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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묻힌 거인 - 가즈오 이시구로 장편소설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하윤숙 옮김 / 시공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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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거인은 거기 파묻혀 있었다. 바람이 거세게 불어오는 언덕 위, 쐐기풀과 잡목림을 헤치고 올라야 하는 곳. 멀리 떨어진 높은 지대에 난데없이 나타난 어른 키보다 높게 쌓아올린 돌 무덤.

    

그렇기 때문에 거인의 무덤은 죄 없는 어린 사람들이 전쟁에서 살육당했던 오래전 어떤 비극의 장소를 표시하기 위해 세워두었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것이 아니라면 이 무덤이 왜 여기 서 있는지 이유가 쉽게 생각나지 않는다. 낮은 지대에 있었다면 우리의 조상이 전쟁의 승리나 왕을 기념하고 싶어 했을 거라고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멀리 떨어진 높은 지대에 무거운 돌을 어른 키보다 높게 쌓아놓은 것은 왜일까? (p.397)

    

그곳은 용이 즐겨 먹이를 먹고 쉬는 곳이다. 그 용은 무엇이며, 왜 하필 그 자리에 있는가? 소설 <파묻힌 거인>의 주인공(이자 실질적으로 작가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화자라고 볼 수 있는) 늙은 액슬과 그의 아내 비어트리스는 과거의 기억을 잃어가는 중이다. 아니, 그것은 단지 그들이 늙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기억을 잃고 있는 것은 그들만이 아니니까. 그들이 살고 있는 거대한 습지 주변, 삐죽삐죽한 언덕 그림자가 드리워진 산비탈 굴에 있는 모든 사람들, 그리고 책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인물들은 금새 지나간 일들을 잊어버린다. 그것이 며칠 지나지 않은 일일지라도 말이다. 액슬과 비어트리스는 더 기억을 잃기 전에 먼 마을에 살고 있는 아들을 만나기 위해 길을 나선다. 그런데 길을 떠나 다른 마을에 들러 여러 사람들을 만나는 도중 액슬과 비어트리스는 그들이 기억을 잃고 있는 이유가 높은 산에 있는 암용 케리그 때문임을 알게 된다. 마법에 걸린 용 케리그가 내뿜는 입김으로 인해 사람들은 점점 기억을 잃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액슬과 비어트리스는 늙은 기사 가웨인의 도움을 받아, 기억을 잃어 자신들을 버린 부모가 돌아오기를 소망하는 아이들이 키운, 독초를 먹은 염소를 힘겹게 끌고 거인의 돌무덤이 있는 언덕에 오른다. 그곳에서 쉬고 있는 용이, 독을 품은 염소를 먹고 쓰러지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두 가지의 질문. 먼저 하나는 다시 처음 질문의 반복이다. 그 용은 무엇이며, 왜 하필 그 자리에 있는가? 망각의 입김을 내뿜도록 용에게 마법을 건 이는 위대한 아서 왕의 대마법사 멀린이었다. 전쟁을 끝낸 아서 왕이 우려한 것은 전쟁 기간 중에 일어난 학살과 살육, 무자비한 폭력이 불러오는 연쇄적인 복수의 칼날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는 사람들이 망각하기를 원했다. 그 모든 것을 말이다. 아무 죄없는 어린 아이들과 여자들에게까지 이루어진 살육과 약탈, 강간에 대한 기억과 그것이 필시 불러올 피의 복수 말이다. 다시 말해서 암용 케리그는 망각을 수호하는 괴물이자, 망각 그 자체였고, 그 용이 편히 쉬고 있는 바닥에는 거대한 거인이 파묻혀 있었다. 거대한 거인,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거대한 기억 말이다. 

 

이것은 두 번째 질문과도 연관된다고 말할 수 있는데, 두 번째 질문은 늙은 노부부, 액슬과 비어트리스에 대한 것이다. 왜 그들은 처음 마을을 떠날 때의 생각과는 달리 먼 곳에 사는 아들을 바로 만나러 가지 않고, 위험해 보이는 용을 처치하는 일에 끼어드는가? 가는 도중 이러저러한 일에 연루되기는 하지만, 그들이 용을 없애기로 마음 먹는 것은 누군가의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들의 자발적인 의지에 따른 선택, 혹은 단호한 결단처럼 보인다. 그것은 결국 작품에 가로질러 놓여 있는 이 질문과도 연관된다고 말할 수 있는데, 기억을 찾는 것이 그들에게 어떠한 의미인가, 라는 질문이 그것이다. 액슬과 비어트리스는 망각의 늪에 빠져 살면서도 그들이 망각하고 있다는 사실마저도 망각하는 마을의 다른 사람들과 달리 어떻게든 기억의 줄을 놓지 않으려 애쓴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두 가지의 문제와 연관된 것처럼 보이는데, 먼저 하나는 망각이 불러오는 어떤 두려움이다. 

 

그 두려움이 무엇인지는 작품 안에 비유처럼 제시된 이야기가 극명하게 보여준다. 여행 도중 우연히 만나게 된 뱃사공에게서 노부부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듣는다. 그 뱃사공은 바다를 건너 섬으로 가려는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데, 이때 (그들이 부부나 연인일지라도) 함께 배를 타고 섬으로 가는 것은 허락되지 않으며, 그들이 함께 섬으로 건너가기 위해서는 뱃사공의 확인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 확인이란, 그들의 소중한 기억이 무엇인지 각자 따로따로 확인하는 것이다. 그 기억에서 그들의 참된 관계가 드러나야만 그들은 함께 섬으로 건너갈 수 있으며, 그 곳에서 함께 지낼 수 있다. 물론 이 신비로운 이야기를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여러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그것은 여러 상징물들(<신곡>에서 죽음의 강 스틱스를 건너는 단테와 베르길리우스, 그리고 카론이라는 늙은 뱃사공)이 의미하는 대로 죽음에 대한 비유처럼 보이는데,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이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이겨낼 수 있는 것은, 어쩌면 과거의 기억 때문이 아닐까. 사람들은 죽음 뒤에 있을 무(無)를 두려워한다. 어떤 이들은 여러 종교에서 제시하는 내세를 믿으며, 또 어떤 이들은 죽은 뒤에 생에서 사랑했던 사람들을 다시 만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 그들에게 기억이 사라진다면, 그들은 사랑하는 이들을 어떻게 알아보고 다시 만날 것이며, 죽음의 두려움을 어떻게 이겨낼 것인가.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속으로 생각했지요. 하지만 그 여자는 이 땅에 망각의 안개가 덮여 저주가 내렸다는 이야기를 계속했고, 그건 우리 두 사람도 종종 말하던 거잖아요. 그때 그 여자가 내게 물었어요. '함께 나눈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당신과 당신 남편은 서로를 향한 사랑을 어떻게 증명해 보일 거예요?' 그 후로 나는 줄곧 그 생각을 했어요. 그 생각을 할 때면 너무 겁이 날 때가 있어요." (p.71)

 

다른 하나는 이 죽음 이후에도 이곳에 남겨질 이후의 세대와 관련된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이 소설 <파묻힌 거인>에는 다양한 세대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주인공 액슬과 비어트리스, 또는 기사 가웨인과 같이 나이 들어 이제 죽음을 앞두고 있는 세대, 혹은 전사 위스턴, 수도원의 수도사들과 같은 중간 세대, 아니면 노부부와 윈스턴이 구해내는 에드윈과 같은 어린 세대 말이다. 에드윈을 제외하고, 이들 나이든 세대와 중간 세대는 크게 보아 두 가지의 편으로 나뉜다고 볼 수 있다. 망각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망각을 걷어내고 기억을 되찾으려는 사람들. 이 두 갈래의 길은 다르다. 망각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기억을 잃고 죽음이라는 거대한 무 속에 빨려 들어갈지도 모를 두려움을 내포하지만, 동시에 살육과 폭력, 학살과 그것이 불러오는 복수를 잊게 만든다. 기억은 사랑하는 사람, 따스함을 안겨준 소녀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게 만들지만, 동시에 다른 종족의 사람들에게 괴롭힘을 당한 기억, 그들에게 어머니를 빼앗긴 기억을 떠올게 해 강력한 복수심에 불타게 만든다. 기사 가웨인과 전사 위스턴은 그 양 극단을 상징한다. 그 어느 쪽을 지지할 것인가. 아니, 그 질문을 이렇게 바꿔도 좋을 것이다. 이후의 세대, 그러니까 에드윈이나 혹은 (소설 속에 실체로서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액슬과 비어트리스가 그토록 애타게 만나고 싶어하는 아들에게, 혹은 아들과 같은 세대의 이들에게 어떤 세상을 전해줄 것인가.

