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례한 복음 - 이택광의 쾌도난마 한국문화 2008~2009
이택광 지음 / 난장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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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인터넷 촉수가 가장 발달한 성실한 저격수를 꼽으라면 이택광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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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체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뭔가 임팩트가 있는 것도 아닌 '문화연구의 21세기'를 죽이는 것은 '빨간펜 선생님들' 때문이다. 지난 8월 [문화연구에 저항은 있는가]라는 '뜨거운' 주제를 내걸었던 문화연구자들의 문화연구캠프는 그들이 왜 무기력한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세션의 좌장들은 마음 속 빨간펜으로 대학원생들의 글을 '좋은 논문이 되려면'으로 시작하는 훈수를 두었고, 나는 그 훈수에 기분이 상해 끝까지 자리를 지키지 않고 나왔다. 용산참사부터 시작하여 고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 그리고 촛불에 대한 문화연구자들의 기계적인 해석을 거부하는 장문의 비평을 작성하여 가지고 갔던 나는, 무엇보다 이 비평문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고 싶었으나 거부당했다. 그들은 비평의 내용보다는 '재미있네요'라는 멘트로, '좋은 논문이 되려면 다음의 사항을 지킬 것을' 더 말하고 싶었나보다.

'촛불'을 이야기하는 한 세션은 2008년의 이야기들을 대학원 특유의 '재미주의'라는 시선으로만 스케치했을 뿐, 그 어떤 영향력도 없었다. 미디어/문화연구자라는 이름 아래 속해 있던 그들은 기존의 딱딱한 실증적 언론 연구와는 다른, 차별적인  그리고 대중적인 연구를 한다 자임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터무니 없는 교만에 불과하다는 것을 나는 대학원 생활을 하며 느꼈다. 문화연구자들이라 하면, 다른 연구와는 달리 뭔가 멋스럽고 반항스러운 것 같지만, 그건 정말 큰 오산이다. 똑같이 기계적이며, 체제순응적이다. 고로 문화연구에서 정치를 논하는 젊은이들에게 정치는 '흥미로운 논문'의 소재로 전락한다. 수업 시간에 감화받은 목소리로 촛불을 연구하겠다던, 한 이는 그 이후 그 연구가 끝나자마자 어느새 그랬냐는 등, 다른 길을 향해 가버렸다. 여기서 그가 표방하는 정치는, 의식있는 학생으로서의 체면을 적당히 유지하고, 문화연구 진영 내에서 나름 정치적 시각을 강하게 드러내는 권력자-교수에게 이쁨을 받기 위한 포장이라 하면 너무 잔인한 해석인가. 하지만 그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빨간펜을 꺼내 "음 좋은 논문이군", "좀 더 발전시키면 좋은 논문이 되겠어" 수준으로 모든 글을 판단하며, 처리하는 빨간펜 선생님들의 그 고마운(?) 조언은 대학원생들의 자기 검열과 잘 섞여 '그들만의 리그'로 변질된다. 정말 아이러니한 것은 그토록 저항을 외치며, 혁명적 사유를 이야기하던 문화연구의 정신은 정작 그 문화연구를 하겠다던 문화연구자의 연구 안에서 증발된다.  

