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는 입과 먹는 입 - ‘종언의 시대’의 종언과 새로운 사유의 모색 What's Up 5
김항 지음 / 새물결 / 2009년 2월
평점 :
품절


1.  저는 책을 좋아하시는 분들이야말로, 책을 그냥 '스쳐 보는' 느낌을 가장 잘 알 것이라 생각합니다. 책이 1페이지부터 300페이지까지 있다고 합시다. 120페이지가 다다르도록 스쳐보는 느낌에서 나오는 그 어떤 찝찝함. 하지만 뭔가 읽었다고 티는 내고 싶은 체면. 찝찝합은 책을 1페이지부터 다시 읽으라고 하고, 체면은 그냥 지금 이 태도로 책을 대하라고 속삭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엄연히 이 두 요인 중 어떤 것이 승자가 될 줄 압니다. 김 항의 본 책을 '체면'으로 읽는다면, 당신은 그 어떤 것 하나 이 책에서 건질 수 없을 것입니다. 체면은 이 책이 만들어놓은 사유의 운동장 속에서 거침 없이 뛰어 노는 지식인들의 모습을 멍하게 쳐다만 보게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책을 매만지고 싶은 것을 뛰어 넘어, 책 속 사유의 운동장에서 함께 어우러지고 싶은 욕망을 솔직하게 인정한다면, 우리는 이 책을 더럽힐 준비를 해야한다고 봅니다. (맑스의 독서법이 그랬다고 하지요 아마) 빨간펜을 준비하고, 책의 '도그지어'를 많이 만들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이 책은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2. 놀랍게도 이 놀라운 책은 주목을 많이 받지 못한 듯합니다. 제가 추천한다고 해서, 이 책의 진가가 주목을 받는다는 것은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장면일 것입니다. 그것은 저 스스로에게도 허락하고 싶지 않은 오만입니다. 저는 이 책에 나오는 벤야민, 슈미트, 데리다, 훗설, 헤겔, 하이데거, 아감벤,푸코, 가라타니 등등 그 어느 한 사람의 이론도 확실하게 내 것으로 소화할 수 없었음을 고백합니다. 그래서 이런 고백으로 말미암은 고백은 이 리뷰가 다시 이 책을 읽기 위한 작은 다짐이라는 것을 의식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다짐은 어쩌면 '모자람'의 인정으로 출발하는 것이요, 그 인정을 통해 생긴 여백은 스스로에게 허락하는 지적 여정의 진정성이자, 지적 대가들을 접할 때 느끼는 질투 어린 존경심의 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본격적으로 뛰어들어갈 수도 없지만, 그래도 체면이 아닌, 찝찝함을 선택한 후에 대면한 이 책에 대한 사유를 조금 말해볼 차례입니다. 아쉽게도 본격적으로 뛰어들 수 없는 제 지성의 단계로 인하여, 이 사유는 인상 비평에 머물 수도 있고, 약간의 어설픈 태도로 중점들을 제시할 수 있는 차원으로 한정되어 있음을 고백해야 할 것 같습니다. 

3. 결국 좀 과감하게 말해서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유의 경계라는 판 자체를 뒤엎어보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것은 들뢰즈가 자신의 철학에서 줄곧 강조했던 표현이었으며, 푸코 또한 '한계경험'이란 개념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부분이라 알고 있습니다. 조금은 시시한 제 과감한 요약을 감수한다면, 이 책에서 우리는 인간과 동물. 그리고 그 사이를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호모 사케르]에서 체험했던 한 측면. 경계 자체에 의해 구분되어진 '내용'이 아니라, 그 내용을 '구성하는' 한 기준. 그 기준을 향한 사유를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머릿 속에서 끄집어내야 합니다. 그 기준이란 말을 '경계'라는 개념으로 바꿨을 때, 경계는 우리의 일상 속에서 지극히 정상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기준을, 그 경계를 의심하는 것이 낯섭니다. 그래서 여기에 의심하는 지식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또 철학의 자세이겠지요. 그렇습니다. 여기까지는 우리 모두 고개를 끄덕이고 공감하는 당연한 차원일 것입니다. 여기서 김 항의 사유에 대한 고유성은 '주권'입니다. 그리고 그 주권으로 인하여 관계되는 인간, 그 인간과 연결된 국가의 존재에 대하여, 우리는 이 책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맞게 됩니다. 김항은 국가라는 존재에 조건지어진 인간을 사유하며, 홉스에서 출발하는 국가와 인간의 계약론, 그리고 거기서 발생하는 '주권'의 의미에 대하여 물음을 시도합니다. 그리고 이 기나긴 사유의 전쟁은 슈미트의 [정치신학]을 통한 '예외상태'와 '결정'을 묻습니다. 이 순간, 우리는 [호모 사케르]에서 복습한 예외상태의 중요한 지점. 누가 법이며, 그 누가 법이냐는 질문을 던졌을 때, 그 질문에서 우리가 당연한 한 이로 인정하는 주권자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법 안과 밖을 넘나드는 '결정자'. 그 유명한 아감벤의 '포함하는 배제'라는 관계를 실천하는 주권자. 정치 철학의 사유로서, 김 항은 그 결정자와 예외상태에 대한 측면을 강조합니다.  