 

물론 소설이 제시하는 길은 액슬과 비어트리스의 결단대로 용 케리그를 죽이고 파묻힌 거인을 깨우는 것이지만,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것이 그렇다고 해서 그 이후 불러올지도 모를 복수의 거대한 피바람을 긍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소년에게 전사로서의 증오심을 불어넣으려 애쓰는 위스턴과 달리 액슬과 비어트리스는 (처음 그들이 그랬던 대로) 마지막까지 그에게 사랑을 전해주려 애쓴다. "에드윈! 우리 둘 다 네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앞으로 살아가면서 우리를 기억해줘. 네가 아직 소년이었을 때 느꼈던 이 우정과 우리를 기억해줘." (p.450)

 

그렇게 그들은 이제 그들이 가야할 곳으로 간다. 소설의 마지막은 눈이 부시게 아름답다. 그것이 아름다운 것은 단지 마지막을 앞두고 있는 어떤 아름다운 기억이나, 그들의 사랑을 다시 보여주고 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것이 아름다운 것은 어쩌면 그것에 미래 세대를 위한 결단이 들어있기 때문은 아닐까. 결국 가즈오 이시구로는 이 마지막에서 이것을 묻고 있는 것 같다. 과거의 세대가 퇴장하면서 미래 세대를 위해 무엇을 남겨줄 것인가. 과거에 대한 달콤함으로 포장된 망각이라는 흐리멍텅함인가, 복수나 증오의 대물림인가, 아니면 미래에서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나갈 때 필요한 또다른 무엇을 담은 것인가. 겹쳐서 보지 않으려 해도 현재 우리를 둘러싼 여러 상황들과 이 소설의 묵직한 질문이 자꾸 어쩔 수 없이 겹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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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12 02: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1-13 18: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별도 없는 한밤에 밀리언셀러 클럽 142
스티븐 킹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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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은 후 쓰는 리뷰입니다.

    

   

'스티븐 킹의 창작론'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그의 책 <유혹하는 글쓰기>는 창작론 따위는 재미없고 지루할 것이라는 편견을 깨뜨리는 책이다. 그 책은 스티븐 킹의 문학적 자서전에서부터 창작의 기본적인 원리들과 작가로서 갖춰야 할 자세들(그러니까 일종의 총론), 창작의 기술들(각론), 글을 쓸 때 실제적으로 써먹을 팁들 모두를 담고 있으며, 동시에 풍부한 입담을 통해 그의 소설처럼 술술 읽혀내려가는 책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개인적으로 특히 재미있게 읽었던 부분은 책의 말미에서 그가 실제로 원고를 수정하며 보여주는 자잘한 팁들인데, 그것은 한편으로는 그의 소설을 읽는 재미의 핵심이 무엇에서 나오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그것은 바로 소설의 '속도감'인데, 그는 원고를 수정하는 기본은 결국 '삭제'이며, 그것은 불필요한 단어를 생략하는 등의 문장쓰기에서부터 하다못해 쓸데없이 거창한 주인공의 이름을 줄이는 것에까지 해당한다고 말한다. 즉 그의 원칙이란 명료하게 서술하여 속도를 유지시키며, 독자를 끝까지 읽게 만드는 것이다. "묘사와 대화와 등장 인물을 창조하는 모든 기술도 궁극적으로는 명료하게 보거나 들은 내용을 역시 명료하게 옮겨적는 (그리고 그 불필요하고 지긋지긋한 부사들을 안 쓰는) 일로 귀결된다. (p.240)"

     

킹의 이 책 <별도 없는 한밤에>는 그의 이런 원칙 실천의 장이다. 그것은 주인공의 이름같은 사소한 부분에서부터 - 헨리, 테스, 다아시, 밥 등의 짧고 평범한 이름들, '1922'의 주인공 윌프리드의 이름은 살짝 긴 것도 같지만, 어차피 그는 이 글에서 계속 '나'로 서술되고 있으니 이름따위야 알게 뭐람 - 다른 조금 더 큰 부분까지 해당되는데, 몇 가지를 예로 들어 보자. 중편 및 단편 4편을 묶은 이 책에 가장 처음 등장하는 소설 '1922'는 다음의 문장으로 시작한다. "나 윌프리드 릴런드 제임스는 지금부터 나의 죄를 고백하고자 한다. 1922년 6월, 나는 내 아내 알렛 크리스티나 윈터스 제임스를 살해하고 시체를 오래된 우물에 유기했다. 내 아들 헨리 프리먼 제임스도 이 범죄를 거들었지만, 헨리는 그때 열네 살이었으니 법적 책임은 물을 수 없다. 헨리는 내 꼬드김에 넘어가 살해에 가담했다. (p.11)" 이 문장을 읽은 다음 소설의 나머지 부분들을 미뤄둔 채 천천히 읽을 수 있을까? 불확실하거나 모호한 것은 없다. 윌프리드, 그러니까 나는 아내를 죽였으며, 아들도 그 사건에 가담시켰다. 이 사건은 도대체 어떻게 일어난 것일까. 이 아내를 죽이는 지난한 과정이 200페이지가 넘는 이 소설의 끝까지 이어지는 것일까. 그러나 킹은 질질 끌 생각 따위는 없다. 불쌍한 알렛은 50페이지가 채 넘기도 전에 이미 누비이불에 둘둘 말려진 채로 썩은 냄새가 나는 우물 밑바닥에 던져진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이야기에서도 마찬가지다. 즉 킹은 재료를 차분히 준비하는 것에 요리의 모든 시간을 보낼 마음 따위는 없다. 재료는 이미 후라이팬 안에 던져졌고, 더 이것저것 고민할 이유도 여유도 없다. '빅 드라이버'의 테스는 역시 200페이지에 가까운 이 소설에서 채 30페이지가 지나기 전에 '빅 드라이버'를 만나며, '행복한 결혼 생활'의 '다아시'가 남편의 비밀을 알게 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킹이 일단 재료부터 냄비 속에 던져놓고 보는 초보 요리사는 당연히 아니다. 킹은 요리의 맛을 내기 위해 두 가지를 첨부하는데, 하나는 재료에 대한 밑간이다. 깔리는 암시들, 다음과 같은 문장들. "나는 아내를 죽인 것보다 아들에게 그런 짓을 한 것이 훨씬 후회스럽다. 왜 그런지는 이 글을 읽다 보면 알 것이다. (p.12)" "그로부터 8년이 지난 지금, 나는 비로소 깨닫게 됐다. '쪼까오다'와 '쫓기다'가 얼마나 비슷하게 들리는지를. (p.47)" "테스의 운명은 그렇게 간단히 결정됐다. 원래부터 지름길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사람이었으니까.(p.236)" "다아시는 길을 걸을 때 중력이 자신을 땅에 붙들어 줄 거라 믿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행복을 조금도 의심치 않았다. 그날 밤 차고에 들어갈 때까지는. (p.473)" 순간의 결정으로 갈리는 운명, 이미 결정나버린 운명. 그것은 어떻게 그들에게 절망을 선사했을까. 그리고 그것은 그들의 끝일까. 그릇에 가득 담긴 음식을 한입씩 베어물 때마다 뿌려놓은 밑간이, 아니 뿌려놓은 문장들이 맛을 곱씹게 만든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맛있는 요리가 그렇듯이, 그것은 한 번의 행위로 만들어지는 결과물은 아니라는 점이다. 어떤 재료는 갈아야하고, 어떤 재료는 볶아야하고, 또 어떤 재료는 삶아야한다. 그리고 그것이 모두 합쳐졌을 때 맛있는 요리가 나온다. 마찬가지로 킹의 이 소설들은 1막으로 이루어진 연극이 아니다. 앞서 얘기했듯이 '1922'에서 월프리드가 고백한 아내에 대한 살인, '빅 드라이버'에서 테스와 빅 드라이버의 만남, '행복한 결혼생활'에서 남편 밥의 비밀 모두, 이야기의 초반에 이미 밝혀진다. 그렇다면 나머지 페이지들을 도대체 무슨 수로 채울 것인가. 이 이야기들은 모두 끝났다고 생각한 시점에서 다시 시작한다. 가장 무서웠던 이야기들은 끝나는 것 같았지만, 그것은 단지 1막의 끝일 뿐이며, 이야기는 더 무섭고 잔혹한 2막과 3막을 준비하고 있다. '빅 드라이버'에서 테스는 '빅 드라이버'를 만나고 소설의 시작에서 60페이지 정도가 지난 후 집으로 돌아온다. 벌써? 그렇다면 소설의 나머지 100페이지는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실망하지 마시라. 2막과 3막이 준비되어 있다. 그리고 여기에 킹은 잊지 않고 적절한 양념들을 추가한다. 테스의 아주 잘못된 것처럼 보이는 선택들, 물씬물씬 솟아나오는 조바심들. 그렇게, 그렇게 하지 말란 말이야, 제발. 촉발된 독자의 조바심은 식욕을, 아니 독욕을 돋군다.