다가오는 현상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늘 '그건 논문의 주제로 어울리지 않아'라고 딱 잘라버리고, '딱 그 만큼의' ,' 기존의' 것에서 너무 벗어나지 말 것을 요구하는 제도의 목소리는 젊은 대학원생들의 몸과 마음을 늙게 만들고, 글은 축 처진 노인의 살과 같게 한다. 자신이 참 젊다고 생각하는 착각 속에서 사유의 게으름을 학문의 연차로 지배하려는 그 젊은 권력의 스승들마저도 내게는 '무지한 스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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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는 입과 먹는 입 - ‘종언의 시대’의 종언과 새로운 사유의 모색 What's Up 5
김항 지음 / 새물결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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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는 책을 좋아하시는 분들이야말로, 책을 그냥 '스쳐 보는' 느낌을 가장 잘 알 것이라 생각합니다. 책이 1페이지부터 300페이지까지 있다고 합시다. 120페이지가 다다르도록 스쳐보는 느낌에서 나오는 그 어떤 찝찝함. 하지만 뭔가 읽었다고 티는 내고 싶은 체면. 찝찝합은 책을 1페이지부터 다시 읽으라고 하고, 체면은 그냥 지금 이 태도로 책을 대하라고 속삭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엄연히 이 두 요인 중 어떤 것이 승자가 될 줄 압니다. 김 항의 본 책을 '체면'으로 읽는다면, 당신은 그 어떤 것 하나 이 책에서 건질 수 없을 것입니다. 체면은 이 책이 만들어놓은 사유의 운동장 속에서 거침 없이 뛰어 노는 지식인들의 모습을 멍하게 쳐다만 보게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책을 매만지고 싶은 것을 뛰어 넘어, 책 속 사유의 운동장에서 함께 어우러지고 싶은 욕망을 솔직하게 인정한다면, 우리는 이 책을 더럽힐 준비를 해야한다고 봅니다. (맑스의 독서법이 그랬다고 하지요 아마) 빨간펜을 준비하고, 책의 '도그지어'를 많이 만들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이 책은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2. 놀랍게도 이 놀라운 책은 주목을 많이 받지 못한 듯합니다. 제가 추천한다고 해서, 이 책의 진가가 주목을 받는다는 것은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장면일 것입니다. 그것은 저 스스로에게도 허락하고 싶지 않은 오만입니다. 저는 이 책에 나오는 벤야민, 슈미트, 데리다, 훗설, 헤겔, 하이데거, 아감벤,푸코, 가라타니 등등 그 어느 한 사람의 이론도 확실하게 내 것으로 소화할 수 없었음을 고백합니다. 그래서 이런 고백으로 말미암은 고백은 이 리뷰가 다시 이 책을 읽기 위한 작은 다짐이라는 것을 의식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다짐은 어쩌면 '모자람'의 인정으로 출발하는 것이요, 그 인정을 통해 생긴 여백은 스스로에게 허락하는 지적 여정의 진정성이자, 지적 대가들을 접할 때 느끼는 질투 어린 존경심의 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본격적으로 뛰어들어갈 수도 없지만, 그래도 체면이 아닌, 찝찝함을 선택한 후에 대면한 이 책에 대한 사유를 조금 말해볼 차례입니다. 아쉽게도 본격적으로 뛰어들 수 없는 제 지성의 단계로 인하여, 이 사유는 인상 비평에 머물 수도 있고, 약간의 어설픈 태도로 중점들을 제시할 수 있는 차원으로 한정되어 있음을 고백해야 할 것 같습니다. 

3. 결국 좀 과감하게 말해서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유의 경계라는 판 자체를 뒤엎어보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것은 들뢰즈가 자신의 철학에서 줄곧 강조했던 표현이었으며, 푸코 또한 '한계경험'이란 개념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부분이라 알고 있습니다. 조금은 시시한 제 과감한 요약을 감수한다면, 이 책에서 우리는 인간과 동물. 그리고 그 사이를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호모 사케르]에서 체험했던 한 측면. 경계 자체에 의해 구분되어진 '내용'이 아니라, 그 내용을 '구성하는' 한 기준. 그 기준을 향한 사유를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머릿 속에서 끄집어내야 합니다. 그 기준이란 말을 '경계'라는 개념으로 바꿨을 때, 경계는 우리의 일상 속에서 지극히 정상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기준을, 그 경계를 의심하는 것이 낯섭니다. 그래서 여기에 의심하는 지식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또 철학의 자세이겠지요. 그렇습니다. 여기까지는 우리 모두 고개를 끄덕이고 공감하는 당연한 차원일 것입니다. 여기서 김 항의 사유에 대한 고유성은 '주권'입니다. 그리고 그 주권으로 인하여 관계되는 인간, 그 인간과 연결된 국가의 존재에 대하여, 우리는 이 책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맞게 됩니다. 김항은 국가라는 존재에 조건지어진 인간을 사유하며, 홉스에서 출발하는 국가와 인간의 계약론, 그리고 거기서 발생하는 '주권'의 의미에 대하여 물음을 시도합니다. 그리고 이 기나긴 사유의 전쟁은 슈미트의 [정치신학]을 통한 '예외상태'와 '결정'을 묻습니다. 이 순간, 우리는 [호모 사케르]에서 복습한 예외상태의 중요한 지점. 누가 법이며, 그 누가 법이냐는 질문을 던졌을 때, 그 질문에서 우리가 당연한 한 이로 인정하는 주권자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법 안과 밖을 넘나드는 '결정자'. 그 유명한 아감벤의 '포함하는 배제'라는 관계를 실천하는 주권자. 정치 철학의 사유로서, 김 항은 그 결정자와 예외상태에 대한 측면을 강조합니다.  

