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도 이후_아케로 마냐스의 <노벰버>(2003)를 봤다. 재미란 말이 재미가 없는 것처럼(이는 금정연이 어느 글에서 썼던 표현이다), 시도란 말에 '시도스런' 기운은 없다 


A 시도란 것에 시시함을 느끼고 있음을 표해야 우리는 그 동여낸 마음을 갖고 그나마 상처를 덜 받고 살겠거니 하는, 그런 세상에 살고 있다. 어쩌면 방금 꺼낸 그 말을 괜시리 왜 하냐고 이죽거려야 하는 단계까지 와 있는지 모르겠다 


B <노벰버>는 '선언'과 '시도'에 관한 영화다. 작품은 순진하고 우직하다. 그래서 더 생각할 거리를 준다. 


C <노벰버>는 '수행성'에 관한 영화다. 언어는 표현될 때 그 자체의 힘으로 인간을 얼마만큼 움직이게 하는지, 더 나아가 고뇌에 빠뜨리게 하는지 영화는 그 곤경을 그려낸다. 어떤 강제와 어떤 자율이 이상하게 섞인 상태에서 '노벰버'라는 극단의 인물들은 수행성의 덫에 갖히고 만다 


D 애초에 자신들의 시도를 견고히 해줄 극단 내 '약속의 언어'가 자유 대신 감옥이 될 때, 인간은 예술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E 우리가 한 번쯤은 들은 대답일 수도 있겠으나 이 영화가 후반부에 에너지를 쏟아붓는 공연 씬은 , 왜 인간이 '시도 이후'의 예술에도 결국 '시도'를 찾게 되는지를 우스꽝스럽게 보여준다. 요즘 시대엔 점점 찾아보기 힘든 어떤 대의를 위한 자기 희생적인 우스꽝스러움을.


 F 이 영화의 결말을 보고 나서 숙연해지거나 혹은 야유를 보내거나. 이 틈을 비집는 새로운 질문을 여전히,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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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에 <젠틀 진보라는 환상>이란 글을 썼다. 강준만 전북대 교수가 줄곧 제기하고 있는 진보의 싸가지론이 어떤 한계가 있는지 그의 '인용력'이 갖는 문제점에서 고찰해보았다. 그러기 위해 우선 2014년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젠틀 진보라는 환상>(전문 링크) 


"2014년은 현재 강 교수의 생각을 읽는 데 중요한 해다. 그해 싸가지 없는 진보가 나올 당시, 그의 생각에 보탬이 된 책이 나왔다. 김찬호 성공회대 교수의 ‘모멸감’과 미국 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의 ‘바른 마음’이다. 특히 올해 2월에 나온 ‘정치를 종교로 만든 사람들’에서 ‘모멸감’은 중요하게 언급된다. 얼핏 제목만 보면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하지만, 두 사람 다 정치와 도덕의 관계 회복을 주장한다. ‘이왕 싸우는 거라면 건설적으로 싸울 수 없을까’라며, 품격과 교양 있는 정쟁 그리고 정치적으로 나이스하고 젠틀한 개인상을 제시한다. 한데 논의를 자세히 뜯어보면 저자들은 정치와 감정의 연관성 속에서 유독 정치 현상을 ‘자극과 반응’의 틀에서만 생각하려 한다.

강 교수는 이를 참조해 자신이 오랫동안 제기해온 정치의 종교화라는 프레임을 다시 한번 강변한다. 이념과 영웅화된 정치인에 대한 극단적인 몰두를 중단하자고. 백 번 천 번 옳은 이야기다. 하나 그가 보수와 진보를 종교적 은유에 가둘 때 간과하는 지점이 있다. 중도와 부동층이야말로 현실 정치의 새로운 종교적 은유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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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문화 다>에 『정동 이론』에 관한 서평을 썼다. 정동 이론의 언어는 어떻게 정동연구자와 정동연구 비판자 양쪽에게 덫으로 작용하는가, 그 문제를 지적해보았다.




