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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내성적인
최정화 지음 / 창비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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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최정화의 인물들은 모두 불안한 인물들이다, 라고 첫 문장을 쓰려고 했는데, 생각해보니 너무 당연한 이야기인 것 같다. 소설의 인물들이 불안하지 않은 인물들이 있던가. '불안'의 반대편에 있는 것은 아마 '안정' 또는 '균형'과 같은 말일 텐데, 균형적으로 사고하며, 안정적인 말과 행동만 하는 인물들이 등장하는 소설이 무슨 재미가 있을까. 여태껏 대부분의 소설들이 그런 인물들을 그려왔다. 어딘가에 불안정하게 매달려있는, 위태위태하게 어디론가를 걷고 있는 사람들. 아니, 그렇다면 그것은 반대로 최정화가 (소설이라는 세계에서 볼 수 있는) 그런 흔하디흔한 인물을 다시 반복하며 그려내고 있을 뿐이라는 이야기가 되는 건가. 그렇다고 말할 수도, 혹은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사실 어떤 인물이 불안하다는 것은, 그들이 사실은 안정을 누구보다도 지향한다는 의미도 된다. 예를 들어 불안의 대표적인 증세인 강박증을 가진 인물들이 타인이 보기에 정말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행동들을 보이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보다 더 큰, 어떠한 강박행동으로도 도저히 막을 수 없는 불안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이 소설집에도 그런 인물 중의 하나가 등장하는데, 단편 '오가닉 코튼 베이브'에 등장하는 그녀는 이러한 증세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녀의 강박은 계속적으로 다른 것으로 옮아가는데, 이 강박이 균형에 대한 끊임없는 집착임을 알기란 어렵지 않다. 그녀는 '강박적으로 자기 몸에서 부족한 성분을 찾아내고', 그녀의 강박이 더욱 심해진 것은 목 디스크, 즉 신체의 균형이 깨지는 일로부터 비롯되었다. 아니면 '구두'나 '팜비치'에 등장하는 인물들. 두 소설의 마지막에서 주인공들은 극도의 불안에 빠진다. 그리고 그 불안은 자신이라는 존재를 대체하고 있는, 혹은 대체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 여자가, 자기가 나인 줄로 착각하고 내 구두를 신고 갔다고 말이에요.(p.26 '구두')", "그런데 아내는 파라솔 아래서 웬 남자와 마치 그의 마누라라도 되어 있는 듯이 마주 앉아 있었다.(p.49 '팜비치')". 자신이 위치하고 있던 하나의 세계에서 자신을 대체할 수 있는 어떤 존재. 그것이 내 자리를 빼앗아버린다면, 이 애써 겨우 균형을 잡아 놓은 이 세계에서 나란 존재는 과연 어떻게 되는 것일까. 모종의 불안감이 그들을 엄습한다.   

 

그렇게 최정화의 인물들은 어떻게든 균형을 맞추려고 애를 쓴다. (작가의 이름이 正和라서 그럴지도..라는 쓸데없는 드립을.) 위에 든 소설들 외에도 '틀니'의 아내는 다시 남편이 틀니를 끼고, 일상의 균형이 돌아오기를 바라며, '홍로'의 그는 아내가 아닌 아내와 이상한 결혼 생활을 유지하며, '지극히 내성적인 살인'의 여자(미옥)는 작가와의 어떤 균형잡힌 관계(작가가 소설을 보여주고, 그녀가 거기에 평을 하는)를 유지하고 싶어하며, '타투'의 아버지는 지나가 가진 비밀을 몰랐던 때로 돌아가기를 바라고, '대머리'의 나 역시도 어떻게 해서든 경제적인 안정을 되찾고 싶어한다. 그랬던 그들이 어떤 불균형을 맞닥뜨리고 불안의 세계로 빠져들어간다, 최정화의 소설들을 한 줄로 요약하라면 그렇게도 말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문제를 짚어볼 필요는 있다. 그들이 그렇게도 유지하려고 했던, 어떻게든 균형을 맞추려 했던 세계. 그 세계들은 긍정적으로 볼 수 있을까? 강박으로 유지되는 '오가닉 코튼 베이브'의 세계를 빼고라도 그들이 유지하려 애썼던 그 세계들은 사실 이미 어딘가모르게 삐걱거리고 있다. '팜비치'의 아내와 남편은 각자 자신이 보고 싶은 세계의 일면만을 각자 보고 있으며, '틀니'의 세계는 아내의 헌신으로 만들어진 세계였고, '홍로'의 공간은 말할 것도 없이 기이한 결혼생활이다. '타투'에서 아버지와 딸은 흔히 말하는 단절의 단계에 이미 이르렀고, '대머리'와 '파란 책'의 공간 역시 허위로 유지되는 공간들이다. 아니 굳이 여러 예를 들지 않아도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어떻게든 균형을 유지하지 않으면 곧 무너질 것 같아서 불안함을 느끼는 세계, 그 세계가 과연 건강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래서 그들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스스로 균형을 해제시키는 것인지도 모른다. 건강하지 못한 세계에서 살아나오기 위해서. 소설에는 그렇게 균형을 맞추려 노력했던 '지극히 내성적인' 그들이 스스로 균형을 무너뜨리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은 서늘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무엇인가 다른 세계가 열리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녀는 자기가 왜 그랬는지 몰랐다. 그를 불러 틀니를 끼우는 걸 빼먹었다고 알려줬어야 했다. (p.95 '틀니')" "그녀는 적절한 대답을 찾았다는 점에 대해 스스로 놀란 것 같았다. (p.113 '홍로')" "선생님이 새로 쓴 원고라며 프린트를 내밀었을 때 나는 맛있는 음식이 떠올라서 군침이 도는 것처럼 묘한 장난기가 발동했습니다. (p.143, '지극히 내성적인 살인의 경우')" "나는 그만 사촌에게 '대머리'라고 부르고 말았다. (p.206 '대머리')"   

 

그녀가 보기에 문제는 책의 두께였다. 그녀는 책들이 너무 얇다고 느꼈다. 집에는 엄지손가락 굵기 정도의 책 밖에 없었다. 새 책장 안에는 적어도 5센티미터 정도는 되는 묵직한 책이 놓여야 마땅했다. 그녀는 집 안에 새로운 소품을 들일 때가 온 것이라고 확신했다.   

서점에 갔을 때 그녀가 좀 당황했던 것은 사실이다. 책의 제목이나 저자, 출판사의 이름 대신 그녀는 책의 두께를 알고 있었다. 오십대의 깡마른 서점 주인이 안경 너머로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무슨 책을 찾으시죠?"라고 물었을 때 그녀는 계산대 위에 올린 손가락을 두들기며 잠시 머뭇거려야 했다.   

(중략)  

"아까 말씀하셨던 책이 이거 맞나요?"  

"네, 파란색에 5센티미터. 맞잖아요."  

"진작에 하이데거라고 했으면 대번에 찾을 수 있었을 텐데요."  

"하, 뭐라고요?"  

"하이데거. 이 책을 쓴 철학자요. 포장해드릴까?"  

- p.213 '파란 책'

 

그렇게 그들의 세계에 틈이 열린다. 5센티미터 정도 되는 틈이. 그것은 그들에게 불안을 주지만, 아주 나쁘다고만 말할 수 없다. 동시에 그것은 어떤 가능성이 내재된 틈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작은 틈새로 열려진 이 불안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쉽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작가가 그려내는 것은 어떤 양상이자 가능성이지, 당위나 윤리가 전제된 세계가 아니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최정화의 세계는 수많은 가능성의 세계라고 말할 수 있다. 결말이 하나로 규정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우리가 읽었지만, 그 읽은 세계를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서 각각의 이야기는 아주 다른 이야기로 규정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그것은 그녀의 소설들이 등장인물 어느 한쪽의 입장에 무게 중심이 쏠려 있기도 하거니와 그녀의 소설 전체가 어쩌면 '내성적'이기도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의 접근법은 우리에게 일방적인 독해를 강요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지극히 조심스럽다. (예를 들어 이 이야기들에는 부러 이야기하지 않는 어떤 다른 이야기들이 더 들어있는 것처럼 느껴지며, 따라서 마치 장편의 일부처럼 느껴지는 구석도 있다. 예를 들어, '대머리'에서 사촌의 손에 들린 주사기는 무엇일까. 혹은 '집이 넒어지고 있어'에서 나는 과연 살인자일까, 살인자라면 어떤 살인인가.)   