4. 조에와 비오스라는 삶의 형태들. 인간과 동물, 그리고 그 경계에 의해 '버려지는' 삶을 살아야 하는 벌거벗은 이들, 벌거벗은 삶을 살아야 하는 이들의 존재는 정치 자체에 대한 '안온한 공포'를 체감하게 합니다. 여기서 제가 '안온한'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그 공포의 존재가 사유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나타날 수 없는 투명한 그 무엇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스스로 그 버려지는 삶을 외면하려고 발버둥치는 지금, 오히려 이 사유는 '고발적'이며, '폭로적'입니다. 다만, 김 항은 이론과 현실 사이에서 그 이론이 갖고 있는 힘의 항구성을 위해, '기계적인 삽입'을 경계하라고 주문하는 듯 합니다. '호모 사케르'를 이 비루한 인생사의 풍경들에 대입하는 순간, 우리는 어쩌면 호모 사케르가 추상화된 이론으로서 갖는 폭발적인 감정을 체감하는 것이 아닌, 난삽하고 성급한 지적 삽입을 통해 예상치 못한 조루를 체험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아마 김 항의 이 사유의 전쟁이 어려운 이유는 이 책이 지나치게 '수사적'이며, 그 반지성주의자들의 어설픈 모토인 '현학적'이라서가 아니라, 이 책에 수놓아진 수많은 이론들의 '휘발'/ '증발'을 막기 위한 김 항 스스로의 전략이라고 생각되어집니다. (저는 이런 전략이라면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고로 이 책을 통해 가장 쉽게 찾아오는 유혹. 책을 통해 상상되는 여러 장면들은 사실 우리 스스로의 상상력이 그만큼 제한되어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아마 이 책을 한 번 더 읽을때 떠오르는 그 이해할 수 없는 광경들. 그 광경들이 아마 이 책이 요구하는 사유의 끝자락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5. 우리 시대의 정치를 존재케하는 말하는 입들이 삶의 하루하루를 연명하면서, 그 연명 마저 권리로 인정받지 못하는 먹는 입들의 존재를 '포함하는 배제'로 작동시킬 때, '입들'을 가진 이 인간/동물. 그 /의 존재에서 늘 왔다갔다하는 우리 시대의 정치란, 어쩌면 참 빈곤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현실정치'에 대한 사유에서 우리는 늘 가능성을 모색하는 시도를 훈련받아 왔고, 제안받아 오면서도, 그 훈련과 제안에서 '현실'이란 시간에 지나치게 억눌려, 서로의 사유에 상처를 줄 때 쯤, 그 상처가 빚어내는 언어의 지점들은, 우리를 세상의 늑대로 만드는 데 주저함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러나 늑대인 나, 늑대인 나를 벗어나고 싶은 나를 다 챙기면서, '말하는 사람'으로서 우리가 뱉어냈던 역사를 반성의 시간에서, 회복의 시간에서, 치유의 시간에서 살펴봐야 한다는 것은 '상식인'의 한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그 상식인이 사회가 허용하는 '상식'에만 머무른다면, 그 상식의 힘은 미진하다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이 책이 몰아붙이는 상식은 결국, '변혁을 갈망하는 / 요구하는 상식'으로서, 우리는 그 상식을 '비-상식'이 아니라, 상식의 새로운 판으로 사유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그것이 인정된다면, 우리는 그토록 바라던 유토피아에 있겠지요. 