      

그러나 킹의 요리들은 아마도 집나간 입맛들을 돌아오게 만드는 것에만 머물러있지는 않은 것 같다. 좋은 요리사들이 만드는 좋은 요리가 그렇듯이 그것은 맛있기도 하지만, 몸을 건강하게 해준다. 그리고 좋은 소설들은 물론 몸이 아니라 정신을 건강하게 해준다. 이 소설들을 이렇게 바꿔서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지극히 미국적인 공간에서 그려내는 미국이라는 가족 사회의 망가진 초상. 이 소설들이 공유하는 지점이 있다. 하나는 공간이 서사를 끌고가는 힘이다. '1922'에서 세밀히 묘사된 외따로 떨어져 있는 작은 농장들(나, 윌프리드가 아내를 죽이기로 결심한 것도 결국 땅 때문이었다), '빅 드라이버'의 "정을 주세요 정을 드릴게요"라는 간판이 걸려있는 버려진 가게, 아니면 '행복한 결혼 생활'에서 완벽히 정리되어 있는 것 보이지만, 아주 더러운 것을 몰래 숨겨놓고 있는 밥의 차고. 할리우드의 (공포) 영화들에서 자주 등장하는 그 자체로 불길하고 무섭고 막막한 공간들. 다른 하나는 결국 이것이 가족이라는 것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미국 사회의 알 수 없는 단면들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지극히 사적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그래서 그 안에서 어떤 공포 서사가 진행되고 있어도 알 수 없는 가족들의 내밀한 서사가 있다. '1922'나 '행복한 결혼 생활'은 말할 것도 없고, '빅 드라이버'의 어머니와 아들, 그리고 '공정한 거래'도 결국 가족의 이야기이다. 이 부서져가고 있는 가족의 초상들, 그것이 토대가 되어 떠받치고 있는 미국 사회라는 불안한 무엇에 대해. (예를 들어 요즘 도널드 트럼프에 대한 지지율을 보면 저쪽도 참 답이 없구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결국 이 소설집 <별도 없는 한밤에>는 그가 그려내는 세계의 연장 선장에 있다. 그의 세계란 미치광이 아버지들이 중심이 되어 벌이는 가족 공포의 세계이다. 외따로 떨어져 있는 폐쇄된 공간에서,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그 공간에서 벌이는 아버지들(남자들)의 피의 서사. 그는 그것을 지금껏 여러 작품에서 그려왔고, 그것은 이 작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즉 '1922'의 아버지와 아들이, <샤이닝>의 아버지와 아들과 겹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당연하다. 이 대물림되는 미치광이들. 그들은 미쳐가는 것일까, 아니면 그 오래전 죽은 아버지들의 영향으로 이미 미쳐있었던 것일까. 그러나 그들은 성실하게 납세하고 주말에 교회를 가고,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책을 읽는 농부이자, 훌륭한 회계사이자 17년 간이나 무료로 봉사하는 보이 스카우트 지도자들이기도 하며, 동시에 "우리 군인들을 응원합니다! 아프간디스탄(철자는 킹이 일부러 틀리게 쓴 것이다)에서 승전 기원!!"이라는 문구가 붙은 곳에서 성실히 트럭을 몰며 일하는 사람들이기도 하다(물론 이것은 킹의 농담이지만, 여기에서 한 남자가 생각나기도 했다. <11/22/63>에 등장하는 케네디를 살리기 위해 애쓰는, 킹의 세계에서 보기 드문 선한 남자 제이크 에핑 말이다). 성실하고 좋은 가장인 그들에게는 다른 세계가 있다. '1922'에 등장하는 '음흉한 남자'의 세계, 혹은 '행복한 결혼 생활'에 등장하는 다아시의 거울 속 다른 세계. 그리고 물론 스티븐 킹이 그려내는 미국도 우리 눈에 보이는 미국이 아닌, 우리가 보지 못하는 그러나 엄연히 존재하는 다른 세계의 미국이다.

      

아무튼 그런 것을 다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스티븐 킹의 600페이지가 넘는 이 소설은 200페이지의 체감속도로 넘어가는 그런 소설이다. 개인적으로는 내가 이 리뷰에서 가장 언급을 적게 한 '공정한 거래'라는 짤막한 단편이 가장 마음에 들었는데, 그것은 이 소설이 가장 잘 쓰여진 것처럼 느껴져서라기보다는 이 소설이 어린 시절의 추억들을 떠올리게 만드는 부분이 있어서였다. 소설을 읽다보니 어린 시절 <환상특급>을 두근거리면서 보던 기억이 떠올랐다. 보고난 후 잠을 잘 이룰 수 없게끔 만드는 공포, 혹은 서스펜스가 있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끝까지 보게 만들었던 재미, 그리고 거기에 담긴 적당한, 그러나 서늘한 교훈까지 말이다. 그래, 내 어릴 적 <환상특급>의 이야기들도 항상 이런 식으로 끝나곤 했지.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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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5-09-23 1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환상특급류는 넘 좋은데.. 요즘 장르(드라마)물 아껴놨던거 몰아보느라 정신못차린상태.. 그와중에 메르세데스는 너무 재미없어서 질질 흘려읽었어요.. 길긴 또 왜이리긴지.. 왜지..왜때문이지.. 타고난 이야기꾼은 맞는데 유머코드,탐정코드 별로 저랑 안맞아요(느낌법 안쓰기). 호러는 좋은데 말이죠. 그렇지만 좀비.. 또 지루할까봐 안볼라그랬는데 600페이지가 200페이지로 둔갑.. 접수! 잘지내나요, 맥거핀님?