 

소설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뭐 새로울 것은 없는 이야기이다. 우리 모두는 그것을 매우 잘 알고 있다. 소설은 월요일의 출근을 믹아주지도, 산더미 같이 쌓인 일을 해주지도, 부모나 남편, 혹은 아내, 상사의 잔소리나 질책을 대신 들어주지도, 카드비나 은행 대출이자를 대신 내주거나, 전세금이 더 오르지 않게 해주지도, 내가 원하지 않는 대통령이 물러나거나, 해결되지 않은 일들이 해결되도록 해주지도 않는다. 소설이 '실제적으로' 해줄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우리가 소설을 읽으면서 할 수 있는 것은 위에 든 그 모든 것들을 피해 오로지 이야기의 앞뒤를 확장시키며 상상하는 것 뿐이다. 즉 작가가 던진 아주 작은 5센티미터의 틈에 손가락을 넣어 그 안을 최대한 들여다보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다보면 우리에게도 한가지 틈이 생긴다. 아니 한가지 잊고 있던 사실을 깨닫게 만든다. 우리 삶에도 틈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 말이다. 그 틈은 지금으로서는 5센티미터, 어쩌면 그 이하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 우리가 그 안에 손가락을 넣어보기 전에는, 다시 말해서 파란 책을 열어보기 전에는 거기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 수 없는 법이다. 최정화의 소설은 그렇게 소설이 가진 가능성이라는 것을 다시 생각해 보게 만든다. 어떤 가능성? 이런 것은 어떨까. "그렇게 해서 나는 신기한 사실을 하나 더 알게 되었다. 아이의 집이 넓어지고 있다는 걸. 그 집도 넓어지고 있었다는 걸. 집이 넓어지는 것, 그건 내 집에서만 일어나고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걸. 그러니 이제는 마음 놓고 행복해져도 될 것 같았다. 마음 편히 잠에 들 수 있을 것 같았다. (p.256 '집이 넓어지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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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06 01: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5-07 03: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5-10 18: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천국의 문 - 2016년 제40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김경욱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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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들이 떠돈다. 일단 수록된 거의 모든 작품들이 직접적으로 어떤 죽음들을 이야기하고 있기도 하다. 대상 수상작인 김경욱의 <천국의 문>은 임종을 앞둔 아버지를 돌보는 여자의 이야기이고, 윤이형의 <이웃의 선한 사람>은 미래에 예정된 죽음을 보는 남자가 나오며, 황정은의 <누구도 가본 적 없는>은 사고로 아이를 잃어버린 부모의 여행기(이것을 '여행기'라고 해도 될까?)이다. 그 뿐인가. 정찬의 <등불>은 "그가 여객선 사고 소식을 처음 들은 것은 문경새재에서였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며, 김탁환의 <앵두의 시간>은 "치숙痴叔은 쓰는 인간이었다."라는 문장으로 소설의 첫머리를 연다. 이 "...이었다"라는 과거형. 그러니까 소설은 이제 그런 인간'이었던' 치숙의 부재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는 셈이다. 

 

그러나 나는 단지 이 소설들이 어떤 죽음들을 직접적으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죽음들이 떠돈다,라고 말하고 싶은 것만은 아니다. 나는 이상하게도 이야기되고 있는 죽음들이 아니라, 이야기되지 않고 이미 부재하고 있는 것들을 통해 죽음을 들여다보고 싶다. 다시 말해서 이야기되지 않고 있는 것, 내 머리 속이 만들어낸 이상한 상상, 그러니까 그것은 아마도 오독(誤讀)일텐데, 그들을 통해서 말이다. 그 오독의 질문들 몇 가지를 해보자. 김경욱의 <천국의 문>을 가장 단순하게 이해하는 방법은 아마 다음의 이 질문을 던지는 것이 아닐까? 그 남자, 즉 여자가 병원에서 만난 사내는 과연 실재하는 인물일까. 아버지를 여자에게서 데려간 사내, 여자에게 위안을 주고, 영혼과 천국의 문을 이야기하는 사내, 그는 어쩌면 여자 스스로가 만들어낸 환상, 다시 말해서 여자가 만들어낸 어떤 유령이 아니었을까. 아니면 곧이어 등장하는 다른 유령, 김이설의 <빈집>에 등장하는 수정. 소설 속에서 수정이 원하는 것은 명백하다. 그것은 완전한 새 아파트에 방해되지 않는 하나의 유령이 되는 것. 소설은 다음의 문장들로 끝난다. "시간은 아주 오래전부터 그대로 멈춘 것 같았다. 수정은 집 안을 한 바퀴 둘러본 다음, 소파를 쓰다듬었다. 그러고는 새 아파트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빈방으로 들어갔다. (p.133)"

 

유령들의 향연은 계속된다. 황정은의 <누구도 가본 적 없는>은 유령들의 여행기이다. 유럽을 여행하던 부부는 한 식당에서 화성에 당도한 우주선에 대한 기사를 본다. 이 대화는 이렇게 끝난다. "미국이 간 거지. 아무도 없어, 저기엔. 무인無人이었으니까. 저기 갈 수 있는 사람은 지금도 없어. (p.295)" 이 비유는 중의적이다. 다시 말해서 이 소설은 아무도 없는 곳, 누구도 가본 적 없는 곳에 여행을 간 부부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누구도 가본 적 없는 곳에 간 이들, 그들이 유령이 아니면 무엇이라고 말하겠는가. 윤이형의 <이웃의 선한 사람>은 보다 복잡하다. 나의 아이를 구해 준, 미래를 보는,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정해진 미래를 사는 남자는 정말 아직도 건너편 빌라 202호 살짝 열어진 창문이 있는 방에 살고 있을까. 왜 나는 "자꾸만 지금 이 자리에 서서 건너편 빌라가 그대로 그 자리에 있는 걸 보고 나서야 안심하는 버릇을 고치지 못"하며 "길을 건너 계단을 오르고, 초인종을 누른 다음 기다리면 되"는 "그 간단한 일을 할 수가 없"는가. 어쩌면 그가 거기에 존재한 적이 없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정해진 미래를 사는 남자라는 이 흥미로운 이야기는 이 부채감에 못이기는 동화작가 '나'가 만들어낸 환상의 유령 이야기는 아닐까. 아니, 조금 더 오독의 늪으로 빠져 보자면, 이 '동화작가 나'는 존재하고 있는 인물일까. 이 모든 것은 어쩌면 이미 죽은 이(소설의 초반에 등장하는 그의 꿈을 다시 한 번 읽어보라), 즉 유령의 목소리가 아닐까.

      

그렇게 유령들, 아니 갈 곳을 잃은 영혼들은 떠돈다. 왜 이 소설들에서는 이렇게도 영혼이 떠돌고 있는 것일까. 그것에 답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이상문학상은 "당해년도 1월부터 12월 말 사이에 발표된 작품을 모두 심사와 수상의 대상에 포함"하며, 그러므로 이 작품집에 실린 2015년에 쓰인 소설들은 대체로 가족을 잃은 이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며, 우리는 그 소설들이 쓰여지기 얼마 전에 일어난 사고(아니 사건이라고 하자)를 모두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찬의 <등불>은 위의 첫 문장에서 보여지듯이 세월호 사건을 보다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윤이형의 <이웃의 선한 사람>에서도 이런 언급이 등장한다. "많은 아이들이 죽는다고만 말해두죠. 이런 나라에서 계속 터질 법한, 그렇게 사람들이 말하는, 하지만 정말로 또 터질 거라고 믿고 싶어 하지는 않는 그런 일이, 그래요, 계속 터지는 겁니다. 지금부터 몇십 년 후에도요.(p.250)" 그리고 황정은의 <누구도 가본 적 없는>에서 부부는 아이를 물에 빠지는 사고로 잃는다.) 그러니 그 수많은 영혼들이 계속 이 소설들에는 등장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혹은 가까운 이들을 잃은 사람들은 그 어디에도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갈 곳이 없는 영혼이 된 채로 여기에 머물러 있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 사건을 같이 지켜본 많은 이들은 그들의 아픔과 고통과 분노와 절규를 바라보며, 그들의 영혼을, 그리고 운이 좋았다면 자신 한구석에 숨어 있는 영혼의 존재도 살짝 들여다보지 않았겠는가.

 

아니, 나는 어떤 애도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다행스러웠던 사실은 이 소설들이 단지 상처의 확인과 애도에만 머물러 있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김경욱의 <천국의 문>은 여자가 "아빠, 아빠, 이 개자식, 나는 다 끝났어."라는 오래전 시구를 떠올린 다음, 경찰서로 전화를 거는 것으로 소설을 마무리짓는다. 김탁환의 <앵두의 시간>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치숙의 모습을 보여주며, 윤이형의 <이웃의 선한 사람>에서는 기억으로 겨우 유지되는 선한 마음의 부채감, 그 위태로움을 느끼는 바보스러운 기우들을 애써 믿으며, 이야기가 끝난다. 황정은의 <누구도 가본 적 없는>에서도 그 마지막에는 남자의 외침이 있다. 아이 로스트...... 노, 노, 미스드......로스트......즉 잃어버렸다는 사실 그것을 기억하는 한 그에게는 아직도 모종의 희망이 있다. 그리고 정찬의 <등불>의 마지막도 있다.  