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불가능성을 점검하고, 또 점검하는 것에서, 우리는 충분히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는 인간/동물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6. 마지막으로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에 대한 김항의 몸부림에서 이른바 '센서'라는 개념을 통해 문학이 가졌던 열망, 실제로 확보했었다고 믿었던 사회와의 책임 혹은 신뢰 관계에 대해, 저는 김 항이 고진을 일갈하는 것에 희망을 봅니다. 이 일갈은 단순히 '종언'이라는 말에 대항하기 위한 또 다른 종언의 맞대응이 아니라, 종언이라는 말이 나오기까지 그것을 구체적으로 그리고 힘을 들여 사유하려는 그의 노력에 대한 시도라고 생각합니다. 접촉한다는 것을 포괄하는 감각한다는 것의 이 의미에서, 문학이 가진 새로운 정치성을 발견하고 싶다는 생각 또한 저자처럼 했습니다. 

7. 광주의 에티카 부분은 아마도 전진성 교수가 줄곧 강조하는 기억의 문제, 기념의 문제, 추모의 문제, 미화의 문제 차원과 함께 사유하고 싶은 욕심이 생깁니다. 이 대목은 따로 글을 써보고 싶군요. 

이 책은 닳고 닳아야 하는 운명에 속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현학과 서양의 이론 수입이라는 그 헛물 켠 비판의 시선을  뛰어넘는 것은, 이 책 자체가 가진 집요함입니다. 어쩌면 이 집요함은 사유와 사유를 맞붙히는 일종의 마스터베이션이겠지만, 이 마스터베이션은 순전한 자기 만족이 아닌, 타인과의 소통을 의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족'은 이 책과는 거리가 멉니다. 책을 위해 또 다른 책을 쌓아두고 보게 하는 이 책의 존재에 대해 계속 '보물찾기'를 시도해 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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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불제 민주주의 - 유시민의 헌법 에세이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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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나오자마자 주문을 했던 것 같은데, '이제야' 리뷰를 씁니다. 책이 나올 당시, 미리 기대를 한 사람들의 반응들을 종종 체감할 수 있었고, 지하철 익명의 젊은이들 손에, 학교 동료들 손에 이 책의 커버가 보일때마다, 얼른 읽어보고 싶다는 마음은 들었지만, 정작 그러진 못했습니다. 지금 와서 책을 다 읽고, 리뷰를 쓰니 책에 가졌던 주변 이들의 감흥들과 '글-흔적'들이 하나의 '소-역사'가 된 듯합니다. 저자로서의 유시민이 군데군데 얽어 놓은 현 정치의 '꼴'에 대한 판단을 훑어 보면, 상당히 오랜 고난의 시간이 흐른 것 같지만, 어찌보면 참 많이 남았다는 요상한 아쉬움의 한탄도 해 보게 됩니다. 뭐가 많이 남았는지는, 아마 우리 모두가 침묵 속에 공감할 그 어떤 나쁜 공기들의 흐름이겠지요. 하지만우리는 '기다림의 역사'에 모든 것을 맡긴 채, 그 '기다림의 철학', 알튀세르가 말한 '상식의 철학'에만 의지할 수는 없습니다. 