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 시대의 역사 서문 외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7
야콥 부르크하르트 지음, 최성철 옮김 / 책세상 / 2002년 3월
절판


개별적인 것, 특히 이른바 사건이라고 불리는 것들은 그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보편적인 것을 밝혀내는 입증 과정에서 언급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찾는 사실은 그 역시 [역사적] 사실인 사고방식이기 때문이다. 원전들은, 우리가 그에 준하여 관찰하는 한, 진부한 지식을 위한 단순한 연구에서와는 전혀 다른 말을 하게 될 것이다.-17~18쪽

문화사는 과거 인류의 내면으로 파고 들어가 그들이 어떻게 존재했고, 원했고, 생각했고, 할 수 있었는지 말해준다. 문화사는 이와 함께 변하지 않는 것에 관심을 두기 때문에 마지막에는 이 변하지 않는 것이 순간적인 것보다 더 위대하고 중요하게 보이고, 하나의 특성이 하나의 행위보다 더 위대하고 교훈적으로 보이게 된다. 왜냐하면 행위들은 해당하는 내적 능력의 개별적 표현에 불과하고, 내적 능력이야말로 그 행위들을 언제나 새로이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19쪽

이 모든 것을 소망하는 것 대신 우리가 해야 할 임무는, 가능한 한 우매한 기쁨과 두려움에서 벗어나 무엇보다도 역사의 발전을 인식하는 데 주력하는 것이다. 물론 이미 말한 대로 혁명의 시대는 우리가 이와 같이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것을 매우 어렵게 만든다. 우리는 우리의 처지를 의식하는 바로 그 순간 우리 자신이 수많은 파도 가운데 한 물결에 의해 휩쓸려 다니는 다소 부서지기 쉬운 배 위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100쪽

빈곤과 두뇌 형성에서의 신체적인 퇴화는 정치적 평등과 심한 대립 관계에 있다. 빈곤은 비록 모든 문명 단계의 한 구성 요소이지만, 이전에는 빈곤이 집중적이지도 않았고, 정치적으로도 전혀 자기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빈곤이 떠들썩해졌고, 빈곤은 더 이상 빈곤이 아니길 원하고 있다. 우리는 이른바 영원한 수정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104쪽

우리는 차라리 운명에게 다음과 같이 부탁하고 싶다. 매 시대에 우리 눈앞에 놓여 있는 것에 대한 책임감을 가질 수 있도록.불가피한 것에 놓여 있는 것에 대한 책임감을 가질 수 있도록. 불가피한 것에 순종할 수 있도록. 그리고 만일 생존과 관련한 중대한 문제들이 우리를 덮친다면, 생존에 대한 명쾌하고 분명한 입장을 가질 수 있도록. 끝으로 개개인의 삶을 위해, 즉 그 개인이 자신의 책무를 완수하고 세계를 고찰할 때 깨어 있는 정신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만큼의 햇빛을 얻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말이다.-1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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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자서전 - 어느 베스트셀러의 기이한 운명
안드레아 케르베이커 지음, 이현경 옮김 / 열대림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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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다루는 책들이 있다. 오르한 파묵의 <새로운 인생>, 박주영의 <백수생활백서>와 같은 소설을 읽으면, '책'에 대한 형형색색의 애정이 느껴진다. 베르나르의 <여행의 책>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오르한 파묵의 <새로운 인생>은 책에 대한 애정이 무엇인지를 유려한 문체로 때로는 아이처럼 순수하게 보여주는 작품이어서 그 잔상이 오래 간다. '이런' 책들을 읽을 때면, 책의 존재를 생각하게 되고, 책에 대한 입장을 다시 정리해 보게 된다.  

이 책의 작가인 안드레아 케르베이커는 애서가의 수준을 넘어 수집가의 일반적 속성을 가진 것 같다. 물론 이 얇은 소설에서 그것을 진득하게 경험하기란 어렵지만, 작가는 책을 사랑하는 자신만의 방법을 표현하려고, 그리고 나누려고 시도한다. 그 표현과 공유의 순간에 책 속 문자의 힘이 매개가 되는 것은 우리에게 책과 책을 이어주는, 그리고 그 책을 집어들고 있는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역할로 인식된다.  

하지만 작가는 이 책에서 인간의 입장으로 책을 바라보지 않는다. '책'의 입장을 묻는 이 작품에서, 주인공은 '책'이 된다. 책의 물질성이 확보되면서, 그 물질성으로 인해 말을 하고,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는 책의 행위는 단순한 의인화의 효과를 넘어, 책을 매만지고 있는 '인간'의 행위에 대해 묻는다.  

책에 대한 입장에서, 책의 입장으로. 우리는 책을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사랑이 정말 책과 함께 나누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책의 입장을 묻고, 또 묻는 것은 전혀 미련한 행동이 아니다. 우리는 오히려 그 행동을 너무나 간과해 왔다. 그렇다면 책의 입장을 묻는다는 것은 어느 것일까. 자신이 가는 서점, 도서관, 카페에서 어느새 매만지고 있는 책의 형태를 살피기, 그리고 책 속 구절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언어들을 관찰하기, 마지막으로 이리저리 방치되어 있는 내 방 속 책들의 존재를 자주 들여다보기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인 '책'은 '책을 다루는 어느 책'처럼, 자신을 대신할 새로운 매체들의 등장에 관심을 가진다. 안드레아는 이 상황 속에서, 그리고 안드레아 뿐만 아니라, 안드레아처럼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가지는 공통된 희망,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은 살아남을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남겨둔다.   

