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 오타쿠를 통해 본 일본 사회
아즈마 히로키 지음, 이은미 옮김, 선정우 감수 / 문학동네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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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비-이야기의 소비 중 요약 /90년대의 오타쿠들은 일반적으로 80년대에 비해 작품세계의 데이터 자체를 고집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전하는 메시지나 의미에 대해서는 극히 무관심하다. 반대로 90년대에는 원작의 이야기와는 관계없이 그 단편인 일러스트나 설정만이 단독으로 소비되고 그 단편에 소비자가 마음대로 감정이입을 강화해가는, 다른 유형의 소비행동이 대두해왔다. 이 새로운 소비행동은 오타쿠들 자신에 의해 '캐릭터 인간'으로 불리고 있다. 후술하듯이 거기에서 오타쿠들은 이야기나 메시지와는 거의 관계없이 작품의 배후에 있는 정보만을 담담하게 소비하고 있다.-76쪽

<에반겔리온>의 팬이 추구하고 있었던 것 중 - (전략) 많은 건담 팬들은 건담의 세계를 정밀조사하는 데 욕망을 쏟고 있다. 즉 거기에는 가공의 커다란 이야기에 대한 정열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90년대 중반에 나타난 <에반겔리온>의 팬들, 특히 젊은 세대(제3세대)는 그 붐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조차도 에반겔리온의 세계 전체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을 기울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그들은 처음부터 2차창작적인 과도한 읽어내기나 캐릭터 모에의 대상으로서 캐릭터의 디자인이나 설정에만 관심을 집중하고 있었다. 즉 거기에서는 건담의 세계 같은 커다란 이야기=햐구는 이미 환상으로서도 욕망되고 있지 않았다. <건담>의 팬은 '우주세기' 연표의 정합성이나 메카닉의 리얼리티를 이상하게 고집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77쪽

5. 데이터베이스 소비 중 요약 / 모에 요소의 데이터베이스화는 90년대에 급속하게 진전되었다. '모에'란 원래 80년대 말에 생긴 말로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등의 캐릭터 또는 인기 연예인 등을 향한 허구적인 욕망을 의미했다고 한다. 특정한 캐릭터에 '열광하는' 사람들은 관련 상품을 집중적으로 구입하기 때문에 제작자에게는 작품 그 자체의 질보다 설정이나 일러스트를 통해 모에 욕망을 어떻게 환기할 것인가가 기획의 성패를 직접적으로 좌우하게 된다. 이러한 경향은 길게는 70년대까지 거슬러올라가지만 그 중요성은 90년대의 미디어믹스의 흐름 속에서 결정적으로 중대되게 되었다.-90쪽

'이야기 소비'에서 '데이터베이스' 소비로 중 요약 -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해보자. 만화,애니메이션,게임,소설,일러스트, 트레이딩 카드, 피규어, 기타 여러 작품이나 상품의 심층에 있는 것은 이제는 결코 이야기가 아니다. 90년대의 미디어믹스 환경에서 그 다양한 작품이나 상품을 묶는 것은 캐릭터밖에 없다. 그리고 소비자는 그 전제 위에(95)서 이야기를 포함한 기획(만화나 애니메이션 또는 소설)과 이야기를 포함하지 않는 기획(일러스트나 피규어)사이를 마음대로 왕복하고 있다. 여기에서 개개의 기획은 시뮬라크르이며 그 배후에 캐릭터나 설정으로 이루어진 데이터베이스가 있다.-95쪽

근대에서 포스트모던에 이르는 흐름 속에서 우리의 세계상은 이야기적이고 영화적인 세계시선에 의해 지탱되던 것에서 데이터베이스적이고 인터페이스적인 검색엔진에 의해 읽어내지는 것으로 크게 변화하고 있다. 그 변화 속에서 일본의 오타쿠들은 70년대에는 커다란 이야기를 잃어버렸고,80년대에는 그 잃어버린 커다란 이야기를 날조하는 단계(이야기 소비)에 이르렀으며, 계속되는 90년대에는 그 날조의 필요성조차 폐기하고 단순히 데이터베이스를 욕망하는 단계(데이터베이스 소비)를 맞이했다.-97쪽