철학은 철학 자체에 대한 의혹을 그 존재의 이유로 삼듯, 우리는 상식의 철학을 뛰어 넘은, '대철학'(알튀세르가 말한 대철학과는 다른 뜻으로)을 추구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대철학'의 길로 인도하는 것일까요. 진정한 행복에 대한 사유를 읊었던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의지할 수도 있겠습니다. 또는 인간 주체의 의지와 양심, 그리고 세계에 대한 도덕의 열망을 이성적으로 믿었던 칸트에게 의지할 수도 있겠습니다. 또는 진리 자체를 의심했었던, 그렇기때문에 자신에게 하나의 얼굴만을 강요하는 이들을 비판했었던 푸코에게 그 길을 물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오늘 우리는 정치철학이라는 세계 안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고민을 하는 지식인들을 자주 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 시대 정치철학은 민주주의를 되묻게 되었습니다. 특히  '7-80년대'라는 신화의 시대를 건너온 많은 이들이  '민주화'라는 이름 아래 행해지는 작용과 부작용을 알게 되면서, 우리 사회는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라는 숙제에 놓였다는 진단은 이미 오래 전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이제 '어떤 민주주의'를 꿈꿀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는 시대에 접어들었습니다. 그래서 민주화는 민주화 자체가 아닌, '정치적 민주화', '경제적 민주화', '문화적 민주화' 등 다양한 꼴의 민주화가 갖는 의미들을 찾고 해석하는 작업을 자연스럽게 목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무엇보다 '현실정치'가 갖는 중요성을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법'을 사회학적 관점에 다룬 몇몇 책들이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법은 그동안 법의 만들어짐 속에서 그 결과물을 두고, 해석의 싸움을 구경하는 차원으로 우리에게 그 존재를 드러냈습니다. 정작 우리는 뉴스를 보면서, 법안이 나왔다. 법안이 나옴으로 골치아픈 일들이 진행되고 있다 등 언론의 간략한 메모지만, 그 메모에 담긴 풍경들을 보면서 법이라는 것이 만들어지는 과정, 그것이 적용되는 과정은 순수하지 않다는 것을 경험했지만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는 법을 집행하는 자들에 대한 권력관계의 심층적 의문을 가지진 못했습니다. 법이라는 것을 둘러싼 '전문적이다'라는 어떤 이미지의 강박은 그것을 더 강조했다고 봅니다. 그래서 법은 우리에게 '지켜야되는 어떤 것'으로 자리잡지요. 우리는 법의 이면에 대해 뭔가 심정적으로 파헤치고 싶은 게 있지만, 섣불리하진 못합니다. 주로 우리는 법에 대한 '지킴이'이라는 위치에 머무르고 맙니다. 그러나, [헌법의 풍경], [불멸의 신성가족]의 김두식이나 [부러진 화살]의 서형이 보여준 결실은 법을 둘러싼 어둠의 심연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나타냅니다. 이것은 곧 '지킴이'의 위치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우리 소시민들에게,  '법-물음이'로의 삶을 살도록 촉구합니다.  '법-물음이'가 되었을 때, 우리는 다시 뉴스에서, 신문에서 봤던 그 법의 탄생에 개입된 무수한 권력의 입들을 외면이 아닌 직시의 자세로 보게 될 것입니다.