어느 날, 퇴직하고 카페 창업을 준비 중인 A가 친구 B와 서울 연남동을 찾았다. A는 지인 D의 소개로 연남동에서 작은 카페를 운영하는 C를 만났다. A는 C와 함께 커피 한잔을 마신 뒤 연남동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곤 물었다. “가장 최근에 생긴 카페가 저곳이에요?” C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차피 그 옆에 금방 또 생길 거예요.” 대화를 듣던 B가 속으로 중얼댔다. ‘아니, 최근에 생긴 카페가 저 건물이면 저 건물이라고만 얘기하지. 왜 저리 말한담.’ 

 

   사회심리학자가 대화를 들었다면, C의 말에 스며든 빈정거림은 요즘 사회에 팽배한 집단적 냉소가 전염된 예라고 말했을 것이다. 내향성을 다루는 정신의학자는 C의 인간 관계와 성격을 조사해 전두엽을 문제 삼으며, C의 빈정거림과 까탈스러움에는 세로토닌의 부족이 핵심이라고 진단할 것이다. 문화연구자나 문화사회학자들이었다면, 홍대 특유의 ‘힙스터스러움’과 젠트리피케이션의 연관성을 꼬집었을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지금까지 나온 이야기를 다 들은 뒤 그런 감정을 하나하나 포착하고 진단하는 게 체제에 타격이라도 줄 것 같냐며, 다 개소리라고 성질을 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대화를 진지하게 따져보려는 연구자들의 영토가 있다. 『정동 이론』은 그 영토를 확인할 수 있는 책이다.



 

   정동연구자들의 맥락을 따르면, 우리가 대화에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C의 빈정거림이 아니다. 정동연구자들은 다음과 같이 포문을 열 것이다. C가 왜 ‘아직 있지 않은 상황’을 자신의 현재로 언급했을까. 정동연구자들의 눈엔 C의 행동은 빈정거림 혹은 따스함이라는 감정의 유형에 쉬이 포섭될 수 없다. 몸과 마음의 마주침에 집중하는 이 연구자들에게 C는 그저 ‘내뱉은’ 자 일 수 있다. 내뱉음은 ‘헐’ ‘대박’ ‘작살’ ‘열라’처럼 순간을 기념하되 금세 휘발될 가능성이 있는 몸짓이다. 이 몸짓은 우발적이되 삶 가운데서 어떤 반복된 리듬을 확보한다. 내뱉음을 인정하는 순간은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말의 에너지가 ‘자신도 모르게’ 삶의 어떤 패턴으로 만들어진다는 ‘느낌’을 받을 때다. 고로 나는 내뱉는 자신에 대해 확신할 수 없다. 내뱉는 자는 자신을 믿기 때문에 말의 에너지를 분출하지 않는다. 내뱉음은 자신을 믿지 못할 수밖에 없는 데 기인한 어떤 긴장감이 예상치 않은 방향으로 튀어나오는, 순간적 분출이다. 

 

   정동연구자들은 기본적으로 마음을 어떤 형태로 확정하는 언어보다는 순간적 분출에 매료된 자들이며, 때론 의심을 품는 자들이다. 책 속 표현처럼 형언할 수 없는 것을 편평하고 매끄럽게 해석하려 드는 자들에게 엿 먹이려 하는 자, 이들이 정동연구자다. 

 

   물론 이 예를 통해 정동 연구가 인간과 인간 ‘사이’의 문제만을 건드린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이들은 ‘아직 아님not yet’이라는 약속 가운데서 이 사회의 지배 체제에 내장된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모순을 파헤치는 데 관심이 많다. 확신보다는 도래를 신봉하는 이들의 사유는 어쩌면 시대의 음모론을 음모론으로 맞서는 ‘맞불의 문화정치학’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동연구자들의 기술은 다가올 위험에 대한 편집증적 과장이 아니라, 부대낄 상황에 대한 총체적인 섭렵에 가깝다. 


 다만 확실보다는 불확실을, 달라붙음보다는 흘러내림을, 서 있음보다는 미끄러짐이라는 사고 체계를 따르는 『정동 이론』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이 액체적 언어에 대해 혼란을 느낄지 모른다. 