 

달빛이 한층 밝아지고 있었다. 달 주위에 엷게 끼어 있던 구름이 걷히고 있었다. 트럭에 올랐다. 시계를 보았다. 네 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진도에 도착하면 아침이 될 것이다. 그 시각에 꽃을 살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다. 백합 다발을 가득 안고 팽목항으로 가고 싶었다. 시동을 걸었다. 길이 떠올랐다. 처음 가는 길이었다. 그녀를 만난 것은 길이었다. 그녀를 만난 것은 길에서였다. 처음 가는 길에서 누구를 만나게 될지 가슴이 설렜다. 길 너머에서 누군가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손은 빛처럼 희었다. (p.283)

 

빛처럼 흰 손을 가진 이가 이끄는 길. 그 길은 그녀를 만나는 길이면서, 동시에 '처음 가는 길'이기도 하다. 그는 아마도 그녀에게 '죽음을 맡'길 수 있을 것이다. 그녀를 애도하며, 이제부터 가보지 못한 길을 가게 될지도 모른다. (마지막의 이 결말은 전혀 반대되는 지점으로 읽힐 수 있는데, 그것을 어떻게 읽는가가 아마도 이 소설의 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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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지는 조금 되었는데, 어제 세월호 사건을 다룬 한 다큐 프로그램을 본 후 다시 읽고 리뷰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프로그램이 끝난 후 TV를 끄고 조금은 멍한 상태에서 다시 읽었다. 그렇게 읽다보니 이상하게도 소설 속의 거의 모든 문장들이 그 사건을 직간접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고, 의미심장해졌다. (김이설의 <빈집>을 읽으며, 부모들이 기억하기 위해 남겨둔, 아이들이 없는 그 빈방을 떠올리는 식이다.) 그 다큐에서 무엇보다도 계속 마음을 건드리는 것은 아이들이 남겨준 소중한 영상들이다. 아이들이 남겨준 소중한 메시지가 사건이 감추고 있는 것들에 조금씩 다가가게 해주는 열쇠가 된다는 면에서도 그러하지만, 그것은 우리 마음 속의 부채감, 그러니까 윤이형 식대로 표현하자면 "막 쪄낸 감자처럼 포슬포슬하고 따스한 이 현실이라는 것이 너무 눈물겹고, 우리를 제외한 세상 전체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것 같은 부채감"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그 영상들은 그 부채감을 우리에게 기억하라고 말한다. 그것을 기억하고 무엇인가를 하라고 말이다. 그 무엇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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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18 03: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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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22 00: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오에 겐자부로]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오에 겐자부로 - 사육 외 22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21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승애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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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1.  

오에 겐자부로는 고쳐쓴다. "나는 평생 젊은 나이에 시작해 버린 소설가로서의 삶에 본질적인 곤란을 느끼며 살아왔습니다. 이제 와 돌아보니 자신이 쓴 것을 고쳐 쓰는 습관으로써 그것을 극복해 왔음을 깨닫습니다. (p.744 '오에 겐자부로 후기') 중기 단편의 연작들을 제외하고라도, 묶을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즉 주제를 변주하면서 어떤 세세한 것들을 고쳐서 이루어진 듯한 소설들이 있다. 예를 들어 <기묘한 아르바이트>와 <사자의 잘난 척>, 혹은 <남의 다리>와 <인간 양>, <사육>과 <돌연한 벙어리>, 후기 단편의 <벨락콰의 10년>과 <마고 왕비의 비밀 주머니가 달린 치마>.

 

2.  

오에 겐자부로의 초기 단편들은 어떤 은유들이다. 먼저 <기묘한 아르바이트>에서 <사자의 잘난 척>으로 이어지는 세계. 다시 말해서 개를 도살하거나, 혹은 사자(死者)를 처리하는 것. 죽음을 기다리는 미약한 존재들을 차례로 도살하는 것이나, 이미 죽은 이들을 처리하는 것은 죄책감과 수치심을 동반한 행위다. 그러나 죄책감과 수치심을 동반하는 이 일을 그들은 그만둘 수 없다. 아니 그만둘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중요한 문제는 그 일에 그들이 '자원'했다는 사실이 아닐까. 즉 어떤 의미에서는 그들은 수치심과 죄책감을 느끼기 위해, 혹은 그 수치심과 죄책감을 보기 위해 그 곳에 갔다. 개를 도살하는 개백정이 있는 도살장에, 혹은 시체를 처리하는 관리인이 있는 시체처리실에. 

 

물론 1957년에 쓰인 이 소설들은 당시의 일본 사회를 은유하고 있다. 전쟁에 패배했고, (죽지 못하고 패배한 상태로 살아남았다는) 묘한 수치심과 죄책감이 지배하는 사회, 그들은 그 속에 무력하게 갇혀 있다. 남아 있는 무력한 것을 죽이거나, 혹은 이미 죽은 것들을 재확인하면서. '나'가 그곳에 자원하는 것은 어쩌면 한 켠에 물러서지 않고, 그 수치를 정면으로 봐야겠다는 의지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래야 볼 수 있는 것들, 혹은 드러나는 것들이 있으니까. 예를 들어 그것은 개에게 물린 상처이거나, 뱃 속의 아기다. 그러나 그것을 자각하거나 지켜내는 것은 여간 어렵지 않다. 소설들은 무의미해보이는 아이러니로 끝나는데, 수치심과 죄책감은 무의미한 아이러니로 남았을 때 더욱 강력해지는 법이니 말이다. 

 

3.   

<남의 다리>와 <인간 양>에서는 이것이 그래서 더욱 강력해지는 것처럼 보인다. 점액질의 두꺼운 벽, 혹은 교외로 나가는 막차 버스라는 폐쇄된 공간 속에서 그들은 죄책감과 수치심을 공유하고 있다. 그들은 퇴화했다. 그들은 자신의 마음대로 움직일 수조차 없는 상태니까. 다시 말해서 다리가 없거나, 혹은 '인간 양'이 된 상태니까. 여기에 균열을 일으키려고 시도하는 듯이 보이는 이들이 등장하지만, 그 균열은 사실 정확히 말해서 균열이라기 보다는 그 수치심을 재확인하는 것이거나 보다 강화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수치심이란 결국 비교할 수 있는 외부의 무엇인가(그 균열을 내려고 시도하는 내외부에 보이는 무엇인가)가 존재할 때 더 맹렬하게 내 안에서 고개를 쳐드는 것일테니 말이다.

 

이러한 초기작들에 등장하는 '나'들은 (이런 표현이 괜찮을지 모르겠지만) 예민한 수치심의 소유자들이며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외부가 일으키는 균열을 민감하게 바라보며, 그 외부에 한걸음 내딛는 것을 주저하는 이들이다. <기묘한 아르바이트>와 <사자의 잘난 척>의 '나'들은 역설적으로 말해서 수치심을 느끼는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그 일에 자원했으며, <남의 다리>와 <인간 양>의 '나'들은 '수치심'이라는 것을 마주보며, 그것의 작동방식을 지켜보는, 그 메커니즘을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에 그것이 침투하지 못하도록 자신 안에서 또다른 공고한 벽을 쌓는 이들이다. 그 벽들은 <사육>이나 <돌연한 벙어리>에서와 같이, 변하지 않는 폐쇄된 상태로 지속되는 공간의 의미를 재확인하는 것이거나, 혹은 극단적으로는 <세븐틴>처럼 전혀 반대의 방향으로(그러나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필연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일 수 있다. (<세븐틴>의 소년(나)이 무엇보다 원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자신을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을 '극복'하는 것이었으며, 그것은 그에게 '우익'이라는 갑옷을 입는 방식으로 해결된다.)

 

4.  

하나 재미있는 것은 이것이 '나'들로 이루어진 소설이라는 점이다. 오에 겐자부로는 세상과 자신의 사이에 이 수많은 가상의 '나'들을 끼워넣었다. 그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그는 그렇게 세상과 자신의 사이에 여러 적당한 가상의 '나'를 끼워넣은 채 거리를 유지하며 그 '나'를 통해서 수치심이 가득한 사회, 혹은 수음(手淫)을 공유하는 사회, 거대한 점액질의 두꺼운 벽으로 둘러쌓인 일본 사회를 은유하며 들여다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 두개골 이상을 가진 장남 히카리가 태어났다. 다른 가상의 '나'를 끼워넣을 수 없는 거리, 나(오에 겐자부로)와 장남 히카리(이요) 사이의 너무나도 가까운 거리. 그는 그 가까운 거리 속에서 꽤나 혼란을 느꼈던 것 같다. 그것은 <공중 괴물 아구이>에 잘 나타나 있는데, 여기에서 자신의 장애가 있는 아들을 죽게 만든 음악가 D는 그것의 죄책감을 견뎌내기 위해 자신의 세상을 정지시키고, 거기에 '아구이'라는 죽은 아들의 환영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으로서 겨우 자신의 거리 균형을 유지해낸다. 아마도 이 소설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이 음악가 D가 '나'로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또다른 소설 속 '나'가 등장해 그가 음악가 D를 지켜본다는 설정이 아닐까. 다시 말해서 오에 겐자부로는 이 소설에서 자신과 '아구이' 사이에 이 음악가 D를 지켜보는 또다른 가상의 '나'를 끼워넣으려 어떻게든 애쓰는 중이다. 그리고 그 '나'는 소설의 말미에서 음악가 D가 만들어낸 가상의 '아구이'를 실제로 경험한 다음, 그 댓가로, 그러니까 어떻게든 가상의 '나'로서 그 자리에 끼어들었던 댓가로 실명한다. 이 실명. 그것은 오에 겐자부로의 초기 소설 세계의 종말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5.   

