은 거예요.. 사실, 리뷰를 보고 나도 봐야지 한 적 거의 없었어요, 저는. 어차피 볼지 말지는 맘속에서 다 결정되어 있으니까. 그러니까 제 말은 알리는 효과, 미리 쓸 필요 없어요. 맥거핀님 리뷰는 그냥 그 자체로 좋아서 읽는 거예요(라고 말한다).

(다음사람1)
아..그러니까 빨리빨리 쓰란 말입니다..네? 왜 늦어요, 방송정보를 알려주고 올렸어야죠, 이렇게 뒤늦게 올리시면 자기만족 외에 우리는 얻는 효과가 뭐가 있어요. 봤다고 자랑하는 거예요? 그러지마요, 우리집에도 TV 있어요.

(다음사람2)
써준 것도 감사하지 무슨 자기 못봤다고 빨리 올리라느니 효과가 없다느니 차라리 읽지 마세요. 님 같은 사람들은 봐도좋을 작품이 아닌 것 같습니다..

(다음사람3)
힘들어서 기권



(돌아온 아이리시스) 맛난 점심 드세요!

맥거핀 2013-11-06 18:32   좋아요 0 | URL
어..(다음 사람1)이 제일 좋은데요. 저는 변태인가 봐요. 갈구는 게 좋아요. 하긴 이런 다큐는 사실 때 지나면 못보는 경우가 많아서 보고 다음날 바로 올린다해도 별 의미가 없겠죠. 그저 자기만족만 해도 다행이죠. 요즘에는 자기만족도 안되는 글들도 많아서..

아이리시스님 저녁 잘 챙겨드세요!! (비오는 날에는 늘 술이 땡기는데 그래도 밥을 먹어야겠죠.)

2013-11-09 20: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1-10 23: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인기없는 에세이]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인기 없는 에세이 - 지적 쓰레기들의 간략한 계보
버트런드 러셀 지음, 장성주 옮김 / 함께읽는책 / 2013년 8월
평점 :
절판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버트런드 러셀의 책 <인기 없는 에세이>는 그의 후기에 쓰여진 여러 편의 비교적 대중적인 에세이들을 묶은 책이다. 그의 주된 관심사는 철학이었지만, 단지 그것에만 머물지 않았는데, 그는 철학, 수학, 과학, 교육, 정치, 예술, 종교 등 인간의 거의 모든 부문에 관심을 두고, 다양한 부분에 걸쳐 자신의 의견을 활발하게 피력하였다. 그것은 이 한 권의 책에도 잘 드러나있는데, 이 책에 실린 12편의 에세이들은 철학의 효용, 인류의 정신사, 인류가 가진 관념들, 인류의 미래상 등등의 그렇게 간단하게 이야기할 수만은 없는 주제들을 다루면서도, (여러 부문에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현실과 유리된 철학적인 논의에만 머무르지 않고, 당대의 현실을 깊숙이 반영하여 날카로운 풍자와 해학으로 이야기를 여러 방면으로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 그러므로 이야기의 내용보다도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에세이들이 쓰인 현실, 그러니까 그 시기인 것으로 보이는데, 몇 개의 에세이들을 제외하고 이 책에 실린 대부분의 글들은 1946년에서 1950년 사이, 즉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하고, 세계가 급속히 두 개의 커다란 세력으로 분화하던 시기, 냉전이 서서히 그 고개를 쳐들고 있던 시기에 쓰여졌다.