 

   가령 나는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다. 정동 이론은 결국 학자가, 혹은 이 사회를 깊이 고민하려는 독자가 가져야 할 ‘윤리적 당위’ 수준에 머물러버리는 건 아닐까. 이 책에선 정동과 관련된 다양한 사례와 결과가 제시되고 있다. 하지만 결국 정동 이론이 지향하는 근본적인 사고가, 외려 연구자들의 언어를 불확실하고 형언할 수 없는 세계를 세밀하게 그려냈다는 ‘소묘의 기술’, 정동으로 가득 찬 세계를 두고 신경 써야 할 다채로운 맥락을 ‘수집·편집하는 기술’로만 인식되게 주저앉혀버리는 건 아닐까. 여기서 정동연구자들이 챙기는 근본적 사고는 정동을 특정한 마음의 양태로, 주체의 신체에 스며든 일정한 기운·에너지·정서로 확정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허나 정동연구자들의 말대로 (들뢰즈의 영향력이 느껴지는)  ‘잠재성’이란 가치는 자신들이 수고스럽게 내린 진단의 맛을 도리어 싱겁게 하며 주장의 선명함을 도려내는 ‘윤리적 강박’으로 작용하고 있는 건 아닐까. 정동이란 영토를 휘젓는 다채로움과 열림의 사고가 서로 스며들며 현란하게 맞부딪힐 때, 그 결과는 예상보다 헛헛한 구석을 남긴다. 

 

   나는『정동 이론』을 읽으면서 아직 아님을 희망의 모토로 외치는 정동연구자들에게 잠재성과 가능성이란 정동의 주요한 가치는 덫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자들은 자칫 그들의 섬세한 노력을 학문을 다루는 사람이 갖는 이색적인 태도로만 소비할 수 있다. 특히 정동을 둘러싼 이색적 언술이 우리의 닫힌 사고를 묘파해내는 실제적 장치가 아니라, 우리 모두 의식하며 살아야 할 불확실한 미래의 설계도가 이럴 것이라고 되풀이하는 청사진으로만 기능할 때 더욱더. 정동연구자들은 이 미지의 세계를 미지로 수긍할 청사진으로서의 정동을 자주 언급한다. 이때 그들은 아직 학문적으로 제대로 꽃피지 않은 정동적 사고의 시간성을 언급하며 더 무르익을 것을 약속한다. 그러나 약속하는 자가 약속에 도취되었을 때, 약속은 자신이 정한 룰에 안주해버리는 허황된 말의 게임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그러한 위험은 약속 자체를 견고히 하고자 누군가가 찾지 못했다는 데서 온 희소성에 희열을 느끼는 장이 될 수 있다. 마치 문화연구자들이 자신의 연구 성과를 발표할 때마다, “그동안 00에 관한 연구는 관심을 받지 못해왔다”로 소재주의에 안착하는 한계를 보였을 때처럼. 

 

   한편 ‘아직 아님’이란 정동연구자들의 모토는 이 연구 영역을 비판하는 자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논거이기도 하다. 정동연구자들을 비판하는 논리 중 하나는 ‘대세론’이다. 비판자들은 최근 몇 년간 국내에 정동 연구가 주류가 되었다는 식의 인트로를 내세우며, 정동 연구를 비롯한 감정에 관한 관심이 지배 세력의 효과로 전락할지 모른다고 우려한다. 여기서 내가 갤럽이나 리얼미터에 의뢰해 정동 연구가 메인스트림에 올랐는지 수치화해보려는 건 우스꽝스러운 일일 게다. 내가 의아해하는 것은 정말 이 연구가 대세인지 여부가 아니다. 자신이 비평하려는 대상을 대세로 쉽사리 선정한 채, 그 대세라는 위치에서 사람들이 자연스레 갖는 부정적인 시각을 고스란히 자신의 논지에 시너지로 활용하는 사고다. 소위 ‘힙hip’에 예민한 국내 학문 사회에서 두드러진 이 사고는 정동 이론을 비판하는 데 안일하게 쓰이고 있다. 

