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2030 세상보기 2월엔 요즘 주목하는 감독 노아 바움백의 뉴욕3부작 <프란시스 하> <위아영> <미스트리스 아메리카>)을 통해, 신자유주의체제 청춘이 짊어진 '공모전 자아'라는 현실을 고찰해보았다.


원고 전문 링크 (공모전 자아)
















나는 다른 지점에서 바움백의 영화가 흥미롭다. 먼저 그의 작품에는 ‘타임 푸어time poor’가 된 젊은이들이 강조된다. 바움백 영화의 뮤즈인 배우 그레타 거윅은 영화 속에서 늘 바쁜 인물을 연기한다. 허나 우린 눈치 채고 있다. 바쁨이란 정말 바쁜 게 아니라, 제대로 진행되는 일이 없거나 정작 하는 일이 없다는 뜻임을. 그녀가 맡은 인물은 대체로 ‘쩌는 활동성’을 지녔지만, 그 에너지는 일의 구상 단계에 쏠린다. 거윅을 비롯해 영화 속 인물들은 ‘이상’을 품는 게 얼마나 손해인지 미리 자각하면서도, 사회가 자신들에게 늘 ‘구상’중인 인간임을 확인하려 드는 것에 지쳐 있다.

이 문제를 현실과 견주어볼 때, 마치 공모전 준비 태세를 상시적으로 요구 받는 우리네 젊음과 이어진다. 바움백의 영화엔 구상을 경제적으로 실현시킬 사람을 정하고자 자신의 신체 감각을 프레젠테이션에 맞춰놓은 이들이 곧잘 등장한다. 젊은 문화노동자들의 비애를 보여주는 거윅은 ‘프로젝트식 삶’을 따른다. 그녀는 일의 성과가 주는 효과와 쾌감이 짧을지 길지 불확실한 가운데, 이 불안한 현실을 ‘쿨하게’ 인정할 줄 아는 동료를 찾는다. 하지만 이러한 쿨함은 본연의 마음이기보단, 프로젝트식 삶으로 생계를 꾸려나가고자 단련한 자아상에 가깝다.

새삼스럽지만 그간 신자유주의는 우리에게 삶의 일시성을 요구해왔다. 이러한 일시성이 ‘안전한 비정규직’이란 모순을 만들었음은 긴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여기서 더 주목해야 할 점은 젊은 세대가 공모전을 삶의 단위로 받아들이도록 신자유주의가 유도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공모전이란 실제 대회나 경연이라고만 할 수 없다. 이른바 ‘공모전 자아’를 갖게 된 젊은이들은 가상의 사원(社員)이 되어 직업에 대한 지식을 얻음과 동시에 노동에 대한 환멸을 자주 체험한다. 피로와 냉소가 누적되는 가운데, 소진(burn-out)은 일에 파묻힌 채 성과에 중독된 직업인의 경험만이 아니라 직장 문을 두드리기 전부터 청춘의 체내에 침투한 바이러스와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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