버트런드 러셀이 이 때 가장 크게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반전과 반핵, 평화운동이었다. 물론 당시 대다수의 지성인들을 포함한 상당수의 서구인들 역시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기는 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결국 이긴 쪽에나 패배한 쪽에나 커다란 상처를 남겼고, 이대로 더이상 큰 전쟁이 지속되면 인류 전체가 공멸하고 말 것이라는 위기의식을 불러 일으켰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등장한 핵무기와 그것의 증가는 만약 다음번의 세계대전이 일어난다면 반드시 그것은 인류의 완전한 파멸로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를 낳기도 했다. 버트런드 러셀의 입장에서는 이것은 조금 더 특별했는데, 그는 이러한 전쟁이 인류의 어리석은 관념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인류에 해를 끼친 관념들'이라는 에세이에서 이러한 전쟁이라는 솥을 부글부글 끓게 한 재료들이 어떠한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데, 예를 들어 현대의 전쟁은 거슬러 올라가면 마녀를 처형하던 중세의 재판에서 단지 그것의 목적이 군중들의 분노를 마녀와 마술이라는 허상에 돌리고, 군중을 즐겁게 함으로서 그들의 악한 열정을 만족시켰던 것과 동일한 메커니즘을 가진다. (즉 여기에서 도리어 가장 위험하게 여겨졌던 것은 '마술을 부리는 마녀'가 아니라, '마술을 믿지 않는 것'이다. 실제로 중세에서 마술을 부린다고 여겨졌던 상당수의 것들은 마술과 가장 대척점에 있는 과학과 관련된 것이기도 했다. 이것을 다시 전쟁에 적용한다면 전쟁이 일어났을 때 가장 공격받는 주장은 '우리가 적에게 질 것이다'가 아니라, '전쟁이 (다른 목적을 위한 것이니)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질투, 국가적 자만심, 자신의 집단이 우월하다는(특별하다는) 믿음 등등의 여러 '인류에 해를 끼치는 관념들'이 결합되어 전쟁이 수행된다. 그리고 이것은 러셀의 입장으로 보면, 결국 전쟁이라는 것은 사람을 죽이고, 물질을 파괴하는 것을 넘어서, 인간의 정신세계 자체를 파괴하는 것, 인류의 정신 자체를 복구할 수 없는 파멸로 이끄는 것이기 때문에 위험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 수행되던 영국에서 반전운동을 주장하였고, 그로 인해 교수직에서 해임되고, 1918년에는 감옥에 수감되기도 했다.

그렇게 확고하게 전쟁을 반대하고, 혹시 발발할지도 모르는 나중의 전쟁을 우려하는 시각은 이 책의 곳곳에 스며들어 있는데, 그것은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이 주된 에세이들의 쓰여진 때는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개의 거대한 세력이 서서히 발톱을 드러내던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의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러셀은 이 책에서 지금으로보면 조금 의아하다고 느껴질만한 주장, 혹은 러셀 자신의 주장들과도 무엇인가 맞지 않는다고 느껴질 법한 주장을 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정부의 탄생이다. "이러한 까닭에 오늘날과 같은 국제적 무정부 상태가 지속되느니 미국이든 소련이든 어느 한 쪽이 세계 제국을 건설하는 편이 바람직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미국이 승리하는 편이 더 낫다고 여길만한 중요한 이유가 있다. (중략) 내가 미국을 편드는 이유는, 문명적인 생활 방식에서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소련보다 미국이 더 존중하기 때문이다. (p.97)" 이것이 러셀 자신의 주장들과도 맞지 않는다고 느껴지는 것은 그가 이 책에서 플라톤의 <국가론>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하며, '정적인 완전성'에 따른 철인이 지배하는 그의 이상국가론이 허구이고, 기만술이라고 맹비난하고 있기 때문이다. 덕이 전체에 위치한다는 관념에 기반한 플라톤의 <국가론>은 비판하면서 하나의 전체로서의 세계제국의 건설을 꿈꾼다는 이 껄쩍지근함을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까.

