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비티 Gravity, 알폰소 쿠아론, 2013.
(영화의 전체적인 줄거리와 결말이 들어 있습니다.)
1.
<그래비티>는 중력이 없는 공간에서 중력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상한 영화다. 아니 분명 이 말은 오해의 소지를 담고 있다. 영화로 인해 많이 나온 이야기이긴 하지만 중력이 '없는' 것은 아니니까. 영화의 배경이 되는 지구와 근접한 우주 공간에는 여전히 지구의 중력이 작용하고 있다(물론 지구와 멀어진다고 해서 중력이 '아예'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아주 미미하기는 하나 중력은 여전히 작용한다. 또한 많은 이야기들이 지적했듯 <그래비티>는 실제와 맞지 않는 영화 나름의 과학법칙이 존재한다. 아무튼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이 글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러니 여기서 말하는 과학법칙들이란 '영화에서 말한' 과학이다). 그런데 마치 중력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그런 중력과 (위성이) 지구를 도는 원심력이 상쇄되기 때문이다. 즉 그곳에는 여전히 힘의 법칙들이 작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당기는 힘과 회전하는 힘. 영화의 주인공인 스톤 박사(산드라 블록)는 회전하는 힘, 즉 지구 주위를 도는 위성잔해들에 의해 죽음 가까이까지 이르렀다가 당기는 힘, 즉 지구의 중력에 의해 살아 돌아온다. 전혀 멋대가리 없이 이야기하자면 이 영화는 그런 영화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이 영화는 애초에 무(無)와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다. 영화가 "소리도 산소도 없다. 외계인도 우주전쟁도 없다."와 같은 '없다' 시리즈를 메인카피로 내세웠을 때, 그것은 그 대신 보여줄 다른 '꺼리'가 있다는 자신감이다. 그 '꺼리'는 무엇인가. 그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지만, 잊고 있는 것들이다. 즉 소리도 산소도, 그리고 중력도 없는(사실은 없는 것처럼 보이는) 그 공간에서 빛을 발하는 것은 관성의 법칙, 작용-반작용의 법칙과 같은 뉴턴의 구닥다리 법칙들이다. 예를 들어 줄이 끊어진 스톤 박사는 한 번 돌기 시작하더니 계속 돌며 떠밀려나간다. 관성의 법칙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혹은 다른 무엇인가가 그녀를 붙잡지 않는다면 그녀는 영원히 돌며 떠밀려가면서 죽음의 길로 갈 것이다. (지구에서도 어느 정도는 그렇지만) 우주에서 뉴턴의 관성은 그녀를 죽음으로 내모는 무서운 역학이다. 그러나 그런 죽음의 길에서 그녀를 구원하는 것 역시 뉴턴의 역학이다.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 말이다. 우주에서 우주선이 움직일 수 있는 이유는 뒤 꽁무니로 무엇인가를 맹렬히 쏟아내기 때문이다. 그 힘의 반작용으로 우주선은 앞으로 나아간다. 마찬가지로 영화에서도 이를 간단하게 보여주는 장면이 있는데 (말이 안된다는 지적을 받기는 했지만) 스톤 박사가 소화기를 추진체로 이용하여 위험으로부터 이동하는 장면이다.
2.
이 작용과 반작용이라는 것은 영화에서 눈에 보이는 힘으로 주로 나타났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도 있다. 예를 들어 대화라는 것도 일종의 작용과 반작용이다. 극의 초반부를 이루고 있는 쓸데없어 보이는 대화들, 예를 들어 우주인들과 지구의 본부(휴스턴)가 교환하는 대화들, 그리고 우주인들이 교환하는 이야기들은 반드시 필요한 것처럼 보이는 내용들도 있지만, 외부인인 우리가 보기에는 쓸데없어 보이는 농담들이 더 많다. 그러나 그것은 아마도 그들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것들일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내용이 아니라, 누군가가 내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거나, 혹은 누군가가 나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그들이 그 사이에서 확인받고 싶은 것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우주선과 우주선 외부의 우주인을 연결한 물리적인 끈과 동일한 기능을 가진다. 그러니 그들은 우주선과 연결한 물리적인 끈이 끊어졌을 때보다 우주선과의 교신, 즉 정신적인 끈이 끊어졌을 때 더 큰 멘붕에 빠진다. 끈을 잡아당기면 다시 우주선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교신이 끊어지지 않는다면 그들은 다시 우주선으로, 혹은 지구로 돌아갈 수 있다. 이것은 여전히 작용-반작용의 세계이다.