(전략)코제브는 헤겔적인 역사가 끝난 뒤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 생존양식밖에 남아 있지 않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 하나는 미국적인 생활양식의 추구,그가 말하는 '동물로의 회귀'이며 또하는 일본적인 스노비즘이다./'스노비즘'이란 주어진 환경을 부정할 실질적인 이유가 아무 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형식화된 가치에 입각해'그것을 부정하는 행동양식이다. 스놉은 환경과 조화하지 않는다.비록 거기에 부정의 계기가 전혀 없다고 해도 스놉은 그것을 굳이 부정하고 형식적인 대립을 만들어내어 그 대립을 즐기고 애호한다. 코제브가 그 예로 들고 있는 것은 할복자살이다. 할복에서는 실질적으로는 죽을 이유가 아무것도 없는데도 명예나 규율이라는 형식적인 가치에 입각하여 자살이 행해진다.이것의 궁극의 스노비즘이다.(119)-118,119쪽

이와 같은 삶의 방식은 부정의 계기가 있다는 점에서 결코 '동물적'이지는 않다.그러나 그것은 또 역사시대의 인간적인 삶의 방식과는 다르다. 스놉들의 자연과 대립(예를 들면 할복할 때의 본능과의 대립)은 이미 어떤 의미에서도 역사를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다.순수하게 의례적으로 수행되는 할복은 아무리 그 희생자의 시체가 쌓여도 결코 혁명의 원동력은 되지 않는 것이다.-119쪽

포스트 역사의 인간 = 오타쿠들은 오타쿠계 작품의 가치와 패턴을 알고 있으면서도 거기에서 굳이 취향을 분리해낸다. 즉 '형식을 내용에서 계속 분리해낸'다. 그러나 그것은 작품에서 의미를 받아들이거나 사회적 활동에 발을 들여놓기 위해서가 아니라 순수한 방관자로서의 자기(='순수한 형식으로서의 자기')를 확인하기 위해서이다.-121쪽

스놉하고 냉소적인 주체는 세계의 실질적인 가치를 믿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욱 그들은 형식적 가치를 믿는 척하기를 그만두지 못하며,때로 그 형식=겉모습 때문에 실질을 희생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코제브는 이 '그렇기때문에 더욱'을 주체의 능동성으로 파악했지만, 지젝은 그러한 전도가 오히려 주체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강제적인 메커니즘이라고 설명한다. 사람들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할복을 자행하고 거짓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스탈린주의를 믿는다. 그리고 그것은 싫어도 그만두지 못하는 것이다.-1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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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디 앨런 - 뉴요커의 페이소스 마음산책 영화감독 인터뷰집
우디 앨런 외 지음, 로버트 E. 카프시스.캐시 코블렌츠 엮음, 오세인 옮김 / 마음산책 / 2008년 2월
품절


앨런은 영화의 모(79)습과 색채를 일관성 있게 조율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했다. 비록 많은 관객들이 그것에 대해 신경을 쓰거나 알아본다고 생각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그에게 이 작업은 중요한 일이다. "사실, 그저 극소수의 관객만이 영화의 외적인 모습에 제대로 관심을 갖겠지요."그가 말했다. -79쪽

우리는 아마도 한 시대의 끄트머리에 살고 있는 걸 거에요. 집에서 영화 보는 게 편리하고, 경제적이고, 바람직하기까지 한 시대가 오는 건 그저 시간문제에요. <애니 홀>의 l.a 로케이션 촬영을 하면서 느낀 것 가운데 하나도 그거였어요. 그곳의 많은 사람들이 집에서 영화보는 데 푹 빠져 있었죠. 그들의 집에 있는 30인치 스크린이 70인치 스크린으로 바뀌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거에요. 그런 시대가 오면 굳이 불편하게 극장을 가기 위해 외출할 필요가 없죠. 더구나 극장의 프린트 질이 좋지 않고, 스크린이 집에서 보는 화면과 비교해 그리 크지 않다면 말입니다.-79쪽