2015-09-24 16: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9-25 12: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선 2015-09-26 0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름 짧게 쓴다고 했는데 맨 처음에 쓸 때는 길게 썼네요 일부러 그런 걸지도 모르겠네요 1막 2막 3막까지 가는 이야기군요 어떻게 될지 알고 싶으면 멈추지 못하고 보기는 하는군요 요새는 그런 책을 못 봤습니다 어떤 때는 앞으로 어떤 일이 펼쳐질지 기대가 되기도 하는데, 그런 일도 자주 없군요 이 책은 그런 기분으로 보신 듯하네요 책을 보면서 그러면 안 돼 하는 사람은 꼭 그렇게 하죠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미치광이 아버지라... 스티븐 킹은 왜 그런 걸 쓸까 싶네요 진짜 아버지일 수도 있고 그 아버지는 다른 걸 나타낼 수도 있겠네요

명절 잘 보내세요 잠깐 달도 보고... 늘 무슨 달이라고 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보름은 달마다 찾아오는데... 명절에는 평소와는 다른 달이 될지도 모르죠


희선

2015-09-30 17: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 제20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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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에 등장하는 소설들이 있다. 남자가 투고한 <우주 알 이야기>. "원래부터 시간순으로 서술된 작품이 아님은 분명"한 "뒤로 갈수록 한 챕터의 길이가 길어지고, 소제목과 글 사이에는 어떤 패턴이 있는 것 같았는데, 그건 그냥 여자의 착각인지도" 모를 그런 소설. 아니면 남자가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쓴 소설 <그믐>. "학교 폭력 이야기"를 다룬, "화자가 하는 말이 그렇게 다 거짓말이었던 게 반전"인 소설. 이것은 거의 정확하게 장강명의 이 소설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이하 <그믐>)의 내용을 뭉뚱그려 말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이 소설의 어떤 전략을 말해주고 있기도 하다. 그 전략이란, 시간을 흩뜨린다, 어떤 패턴을 중첩한다, 트렌디한 소재(그러니까 학교 폭력)를 다룬다, 반전을 담는다,를 포괄한 것이면서 동시에 그것이 단순한 전략 이상의 것이 될 수 있도록 어떤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 전략들이란 사실 너무 흔한 것이니까 말이다. 시간을 뒤섞는 것, 혹은 패턴을 중첩하는 것(그 패턴을 어떤 '복선'이라 불러도 좋으리라), 반전을 담는 것, 그런 것들은 이미 낡을대로 낡은 수법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소설 속 소설의 내용이라고 이렇게 서술한 것에는 다른 의미가 있을 터였다. 그 다른 의미에 담겨진 무엇이 있을까. 아니면 희미한 의심. 이것마저도 어쩌면 또 하나의 전략이 아닐까.

    

책의 말미를 보니, 이 다른 의미에 주목하는 평들이 있다. 평론가 강지영의 평. "이 소설은 SF의 외연을 끌어오고 있지만 이미 그 안에서 소설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자문자답하고 있는 훌륭한 메타소설이기도 했다." 아니면 평론가 권희철의 평. "형식의 관점에서 볼 때 소설이 기억을 통해 시간의 문제를 다루는 물건이라는 점에서,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이 여느 평범한 소설가 소설보다 훨씬 더 깊이 있게 소설이라는 물건을 들여다보고 있다고 느꼈다." 이 두 개의 평에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이 소설 <그믐>이 소설을 통해 '소설이라는 형식'을 살펴보는 일종의 메타소설이라는 점이다. 위에서 얘기한 대로, 소설 속의 소설이 등장하고, 그것이 겉 소설의 내용을 암시한다는 점에서의 비슷한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지만, 동시에 다른 설정에서도 이 소설 읽기(혹은 쓰기)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투고된 원고를 실수로 떨어뜨려 원고가 섞이는 것, 혹은 남자가 자신에게 들어온 '우주 알'에 대해 서술하는 부분 같은 것들 말이다. 남자는 과거를 볼 수 있게 하고, 미래를 예측할 수 있게 해주는 자신에게 들어온 '우주 알'에 대해 그것을 책을 읽는 것에 비유하여 이렇게 설명한다. "원하는 속도로 읽으면 되는 거니까. 중간에 멈출 수도 있고, 어떤 페이지를 읽다가 다른 페이지로 건너뛸 수도 있고, 앞으로 돌아갈 수도 있어. 시간이란 게 책처럼 통째로 펼쳐져 있으니까." 혹은 "그렇게 책을 읽을 때마다 매번 페이지를 뒤섞고 다시 제본을 해서 읽는 거야."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여자가 종종 놀림 섞은 의문을 가지듯이 그가 모든 것에 대해 알 수는 없다. 왜냐하면 남자가 볼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그것을 미술관에 걸린 그림을 감상하는 것에 비유하여 설명하는데, 그는 입구부터 차례대로 그림을 감상할 수도 있고, 중간중간에 그림을 건너뛸 수도 있으며, 다시 되돌아가 특정의 그림을 감상할 수도 있으며, 출구부터 입구로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미술관에 걸리지 않은 그림을 볼 수는 없다. 그것을 다시 책에 대한 비유로 돌아와서 생각해본다면, 그는, 그리고 동시에 모든 소설의 독자인 우리들은, 설혹 "책을 읽을 때마다 매번 페이지를 뒤섞고 다시 제본을 해서 읽"을 수는 있지만, 소설이 결국 서술하지 않은 장면을 읽을 수는 없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의 소설에서만 해당되는 문제는 아닐 것이다. 우리가 여러 책을 읽는다는 행위도 어떻게 보면 그와 비슷하지 않을까. 우리는 여러 책을 통해 과거와 미래의 사건, 혹은 동시대의 우리가 경험해보지 않은 사건을 간접적으로 체험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직 쓰여진 적이 없는 무엇인가에 대해 읽을 수는 없다. 우리가 그것에 대해 읽고 싶다면, 우리가 직접 상상하여 쓰는 수밖에 없다. 서술되지 않은 것, 혹은 섞여버린 원고 사이를 이으려면 우리가 우리의 상상을 거기에 첨부하여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결여된 무엇인가가 있다. 예를 들어 소설의 말미에 등장한 질문. 세 가지의 순서를 바꾼 단어들로 이루어진 질문. "도대체 너는 누구였어? 너는 도대체 누구였어? 너는 누구였어, 도대체?" 그것은 그의 작동 방식에 대해 묻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까지 남자는 자신의 안에 들어있는 우주 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 여러 비유를 들어 설명했지만, 그 질문은 그것에 대해 묻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 존재가 과연 무엇인지, 그것의 기원과 존재의 이유에 대해 묻는 것이다. 그것을 다시 소설 읽기로 돌아온다면 이렇게 바꿀 수 있을 것이다. (페이지를 섞고 다시 제본을 하여 읽든, 쓰여지지 않은 것을 상상으로 첨부하여 읽든) 소설이란 무엇인가, 왜 소설을 읽으려고 하는가. 그것을 거창하게 말하기 보다는, 나는 이렇게 바꿔서 말하고 싶다. 도대체 너는 누구였어, 너는 도대체 누구였어, 너는 누구였어, 도대체,라는 중첩된 질문이 지시하는 바는 (미세한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결국 같다. 그것은 소설 속에서 시간을 흩뜨려 놓는 것과 비슷하다. 즉 소설 속에서 시간이 뒤섞인다고 해도, 거의 모든 독자들은 그것을 자신의 머리 속에서 재배열하여 자신의 소설 속 시간을 만든다. 그리고 끊어진 시간들을 자신의 상상이라는 풀로 이어붙여서 다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다시 말해서, 단어를 뒤섞는 것이나 시간을 뒤섞는 것이나, 결국 하나의 테크닉이고, 그렇다고 해서(즉, 그 테크닉으로 가려놓았다고 해서) 근원적인 질문이 바뀌지는 않으며, 그 질문을 피해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질문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예를 들어 이 소설에서라면 이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남자는 여자에게, 그리고 동시에 독자를 향해 서술한다. "지금까지 내가 해온 모든 거짓말들은 다 잊더라도, 이 말만은 기억해줬으면 해. 널 만나서 정말 기뻤어. 너와의 시간은 내 인생 최고의 순간들이었어. 난 그걸 절대로 후회하지 않아. 고마워. 진심으로." 소설 속에서 '이 말만은 기억해줬으면 해', 혹은 '진심'이라는 낱말이 등장할 때에 동반하게 되는 어떤 머뭇거림이 아니더라도, 나는 이 말 앞에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 남자의 진심이란 무엇이었을까. 아니, 이 남자에게 이 여자는 어떤 의미였을까. 나는 사실 잘 모르겠다. 그것을 여자의 입을 빌려 묻고 싶다. 도대체 너는 누구였어? 그것은 남자 안에 작동하는 우주 알의 작동 방식에 대해 묻는 것이 아니다. 그 우주 알이란 무엇인지, 혹은 그 우주 알이 들어간 남자라는 존재는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묻는 것이다. 그가 원래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왜 우주 알은 그에게 들어갔는지, 소설의 말을 빌리자면 그의 '패턴'이 과연 무엇인지. 그에게 남은 패턴, 그리고 그 전에 그가 지워나간 패턴은 무엇이었는지.