오에 겐자부로는 그렇게 실명시킴으로써, 자신이 지금까지 구축해왔던 은유의 세계를 중지시키고 싶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두 가지의 문제, 즉 '나'라는 가상의 존재를 내세우고, 그 뒤에 숨어서 거대한 은유의 세계를 발전시킨다는 것의 비겁함과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자신으로서는 감당하기 버겁게 여겨지는 장남 히카리라는 실재가 여기에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레인트리'를 듣는 여인들> 연작에서 보여지는 것은 첫 번째 문제에 대한 극복 시도이다. 먼저 여기에서부터 감지되는 것은 극도로 가까워진 소설 속 '나'와 실제의 오에 겐자부로라는 소설가의 거리이다. 실제와 허구가 어지럽게 뒤섞인 이 연작에서 내가 흥미롭게 생각한 부분은 이 '레인트리'를 '나'가 보지 않거나, 혹은 보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는 여전히 어떤 의미에서는 그 실재를 보기를 두려워하는 것 같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한 가지 질문이 필요해지기는 한다. 그는 이 '레인트리', 그러니까 이 레인트리라는 거대한 메타포를 정말 보지 못했던 것일까, 아니면 보고도 못 본척 하는 것일까. 

 

그것의 의미를 이 연작들은 페니 샤오링 다카야스의 입을 통해 집요하게 캐묻는다. 금방 말라버리는 다른 나무들과 달리 잔뜩 우거진 손가락만한 잎사귀에 물방울을 저장해 두는 생명의 나무, 그 레인트리를 정말 보지 못했는가, 아니면 보고도 못 본척 하는 것인가. 다시 말해서 이 때 오에는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흐려놓는 이러한 방식의 서술도 정당한 방식인지, 그리고 그 생명의 나무를 진정으로 제대로 보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이 현실과 허구를 흩뜨리는 서술 방식도 여전히 이 서술들에 내재된 근원적인 의문 - 단순하게 말하자면, 이 '나'는 오에 겐자부로인가 아니면 또다른 '나'인가 - 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또한 동시에 레인트리를 '나'가 만나게 되는 공간은 일본이 전쟁을 일으킨 그 장소, 바로 하와이라는 점에서, 그의 반전과 반핵에 대한 호소는 그 전에 일으킨 전쟁의 책임, 전쟁피해자가 아닌 최초가해자로서의 일본을 먼저 논하지 않는 한 궁극적인 의미는 획득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반성이 치열하게 이루어지지 않는 한 레인트리는 불탈 것이고, 또한 거꾸로 선 '레인트리', 그러니까 반대의 의미로 지옥으로 내려보내는 '거꾸로 선 세피로트 나무'가 작동하게 되지 않겠는가,라고 오에 겐자부로는 묻고 있는 것은 아닐까... 

 

6.  

레인트리는 불탔지만, 그 돌파구는 다른 하나의 문제를 돌아보는 것으로 조금씩 열린다. <새로운 사람이여 눈을 떠라> 연작은 아버지 '나'와 장애를 가진 이요와의 이야기이다. 은유로서 비껴서 있는 것처럼, 아들의 문제에서도 '나'는 비껴서 있다. 이요가 태어났을 때의 일화, 이요가 물에 빠졌을 때의 이야기를 보면 나약한 또는 비겁한 아버지로서 '나'의 모습(그가 그 순간에도 결국 하고 있는 것은 글 속에 숨은 '인용'이다.)이 극명하게 드러나있는데, 이를 두고 '나'의 어머니는 며느리(즉 '나'의 아내)에게 말한다. "저런 인간이니까, 우리는 의지할 수가 없겠구나. 네 힘(으로), 이요를 구하는 수밖에 없다." (p.473)

 

이 나약한 아버지에게 맴도는 것은 죽음의 그림자이다. 어린 시절 강 상류 바위 사이 소(沼)에서의 죽음 충동, 다카야스의 죽음, 친구 H의 죽음...이를 요약하는 키워드는 비탄(grief)이다. 이 비탄은 어디에서 연유하였는가. '나'는 이 비탄이 이요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잘못 생각한 것이었음을, 어쩌면 그 비탄은 자신에게서 비롯되었음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 세상을 이미 몇 번이고 파괴한 자들은 이요의 세대가 아니라 그 전의 세대이고, 반면 이요와 그의 세대들은 새로운 세계를 건설한 힘을 이미 기르고 있는 중이다. 그것은 생명의 힘이고, 또한 어떤 의미에서는 건강한 성적 충동이기도 하다. 

 

7.  

그러므로 레인트리는 불탔을지 모르지만, 그것에게는 아직 다른 가능성이 남아있다. 어떤 가능성이? 부활의 가능성이 말이다. '나'는 쇠할지 모르지만, '나'라는 존재가 이요에게 연결되는 것처럼, '레인트리'는 생명의 나무로서 부활한다. 이는 단지 생물학적인 연속성이라고만 말할 수는 없는데, 어떤 의미에서는 '나'가 평화의 세계, 공존의 세계를 건설하기 위해 애쓰는 것은 폭력으로 점철된 한 세대를 파괴하고 새로운 세대를 위한 세상을 여는 노력일 것이기 때문이며, 그러한 노력으로 만들어진 세계에서 비록 그 육체는 존재하지 않아도 과거 세대는 다른 방식으로 부활한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반전 반핵을 위해 노력하는 '나'의 자세는 미래 세대를 위한 노력이며, 동시에 이요와 공존하기 위한 노력이기도 하다. 이요를 비롯한 다음 세대에게 어떤 세상을 물려줄 것인가. 오에 겐자부로는 말한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자신과 이요에게 동시에.  

 

'생명의 나무'로부터의 목소리가 모든 인류에게 격려로 고하는 말을 이윽고 노년을 맞이하여 죽음의 고난을 겪어야 할 나의 운명에 맡기고. '두려워하지 마라 앨비언, 내가 죽지 아니하면 너는 살지 못한다. / 그러나 내가 죽으면 내가 부활할 때 너와 함께하리라.' (p.566)

 

8.  

전망은 그렇게 긍정적이지 않다. 평화와 공존과 공생의 원리는 아직도 멀다. 다음의 세대는 어떠한 세상을 살게 될 것인가? <조용한 생활> 연작에서와 <하마에게 물리다> 연작에서 드러나듯이 세계는 아직 양편의 가능성으로 나뉘어 있다. 광신자와 쾨헬번호 311 피아노 소나타가 교차하고, 이요는 그리스도가 될 수도 있고, 적그리스도가 될 수도 있으며,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극단적인 폭력과 새로운 시스템을 건설하려는 희망이 병존한다.

 

오에 '나'는 보다 희망쪽에 걸어보고 싶은 것 같다. 거기에는 그리스도이든 적그리스도이든 동생 마짱을 어떻게든 붙잡고 있는 이요와 오빠가 누구이든 그곳이 어떤 곳이든지 이요와 함께 하겠다고 결의를 다지는 마짱이 있으며, 죽은 언니를 생각하며 어떻게든 아프리카로 가기 위해 애쓰는 젊은 여자(라베오)가 있고(<익사>의 우나이코를 연상시키는 캐릭터다), 하마에게 어깨에서 옆구리까지 물린 엄청난 고통 속에서도 "왓, 왓!"하고 부르짖으며 그 상황을 벗어난 젊은이가 있다. 또한 '울보' 느릅나무를 오에의 아버지-오에-이요에게 연결되는 생명의 나무 '레인트리'로 탈바꿈시킨 아이들의 노력도 있다. (<'울보' 느릅나무>)

 

이 다음의 세대들을 위해 그렇다면 오에 세대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그것은 어쩌면 겨우, 그러나 사실 무엇보다도 결연한 이것 아닐까. 그것은 <익사>에서 그랬던 것처럼 시대정신에 물든 한 세대를 기꺼이 익사시키고, 다음의 세대에게 응원을 보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오에 자신에게는 안락한 삶이나 기존의 방식에 은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부에 존재하는 하마에 물려 왓, 왓 하고 내뱉는 절규, 다른 말로 하면 <익사>에서와 같이 글 조각 하나에 의지한 '붕괴의 양상'을 날카롭게 지켜보는 것이다.

  

9.  

노년의 '나' 오에는 여전히 스스로에게 캐묻는다. 반전과 반핵, 아들 이요를 이야기하던 '나'에 그는 머물러 있지 않고 그는 앞으로 나아간다. 여기에는 이제 오로지 읽는 '나'만이 남는다. 현실의 타인들이 와 있던 그 빈자리에는 이제 책 속의 인물들이 실제가 되어 나타난다. <벨락콰의 10년>, <마고 왕비의 비밀 주머니가 달린 치마>. 현실에 나타난 벨락콰와 마고 왕비. 책 속에서 현실의 젊은이로 나타난 그들에게는 아직 갈림길이 남아있고, '나'는 늘 그랬던 것처럼 여전히 그 앞에서 머뭇거린다.