저는 조금 불편하더라도 극장에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쪽이지만, 그건 노스탤지어일 뿐이에요. 어릴 때 자라면서 매 주말마다 극장에(79)갔고, 그곳에서 겪은 수많은 즐거운 경험들에서 비롯된 거죠. 이젠 습관적으로 극장을 가는 사람들이 많지 않고, 영화는 일반적이고 대중적인 오락 형식에서 이젠 좀더 예술적인 것으로 변모했죠. 사람들이 어떤 영화를 보느냐, 그리고 그 영화를 어디서 보느냐를 두고 점점 더 까다로워지는 걸 탓할 순 없어요. Gary Arnorld, Woody Allen on Woody Allen, The Washington Post,17 April 1977. -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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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자무시 - 인디영화의 대명사, 짐 자무시 인터뷰집 마음산책 영화감독 인터뷰집
루드비그 헤르츠베리 엮음, 오세인 옮김 / 마음산책 / 2007년 4월
품절


(전략)그리고 비디오도 결국은 큰 도움이 되고 있어요. 더욱 많은 영화에 접근할 수 있게 해주거든요. 넓은 공간에서 불을 모두 끄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영화를 감상하지 못하고, 조그만 스크린으로 혼자 영화를 본다는 건 여전히 실망스런 부분이지만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원하면 언제든 밖으로 나가, 예를 들어 조르주 프랑스의 영화를 구해볼 수 있어요. TV 얘기를 하다 보니 고다르가 한 말이 생각나네요. 그는 극장과 비디오의 차이를 묻는 말에 이렇게 대답했어요. "극장에서는 스크린을 올려다보고, tv는 내려다보죠"라고요. -1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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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그 비밀의 언어
장 크로드 카리에르 지음, 조병준 옮김 / 지호 / 1997년 1월
절판


다른 한편에선 우리는 위기를 본다. 지난 30년 간 나는 관객이 줄어들고 있다는 걱정을 줄곧 들어왔다. 물론 그것은 어느 한 종류의 영화 - 영화관에서 상영되는 영화를 말한다 - 에 닥친 위기일 뿐이다. 우리는 점점 더 많은 영화를 보고 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영화관이 아닌 다른 곳에서 본다는 것뿐이다. 텔레비전으로,비디오로, 비행기 안에서, 기차 안에서, 아마 조만간 우리는 자동차 뒷좌석에 앉아서 영화를 보게 될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는 완전히 개인화된 스크린의 출현을 눈앞에 두고 있다. 특수한 안경 뒤에, 헬멧 내부에 스크린이 자리잡을 것이다. 마치 워크맨 덕분에 홀로 음악을 듣는 것이 가능해졌듯이, 이제 기술의 발전으로 해변가든, 지하철에서든 어느 곳에서든 영화를 볼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 -304쪽

영화관도 자체적으로 반격을 시도하고 있다. 지금의 TV 수상기가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뛰어난 영사 장치로 무장하기 시작했다. 극장들도 옴니맥스Omnimax,360도 화면, 초당 6프레임 영사기등 새로운 기술을 채택하고 있다. 이러한 기술 전쟁의 결과는 아직 팽(304)팽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관객들이 기술과 맺는 상호 작용으로 인해 관객들 사이에서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중이다.(사실 기술은 바로 그 목적을 위해 설계된 것이다). 이제 곧 레이저 비디오 디스크 덕분에 영화관은 텔레비전의 뒷마당인 가정에서 텔레비전과 경쟁을 벌이게 될 것이다. 우리의 아파트는 영화관으로 변할 것이며, 우리가 원한다면 여러 개의 스크린을 갖춘 영화관도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홀로그래픽 이미지들로 이루어진 이미지 가구과 유령 시설들과 함께 이미지 벽 속에서 살게 될 것이다. -304,305쪽