      

"인간이란 건 결국 패턴이야." 소설은 말한다. 그렇다면 소설도 일종의 패턴일까. <그믐>에는 어떤 패턴들이 있다. 예를 들어 소설에 붙은 중간제목들의 패턴. '순서/보람/개성' '작두/홍콩/교지' '노선/모범/소금' ..... 언뜻 연관이 없어 보이는, 그러나 두 음절로 이루어진 어떤 패턴을 이루는 듯한 단어들. 이 소설 <그믐>도 그런 것과 비슷하다. 작은 패턴들은 있지만, 이상하게도 그 패턴들이 잘 붙지가 않는다. 각각의 디테일한 이야기들이 있다. 예를 들어 '홍콩', 홍콩에 살고 있는 자신과 같은 이름을 가진 동창의 이야기. 혹은 '모범', 모범택시를 모는 아버지와 그의 바람을 의심하는 어머니의 이야기. 이 각각의 이야기들은 디테일이 살아 있으며, 그 자체로 충분히 읽기의 즐거움을 주는 이야기거리가 된다. 그것을 작가의 능숙한 테크닉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들이 붙어서 만들어내는 무엇인가, 예를 들어 남자는 어떤 사람이고, 여자는 어떤 사람이며, 남자를 집요하게 쫓는 아주머니는 어떤 사람인가는 여전히 흐릿하다. 그것은 각각의 패턴들은 있지만, 그 패턴들을 엮는 고리, 그 고리의 만듦새가 헐겁기 때문이다. 디테일(혹은 패턴들)의 총합이 소설이 되지는 않는다. 각각의 장면들을 최대한 디테일하게 만든다고 해서 좋은 영화가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 디테일함들을 엮어내는 그 이상의 무엇인가가 소설이라는 형식에는 필요하며, 그것은 이 소설에서도 마찬가지다.

      

그 이상의 무엇인가는 무엇인가, 무엇이 결여되었는가에 대해 답하는 것은 어렵다. 그것은 결국 소설을 왜 읽는가, 소설은 읽는 이에게 무엇을 전달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귀결될 것이다. 다만 나는 도대체 너는 누구였어,라고 질문하며 애처롭게 남겨진 이 인물이 작가의 테크닉 실험의 희생양이 아닐까,하는 희미한 의심, 혹은 그것마저도 어떤 전략의 일부가 아닐까,라는 더 희미한 의심을 가져볼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한국이 싫어서>에서 계나의 "난 이제부터 진짜 행복해질거야"라는 진술에 섞인 어떤 의구심을 떠올리게 만들기도 한다. 이 <그믐>의 "진심으로"와 <한국이 싫어서>의 "진짜'가 말하고자 하는 무엇에 대하여.

    

 

덧.

두 가지의 목적에서 이 리뷰를 썼다. 하나는 장강명 리뷰대회에 붙은 상금을 보고. 그런데, 결국 이런 내용이고 보면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리뷰인 것 같다. 아니 내가 출판사 직원이라도 이런 리뷰는 안 뽑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원고지 10매 이내라는 분량 제한도 무시하고 있으니....)

 

다른 하나는 지난 번 <한국이 싫어서>를 읽고 남긴 별 하나가 마음에 걸려서다. 소설 하나만 읽고 이 작가에 대해 너무 단정적으로 생각하고 말한 것은 아닐까. 어쩌면 다른 소설들은 이와는 전혀 다르지 않을까,싶어서 한 권쯤 더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렇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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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7 15: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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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7 15:4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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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7 20: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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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8 15: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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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8 11: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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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8 15: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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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9 12: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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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21 10: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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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5-09-20 0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시간 왔다 갔다 하는 거 읽기 힘들더군요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그래도 끝까지 보려고 합니다 그래야 무슨 이야긴지 조금은 알 수 있기도 하니까요 이런 말을 처음에 하다니... 그냥 소설은 앞으로 나아가는 이야기보다 지난날을 떠올릴 때가 더 많기도 하군요 단편도 지금이 아닌 예전 이야기를 할 때가 많고... 우리나라 단편 별로 안 읽어서 잘 모르는데, 얼마전에 조금 읽고 생각한 거군요 다 지난날을 이야기하는 건 아니지만... 그런 게 더 많다고 느꼈습니다

왜 제가 시간 왔다 갔다 하는 거 힘들게 여겼는지 생각났습니다 읽으면서 이걸 어떻게 쓰지 해서예요 쓰는 것 때문에 그랬다니... 지금은 거기에 덜 매이려고 하지만... 책을 본 다음에 쓰기 시작했을 때 별로 생각하지 않아서군요 어렸을 때 쓴 독후감처럼 쓰려고 해서, 지금도 거기에서 그렇게 벗어나지 못했지만... 좀더 괜찮은 생각이라도 하면 좋을 텐데, 그런 것도 못하는군요 독후감 잘 쓰는 사람도 있군요 제가 그걸 거의 안 써봐서...

책 내용 조금 아는데, 왜 그랬을까 하는 생각 조금 했습니다 그것 자체로 좋다고 봐야 할지, 그저 그럴 수도 있겠지 해야 할지... 진심이겠죠 그렇게 될 만한 게 보이지 않는다 해도... ‘진심이야’ 하는 말을 하면 그렇게 들리지 않을 수 있겠지만, 그대로 받아들여도 괜찮겠죠 잘 모르는데 이런 말을 했네요

이번에도 별점은 낮군요


희선

맥거핀 2015-09-21 11:10   좋아요 1 | URL
그런데 소설에서 시간을 섞는다고 해도 그것은 일종의 트릭일 뿐, 결국 그것은 읽는 이의 머리 속에서 재배열되죠. 소설은 결국 읽는 이의 기억에 의존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니까요. (예를 들어 단기기억상실자가 소설을 읽는 풍경을 상상해본다면 말이죠.) 근원적으로 소설에서 시간을 섞을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은 섞이는 것 같지만(어떤 트릭으로 섞이는 척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섞이지 않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래서 트릭 이상의 무엇인가가, 그러니까 시간을 섞는다면 왜 섞어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이 이 이야기에서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 대답은 그렇게 저를 납득시키지 못했습니다.

저는 한편으로는 소설이라는 것이 결국은 진심을 포장하는 기술이라고도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많은 소설들이 진심이라는 것을 어떻게하면 손상시키지 않고 최대한 전달할까 고민해왔겠죠. 그런데 어떤 소설들이 그것을 `진심이야`라는 말로 한마디로 뭉뚱그릴 때 어떤 (조금 우습게도) 배신감들을 느껴요. 다른 누군가들은 진심을 저렇게 전달하려고 애쓰는데, 너는 그것을 단순히 `진심이야`라는 한마디로 끝내?, 뭐 그런 단순한 생각이겠죠.