 

물론 오에 '나'는 머뭇거리는 자신에게 잊지 않고 카운터 펀치를 날린다. 초기 단편, 중기 단편, 후기 단편의 마지막들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다. 초기 단편의 마지막 <공중 괴물 아구이>에서 '나'는 아이들이 던진 주먹만한 돌을 맞고 실명한다. 중기 단편의 마지막 <'하마 용사'와 사랑스러운 라베오>에서는 엉덩방아를 찧고, 자신이 내부의 하마에게 물려 절규하고 살아왔음을 깨닫는다. 또한 후기 단편의 마지막 <불을 두른 새>에서는 전철을 기다리다가 아들의 몸을 껴안은 채 쓰러지며, 피를 흘린다. 머뭇거리는, 그 다음으로 나가기를 주저하는 자신에게 기꺼이 날리는 카운터펀치들.

 

그 카운터펀치를 맞고 어질어질한 속에서도 오에 '나'는 희망을 놓지 않는다. 아니 '나'는 자신을 채찍질하는 것으로 다른 방식의 희망을 끌어내고자 한다. <불을 두른 새>에서 그것이 잘못된 해석임을 깨닫지만 그 영혼과의 공생의 희망을 버리지 못한다. 휘파람새, 그러니까 불을 두른 새와의.

 

10.  

오에는 그렇게 끊임없이 좌충우돌하며 조금씩 나아간다. 소설의 내용면에서도, 소설의 형식면에서도 그는 과거 속에 머무르지 않는다.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실험하고, 하나의 작가를 읽고 다음의 작가로 나아가며, 과거의 어떤 것을 반추하여, 그것에 얻은 것을 통해 익숙해진 것을 새롭게 바꾸어 나간다. 그의 말대로 그것이 아마 그의 소설 쓰는 습관일 뿐만 아니라, '삶의 습관'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니까 다시 강조하여 말할 수밖에 없다. 오에 겐자부로는 '고쳐쓴다'.  

 

 

 

덧-1.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번호를 붙여서 글을 쓰는 것을 조금 '편법'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생각이 조각조각 나뉘어져 있고 그것을 연결할 능력이 안되다보니 어쩔 수 없이 글도 이렇게 조각조각 나뉘어져 버렸는데...언젠가는 이 리뷰를 '고쳐 써' 보고 싶다. 현재로서는 그럴 여력도 안되고, 너무 늦기도 해서...

    

덧-2.  

작품의 발표년도를 제목 옆에 병기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책의 말미에 리스트의 형식으로 덧붙여져 있기는 하지만, 이렇게 작가의 전 생애를 가로지르는 단편집이라면 어떤 년도라는 것도 의미가 꽤 있는 법일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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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6-04-11 23: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자체를 바꿔뵜음...그런데 조금 더 다양한 글자체가 있었으면 좋을 것 같기는 한데..

cyrus 2016-04-12 1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때 저도 번호와 부제를 붙여서 문단을 구분한 형식으로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제가 글의 분량을 많이 잡았을 시절이라서 나름대로 읽는 사람을 위한(?) 눈속임이었습니다. ^^;;

이제는 분량을 조절하면서 쓰게 되다보니 숫자와 부제를 다는 글쓰기를 버렸어요.

맥거핀 2016-04-12 16:54   좋아요 1 | URL
저는 분량의 문제라기보다는 글을 하나의 완결로 묶어낼 수가 없어서 어찌하다보니 이런 형식으로 쓰게 되었습니다. 분량은 예전에는 많이 신경썼는데 뭐..이제는 별로 신경을 안 쓰려고 합니다. 길어도 읽을 분들은 읽으시고, 짧아도...cyrus님이야 글이 길든 짧든 항상 내용이 단단하니 뭐 분량에 특별히 신경 안쓰셔도 될 듯 합니다.^^

우끼 2016-04-12 2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었는데… 정말 훌륭한 해석입니다 ㅠㅠ 이렇게는 생각해보지 못했는데. 정말 그럴 것 같아요. 공중과물 아구이에서 초기작이 끝나고, 분위기가 바뀐 이유가 잘 설명된 것 같습니다. 만약 현실과 유리된 이야기를 쓰는 데서 죄책감을 느꼈다면, 충분히 다음 작품을 그렇게 쓸 수밖에 없을거라고... 어떻게 여기까지 생각을 하셨는지 .. 시간을 두고 조금 더 차분히 리뷰를 읽어보고 싶습니다.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맥거핀 2016-04-14 18:41   좋아요 1 | URL
저는 특히 <공중괴물 아구이> 그 작품이 좋았어요. 작가의 어떤 고뇌랄까요..그런 것이 생생하게 드러나는 작품이었습니다. 초기작들에서 오에 겐자부로는 한발짝 숨어있는데, 그런 자신에 대해 그런 소설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습니다. 사실 많이 늦은, 시간에 쫓겨서 쓴 리뷰라 칭찬을 들을 리뷰는 아닌 것 같고요.^^; 개인적으로는 위에 쓰대로 다시 읽고 고쳐써보고 싶은(분명히 다시 읽으면 고쳐서 쓰게 될 부분이 많으리라고 생각되는데) 리뷰입니다.

에이바 2016-04-12 22: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훌륭하다는 표현이 절로 나오는 리뷰입니다. 맥거핀님의 깊이 읽기에 다시 감탄합니다.

맥거핀 2016-04-14 18:43   좋아요 0 | URL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에이바 님 리뷰도 (그리고 우끼 님 리뷰도) 읽었습니다만, 이 소설은 다들 나름의 독특한 지점에서 생각할 거리를 잡으신 듯 하여 흥미롭더군요. 더 많은 시간을 들여서 읽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따름입니다.

2016-04-14 01: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4-14 18: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4-15 00: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4-18 01: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CREBBP 2016-04-26 1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렇게 번호를 붙여쓰거나 부제목을 붙여 쓰면 말씀하신 것처럼 단편적인 생각들을 연결시키지 않고도 쓰기가 용이하고, 그게 읽는 사람에게도 훨씬 명료한 것 같습니다. 편법의 편법으로 일단 두서없는 생각을 (번호를 매겼다고 생각하고 ) 따로따로 써내려간 다음에 전체적으로 다시 배치하거나 귀찮은 경우 그냥 냅두는 것도 방법이더군요. 공백이 연결을 만들어준다고나 할까요. ㅇ

그건 그렇고, 이렇게 어려운 소설을 이렇게 깊이 있게 풍부하게 해석해내시다니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저는 중반 이후로는 읽는 게 힘들었어요. 다시 차근차근 읽어봐야겠어요. 일정도 너무 촉박했었다는...

맥거핀 2016-04-27 12:20   좋아요 0 | URL
아..네 좋은 방법이네요. 머리 속에서 문단을 배열하는 것보다 미리 토막토막 써둔 뒤 다시 재배열하는 것..일단 쓰고 난 뒤에 고치는 게 더 편할 때가 많죠. 살을 붙여나간다고 할까요..조금 다른 얘기겠지만, 이번에 나온 하루키 씨 책을 보니 하루키씨도 일단 쓰고 난 뒤에 다시 살을 붙여나가서 고치는 식으로 한다고 하더군요.

이미 좋은 리뷰 쓰셨던데요, 뭐.^^ 제가 읽을까 생각했던 책들에 쓰신 리뷰들이 많아서 도움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시스터캐리]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시스터 캐리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6
시어도어 드라이저 지음, 송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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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시간을 거슬러 오른다. 지난 번 서평단 도서로 조이스 캐롤 오츠의 <그들>을 읽고, 이번에 연이어 시어도어 드라이저의 <시스터 캐리>를 읽으니, 시간을 되돌리는 타임머신을 탄 느낌이었다. 오츠의 <그들>이 1937년의 디트로이트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면, 이 소설 <시스터 캐리>는 그보다 시간을 조금 더 앞당겨 1889년의 시카고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연이어 두 개의 소설을 읽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읽다보니 두 개의 소설이 (여러 면에서 또한 다르지만) 적어도 한가지 점에서는 묘하게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이 소설들이 마치 어떤 사회학적 보고서처럼 읽힌다는 점인데, 오츠의 <그들>이 20세기 초반에서 중반에 걸친 미국 사회의 어두운 그늘을 세밀하게 묘파하고 있다면, 이 소설 <시스터 캐리>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에 걸친 미국 사회 초창기의 여러 단면들을 여과없이 드러내보인다. 19세기 중반, 철도교통의 발달은 대도시의 성장을 촉진시켰고(이 소설에서도 철도교통이 중요한 지점을 담당하고 있는데, 캐리를 컬럼비아시티에서 시카고로 이끈 것은 철도였고, 그녀는 그곳에서 그녀의 조력자가 되는 드루에를 만난다. 또한 허스트우드의 몰락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등장하는 것은 전차 운전이었다.), 대도시에는 이른바 '부의 씨앗'이라고 할 만한 것들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의 배경이 되는 20세기 중반의 미국이 부의 대물림이 어느 정도 그 고착화의 양상을 드러내는 시기였다면, <시스터 캐리>의 배경이 되는 19세기 말의 미국은 조금 더 불확실한 가능성이 넘쳐나는 시기였다. 순식간에 성공의 길로 접어들 수도, 혹은 몰락의 길도 들어설 수도 있는 가능성 말이다. 