그러나 당시의 러셀에게는 대안이 없었다. 아니 몇 가지의 가능한 정치적인 대안들을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그것의 한 형태를 히틀러식의 국가사회주의(나치), 혹은 스탈린과 레닌의 소비에트에서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러셀이 보기에는 그 두 가지는 전쟁 못지 않게 위험한 것이었고, 또한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진 것이었다. 그 한 가지는 바로 교조주의인데, 그 두 가지의 사회 모두 교조주의로 이루어진, 교조주의가 만연한 사회였다. 그러므로 교조주의의 총체라고 볼 수도 있는 전쟁을 피하기 위해 또다른 교조주의로 달려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그가 발견한 대안은 경험주의와 합리성이 지배하는 사회, (비교적) 자유로운 사회라고 여겨지는 미국 혹은 영국과 같은 사회였다. 즉 그가 책에서 내내 신랄한 비판과 풍자를 가하는 것은 스콜라주의, 마르크스주의, 파시즘 등의 교조주의, 혹은 교조주의로 이루어진 불분명하고 두루뭉술한 것들이고, 그가 옹호하는 것은 경험론과 합리주의, 민주주의와 같은 가치들, 그리고 수학과 과학의 명징한 세계이다. 그리고 그는 그 교조주의의 근원에 있다고 여겨지는 것들로 거슬러 올라가 멀게는 플라톤에서 가깝게는 헤겔까지 도마에 올려놓고 비판하고 있으며, 넓게는 형이상학 전체에 교조주의의 혐의를 덧씌우고 있다.

즉 러셀은 묻는다. 이 모든 게, 즉 철학이니, 인류의 관념들이니, 과학이니, 수학이니, 도덕이니 하는 것들이 정치와 무슨 상관인가,라고 말이다(이 책에 실린 첫 번째 에세이의 제목은 '이 모든 게 정치와 무슨 상관인가?'이다). 그가 여기에서 말하는 정치란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인류의 미래를 밝게 하는 것이며, '인류에 도움이 된 관념들'을 보존하고, '인류에 해를 끼친 관념들'을 뿌리뽑는 것이고,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전쟁을 막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이 자문에 대한 자답은 이 정치의 기본바탕에는 철학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말한다. 철학은 이론적 목표와 실천적 목표를 같이 지닌다고 말이다. 즉 철학은 이론의 측면에서 과학이 아직 실험할 준비가 안된 방대한 범위의 가설을 세우는 것이며, 실천적으로는 특정의 삶의 방식을 부단히 옹호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특정의 삶의 방식이란 중요한 실천적 의미를 지닌 여러 가지 문제를 엄밀하고 사려 깊게 사고하는 습관, 삶의 목적이라는 개념을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도록 바라보는 것, 사고의 대상을 보다 폭넓은 관계 속으로 넓히는 것, 그럼으로서 현재의 불안과 고뇌에 평정을 찾는 것이다. 

그리고 러셀이 강조하는 절대 빼놓지 말아야 하는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관용과 자비와 박애이다. 러셀이 보기에 당시의 세계는 하나의 갈림길 앞에 서 있다. 러셀은 말한다. "지금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결정적인 순간이다. 인류가 유례없는 재앙에 빠질 것인지, 아니면 행복과 안전과 안녕과 지성의 새로운 지평을 열 것인지가 향후 20년 사이에 우리의 총체적 지혜에 따라 좌우될 것이기 때문이다. (p.293)" 그리고 그것은 인류가 자신의 적들에 대해서, 혹은 자신과 견해를 달리하는 사람들, 자신과 다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더 이상 서로 공격하지 않고, 관용과 자비를 갖추고 서로 얼마나 최선을 다해서 손을 맞잡는가에 달려 있다. 글쎄. 러셀이 그렇게 말한 시기로부터 60여 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놓여 있을까. 유례없는 재앙이라고 부르기는 힘들지만, 그렇다고 행복과 안전과 안녕과 지성의 새로운 지평이라고 말하기는 더욱 어려운 것 같다. 인류가 이런 위치에 놓인 것은 우리의 지금까지의 철학이 잘못되었기 때문일까. 즉 우리가 인류에 해를 끼친 관념들만을 더욱 더 널리 받아들였기 때문일까, 아니면, 단지 러셀이 현상 파악에 실패하였기 때문이거나, 그가 헛된 것에 희망을 걸었기 때문일까(하기는 러셀이 현재의 미국이 벌이는 패악들을 보았다면 무엇이라고 말했을지 궁금하기는 하다). 그러나 그의 현상파악이 틀렸고, 경험론과 민주주의에 근거하는 그의 관념이 낡아빠진 것이라고 해도, 그가 말하는 가치들, 특히 그 중에서도 관용과 자비와 박애가 중요한 것임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니 도리어 인류가 재앙으로 가까이 갈수록 서로를 관용하는 것, 그리고 서로를 긍휼하게 여기는 것은 더욱 중요해지는 것 같다. 60여년 전의 러셀의 이야기가 지금으로서는 고루해보이지만, 지금 우리가 희망을 걸 수 있는 것은 그런 닳디닳은, 낡아보이는 가치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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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3-11-04 0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쇼에게 세상을 묻다]가 생각보다 아주 좋아서 빌릴 리스트에 넣어서 도서관에 갔어요. 그전에 [비트겐슈타인 평전]을 읽고 있었는데 저였으면 당돌하게 도전해오는 비트겐슈타인을 러셀처럼 대하지 못했을 듯해서, 러셀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거든요. 반세기도 훨씬 전에 쓰여진 에세이에서 요즘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가치와 논점을 본다는 건 중요하고 그래서 가치가 있는 거겠죠. 저는 플라톤의 [국가론]이 완전한 텍스트라고 생각했는데(어떤 이론적인 관점에서는 아니고) 러셀이 그렇게 생각했구나..(끄덕끄덕) 뭐 그런 건가요, 남이 하면 이론이고 자기가 하면 이론+실천인. 아, 저 이 책 아직 안 읽었습니다..