아무튼 이제 장강명 씨와는 한동안 바이바이하고, 다른 책들을 조금 봐야할 것 같습니다.^^
 
[한국이 싫어서]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한국이 싫어서 오늘의 젊은 작가 7
장강명 지음 / 민음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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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책 뒤편에 있는 문학평론가 허희 씨의 해설을 읽고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의 끝은 주인공 계나가 난 이제부터 진짜 행복해질 거야, 라고 결심의 말을 덧붙이는 것으로 끝난다. 그런데 허희 평론가는 단호하게 말한다. "나는 그녀가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고 확신한다.(p.200)" 그러니까, 이 해설은 소설의 결론을 뒤집는 것이며, 어떠한 의미에서는 결국 이 소설이 어떤 부분에서는 무엇인가를 의도적으로 숨기고 있거나, 혹은 그려내는 데에 실패했다(혹은 치밀하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어떤 부분에서 그런가.

 

난 이제부터 진짜 행복해질 거야, 라는 결심. 내가 보기에는 그것은 두 가지로 나누어서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한 가지는, '난 행복해질 거야'라는 진술.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나는' 행복해진다,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어떤 국가나, 가족이나, 다른 거대한 무엇이 끼어들 틈은 없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제목 <한국이 싫어서>는 일종의 낚시, 혹은 자극적인 마케팅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정확하게 말하면 계나가 한국을 떠나 호주로 이주하는 것은 '한국이 싫어서'가 아니다. 한국이 싫어서, 가 아니라, 한국에서 행복해질 수 없다고 혹은 한국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실 여기에는 국가라는 이데올로기가 가지는 무엇이 끼어들 틈은 없다. '한국'이라는 것은 단지 어떤 울타리의 다른 이름일 뿐이고, 허희 씨의 말을 빌리자면, 그저 여러 개 축사 중에 어느 한 귀퉁이에 붙여진 이름일 뿐이다. 그게 '한국'이면 어떻고, '서울'이면 어떠하며, '호주'든 혹은 '우간다'인들 뭐가 달라지는 게 있으리.

 

다시 말해서, '한국이 싫어서'라는 제목은 '한국'이라는 특정의 공간에 대한 비판을 담고자 한다는 오해를 불러오지만, 사실 이 소설에서 말하는 것은 그런 거창한 것은 아니다. 이 소설에서 말하는 한국에 대한 비판은, 우리가 익히 알고, 우리가 익히 상상하는 그 지점에서 머무르며, 단지 계나가 한국을 탈출하고자 하는 것은 '한국'이라는 공간이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 공간에서 자신이 살아남을 수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즉 계나(그리고 철저하게 계나의 1인칭으로 전개되는 이 소설에서 계나의 세계관과 소설의 세계관은 동일하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결국 이 소설)에게는 사실 그 나머지는 관심 밖, 아이 돈 케어이며, 어떠한 의미에서는 계나의 스탠스는 사실 그녀가 비판하고자 하는(그러나 사실 정확하게 얘기하면 비판하는 척 하는) 스탠스와 거의 일치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즉 이 소설에서 담고 있는 '한국'이라는 공간에 대한 비판은 그 공간을 지배하는 지배법칙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그 지배법칙의 (최소한의) 주도권이 자신에게 없다는 것에 대한 비판에 가깝다. 지배법칙이 그 모양으로 생겨먹은 것에 대해서는 소설은 사실 관심조차 별로 없다. 오해는 마시라. 나는 이것이 마냥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 소설에서 자꾸 '한국'이라는 것을 불러오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고 말하고 싶은 것 뿐이다. 그저 계나가, 혹은 소설이 말하는 지점은 '내가' 행복해지는 것이다. 그것이 어디가 되었든 말이다. 그 이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사실 이 소설의 '관심 밖'이다. (그러니 '한국이 싫어서'라는 이 제목은 마케팅의 산물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한국이 별로 싫지는 않은데, 내가 거기서는 힘이 없고 앞으로도 힘이 생기지 않을 것 같아서'에 가까울 것이다.) 

 

다른 하나는 난 진짜 행복해질 거야, 라는 결심에서 '진짜'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그러니까 소설의 가장 마지막 문장에 붙은 이 '진짜'는 사실 그녀가 이 소설의 내내, 그러니까 호주에 와서도 결코 '진짜' 행복해진 적은 없었음을 간명하게 말해준다. 허희 평론가의 말대로 "2000년대 한국 소설에 등장한 이주노동자의 살림과 유사한 모습이다. 부푼 희망을 안고 호주에 온 그녀를 비롯한 한국인들은 고국에서보다 도리어 궁핍하게 산다. 영어가 능숙하지 않아 빌딩 청소 등 고된 육체노동을 하면서 영주권과 시민권을 취득하기 위해 아등바등한다. (p.200)" 그 뿐인가. 계나는 두 번이나 부당한 이유로 재판에 연루되고, 벌금을 내고 호주에서 추방될 위기에 처하기도 한다. 그녀의 고백대로 사실 그녀가 호주에서 '진짜' 행복해하는 것처럼 보였던 때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호주 시민권을 취득했을 때는 행복해할 법도 하지만, 그녀는 말한다. "증서 수여식이 끝나고 다른 사람들이 다과회에서 친지들과 기념사진을 찍을 때 슬그머니 행사장을 빠져나왔어. 6년 동안 고생한 게 하나하나 생각나서 뭔가 뭉클한 기분인데, 그렇다고 나 이제 호주 사람이다! 이러고 만세를 부르기도 뻘쭘하고. (p.172)"

 

결국 그 순간에도 그녀가 떠올리는 것은 6년 동안 고생한 기억이다. 그것은 이런 것과 다를까. 예를 들어 그녀가 한국에서 6년 동안 고생하여 좋은 일자리의 취업을 거의 100% 보장해주는 어떤 자격증을 땄다면, 그녀는 그 순간 행복해할까, 아니면 6년 동안 고생한 기억을 떠올릴까. 나는 사실 잘 모르겠다. 그러니까 이런 것을 묻고 싶다. 만약 계나가 6년 동안 한국을 떠나지 않고 호주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한 만큼 한국에서 무엇인가를 했다면, 한국에서 살아남을 정도가 될까, 혹은 한국에서 행복해졌을까. 아니 또 오해는 마시라. 나는 당신이 이 모양으로 사는 것은, 단지 당신이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야, 라는 엿같은 소리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다만 그것이 궁극적으로 무슨 차이가 있는지 알 수가 없어서 하는 말이다. 한국에서 돈없는 노동자로 사는 것과 호주에서 이주노동자로 사는 것의 차이.

 

아주 간략하게 말해서 그것이 큰 차이가 있어요, 라는 것이 이 소설의 태도이고, 그것은 사실 큰 차이가 없다, 중요한 무엇인가는 바뀌지 않았다, 라고 말하는 것이 허희 평론가의 말이고, 내가 어느정도 수긍하는 말이다. 적어도 이 소설에서의 계나의 진술을 그대로 믿는다면 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나는 계나가 행복해질 수 없다고 확신하지는 못하겠다. 어쩌면 행복해질 수도 있겠지.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렇게 얻는 행복이 소설을 읽는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지? 물론 당연하게도 소설 주인공의 행복과 우리의 실제 행복은 크게 상관이 없다. 나는 그것을 새삼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나는 소설의 행복이 우리의 행복과 일치할 수도 있다는 환상을 깨지 않기 위해 소설은 끊임없이 노력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그 환상이 깨지는 것을 막기 위해 소설은 어떻게든 모든 가능한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이 소설이 1인칭으로 말을 건네는 형식을 취하는 것도 그러한 강구할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인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계나가 말을 건네는 이들은 누구일까. 호주에 이미 도착한 이들은 아닐테고, 아직 한국에 남아있는 은혜나 미연이나, 혹은 동생 예나와 같은 이들일 것이다. 그런데 이들에게 이 말은 전해지고 있을까. 이렇게 말하면서? "시드니에서 매일 크고 작은 모험을 겪고 있어서 그런가, 옛날 친구들이 좀 얄팍해 보이더라. 내가 걔들보다 더 나은 선택을 했다거나, 내 미래가 더 밝을 거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호주에 올 일 있으면 연락해, 나 무지 전망 좋고 겁나 큰 아파트에서 살아."라며 휴대폰 번호와 새로 만든 이메일 주소를 알려 주고 자리에서 먼저 일어났어. 머리가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p.121)" 이 말들은, 그러니까 이 소설은 누구에게 전달될 수 있을까. 혹시 계나와 미연이와 은혜가 벌이는 작은 파티에서 주문한 배달음식을 30분 안에 배달해주는, 신용카드를 양손으로 받고 90도로 인사하는 배달원에게?)