 

시어도어 드라이저는 이러한 사회적 배경을 성실히 묘사하면서, 동시에 성공과 몰락을 효과적으로 대비시키며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데, 따라서 그의 이야기를 읽는 것은 마치 날 것의 생생한 사회학적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 하면서도, 동시에 풍부한 서사가 읽는 즐거움을 안겨준다. 몇 가지 장면을 예로 들 수 있다. 소설의 초반부에서 묘사되는 것은 가난한 캐리와 부유한 드루에 혹은 허스트우드의 대비이다. 여러 변변치 않은 구직처를 전전하는 모습, 그러면서도 공상과 욕망을 놓지 못하는 캐리와 안정된 직장을 가지고, 좋은 집에 살며, 모든 좋은 것들을 소비하는 즐거움을 만끽하는 드루에와 허스트우드 일가의 모습은 효과적인 대비를 이룬다. 소설의 후반부에서는 이것이 역전된다. 연극배우로서 성공가도를 달리기 시작하는 캐리와 급격하게 몰락의 길을 걷게 되는 허스트우드의 모습은 소설 초반부의 대비보다 훨씬 극적이며, 독자에게 보다 빠른 속도로 책장을 넘기게 한다. 물론 드라이저는 이 대비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 잘 알고 있는데, 그것은 다른 두 세계를 가능한한 세밀하게 교차하며 묘사하는 것이다. 초반부에 등장하는, 캐리가 잠깐 들어가 일하게 되는 공장에 대한 묘사와 그것에 비교되는 모든 것이 넘쳐나는, 심지어 허영마저도 넘쳐나는 허스트우드 가족 풍경의 대비, 또는 후반부에서 허스트우드가 전차 파업의 대체운전수로 잠깐 일하게 되며 벌어지는 일들과 캐리가 하루아침에 벼락스타가 되는 모습의 극적인 교차. "이 배우들한테는 원래 대사가 한마디도 없었지만 허스트우드가 전차 차고의 윗방에서 잠을 자던 바로 그날 밤, 그날따라 유난히 흥에 취한 주연 희극배우가 관객들을 좀 웃기고 싶었는지 근엄한 목소리로 물었다. (p.555~556)" 이 묘사들은 이 이야기를 보다 극적인 것으로 만들면서, 동시에 당대의 미국 사회에 대한 세밀한 분석보고서로의 기능을 한다. 

 

(일종의 분석보고서로 위에 얘기한 오츠의 소설 <그들>과 이 소설 <시스터 캐리>를 연결지어 보면 재미있다. 예를 들어 허스트우드의 몰락. 어떠한 사회안전망도 없이 허스트우드는 그대로 순식간에 추락하여 빈민, 혹은 그 이하가 된다. 물론 그 반대편에는 갑자기 스타로 부상하는 캐리가 있다. 캐리의 성공 - 그녀의 성공은 재능 이상의 어떤 기묘한 무엇인가가 작동한다 - 은 아이러니하지만, 동시에 그에 못지 않게 허스트우드의 몰락도 아이러니하다. 이 가파른 상승과 하강. 반면 <그들>에서 로레타 가족에게는 가파른 상승은 없지만, 그렇다고 아주 가파른 하강도 없다. 로레타는 복지시설의 사람들에게 불평을 퍼붓지만, 그녀가 그녀의 삶을 조금이라도 유지시킬 수 있는 것은 어쩌면 그 복지정책의 덕택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이런 비교도 가능할 것 같다. 전차 파업을 묘사하는 장면에서 드러나는 군중의 기묘한 연대와 분노. 반면 현대 사회의 군중들은 누구에게 분노하는가, 혹은 분노가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가. 아무튼 이 전차 파업에 대한 묘사 부분에서 드라이저의 필력은 가장 빛을 발한다.)

 

(내가 느끼기에) 어떤 의미에서는 이 소설은 일종의 중간 지점에 와 있는 것 같다. 근대 산업혁명 시대에서 현대로 이행하는 배경적 측면에서도 그러하고, 엄격한 도덕률이 남아있던 빅토리아 시대의 문학과 앞에서 예로 든 <그들>과 같이 작가가 여러 장치를 자연스럽게 구사하는 현대적인 문학과의 중간 지점 말이다. 그것은 예를 들어 두 가지 부분에서 말할 수 있는데, 하나는 소설 중간중간에 등장하는 드라이저 작가 본인의 목소리다.   

 

이런 분위기는 금세, 쉽게 느낄 수 있다. 웅장한 저택, 화려한 마차, 번쩍번쩍 빛나는 상점, 레스토랑, 온갖 술집들 사이를 걷고, 꽃과 비단과 와인의 향기를 맡고, 사치스러운 영혼에서 흘러나오는 웃음소리와 도전적인 창끝의 빛처럼 뿜어져나오는 시선을 느끼고,...(중략) 세상이 이런 것들에 매혹되고 인간의 마음이 이를 꼭 도달해야 하는 바람직한 왕국으로 보는 한, 이것은 위대함의 왕국으로 남을 것이다. (중략) 아! 채워지지 않는 꿈. 정신을 갉아먹고 유혹하는 이 허망한 환상은 우리를 손짓하며 부르고, 손짓하고 또 부르다가 마침내는 죽음과 소멸이 그 힘을 녹여버리고 눈먼 우리를 자연의 품으로 되돌려보낸다. (p.383)

 

그 모든 향락이 결국 '우리를 유혹하는 허망한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자각하는 이 목소리는 물론 캐리의 목소리도, 허스트우드의 목소리도 아니다. 그것을 자각하는 것은 이 이야기를 어딘가에서 내려다보는 작가 자신일 수밖에 없다. 이 소설에서는 중간중간 이렇게 서사나 묘사가 불현듯 멈추고, 작가의 날 것의 목소리가 드러나는 때가 있다. 이것은 <그들>과 같은 소설의 어떤 트릭이나 장치와는 다른 것처럼 느껴지는데, <그들>과 같은 소설에서 드러나는 작가 본인의 목소리는 이야기를 보다 더 다의적, 다층적으로 만드는 데 그 목적이 있다면, 이 소설 <시스터 캐리>에서는 일종의 중화제로서의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 소설 중간중간 이루어지는 작가의 개입은 당대의 도덕률에 반하는 이 소설을, 당시 독자들이 읽는 마음의 부담을 덜어주는 기능을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 사람들 문제 있는 것은 나도 알고, 당신도 알잖아요, 그러니 죄책감 가지지 말고 읽으세요, 이런 느낌이랄까. (어떤 의미에서는 이를 작가의 '논란을 피해가기 위한 장치'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여러 논란을 피할 수 없었지만...) 

 

다른 하나는 이 소설에서 과거의 소설들과 다른 보다 현대적인 유형의 인간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이른바 욕망의 화신(들). 물론 어떤 의미에서는 모든 소설의 등장인물은 '욕망하는 존재'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대체로 무엇인가를 욕망하고, 그 욕망이 서사를 추동해나간다. 그런데 이 소설의 캐리가 다른 과거의 인물들과 다른 점은 (뒤의 작품 해설에서 잠깐 언급되듯이) 그녀는 욕망하되, 무엇을 욕망하는지 모른다는 점에 있다. 그녀가 좇는 꿈은 부인가, 명예인가, 인기인가, 혹은 사랑인가, 아니면 다른 어떤 것인가. 캐리는 이 소설에서 흔히 우리가 성공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에 도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마지막에서도 흔들의자에 앉아 여전히 무엇인가를 갈망하고 있다. "화려하게 빛나는 위치에서도 캐리는 불행했다.(p.652)" 그녀는 행복을 갈망하지만, 과연 무엇을 채워야 행복에 이르게 되는 것일까. 그녀는 결국 이룰 수 없는 것을 욕망하고 있다. 그것을 어쩌면 '욕망하는 것 그 자체'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다시 말해서 그녀는 '욕망하는 것'을 욕망한다. 욕망 그 자체로서, 진정한 의미에서 욕망의 화신으로서.