우리가 "영화 cinema"라고 부르는 그 단어, 다른 언어들에서는 다른 사물을 의미하는 그 단어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인가? 과연 "바로 그 영화 cinema"에 대해 역사를 생각할 수 있는가? 나는 거기에 회의를 가지고 있다. 이미 우리는 대차 대조표와 예(306)측을 휘두르며 과도하게 역사를 떠들어 왔다. 어떤 대상을 역사로 전환시킨다는 것은, 만약 그 대상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일 경우, 그것을 마비시키는 짓이나 다름없다. 영화는 무엇이든 될 수 있지만, 분명히 아직 "과거"는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영화의 눈부신 기술적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이미 그것의 힘이 예전에 믿어 왔던 것만큼 무한정하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하지 않았는가? 영원한 확장대신,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영화가 필름의 물리적 속성에 불가피하게 종속되어 있다는 이유로 해서, 영화의 영역이 실제로 줄어 들었다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아니면 지나간 1백 년은 그저 아직도 유년기에 불과한 것이었을까? 질문은 한 가지로 요약된다. 영화는 아직 젊은가, 아니면 이미 늙어 버렸는가? -306,307쪽

기술의 개선은 정상적인 하나의 과정에 불과하다. 어떤 예술 형식이 "진보"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얘기인 것이다. 진보라는 단어는 무의미하다. 그런데도 우리는 흔히 그 함정에 빠져들곤 한다. 우리가 얼마나 자주 다음과 같은 얘기를 읽어 왔는지를 생각해 보라. "감독들이 이러저러한 일은 할 수 없었던 그 시절로부터 우리는 참 먼 길을 걸어 왔다"라든가 "이제 곧 얼마 안 있어 영화는 마침내 이러저러한 일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아니다, 우리는 지금 혼동을 일으키고 있다. 유행과 취향을, 진화와 진보를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시대, 어느 국민이든 사물에 대한(307) 독특한 설명 방식을 가지고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만들고 있는 것들의 대부분은 망각 속으로 묻혀져 간다. 그런 운명이 우리 모두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 시대 - 언제나 모든 것이 살아 남으리라고 가정하는 시대다-에서 "무엇이 살아 남을지"를 예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느 시대든 처음 시작할 때는 모든 것이 신선한 법이다. 영화를 포함해 모든 것이 그렇다. 영화는 죽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원기왕성하게 살아 있는 것도 아니다. 미래의 영화가 어떤 형식을 갖추게-307,308쪽

되건, 그것이 얼마나 매력적으로 보이건 간에, 그것은 영원히 왕좌를 차지할 수도 없거니와 금방 폐위될 운명에 처해 있는 것도 아니다. 다른 모든 것이 다 그렇듯이 영화도 변해 가며, 또한 위험에 처해 있는 것이다.-308쪽