 

허희 평론가는 (그래도 평론가의 예의를 담아) 계나가 (지금과 같은 태도라면)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고 진지하게 충고해주었지만 나는 조금 더 냉소적으로 말한다. 그녀가 행복하든지, 말든지 나에게는 별로 의미가 없어졌다. 관심 밖, 아이 돈 케어. 그리고 (주인공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라는) 환상을 깨는 이 소설은 (적어도 나에게는) 실패한 소설이다.   

 

 

덧.  

어쩌면 이 소설의 의미는 다른 것에 있는 것 아닐까. 예를 들어 '한국이 싫어서'라는 마케팅적인 제목이나, 중편 소설 정도에 적당한 분량을 적당히 편집으로 늘려 '장편소설'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하드커버를 씌워 13,000원에 팔아먹는 자세 말이다. (빨리 술술 읽힌다,라는 평들이 많은데, 내가 생각하기에 여러 이유 중 가장 큰 이유는 결국 '짧기' 때문이다.) 이 소설이 결국 말을 건네고자 하는 젊은 청춘들에게,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이 어쩌면 이 소설의 내밀한 '태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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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5-08-06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씀드린 날보다도 3일 늦었네요. 너무 더워서 납작 엎드려 있었어요. 파트장님과 신간평가단 담당님께 죄송하다는 말씀 드립니다.

2015-08-06 20: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8-10 00: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8-07 01: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8-10 00: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이리시스 2015-08-22 2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별 한 개. 많이 과대평가됐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요즘 한국문학이 워낙 별로니까 평가는 후하게 줬던 것 같은데, 사실 냉정하게 어느순간부터 국내소설 신간에 별점을 높게 주기가 힘든 건 사실이에요.

맥거핀 2015-08-24 12:17   좋아요 0 | URL
솔직히 내용상에서도 그다지 공감이 안 가기도 하고, 제 기준에서는 어떤 소설의 기본이 안되어있다..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근데 이 책 꽤 잘 팔리는 것 같은데..요즘에 이런 게 먹히나?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요새 젊은 작가들이 잘 쓰기는 하는데..글쎄요. 이상하게도 무엇인가 결여되어 있다,라는 느낌이 들 때가 많습니다(근데 그 `무엇인가`가 무엇인지는 확실히 말하기가 어렵네요).

그나저나 잘 지내나요? 북플에서는 여전히 왕성하게 책을 보시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2015-08-24 12: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이리시스 2015-08-24 12:24   좋아요 0 | URL
맞죠, 자극적인 제목덕을 많이 본 소설이기도.
응, 또 나이를 먹는구나 으흠, 생각해볼게용 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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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메시스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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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필립 로스의 <네메시스>는 작은 이야기이다,라고 첫문장을 쓰려다 멈칫 한다. 작은 이야기인가? 어떤 '규모'나 '배경'이라는 의미에서의 소품이라면 그렇다고 할 수도 있다. 찌는 듯한 더위의 놀이터, 폴리오(척수성 소아마비), 폴리오에 걸리는 아이들, 자신 때문에 아이들이 폴리오에 걸렸다고 생각하는 놀이터 감독...기껏해야 한여름 미국 지방소도시의 어느 동네에서 일어난, 몇몇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던 작은 사건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사건이 한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달라지게했다는 사실을 차치하더라도(사실 모든 소설의 사건은 그 주인공에게는 결코 '작은 이야기'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것이 책임과 회피의 문제, 혹은 죄책감과 희생양의 문제, 혹은 신의 무한함과 그에 대비되는 인간의 원초적인 한계(또는 비극)와 관련된 문제라고 이야기한다면, 그것을 결코 작은 이야기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책 뒤편의 뉴욕 타임스의 평에 '매우 잘 만들어진 오 헨리의 이야기 같다'라는 문장이 있는데, 나도 언뜻 오 헨리의 이야기들과 비슷한 점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 헨리의 이야기들은 대부분 작은 이야기인들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거의 모든 단편들은 인간 감정의 가장 원초적인 부분들로 세밀하게 구성되어 있으며, 단지 그 이야기로 그치지 않고 대부분 어떤 우화로서의 기능을 충실하게 수행한다. 그리고 물론 우화가 우화로서의 기능을 하려면 그 이야기 자체에 읽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바로 필립 로스의 <네메시스>처럼 말이다.

 

<네메시스>의 공간이 있다. 첵 속의 표현을 빌리자면 '쇠로 만들어져 언제까지나 닳지 않을 듯한 눈에 띄게 또렷한 얼굴, 언제든지 의지할 수 있는 강인한 청년의 얼굴(p.20)'을 가진 버키 캔터가 감독하고 있던 동네의 놀이터. 모든 것이 불타오르는 듯한 폭염 속에서도 하루 온종일, 이닝에 이닝을 거듭하는 게임을 이어가는 소프트볼을 하는 아이들이 모여놀던 그 놀이터. 한쪽 구석에서는 여남은 명의 여자아이들이 노래를 부르며 줄넘기를 하고, 동네의 '얼간이' 호러스가 나타나, 놀던 아이들이 귀찮음에 못이겨 악수를 해줄 때까지 그 옆을 떠나지 않고 서 있던 그 놀이터. 그것은 아이들이 모여노는 작은 공간일 뿐이지만, 적어도 버키 캔터에게는 그 자신이 어떻게든 지켜내야 하는 공간이었다. 여기에는 두 가지의 문제가 관련되어 있다. 하나는 무엇으로부터 그것을 지켜내는가의 문제이다. 필립 로스는 이 '무엇으로부터'의 문제를 초반 흥미롭게 구성한다. 그들이 놀던 놀이터에 어느날 이탈리아 아이들 무리가 찾아온다. 그들의 목적은 단순히 그들에게 시비를 걸려는 것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폴리오를 퍼뜨리는 것이 목적이라고 하면서 위협적인 자세로 침을 뱉는다. 버키 캔터는 놀이터의 감독관으로서 거의 혼자 힘으로 무리를 제어하고, 그들이 뱉은 침을 신속하게 물과 암모니아로 닦아내지만, 이상하게도 그 이후부터 폴리오는 놀이터의 아이들 사이에서 퍼져나가기 시작한다. 눈에 보이는 것, 즉 이탈리아 아이들이나 그들이 뱉은 침은 닦아내면 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폴리오 병균으로부터의 위협은 어떻게 지켜낼 수 있을 것인가.