 

이제 앞으로 많은 현대소설에서 아주 빈번하게 등장하게 될, 아니 우리가 현실에서 수없이 보게 되는 그런 인간형의 탄생, 아니 어쩌면 현대사회 인간들의 특질이라고 불러도 될 만한 것의 등장을 여기에서 목도한다.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좇는 사람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정작 무엇을 좇는지도 알지 못하면서, 그것을 '좇는다'는 사실을 멈출 수 없는 사람들. 그래서 어쩌면 이 소설이 그렇게 재미있게 읽혔는지도 모르겠다. 소설을 읽으면서 이 소설이 보다 현대의 독자들에게 더 사랑받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으며, 지금 드라마 같은 것으로 만들어져도, (약간의 양념만 더해진다면) 상당히 인기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물론 이 소설은 영화화된 적이 있다. <로마의 휴일>, <벤허> 등을 만들었던 윌리엄 와일러 감독에 의해 1951년 <캐리>라는 제목으로 제작되었다. 주연 캐리 역은 제니퍼 존스가 맡았는데, 살짝 안 어울리는 것 같기도?) 사람들은 은연 중에 이야기에서 자신의 모습들을 찾으려들고, 그것에 자신의 모습이 언뜻 비쳤을 때 그 이야기를 좋아하게 되니 말이다. 그리고 우리들 대부분은 아니 적어도 나는, 무엇을 욕망하는지도 모르는 채, 여전히 무엇인가를 욕망하고 있으니.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다. "흔들의자에 앉아, 창가에 꿈꾸며 홀로 갈망하리라. 창가의 흔들의자에 앉아 결코 느끼지 못할 그런 행복을 꿈꾸리라. (p.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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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31 01: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4-01 01: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도토리냥 2016-04-02 0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스터 캐리에서 현대적 인물로 그려지는 캐릭터는 캐리 하나뿐인 것 같아요.
등장하는 남자 캐릭터들은 그 시대적인 인물들로 틀에 박힌 전형성을 띠고 있으니까요.

욕망의 화신이라는 표현이 참 좋습니다. 캐리랑 잘 어울려요ㅎㅎ

맥거핀 2016-04-04 01:30   좋아요 0 | URL
캐리가 주인공이니까 더 그렇겠죠.^^ 남자들이 조금 단순하기는 한데..뭐 사실 어떻게 보면 시대가 많이 변했지만, 현재의 남자들이 소설 속에 그려진 남자들하고 별로 달라진 건 없는듯...

한주의 시작이군요. 좋은 한 주 보내세요.
 
[그들]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그들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김승욱 옮김 / 은행나무 / 2015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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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가끔 그런 이야기들이 있다. 이야기의 의미나 교훈을 찾아내는 것을 포기하고, 그저 인물들의 삶을 따라 읽게 되는 이야기. 더 읽어내려가는 것이 고통스럽고 힘들지만, 그들의 삶을 누군가가 지켜봐주어야 할 것 같은 이야기. 사실과 환상, 실재와 가상, 나의 생각과 주인공의 생각이 얽혀들어가, 어느 것이 어느 것인지, 점점 분간하기 어려운, 종내에 이르러서는 그것을 굳이 구분하는 것이 별 의미가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이야기. 거짓이길 바라는 이야기가 실제이고, 실제이기를 바라는 이야기가 거짓인 이야기. 고통스러우면서도 읽어내려갈 수밖에 없는 독서. 나에게는 조이스 캐롤 오츠의 <그들>이 그랬던 것 같다. 

 

<그들>에게는 두 가지의 장치가 있다. 하나는 이 소설이 로레타라는 소녀의 어린 시절부터 그녀가 낳은 줄스, 모린, 베티 등이 성인이 되던 시기까지를 종(縱)으로 훑고 있는 소설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이 소설은 결코 한 가지의 사건이 중심이라고 말할 수 없다. 어떤 특정한 하나의 사건을 횡으로 펼쳐내, 그 사건이 중심이 되어서 이야기가 펼쳐지는 구조가 아니라, 이들의 삶을, 이들이 그려내는 삶의 궤적을 계속 지치지 않고 꾸준히 따라가는, 어떻게보면 사회학에서 다루는 종적 연구의 한 형태라고 볼 수도 있다(책 날개의 작가 소개에 이런 대목이 있다. "오츠는 생생한 심리 묘사와 사회 분석을 융합한 일련의 소설들을 통해 미국 사람들과 미국의 제도를 계속 탐구했다." 개인적으로는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다큐로도 제작되었던, 사당동의 한 빈민가족을 25년간 추적해 한국 사회 빈곤의 종적 영속성을 살펴보게 했던 사회학자 조은의 연구 <사당동 더하기 25>를 떠올렸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이 소설에서 로레타나 줄스, 모린 등등의 인물에 대한 특정적인 묘사 못지 않게 중요해지는 것은 이 소설이 다루고 있는 배경과 시기이다. 이 경우 어떤 의미에서는 로레타, 줄스, 모린 등의 인물은 특정의 '누구'라기 보다는 그 시대의 영향을 받은 인물상들의 어떤 특징들이 혼합된 '누구'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 소설 뒤 작가 발문의 한 대목 "세월이 흐르면서 나는 <그들>의 등장인물들이 내 소설에 나오는 대부분의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나와 다른 사람을 합친 '혼합물'이라고 간단히 대답하게 되었다. 이번에도 그렇다." p.716)

 

그렇다면 소설에서 다루고 있는 시기는 어떤 시대인가. 소설은 사랑에 빠졌던 소녀, 로레타가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일에 휘말려 얼떨결에 원치도 않은 상대와 결혼을 하던 1937년 8월의 어느날에서 베트남전과 반전운동, 인종차별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폭동이 벌어지던 1967년의 디트로이트까지를 다루고 있다. (디트로이트 흑인 폭동은 1967년 7월 23일에 발생하였으며, 당시 사상 최대 규모의 흑인 폭동이었다. 검색하다가 알게 된 사실인데, 이 사건이 <허트 로커>를 만들었던 캐서린 비글로우에 의해 영화화되어 2017년에 개봉될 예정이라니, 이 책을 읽으신 분은 나중에 한 번쯤 챙겨보셔도...) 1937년에는 1929년의 대공황에서 벗어나 성장하던 경제가 다시 침체에 들어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것은 일시적이었고, 이후 제2차 세계대전 참전으로 미국 경제는 다시 급격하게 성장의 길에 들어서며, 이후 1960년대까지 미국 경제는 급격하게 발전하게 된다. 그러나 성장이 낳은 부작용들은 많았다. 빈부격차는 엄청난 속도로 가속화되었으며, 전후 매카시즘, 인종문제 등으로 사회의식 면에서는 성장의 속도가 더뎠다. 도시빈민은 급증하였으며, 도시의 슬럼화된 곳은 점점 늘어났으며, 낮은 의식수준 및 환경과 교육의 영향으로 빈곤의 대물림은 이어졌다.

 

로레타와 그녀의 아들 줄스, 딸 모린이 살던 1950년대의 디트로이트가 그런 곳이었다. 자동차 산업 등으로 도시의 일부는 발달했지만, 빈부격차가 심했고, 로레타 가족이 살던 곳과 같은 슬럼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로레타 가족은 이른바 중간계층이었다. 도시빈민, 백인 하층민 계급. 그들 위에는 안정된 직장과 직업을 가진 백인 상층민들이 있었고, 그들의 아래에는(더 정확히 말하면 '그들이 아래라고 생각하는') 그들이 상대하기를 꺼리고, 무시하는 흑인들이 있었다. 소설에서 그들 도시빈민 백인들과 흑인들의 관계는 정확히 묘사되지는 않지만(주로 '그들', 그러니까 로레타나 모린이나 줄스는 흑인들을 피한다. 아니 피한다기 보다는 그들에게는 이들 흑인들은 고려할 필요가 없는 대상이나 마찬가지인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그 '위'를 쳐다보기도 바빴으니까.), 반면 백인 상층민들과의 관계는 여러 관계를 통해 흥미롭게 보여진다. 예를 들어 줄스가 네이든, 혹은 페이와 버나드(이들은 발전하는, 사실 미쳐 돌아가는 미국 경제를 상징해서 보여주는 인물이라고 할 수도 있다.)와 같은 인물들을 만나서 벌이는 일들, 혹은 모린과 유부남 짐의 관계를 통해서 보면 꽤 재미있는 점들이 있다.

 

(사실 조이스 캐롤 오츠의 심리묘사는 너무나도 집요하고 다층적이기 때문에 이렇게 한 가지로 뭉뚱그려도 되나 싶지만) 나는 그것을 어떤 '양가(兩價)적 감정'이라고 말하고 싶은데, 줄스나 모린이 상층민 백인들에게 의도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접근할 때 보면 그들의 감정은 극도로 양가적이다. 그들은 상층민들을, 상층민들의 삶을 너무나도 동경하고 바라지만, 동시에 그들에게 가까이 가는 것을 너무나도 두려워한다. 그들은 상층민들의 삶을 너무나도 열망하지만, 그것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파멸에 가까워진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감지한다(반면 이들의 반대편에서 안주의 양상을 보이는 것은 로레타이다). 어쩌면 그것은 그들 사이의 경계가 너무 뚜렷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인데(조이스 캐롤 오츠가 이들을 대비하여 묘사하는 방식은 특징적인데, 줄스나 모린이 특히 이들이 사는 집을 겉에서 바라보는 장면들이 대표적이다.), 예를 들어 유리 상자안의 너무나도 가지고 싶은 보석을 바라보며 그것을 열망하지만, 그것을 억지로 열려고 하면 유리가 깨지고 말 것이라는 점을, 그리고 그 이후 어떤 일이 벌어질지 감당할 자신이 없는 자신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고 할까. 흥미로운 것은 이것이 반대편에서도, 그러니까 상층민 백인들에게서도 비슷한 양상으로 동일하게 나타난다는 점이다. 네이든이 줄스에게 대하는 태도, 혹은 짐이 모린에게 대하는 태도를 보면 비슷한 것을 찾아볼 수 있는데(특히 짐이 모린에게 접근하는 장면에 대한 묘사가 압권인데, 흥미롭게도 이 장면은 로레타, 줄스, 모린 이외의 인물로 시점이 이동하는 거의 유일한 장면이기도 하다.), 이들은 어떤 허위로 가득한 자신의 삶을 인식하고, 어떤 모험과 매력이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그들의 접근을 열망하지만, 동시에 그들의 접근, 그리고 그들과 삶이 연결되어 추락하는 것을 너무나도 두려워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는 동시에 로레타, 줄스, 모린 등의 서로서로에게서 비슷하지만 약간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것 또한 양가적 양상을 띤다. 그들은 가족으로서 기꺼이 서로를 사랑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기꺼이 서로를 증오한다. 어쩌면 그들은 서로에게서 결코 보고 싶지 않은 자신의 망가진 모습을 보지만, 동시에 그것이 어쩔 수 없이 버릴 수가 없는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기에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닐까.   