유시민의 [후불제 민주주의]는 '법-물음이'로서 저자가 갖는 우리 시대 최상위의 법인 '헌법'에 대한 사유와 그 '헌법'에 기초한 사회의 이상을 이성적으로 기술해보려는 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이 기술을 따라가다보면, 법이라는 것이 내세우는 논리성에서 비논리성을 발견하게 되고, 그 비논리성이 갖는 권력의 오류와 횡포들을 목격하게 됩니다. 또한 그런 것들을 현실 정치 안에서 직접 '경험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들, 그리고 그 상황들에 대한 성찰로 인해, 법은 오늘날 우리에게 하나의 '괴물'이 되었음을, 이 '괴물'은 그 무엇보다 권력을 그릇된 길로 욕망하는 자들과 친밀한 관계에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아감벤이 말한 것처럼, 법이란 우리의 삶을 참조하는 언어의 형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의 헌법은 결국 우리의 삶과 멀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2008년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노래를 부르며, 우리 스스로의 권리를 선언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민주공화국이라는 그리고 권력은 결국 국민에게 있다는 것을 내 신체의 고백으로 행하였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우리는 그러한 고백과 별개로,  오랜 학업 과정을 통해서 배운 중요한 법의 기본 내용들마저도, 그것을 현실에서 맞닥뜨리는 어떤 순간에는, 참 멀게 느껴진다는 것을 숨길 수 없습니다.  머리속에서 알고 있는 그 쉬운 말들도, 사실 얼마나 지켜지지 어려운 것인가를, 그리고 그 참 투명하고 딱 부러지는 구절들, 너무 명확해서 더 이상의 반박도 필요없을 것 같은 구절들이 막상 현실의 가장 불투명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오늘날 분명 양심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부터 듣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양심의 소리가 오늘의 현실 정치가 갖는 비양심적인 꼴의 상황들과 맞닥뜨릴 때, 우리는 우리 사회가 과연 진정한 민주주의의 위치에 도달했는가를 묻게 됩니다. 유시민은 여기서 '후불제'라는 '책임'의 언어를, 성찰의 수사를 제시합니다. 그냥 민주주의가 아닌, '후불제'라는 조건의 민주주의 말이죠. 후불제라는 개념을 통해 우리는 책임을 통감하게 되고, 그 책임을 스스로에게 묻다 보면, 우리는 그 책임의 알 수 없는 연원을 따라가며 역사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역사를 통한 시간의 이해, 현재 우리의 위치를 다시 짚어보게 됩니다.  

저는 이 책이 '이해'를 살피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말이 참 우습지요. 이해와 살핀다라는 말이 언뜻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유시민은 학자에서 정치가로, 그리고 행정가로 다시 지식소매상이라는 야인의 위치로 스스로를 규정하며, 그 규정된 위치에서 늘 유념했던 정치적 상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꿈꾸던 상이 현실과 타협했던 것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기도 합니다. 이해라는 말 자체를 통해, 저는 현실의 정치와 이상의 정치, 그리고 당위적인 것과 당위를 벗어날 수 밖에 없는 것의 이해를 묵직하게 사유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유시민의 말과 글, 그 언행 속에서 때론 많은 이들이 상처를 받았고, 그 자신도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책을 읽는 우리들은 그 상황을 알고 있고, 또 지금 어느 한 구석에서는, 그가 이 책에서 두껍게 기술한 그 여정을 다시 한 번 걷기를 희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 개인적으로 그가 '상식인'의 입장에서, '상식적'인 언변을 꾸준히 제시할 수 있는 이로 남았으면 합니다. 고로 이 책에 담긴 지극히 '상식적'인 시선은 어쩌면 이 책이 갖고 있는 시선의 평이함으로 제한하여 해석하기보다는, 유시민 자신이 우리 사회와 맞닿을 수 있는 하나의 '소통-선'이 아닐까 생각해 봤습니다. 딱 이 정도의 훈훈함, 딱 이 정도의 일갈로 이 민주주의의 꼴을 넓게 사유할 수 있는 그가 되길 희망합니다. 우리는 이 민주주의에 대해 우리 스스로 '신용있는 인간'임을 떳떳하게 내세울 수 있는 자이기를 한 걸음 내딛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것이야말로 후불제를 허락한 민주주의에 대한 도리이자, 우리가 꿈꾸는 민주주의를 위한 기틀이라고 생각합니다.  

막스 베버는 공준이라는 개념을 통해, 법을 지킨다는 것의 의미를 이해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우리는 이제 이 공준을 토대로, 그 지킴의 의미에서 물음의 의미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헌법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닙니다. 그 예외 상태를 외면하지 않고 바로 보는 자에게 그람시가 말한 철학자로서의 시민은 당신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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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생산에 대하여 - 자크 비데 서문 동문선 문예신서 346
루이 알튀세르 지음, 김웅권 옮김 / 동문선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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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고전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이 사회를 불태워버릴만한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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