 

다른 하나는 그가 '왜' 이 공간에 그렇게 큰 책임을 느끼는가의 문제이다. 캔터는 아이들 사이에 폴리오가 퍼지자, 큰 책임감을 느끼며, 죽은 아이들의 집을 찾아가거나 전화를 하기도 하고, 그들의 장례식장에 가며, 이 문제의 원인이 자신이 맡은 일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닥터 스타인버그나 다른 이들의 말대로 더운 여름날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뛰어논다고 해서, 폴리오가 그것으로부터 촉발된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탈리아 아이들이 다녀간 것도 물론 마찬가지다. (실제 놀이터가 원인이라면 그것을 임시폐쇄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지만, 당국은 물론 그러지 않는다.) 그것은 막연한 상상이나 두려움에 가깝고, 폴리오가 그 아이들에게 어떻게 침투하였는지는 오늘날 흔히 말하는 대로 광범위한 역학조사가 실시되지 않는 한 정확하게 밝혀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캔터의 어떤 책임감은 이러한 실제적인 문제(그러니까 놀이터가 폴리오의 온상이라는)와 조금 비껴서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것을 캔터 개인과 관련된 부분에서 찾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것은 그가 어렸을 때 부모님을 잃고 책임감을 가지고 강해질 것을 요구하는 조부모 밑에서 자라난 것에 그 이유가 있을 수도 있고, 혹은 친구들과 함께 유럽과 태평양에서 벌어지고 있는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고 싶어했지만, 건강한 신체를 가졌음에도 낮은 시력 때문에 참전하지 못하고 국내에 남아야 했던 그의 이력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

 

여기에 필립 로스의 작가로서의 노회한 능력이 드러나는데, 다시 말해서 버키 캔터의 전쟁터는 친구들이 참전한 프랑스 노르망디 해변이 아니라, 여기 미국 뉴어크 위퀘이크의 작은 놀이터였고, 그의 적은 철모를 쓴 독일군이 아니라 폴리오였다. 이것을 필립 로스는 노련하게 교차하며 구성하는데(내가 이 소설을 영화화하는 영화감독이라면 당연하게도 교차 편집을 적극 활용할 것이다), 그가 소설의 초반에 맞서게 되는 것도 하필이면 '이탈리아' 이민자의 아이들이며, 그가 2차 세계대전이라는 전쟁에서 (본의아니게) 물러났다면 이 폴리오와 싸우는 전쟁에서는 자신의 의지로 물러나며, 전쟁에서 친구를 잃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자신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던 소년(도널드 캐플로)을 잃고, 이 폴리오와 관련된 자신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그러므로 필립 로스의 노회한 세공술에 의해 이 이야기는 단순히 폴리오가 퍼졌던 놀이터 이야기 이상의 것이 된다. 총알이 빗발치는 노르망디 해변과 폴리오가 퍼지는 놀이터, 혹은 그보다 작은 단계로서의 불볕의 더위가 몰아닥치는 폴리오가 퍼지는 놀이터와 상큼한 바람과 시원한 바람이 있는 캠프파이어. 이것은 어떤 단계이자, 혹은 비유(우화)의 공간이며, 소설을 읽는 누구에게나 존재할 수 있는, 다만 그 형태가 다른 공간이다. 우리들 각자에게도 자신만의 형태가 다른, 감독해야만 하는 놀이터와 그 책임을 벗어나고 도피하여 도착하고 싶은 꿈의 캠프파이어가 있다(노르망디 해변과 미국의 어느 소도시의 놀이터라고 단계를 바꿔도 마찬가지다).

  

여기에서 이야기는 다시 '무엇으로부터'의 책임인가,의 문제로 돌아가는데, 어떤 의미에서 폴리오는 독일군보다 더 위험하다. 왜냐하면 독일군 철모의 갈고리십자는 눈에 보이지만, 폴리오 바이러스의 갈고리는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적일 때, 그것에 대항하는 가장 쉬운 방법을 생각해냈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눈에 보이는 것으로 치환하는 것이다. 폴리오를 퍼뜨리는 이탈리아 아이들, 그들의 침, 아이들이 즐겨먹던 핫도그, 더운 여름날의 놀이터, 병균을 가지고 돌아다니는 더러운 호러스. 혹은 조금 다른 형태도 있다. 예를 들어 하느님이라는 존재이거나 혹은 인디언 정신과 같은 것. 하느님이 폴리오를 만들어내고, 누군가의 기도에 응답하거나, 혹은 누군가에게 불행을 내린다고 생각하는 캔터의 원망은 어떤 존재에게 책임을 돌린다는 점에서, 설혹 그 존재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앞의 치환들과 묘하게 닮아 있으며, 캠프파이어에서 이루어지는 기묘한 인디언 의식과도 연관된다(이 인디언 의식이 애국심을 고취하는 것으로 끝난다는 점에서 이에 대한 필립 로스의 어떤 비판이 스며들어 있다고 생각해도 될까. 인디언을 몰살한 미국인들이 그 애국심을 고취하기위해 인디언 의식을 활용한다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으로 캔터의 방식이 있다. 외부가 아닌 내부로 방향을 트는 것.

 

버키 캔터의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되는 듯했던 이야기는 말미에 이르러 묘하게 방향을 튼다. 그의 이야기를 비판적으로 보는 또다른 화자가 등장하면서 말이다. 옮긴이의 말대로 이는 작가의 어떤 게임에 대한 제안으로 볼 수도 있다. 캔터의 시각을 지지할 것인가, 아니면 또다른 화자의 시각에 더 무게를 둘 것인가. 나는 필립 로스의 게임에 동참하는 대신, 이 제목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것으로 그 대답을 대신하고자 한다. 네메시스(Nemesis). 그리스 신화에서 인간의 본분을 벗어난 발언과 행동에 대한 신의 노여움과 벌을 의인화한, 흔히 말하는 복수의 여신. 그러나 네메시스는 본래 복수의 여신이 아니었다. 네메시스는 원래 분배의 신이어서 공동체 사회에서 생산물을 사람들에게 고루 분배하던 선한 신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탐욕을 부려 불평등하게 나누게 되자 네메시스의 직분이 달라져 일한 만큼 분배받지 못한 사람들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재산을 가진 자들에게 복수를 가하는 신이 되었다는 것이다(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85196.html 글에서 재인용). 즉 네메시스를 복수의 여신으로 만든 것은 인간들이었고, 보이지 않는 것에서 보이는 희생양을 만들어낸 것도 인간들이었다. 지금 여기에도 네메시스를 복수의 여신으로 만드는 자들은 누구인가.  

 

 

덧.  

소설을 읽는 내내,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예를 들어 폴 토마스 앤더슨의 지극히 미국적인 영화 말이다. 필립 로스의 묘사는 거의 스크린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특히 지옥불이 쏟아지는 것 같은 위퀘이크의 묘사와 그에 대비되는 스트라우즈버그 캠프에 대한 초반 묘사는 인상적이며, 보지 않았음에도 본 것 같은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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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7-27 01: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맥거핀님의 리뷰도 영화적 성질이 있어서 좋아요^^ 문학적 글쓰기보다 좀 더 공학성이 엿보인달까요. 그게 또 맥거핀님 문체의 매력이기도~
필립 로스는 어느 소설이나 지옥불을 넣는 것 같아요ㅎ그의 소설 전개 자체가 화염자갈이 깔린 지옥 통과하기 같기도 하고ㅎ;;;

웹에서 강탈되더니 내 좋아요를 잡아 먹었네! 하나는 제 것입니다!! 생색)))

맥거핀 2015-07-27 18:33   좋아요 1 | URL
영화적이라는 의미에서의 공학이라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실 영화에서 공학이라는 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비중이 크죠(무엇보다도 영화란 결국 카메라로 만들어내는 것이기도 하구요).

아무튼 소설을 읽으면서 어떤 영화에서 본 것 같은 몇몇 장면들이 스치고 지나갔어요. 예를 들어 주인공 버키 캔터에는 채닝 테이텀 같은 친구가 배역을 맡았으면 좋겠군요.

네..확실히 필립 로스 씨는 좀 집요한 느낌입니다. 소품에서도 이 정도시니..

좋아요 하나 제가 꼭 기억해두죠.(저도 생색)

2015-07-29 01: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7-30 14:5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