그리고 그 반대의 세계는 관성의 세계, 죽음과 가까운 세계이다. 영원한 회전, 혹은 줄을 손에서 놓고 영원히 멀어지는 것. 그것은 영화 속에서 실제로 보여지거나 이야기로 확인되는데, 예를 들어 아이를 잃어버린 스톤 박사가 라디오를 들으며 몇 시간동안 끝없이 운전만 했다고 말한 경험은 그것은 관성에 대한 투항일 것이었다. 관성에 내맡겨서 자신을 죽음으로 가까이 내모는 것이다. 아마도 스톤 박사가 기꺼이 먼 우주로 떠나온 것도 분명히 그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처음과 끝을 제외하자면 이 곳은 관성의 세계니까. 영원히 지구 주위를 도는 세계. 위성은 한 번 지구 바깥으로 나가기 위해서 엄청난 힘(작용과 반작용의 힘)이 필요하지만, 그 후에 그 위성을 지배하는 것은 위성의 원심력과 지구 중력의 평형인 관성이다. 그 궤도에 한 번 오르게 되면 아무런 힘도 느껴지지 않는다.
3.
그러나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이는 아무런 힘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보일 따름이다. 즉 힘이 없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힘이 상쇄되는 것이다. 다시 스톤 박사의 경우로 돌아간다면, 죽은 아이는 스톤 박사의 마음에 그대로 있지만, 죽은 아이가 스톤 박사를 당기는 힘을 운전이나 우주에서의 위성 회전과 같은 원심력으로 상쇄시키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놓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영원히 그것이 가능하다면 말이다. 영원히 라디오를 들으면서 운전하거나 영원히 지구의 주위를 뱅글뱅글 돌 수 있다면, 그리고 그것으로서 죽은 아이를 영원히 잊을 수 있다면 왜 그렇게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거나 혹은 가능하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죽음과 맞닿아 있는 길이기 때문이며, 인간이 죽음을 선택하는 것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거나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이렇게 이야기해 보자. 스톤 박사는 그래비티, 즉 중력이라는 힘을 피하여 우주 공간에 왔다. 지구의 중력, 아이의 기억은 그녀를 잡아당기고, 그녀는 그것을 피하기 위해 지구를 돌다가, 이제 우주를 도는 것을 택했다. 그러나 이곳은 언뜻 무중력의 공간, 다시 말해서 힘이 없는 공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매순간 힘이 작용하고 있다. 지구의 중력과 물체의 원심력의 균형으로 힘이 없는 것처럼 보였을 뿐, 사실은 힘이 존재했다. 그녀는 균형이 무너지고 나서야 그 존재하는 힘들을 깨닫는다. 물체의 원심력이 없어져 관성으로 영원히 우주 어딘가로 떠밀려갈 위기에 처하고 나서야 여전히 그녀를 지배하고 있던 중력의 따스함, 혹은 아이에 대한 기억을 깨닫는다. 즉 아이를 잊기 위해 계속 무엇인가를 도는 그녀를 돌 수 있도록, 죽음으로 떠밀려가지 않도록 지탱하고 있는 것은 사실은 여전히 그 가운데에 들어가 있는 아이였다. 즉 우리에게는 완전한 무중력, 혹은 완전히 힘이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란 없다. 우리는 가능한 힘들 중에 어떤 것을 선택하는 것이고, 사실상 모든 인간에게 있어서 그 가능한 힘들 중에 죽음은 가장 최후의 불가피한 고려대상이다.
결국 스톤 박사는 그것을 마지막에 가서야 알게 된다. 그녀가 죽음을 선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죽음을 선택한다기 보다는 어쩔 수 없이 그것에 내몰리는 것이다. 최후까지 교신을 하려 애쓰지만 그 교신이 불가능한 것임을 깨달은 다음, 그녀가 돌연 살기로 결심하는 것은 그 죽고자 하는 액션이 살고자 하는 의지의 동일한 힘임을, 즉 결국 그것에서 최후까지 살고자 하는 자신을 보기 때문이다. 그것을 그녀가 만들어낸 코왈스키(조지 클루니)는 이렇게 표현해준다. 착륙은 이륙과 같다고. 다시 말해서 그 얘기는 우주선이 남은 최후의 에너지가 있다는 것이며, 그녀 안에 살기 위한 에너지가 남아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살기 위한 에너지란 죽기로 결심하고 산소를 끄는 힘이다. 아니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지구의 중력을 뚫고 이륙한 힘이다. 즉 착륙하는 힘과 이륙하는 힘은 같다. 무엇인가를 떠나오기 위해 이륙을 결심한 자라면, 무엇인가로 돌아가기 위해 착륙을 결심할 수 있다.