 

   대세론 안에는 시급한 시국에 ‘마음 나부랭이’나 고민하고 앉았다는 ‘호전론’도 보인다. 호전론에는 자신은 냉철하고 파이팅 넘치는 관점을 내놓고 있는데 반해 마음을 다루는 연구자들은 그 어떤 갈등도 봉합한 채 고요하고 고귀하게 이 사회를 분석하고 있지 않냐는 의구심이 들어 있다. 이러한 호전론이 2008년 촛불 집회 당시, 미디어를 수용하는 사람의 쾌락과 욕망을 발견하며 지내는 문화연구자들이 그간 얼마나 물러 터졌는가, 다시 강성한 이데올로기로 돌아갈 때라며 문화연구를 비판했던 목소리와 겹쳐 보이는 건 우연이 아닐 게다. 정동 연구를 꾸짖는 호전론은 정치에 관한 연성화를 꼬집는 거센 우려만큼이나 게으르다. 이러한 맥락에서 『정동 이론』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은 책임을 입증한다. 정동연구를 비판하는 자들은 이데올로기라는 이름을 빌어 ‘아직 아닌’ 상황들을 예측하고 짐짓 진단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여기서 더 주목해보고 싶은 점은 비평의 몰락이란 새삼스런 진단 가운데, 정동이론가나 이 연구를 비판하는 자들을 통해 발견되는 어떤 비평의 속성,  소위 ‘건강염려증’에 걸린 비평이다. SNS에 흩뿌려진 저 정체 모를 냉소와 혐오, 분노 / 근거 없는 긍정, 애정, 찬사 가운데서 우리는 저 두 유형 중 어느 쪽이든 쉬이 안주해 호응을 얻고자, 내가 받을 ‘반응 자체를 상상하며 염려하는’ 비평을 하고 있진 않은가. 아직 아님이란 정동연구자들의 희망 섞인 약속의 언어는 아직 오지도 않은 정동적 반응을 지정해 이 정도면 ‘먹히겠지’ 하는 안전한 비평어로 의도치 않게 변질되어버린 건 아닐까. 

 

   고로 지금 우리에게 환영받는 비평이라곤 사람들의 격노가 지나치면 자제하라고, 사람들의 분노가 모자라면 증폭시키라고 주문하는 ‘수위 측정의 비평’일 뿐이다. 아직 오지 않은 웃음, 아직 오지 않은 울음, 아직 오지 않은 냉소, 아직 오지 않은 분노를 종합선물세트처럼 떠안은 채 늘 상상하고 방어하며 살아가야 하는 우리에게 이러한 비평이 ‘사이다’로 대접받는 만큼 서글픈 일은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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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오 패트리의 <완전범죄>(1970)에서 소름끼치는 씬은 영화 초반부에 나온다. 


A 경찰과 살인마의 정체성을 함께 안고 사는 개인. 이제 스릴러의 흔하디흔한 소재가 되었지만, 정부를 죽인 주인공이 자신을 종교적 벽화처럼 기념하는 듯한 씬은 단지 영화 끝나기 5분 전의 반전을 위한 장치가 아니다 


B 정치 스릴러이자, 파시즘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담은 이 블랙코미디는 '집' 밖을 나가면 당황하는 권력자의 모습을 그려낸다 



C 이 영화는 때론 단서를 스스로 흘리며 제시하고 다니는 어느 '살인마-로마 경찰간부'의 '범죄스릴러 맞춤형 심리드라마'로 요약되곤 했다. 허나 더 눈여겨볼 대목은 왜 이태리의 치안을 주무르는 권력자가 정녕 '실내'에서만 힘을 쓰는가란 영화에 내재된 질문이다 


D 집 밖을 나가면 어찌할 줄 모르는 '아이'와도 같은 모습은 정작 자기자신을 제외하곤 타인이 아이와도 같다며 훈계하고 질타하는 경찰간부-살인마에게 있다 그는 자신의 살인을 입증할 증거를 경찰 동료들에게 흘리고자 주요한 단서인 푸른 넥타이를 자신이 산 가게서 통째로 사들이려 한다. 그때 주인공은 한 시민에게 넥타이를 대신 사주길 부탁한다. 시민이 시킨 대로 넥타이를 사올 때 주인공의 모습에선 아이처럼 당황한 눈빛을 가린 선글라스가 유약하게 씌여있다 