4. 조에와 비오스라는 삶의 형태들. 인간과 동물, 그리고 그 경계에 의해 '버려지는' 삶을 살아야 하는 벌거벗은 이들, 벌거벗은 삶을 살아야 하는 이들의 존재는 정치 자체에 대한 '안온한 공포'를 체감하게 합니다. 여기서 제가 '안온한'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그 공포의 존재가 사유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나타날 수 없는 투명한 그 무엇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스스로 그 버려지는 삶을 외면하려고 발버둥치는 지금, 오히려 이 사유는 '고발적'이며, '폭로적'입니다. 다만, 김 항은 이론과 현실 사이에서 그 이론이 갖고 있는 힘의 항구성을 위해, '기계적인 삽입'을 경계하라고 주문하는 듯 합니다. '호모 사케르'를 이 비루한 인생사의 풍경들에 대입하는 순간, 우리는 어쩌면 호모 사케르가 추상화된 이론으로서 갖는 폭발적인 감정을 체감하는 것이 아닌, 난삽하고 성급한 지적 삽입을 통해 예상치 못한 조루를 체험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아마 김 항의 이 사유의 전쟁이 어려운 이유는 이 책이 지나치게 '수사적'이며, 그 반지성주의자들의 어설픈 모토인 '현학적'이라서가 아니라, 이 책에 수놓아진 수많은 이론들의 '휘발'/ '증발'을 막기 위한 김 항 스스로의 전략이라고 생각되어집니다. (저는 이런 전략이라면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고로 이 책을 통해 가장 쉽게 찾아오는 유혹. 책을 통해 상상되는 여러 장면들은 사실 우리 스스로의 상상력이 그만큼 제한되어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아마 이 책을 한 번 더 읽을때 떠오르는 그 이해할 수 없는 광경들. 그 광경들이 아마 이 책이 요구하는 사유의 끝자락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5. 우리 시대의 정치를 존재케하는 말하는 입들이 삶의 하루하루를 연명하면서, 그 연명 마저 권리로 인정받지 못하는 먹는 입들의 존재를 '포함하는 배제'로 작동시킬 때, '입들'을 가진 이 인간/동물. 그 /의 존재에서 늘 왔다갔다하는 우리 시대의 정치란, 어쩌면 참 빈곤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현실정치'에 대한 사유에서 우리는 늘 가능성을 모색하는 시도를 훈련받아 왔고, 제안받아 오면서도, 그 훈련과 제안에서 '현실'이란 시간에 지나치게 억눌려, 서로의 사유에 상처를 줄 때 쯤, 그 상처가 빚어내는 언어의 지점들은, 우리를 세상의 늑대로 만드는 데 주저함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러나 늑대인 나, 늑대인 나를 벗어나고 싶은 나를 다 챙기면서, '말하는 사람'으로서 우리가 뱉어냈던 역사를 반성의 시간에서, 회복의 시간에서, 치유의 시간에서 살펴봐야 한다는 것은 '상식인'의 한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그 상식인이 사회가 허용하는 '상식'에만 머무른다면, 그 상식의 힘은 미진하다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이 책이 몰아붙이는 상식은 결국, '변혁을 갈망하는 / 요구하는 상식'으로서, 우리는 그 상식을 '비-상식'이 아니라, 상식의 새로운 판으로 사유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그것이 인정된다면, 우리는 그토록 바라던 유토피아에 있겠지요. 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불가능성을 점검하고, 또 점검하는 것에서, 우리는 충분히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는 인간/동물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6. 마지막으로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에 대한 김항의 몸부림에서 이른바 '센서'라는 개념을 통해 문학이 가졌던 열망, 실제로 확보했었다고 믿었던 사회와의 책임 혹은 신뢰 관계에 대해, 저는 김 항이 고진을 일갈하는 것에 희망을 봅니다. 이 일갈은 단순히 '종언'이라는 말에 대항하기 위한 또 다른 종언의 맞대응이 아니라, 종언이라는 말이 나오기까지 그것을 구체적으로 그리고 힘을 들여 사유하려는 그의 노력에 대한 시도라고 생각합니다. 접촉한다는 것을 포괄하는 감각한다는 것의 이 의미에서, 문학이 가진 새로운 정치성을 발견하고 싶다는 생각 또한 저자처럼 했습니다. 

7. 광주의 에티카 부분은 아마도 전진성 교수가 줄곧 강조하는 기억의 문제, 기념의 문제, 추모의 문제, 미화의 문제 차원과 함께 사유하고 싶은 욕심이 생깁니다. 이 대목은 따로 글을 써보고 싶군요. 

이 책은 닳고 닳아야 하는 운명에 속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현학과 서양의 이론 수입이라는 그 헛물 켠 비판의 시선을  뛰어넘는 것은, 이 책 자체가 가진 집요함입니다. 어쩌면 이 집요함은 사유와 사유를 맞붙히는 일종의 마스터베이션이겠지만, 이 마스터베이션은 순전한 자기 만족이 아닌, 타인과의 소통을 의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족'은 이 책과는 거리가 멉니다. 책을 위해 또 다른 책을 쌓아두고 보게 하는 이 책의 존재에 대해 계속 '보물찾기'를 시도해 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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