두세 해 전에 로스엔젤레스에서 열렸던 감독들의 회의에서 누군가 내게 일상적인 질문을 던졌다. "기술적 진보"가 영화에 도움이 되었는가? 진보의 결과로 매체 자체가 변화했는가? 하는 질문이었다. 나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가 누군가 플로베르에게 물었다던 그 질문을 떠올렸다. 그는 플로베르에게 거위 깃털이 강철 펜촉으로 바귐으로써 문학이 바뀌게 되었느냐고 물었다. 나는 플로베르로 하여금 대답하게 했다.(그가 나를 용서해 주기를!).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거위의 인생은 바뀌었지요." "기술적 진보"는 어떤 것이든 잃는 것이 있게 마련이다. 거위 깃털의 경우에도 금속 펜으로 대체되면서 종이와의 좀더 유연하고, 좀더 인간적이고 좀더 동물적인 접촉을 잃어야 했다. 그 하얀 깃털의 순수함. 그 불규칙한 펜촉의 감미로움, 그것을 쓰기 위해 필요한 윤활제의 부드러움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3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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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다들 가고 싶어한다는 뉴욕대학교 철학과 대학원.  캐슬린(릴리 테일러 역)은 여기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여성이다. 그녀는 친구와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카사노바라는 이름의 뱀파이어에게 목을 물리고, 그녀 또한 뱀파이어가 된다. 카사노바는 그녀를 물기전에 이렇게 말한다. "나에게 꺼지라고 말해!" 하지만, 캐슬린은 차마 그 말을 하지 못한 채, 겁을 먹고 체념한다. 이제 캐슬린이 카사노바의 역할을 수행할 차례다. 아벨 페라라 감독과 그의 고교 동창인 작가 니콜라스 세인트 존 콤비가 만든 최고의 작품 중 하나인 <어딕션>(1995)은, 캐슬린에게 "당신이 공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난처한 질문을 영화 속 숙제거리로 선사한다. 이건 비단 캐슬린 만의 문제가 아니다. 캐슬린은 이 질문을 자신의 주변 동료들에게 우회적으로 꺼낸다. 그리고 그녀는 수업에 흥미를 잃고, 점점 더 그녀가 고민하는 세계에 몰두한다. 그녀는 흡혈귀가 되면서, 공부하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바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관객이라면, 그 관객을 불편하게 만드는 '성찰-게임'을 시작한다. 자신이 살기 위해선 동료들의 피를 빨아야 한다. 늦은 밤, 피를 빨기 전, 오늘의 먹잇감을 찾고, 그녀의 집으로 초대하기 위해 공부에 대한 이야기, 학위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  그녀는 흡혈귀가 되면서 예전부터 가졌던 공부하는 것에 대한 혐오감과 회의를 더 직설적으로 표출한다. 예민하게 더욱 예민하게. 가령 이런 장면이다. 





전쟁터에서 무참하게 살해된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들의 시체를 보면서 느끼는 인간으로서의 어떤 고뇌. 주인공 캐슬린은 역겨워서 세상을 보기 싫어한다. 그녀는 영화 내내 냉정한 눈빛을 뜨는 시간 이외엔 선글라스를 낀 채, 세상을 보는 것과의 단절을 지속적으로 시도한다. 공부와 식욕. 글을 읽고 본다는 것과 욕구의 병렬. 사람을 죽이고 그 죽은 사람을 본다는 것과 글을 읽고 본다는 것의 병렬. 그리고 사람을 죽이고 그 죽은 사람을 본다는 것과 글을 읽고 본다는 것, 먹는다는 것의 병렬. 


캐슬린은 친구가 카페테리아에서 제공하는 햄버거를 한 입 물고, 바로 책을 펴자, "어떻게 먹으면서  읽을 수 있니?"라고 묻는다.    



친구는 말한다. "학위를 받으려면 어쩔 수 없잖아" 

캐슬린은 철학의 거장들을 자유의지를 가장한 사기꾼이라고 비판한다. 그리고 그녀는 '어쩔 수 없잖아'라고 말하는 동료들의 소극적 태도에 불만을 가진 채, 그 혹은 그녀들에게 더 거칠고 강한 그리고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라고 요구한다. 그러한 요구의 극단. 그 경계 안에서, 오늘도 동료들은 캐슬린의 제물이 된다. 캐슬린은 자신을 흡혈귀로 만든 카사노바가 한 말 그대로 동료들에게 돌려준다. "나에게 꺼지라고 말해!" 그러나, 동료들은 차마 그 말을 하지 못한다.   