이 마지막은 말하고 있다. 떠나오기 위해 혹은 잊기 위해 노력이 필요했던 것처럼 돌아오기 위해 혹은 기억하기 위해서는 마찬가지의 노력이 필요하다. 물론 돌아오는 것에는 댓가가 따른다. 어쩌면 돌아오면 되살아나는 기억들이 더 괴롭히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댓가가 따른다고 할지라도 어쩔 수 없이 우리는 돌아올 수밖에 없다. 영원한 균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혹은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죽음과 거의 마찬가지인, 우주공간을 영원히 떠도는 삶이다. 돌아오는 것, 혹은 그래비티. 그것은 어쩌면 인간의 숙명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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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그러나 여러 장점들이 있음에도 이 영화 <그래비티>를 걸작이라고 부르기가 주저되는 부분들이 있다. 개인적 서사를 너무 쉽게 전체로 확대하거나 혹은 전체를 너무 쉽게 개인에게 봉합하는 것, 서사를 전개하는 간편한 방식(이는 사실 불가능한 귀환이다), 익숙한 할리우드의 가족주의, 영웅주의 등 언뜻 보이는 부분들도 그렇지만(그리고 왜 사고는 항상 러시아나 북한이나 중국이 치는가), 조금 더 의아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 영화의 흔히 말하는 '고난의 체험'이라는 구조이다.
물론 몇 가지 전제해 두어야 할 것이 있다. 모든 영화에서 온전한 체험은 필요하지도 않고 가능하지도 않다. 고통을 중점적으로 묘사한다고 해서 더 좋은 영화가 될 수는 없으며, 고난을 받는 스톤 박사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웅장한 음악을 우리 귀에서도 빼버린다고 해서 그다지 더 좋은 영화가 될 것 같지는 않다. 또한 그렇게 한다고 해도, 그 고통이 우리에게 온전히 전달될리는 만무하다. 주인공이 목마름으로 허덕인다고 해도 우리는 옆에 놓인 콜라를 한모금 들이켜면 되며, 스톤 박사가 모든 사람과 교신이 끊겨 공포에 떨 때도, 우리는 여전히 최신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넣고 있다. 아니 도리어 영화는 고통스러움을 효과적으로 제어할 필요가 있다. 영화를 보는 이들이 영화의 주인공들이 겪는 고통을 동일하게 겪는다면 그것은 이미 영화가 아니다. 우리가 영화가 "실감이 난다"고 이야기할 때, 그 실감은 적어도 고통이 상당 부분 제어된 실감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어쩌면 영화는 쾌감을 전달하기는 어느 정도 가능하지만 고통을 전달하기에는 부적합한 매체일는지도 모른다(도리어 글이 더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영화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관객에게 당신이 이것과 얼마나 멀어져 있는지를 깨닫게 만드는 것, 그럼으로써 정신적 고통을 주는 것은 아닐까. 예를 들어 고문받는 자의 위치에 카메라를 놓고 관객을 고문받는 자의 자리에 위치시킨 다음 고문하는 자를 보도록 했던 <남영동 1985> 같은 영화도 결국 도달할 수 있는 최선은 이 영화관의 자리가 저 고문받는 자의 자리와 얼마나 먼지를 깨닫게 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그럼으로써 그 고문에 멀어져 있는 자신의 안도감에 깃든 내면의 허위와 공포를 맞닥뜨리게 하는 것은 아닐는지. 그럼으로써 지금 영화 밖 실제의 세계를 지켜나가는 것이다.
5.