E 주인공은 살인이든 살인의 법적 결과든 살인의 경과를 파헤치는 과정이든 실내에선 소리의 강도가 높고 달변이지만, 그래서 그는 이른바 '코쿤(cocoon)'의 정치에서만 권능자다. 어찌되었든 자신이 타인에게 다가가는 것은 어설프고 그리하여 타인이 자신의 거처로 오게끔 만들거나 자신의 거처화된 곳이 아니면 힘을 못 쓰는 경찰-살인마는 밀실 정치에서 비롯된 자신의 중요한 결함을 감추고 있다. 


F 엘리오 패트리는 이 결함에 깃든 정신분석학적 장치를 통해 파시즘과 남근의 절묘한 유비 관계로 짜인 정치적 우화를 만들어냈다. 신이 되려는 아이(의 모습을 한 어른)는 히틀러 혹은 무솔리니에 투사된 무엇이었을까. 이 영화가 단지 테크닉이 좋은 스릴러 영화의 수준을 뛰어넘는 '클래식'인 이유는 당대 정치에 관한 비평적 물음이 도처에 숨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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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2030 세상보기 2월엔 요즘 주목하는 감독 노아 바움백의 뉴욕3부작 <프란시스 하> <위아영> <미스트리스 아메리카>)을 통해, 신자유주의체제 청춘이 짊어진 '공모전 자아'라는 현실을 고찰해보았다.


원고 전문 링크 (공모전 자아)
















나는 다른 지점에서 바움백의 영화가 흥미롭다. 먼저 그의 작품에는 ‘타임 푸어time poor’가 된 젊은이들이 강조된다. 바움백 영화의 뮤즈인 배우 그레타 거윅은 영화 속에서 늘 바쁜 인물을 연기한다. 허나 우린 눈치 채고 있다. 바쁨이란 정말 바쁜 게 아니라, 제대로 진행되는 일이 없거나 정작 하는 일이 없다는 뜻임을. 그녀가 맡은 인물은 대체로 ‘쩌는 활동성’을 지녔지만, 그 에너지는 일의 구상 단계에 쏠린다. 거윅을 비롯해 영화 속 인물들은 ‘이상’을 품는 게 얼마나 손해인지 미리 자각하면서도, 사회가 자신들에게 늘 ‘구상’중인 인간임을 확인하려 드는 것에 지쳐 있다.

이 문제를 현실과 견주어볼 때, 마치 공모전 준비 태세를 상시적으로 요구 받는 우리네 젊음과 이어진다. 바움백의 영화엔 구상을 경제적으로 실현시킬 사람을 정하고자 자신의 신체 감각을 프레젠테이션에 맞춰놓은 이들이 곧잘 등장한다. 젊은 문화노동자들의 비애를 보여주는 거윅은 ‘프로젝트식 삶’을 따른다. 그녀는 일의 성과가 주는 효과와 쾌감이 짧을지 길지 불확실한 가운데, 이 불안한 현실을 ‘쿨하게’ 인정할 줄 아는 동료를 찾는다. 하지만 이러한 쿨함은 본연의 마음이기보단, 프로젝트식 삶으로 생계를 꾸려나가고자 단련한 자아상에 가깝다.

새삼스럽지만 그간 신자유주의는 우리에게 삶의 일시성을 요구해왔다. 이러한 일시성이 ‘안전한 비정규직’이란 모순을 만들었음은 긴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여기서 더 주목해야 할 점은 젊은 세대가 공모전을 삶의 단위로 받아들이도록 신자유주의가 유도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공모전이란 실제 대회나 경연이라고만 할 수 없다. 이른바 ‘공모전 자아’를 갖게 된 젊은이들은 가상의 사원(社員)이 되어 직업에 대한 지식을 얻음과 동시에 노동에 대한 환멸을 자주 체험한다. 피로와 냉소가 누적되는 가운데, 소진(burn-out)은 일에 파묻힌 채 성과에 중독된 직업인의 경험만이 아니라 직장 문을 두드리기 전부터 청춘의 체내에 침투한 바이러스와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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