 

 

 

 

 

 

 

내가 이 영화를 보게 된 계기는 2002년에 나온  문학비평집 <문학의 광기>때문이었다. 이 책의 저자인 문학평론가 권명아는, 책을 통해 늘 자신이 갖고 있던 공부에 대한 고뇌를 영화 <어딕션>을 통해 사유하고자 한다. 권명아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딕션>에서 자신의 허기를 채우기 위해 끝없이 타인의 피를 요구하는 흡혈귀의 본성은 자신의 <현존>을 위해 <타인의 지식과 생명>을 빨아대는 지식인들의 본성과 일치한다. 자신의 안위를 위한 지식에 중독된 자들, 그들이 <오늘날의 지식인>이다. 그들은 악과 구원과 자유의지를 논하지만 자신들의 악과 구원과 자유의지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다. 페라라는 아예 노골적으로 이렇게 질문한다. "박사학위를 따면 지옥의 문이 닫힐까." 그렇다면 이렇게 만연한 악에의 중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나에게 말해라. 꺼져버리라고, 애원하지 마라, 애원 따위는 통하지 않으니까"라는 흡혈귀의 전언은 악과 타협하면서 "어쩔 수 없다"는 자기변명으로 일관하는 지식인들에게 던지는 페라라의 전언이기도 하다. 이를 타락한 대학사회를 비판하고(28) 자신의 <무능함>을 한탄하면서도 대학제도에서 발을 빼기보다는 최후의 일말의 가능성 때문에 오늘도 비굴한 웃음을 띠고 학회를 전전하는 <우리 지식인들>모두에게 던지는 신랄한 질문이기도 하다.  

피의 먹이사슬로 얽혀 있는 이 지식시장 속에서 나 하나가 무엇을 한다고 해서 세상이 바뀔 것인가, 내가 뭐 그리 잘난 존재라고, 꼭 대학교수가 되려고 한다기보다 <먹고 살려니 어쩔 수 없지>. 이러한 자조와 타협, 자기포기 속에서 악은 중독되고 확산된다. 그래서 오늘날의 지식인의 존재론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아니라, <나는 포기한다, 고로 존재한다>또는 <나는 중독된다, 고로 존재한다>인 것이다. <영혼을 팔지 말 것>, 어떠한 이유에서라도 <영혼>을 두고 거래하지 말 것. 페라라는 이 단순한 대답을 여러 작품을 통해 제기하고 있다.  



학교 도서관에서 인류학을 공부하던 동료를 만나, 캐슬린은 포이에르바흐를 이야기하자며, 그녀의 집에서 피를 빨아먹는다. 그리고 그녀는 지식인의 태도를 물으며, 그녀의 밤을 구성하기에 이른다.   



그녀는 촉구한다. "왜 싫은 걸 싫다고 못해?"  



그녀는 뱀파이어가 된 이후, 그동안 자신이 처절하게 고뇌했던 내용을 담아, 열정적으로 박사 학위 논문을 쓰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녀가 내린 결론은, "철학은 선전입니다" 



캐슬린은 박사 학위를 딴다. 그리고 파티를 연다. 이 파티엔 그녀를 알고 있는 교수들과 동료들이 참석한다. 그러나 이 동료들 몇몇은 캐슬린의 이에 물린 또 다른 뱀파이어들이다. 피의 제전이 시작된다. 이것이 지식노동자의 삶이다.   

당신은, 공부와 피의 관계에 대하여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공부와 피의 거리는 너무나 멀다고 생각하는가. 공부는 처절한 것이다. 이 세상 많은 사람들이 공부하는 이를 만만하게 본다면, 오늘 이 수많은 지식노동자들은 단결하여 뱀파이어가 될 필요가 있다.  고로 공부와 피의 거리는 멀지 않다. 공부는 인간의 피를 통해 윤리를 되묻고, 스스로가 존재하는 이유를 점검하는 시간이다. 하지만, 지금 지식 사회는 점점 이 피의 존재를 잊고 산지 오래다. 이 존재를 다시 깨달을 때, 우리는 인간 앞에서 떳떳해진 앎의 제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공부를 통한 나의 상처는 오직 나의 몫, 이를 통해 맺어질 열매는 당신의 것, 그것이 '진보의 피'일지니.  우리는 이 처절한 피의 격문같은 삶을 멀리할 이유가 없다

며칠 전, 돌아가셨던 어느 시간강사의 죽음을 애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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