그런데 이 영화 <그래비티>는 그러한 방법론과는 조금 거리가 있다. 이 영화는 이안의 <라이프 오브 파이>와 여러모로 비교할 수 있는 부분들이 있다. 이것이 결국 홀로 헤쳐 나와야 하는 재난이라든가, 결국은 땅을 밟는 것이 최후의 목표라는 이야기적인 측면에서도 그러하지만, 영화의 구조로 볼 때도 비슷한 점이 있다. 그것은 두 이야기 모두 사실은 매우 고통스러운 경험이지만, 그 고통의 많은 부분이 다른 것으로 대체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즉 우리는 사실 거대한 재난, 혹은 매우 고통스러운 경험을 보았음에도 주인공의 고통보다는(혹은 적어도 고통만큼이나) 아름다운 바다의 모습이나 멋진 지구의 풍경을 기억한다(또한 이는 두 영화 모두 일종의 환상씬이 등장한다는 점과도 연관되어 있다). 그것은 한편으로 관객이 이 두 사람 모두 살아서 귀환한다는 사실을 확실히 인지하고 있기 때문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라이프 오브 파이>에서 주인공 파이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화자이기 때문에 죽을 수가 없으며, <그래비티>에서는 코왈스키가 떠나가는 장면이 나올 때 스톤 박사의 귀환은 예정된 것이나 다름없다(혹은 그런 장면이 없더라도 스톤 박사는 당연히 살아돌아올 것이라고 거의 모든 관객이 믿는다. 왜? 이건 우리의 믿음에 보답하는 할리우드 영화니까). 아무튼 이 두 사람의 재난은 고통스러운 경험보다는 도리어 멋진 체험이나 아름다운 기억에 가깝다.
그 이유를 한편으로 카메라에서 찾을 수도 있다. 영화의 초반부 스톤 박사를 지켜보던 카메라가 그녀의 헬맷으로 가깝게 다가가더니 그녀의 시점숏으로 전환되는 장면이 있다. 허문영이 <씨네21>에서 '외설적'이라고 말했던 그 장면이다. 이 장면은 영화가 본격적으로 체험으로 전환하겠다는 신호다. 그리고 이후에도 몇 장면은 그녀의 시점숏으로 보여진다. 그런데 조금 이상한 것은 이 시점숏들이 그녀의 고통을 보여주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는 점이다(내가 기억하는 예외적인 거의 유일한 장면은 얼굴이 뚫린 동료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녀가 죽기로 결심하거나, 지구로의 귀환을 견뎌내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그녀 옆에서 그녀를 비추고 있으며, 이 때에는 영화는 체험이라기보다는 관찰에 가까워진다. 그리고 도리어 그녀에게 가장 고통스러웠을 장면, 예를 들어 코왈스키와 줄을 잡고 있는 장면 같은 것은 (나쁘게도) 스펙터클하게 찍혔다. 물론 가장 스펙터클한 장면은 그녀의 시점숏으로 보여지는 지구의 장관이다. 즉 우리에게 체험을 극대화하여 느끼도록 하는 장면은 사실 그녀의 고통과는 거리가 멀다. 그렇다면 이 체험은 결국 무엇을 위한 체험이란 말인가. 그런 의미에서 영화 초반부의 카메라는 허문영의 말대로 '외설적이다'. 허문영은 다른 의미에서 외설적이라고 말했지만, 나는 관객을 향한 그 장면의 무람없음 때문에 외설적이라고 말하고 싶다.
6.
그래서 지구로 돌아와 발에 땅을 내딛는 그녀의 모습을 보여주는 씬에서 다시 명백한 1인칭 시점숏으로 돌아오지만 그 체험에 미심쩍은 잔상이 남는다. 그녀의 귀환과 땅에 발을 내딛는 첫 발걸음에 응원의 의미로서 박수를 보내고 싶은 마음은 여전하지만, 그 웅장한 첫 발걸음에 그렇게 마음이 동하지가 않는다. (또한 <라이프 오브 파이>는 적어도 이 뒤에 파이의 고백을 붙여놓는다는 점에서 적어도 이 영화와는 조금은 다른 길을 간다.)
반 농담으로 한 마디 붙여두자면 최근에 들어서 어떤 영화가 좋은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을 때, 진정으로 좋은가, 좋지 않은가를 나는 매우 간단한 방법으로 파악하게 되었다. 열심히 살아야겠다,라고 생각이 든다면 진정으로 좋은 영화다. 좋은 영화다,라고 생각이 든다면 진정으로 좋은 영화가 아니다. 나는 <그래비티>가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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