 

그녀(모린)는 앉는다. 그리고 거칠게 고개를 돌려 차창 밖을 바라본다. 자신의 다른 자아가 인도에 서 있는 곳을. 사람들이 지나간다. 사람들, 낯선 사람들이 그녀의 주위에서 갈라져 그녀를 건드리지 않고 지나가는 것 같다.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지만 그녀 자신은, 그러니까 그 다른 자아는 점점 생생하고 눈부시게 변해서 인도에 서 있다. 그녀가 고개를 고통스러운 각도로 돌려서 버스에 타고 있는 모린을 바라본다. 죄책감과 야성이 뒤섞인 얼굴이다. (p.300)

 

이 죄책감과 야성. 그렇게 그들은 그 사이에 끼어있다. 죄책감과 야성, 혹은 열망과 두려움, 상승의 열망과 추락에 대한 공포, 혹은 백인 상층민들과 흑인들 사이에서. 이와 관련하여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줄스와 모린이 이 추락의 공포를 안은 불안한 상승, 혹은 불안한 상승 비슷한 것을 조금이라도 만들어내는 것은 마지막 디트로이트의 대규모 흑인 폭동(소설에서도 묘사되었지만 그것은 단지 '흑인' 폭동이라고만 말할 수는 없었다.)과 맞물려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상층부의 백인들과 흑인들 사이에 '끼어'있었지만, 폭동으로 상징되는 흑인들과의 경계선이 더 뚜렷해지면서 상층부의 백인 사회로 진입할 실마리가 가느다랗게 생겨났다. 절도와 폭행, 포주, 심지어 살인까지 행한 줄스는 모트, 그러니까 빈곤 퇴치 행동 연합 회장이자 사회학과 조교수 피어시 박사와의 관계가 어느 틈에 만들어졌고, 모린은 야간대학에서 오츠의 수업(결국 <그들>이라는 이 소설은 모린이 '조이스 캐롤 오츠'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서 구성되었다. 여기에는 트릭이 있지만...)을 듣다가 짐까지 만났다. 로레타가 상층부의 삶을 비슷하게나마 짧게 '체험'하는 것도 이 때였다. 

  

사회학과 조교수 피어시 박사, 혹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작가의 분신 '조이스 캐롤 오츠'.(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소설은 어떤 사회학의 종적 연구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줄스와 모린을 상층부로 연결시켜 준 가느다란 끈. 여기에 이 소설의 흥미로운 두 번째 장치가 있다. (처음 장치에 대해 너무 길게 이야기했으니 길게 이야기할 필요도 없을 것이고 물론 길게 얘기할 능력도 못되니 짧게 마무리짓겠다. 헤르메스님이 이 부분에 대해서 중점적으로 다루신다고 예고하셨으니 그 글을 읽으시는 게...) 다시 말해서,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이 작가 본인의 직접적인 개입, 혹은 모린의 독백. 조이스 캐롤 오츠는 소설 앞에 붙은 '작가의 말'을 통해 이야기한다. 이 이야기는 소설처럼 구성한 역사 기록이며, 거의 대부분을 실제 '모린'의 기억을 바탕으로 삼았다고. 실제 소설 중간에는 모린이 작가, 그러니까 자신에게 야간대학에서 글쓰기를 가르쳤던 '조이스 캐롤 오츠'에게 보내는 편지도 두 편 삽입되어 있다. 이것을 어떻게 이야기하면 좋을까.

 

모린은 편지에서 말한다. "저는 선생님이 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저의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시 외곽의 집에서 사는 저. 농장 주택 또는 식민지 양식의 주택인 이 집의 뒤편에는 울타리가 있고, 부엌에서 일하는 여자는 아마 바지를 입고 있을 겁니다. 아기는 아기 방의 요람에 있고, 창문에는 하얗고 얇은 커튼이 걸려 있습니다. 남편과 제가 함께 쓰는 침실, 거실 창문으로는 잔디밭과 길과 길 건너편의 집이 보입니다. 제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이런 삶을 아프도록 갈망합니다! 제 눈이 아프도록 갈망합니다.(p.462)" 모린은 아니라고 애써 부인하지만, 어쩌면 '이런 삶'은 '조이스 캐롤 오츠'의 삶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모린은 동시에 말한다. "하지만 그렇습니다. 저는 선생님을 미워합니다. 오로지 선생님만을. 심지어 그 남자들도, 펄롱도 미워하지 않습니다. 저는 선생님을 미워하고, 그것만이 제게 유일한 확신입니다. 결혼하고 싶은 남자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선생님에 대한 미움이. 선생님에 대한 미움, 책이 있고 말을 잘하고 결코 일어나지 않았던 일들을 완벽한 형태로 아주 많이 알고 있고, 남편이 차로 학교까지 데려다주고, 심지어 요즘은 가끔 신문에 사진까지 실리는 선생님, 지식을 지닌 선생님. 저는 이미 한평생을 살고 저 자신을 탈탈 뒤집었는데도 아무것도, 그 무엇도 얻지 못했는데 말입니다.(p.469)"

 

이에는 앞에서 말한 양가적 감정이 물론 들어있다. 그것을 다시 확인시켜주는 것이라면 별로 특이할 것은 없다. 그러나 한 가지 질문. 왜 이것이 편지의 형태로, 그러니까 모린의 기억을 바꾼 소설의 형태가 아니라, 작가에게 보내는 직접적인 편지의 형태로 여기에 위치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어쩌면 이 편지를 받는 작가의 위치에 이것을 읽는 독자를 바꿔서 위치시키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편안한 방에서, "책이 있고 말을 잘하고 결코 일어나지 않었던 일들을 완벽한 형태로 아주 많이 알고 있"는 이 책 <그들>을 읽고 있는 당신이 이 그들의 삶을 읽는 것. 이것의 의미를 여기에서 묻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혹은 존슨 대통령이나 롬니 주지사(오바마랑 붙었던 그 '롬니'의 아버지다)나, 로버트 케네디나, 마틴 루터 킹이나 모두 다 죽여야 한다고 외치는, 그러나 안전한 곳에 위치한, 그랬기 때문에 그런 소리를 지껄일 수 있는 사회학과 조교수 피어시, 혹은 모트, 아니 당신의 위치를 여기에 겹쳐내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러나 또 여기서 다시 질문. 그런데 이것이 작가가 모두 만들어낸 트릭이라면 어떨까. 사실 '모린'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으며, 결국 이 모린의 편지도 작가가 쓴 소설의 일부라면 어떨까. 그래서 나는 이 편지에 고개를 끄덕거리면서도 여기에 희미한 의심을 보낸다. 이것 또한 어떠한 의미에서는 작가의 견고한 방어막처럼 느껴졌으니 말이다. 편안한 방에서 이 책을 읽고 있는 자신을 돌이켜 생각해보는 자신을 보고 있는 흐뭇한 이 또다른 자신. 그 '자신'이라는 존재가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있는 견고한 방어막 말이다. 이 편지들은 어쩌면 그 견고한 방어막의 일부로서 다시 기능을 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어느 책 속 어느 곳에도 사실 진정한 '리얼'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아닐까(물론 영화에 대해서도). 작가가 만들어낸 방어막 뒤에 안전하게 숨어서 <그들>이라는 책을, 이 긴 꿈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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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6-03-09 0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러저러한 일들과 별개로)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다음부터는 더 빨리 읽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ㅠㅠ

2016-03-12 01: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3-15 00: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이리시스 2016-03-14 0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맥거핀님이 언제 리뷰썼지?222

맥거핀 2016-03-14 19:57   좋아요 0 | URL
리뷰 더 빨리 써야하는데, 너무 늦어서 몰래 올린 겁니다. ㅎ

아이리시스 2016-03-15 11:41   좋아요 0 | URL
몰래.. 이렇게 잘쓴 걸 왜 몰래.. 근데 왜 맥거핀님글 계속 놓치지..(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