맥거핀 2013-11-04 22:01   좋아요 0 | URL
저는 최근에 태블릿을 하나 샀는데, 전자도서관에서 이북 대여해서 보는 데에 맛들려서 신나게 보고 있습니다. 집 소파에 누워서 클릭 한 번으로 책을 대여해서 바로 읽을 수 있다니 이거 참 신세경이로구나 하면서 말이죠. 조금 아쉬운 건 책이 조금 다양했으면 좋을텐데, 소설 쪽은 그래도 괜찮은 작품들이 있는데, 인문학 쪽은 거의 읽을 만한게 없어서 아쉽습니다. (도서관 얘기 하셨길래 그냥 저의 도서관 근황을 말씀드렸어요.)

으하..사실은 비밀을 말씀드리면, (뭐 별 건 아니지만) 저는 플라톤의 <국가론>을 읽어 본 적이 없어서...최근에 천병희 선생의 번역으로 나왔다고 하는데, 그거는 전자도서관에 안 나오려나..

아이리시스 2013-11-05 12:59   좋아요 0 | URL
그런데 책을 안 읽긴 안 읽나봐요. 평소에는 거의 인지할 일도 없고 그러려니 하다가 도서관에서 책을 검색해보면 완소신간인데, 게다가 대부분 한 권밖에 안 들여온 책인데도 '거의 다' 대출가능목록에 있어요. (이런 신세경@.@)

태블릿(#.#) 좋겠다..(@.@) 웬만한 인문서가 전자도서관에 등장하는 날 우리나라도 독서국가로 발돋움하겠죠. 아니, 제가 <국가론>을 읽었다고 생각하시는 거 오해입니다..-.-;;;;;

맥거핀 2013-11-06 18:36   좋아요 0 | URL
저는 요즘에 도서관에 가본지가 100만년전이라 잘 모르겠는데 요즘에 반질반질한 새 책이 도서관에 많나보죠? 저는 사실 내용보다도 '새 거 같은 책' 이런 거 되게 좋아하거든요. 아무리 내용이 좋아도 막 헌 책 같고 그러면 도서관 책이라도 너무 읽기가 싫어지더라구요. 아이리시스님이 남들 잘 안 읽는 보물들을 잘 골라내는 걸지도 모르죠.

근데 요즘에 알라딘 중고도서점 가보면 저도 깜짝 놀랄 때가 많아요. 아니 이런 신간이 여기에 있네 싶은 책들이 많아요. 아니 한 일주일 전에 출간된 책인데, 중고서점에 막 돌아다니는 걸 보면 신기하기도 하고, 저건 좀 그렇지...싶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