책의 입장이 나타나는 이 작품에서, 작가는 책의 목소리를 통해, 책을 둘러싼 비평도 시도한다. 책의 불안전한 존재로 인해, 그 존재를 에두르는 해석이 책의 균열을 혹은 책의 평화를 가져다줄지는 사실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아직' 책은 살아남았다는 것이며, 인간은 여전히 '읽는다'는 것을 좋아한다는 점이다. 책의 존재는 그래서 잊혀질 수 없고, 지나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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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민족국가를 노래하는가 - 주디스 버틀러, 가야트리 스피박의 대담
가야트리 스피박 외 지음, 주해연 옮김 / 산책자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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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국가'를 볼 수 있을까. 우리는 불가피하게 '국가'를 소환해야 할 것 같다. 국가는 '국가'에 살고 있다는 우리에게 그것을 '인식'으로 혹은 '존재'로 여기게 한다. 국가가 '인식'이라면, 그것은 국가 안에 내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느끼는 심리적 위안 혹은 불편함이라고 할 수 있다. 국가가 '존재'라면, 그것은 사실 '인식'과 동떨어질 수 없는 범위 가운데, '나'가 처한 현실의 조각들을 몸소 체험하고, 그 체험을 통해 '국가'를 '깨닫는'것을 말한다. 이 책을 구성하고 있는 쥬디스 버틀러와 가야트리차 스피박의 대담은 국가를 인문학적으로, 철학적으로, 정치학적으로, 사회학적으로, 문화학적으로 소환하면서, 국가를 하나의 '모습'으로, 하나의 '생각'으로 다시 이야기해볼 것을 간,직접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쥬디스 버틀러는 '언어'를 통해 국가를 재정의한다. state는 국가라는 뜻과, 상태라는 뜻을 둘 다 갖고 있는데, 버틀러는 이 두 뜻을 같이 가지고 가면서, 국가를 '상태'로 규정한다. 국가가 '상태'일 때, 국가는 일정한 모습을 띈다고 할 수 있다. 국가는 건강한가? 국가는 아픈가? 국가는 씩씩한가? 국가는 우울한가? 우리는 매일 뉴스를 보면서, 사실 국가의 상태를 목도하고, 점검하고 있다. 국가의 상태를 점검하는 것은 그러나, 주권과 자유라는 가치 속에서 그것의 색다른 모습이 있다는 것 또한 알게 한다. 우리는 오늘날 주권과 주권의 충돌을 통해 더 나은 주권이 그것보다 더 낫지 않다고 하는 주권들을 말살하는 장면들을 자주 체험하고 있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질문할 것이다. 어는 것이 더 '나은' 주권인가? 우리는 이것을 국가가 할 일이라는 이유로, 혹은 일상의 애매모호한 기준으로 인해, 그냥 거기에 맡겨놓고 사는 것이 대부분이다. 국가를 향해 처절하게 투쟁하는 사람들의 권리를 '재미있는 구경거리' 혹은 '내 알 바 아니요'주의로 쉽게 간주하는 것은 자신만큼은 우월한 주권의 편에 있다는 큰 오만함과 착각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을 버틀러와 스피박은 도전적으로 묻는다. 버틀러와 스피박은 한나 아렌트와 조르조 아감벤 등이 주장한 정치철학적 관점을 비판적으로 읽어내면서, 과연 이 시대에 민족- 국가는 어떤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는지 따져본다.  

다 알다시피, 주권이라는 것이 성립되면서, 그 주권이 모든 주권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주권을 배제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일상 속에서도 체험하고 있다. 그리고 이 문제는 세계의 차원에서 더욱 심각하다. 전쟁을 통해, 평화와 가까이 했던 사람들이 소유하던 풍경은 어느새 권력의 우열 관계 속에서 빼앗기게 되었다. 그것을 다시 찾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러나 점점 또 다른 주권자들의 목소리에 의해 타자화되고, 그 타자화의 효과는 결국 인간을 둘러싼 '평등 의식'이라는 것을 '텍스트' 이상의 가치로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우리는 '배운' 평등으로서 평등을 충분히 학습했다고 자위하지만, 그러한 의식이 배움 이상의 것으로 나아가게 하진 않는다. 배운 평등이 아닌, '생각하는 '평등이 필요한 이 시기에, 이 책이 논의하고 있는 '벌거벗은 삶'을 사는 사람들을 위한 희망 공간을 마련하는 학문의 의지는 우리 모두가 함께 고민해봐야 할 문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지식시장에서 이런 책들이 나올 때마다, 가장 앞장서서 이 이론의 실천성을 박제화시키는 것은 바로 이론을 다루고 있는 학계 사람들이라는 점이 안타까운 아이러니다. 자신의 지성을 내세워, 그것을 자신의 방식대로 소비한 뒤, 그것의 소비를 일종의 자기 자랑으로 내세우는 지식 노동자들의 행위는 사실상 '성실한'것이 아니라, 얄팍한 이론 수입에 능한 지식상인의 '재주'인 것이다.  

 나는 이 책이 또 다른 '성실성'을 추구할 수 있는 매개가 되길 원한다. 그 성실성은 바로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세계 속 장면들과의 끊임없는 부딪힘이다. 이 책에 나온 해외 불법 이주자들의 저항은 사실 '해외토픽'이라는 소소한 흥미거리가 아니다. 그 흥미거리로서의 인식을 뛰어 넘어, 우리는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삶의 풍경에 스며들어, '스며듦의 사유'를 전개해야 한다고 본다. 그리하였을때, 버틀러가 지적한 '상태'로서의 국가는 상당히 흥미롭고 적절한 개념인 듯하다.  

우리가 국가를 '상태'로 생각했을 때, 국가가 갖고 있는 모순들은 더욱 더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될 것이다. 국가의 건강성을 보장하는 이 정부의 획일화된 언어는, 결국 그 언어의 힘 속에서 또 다른 건강하지 않음을 가려버린다. 그러한 건강하지 않음 속에서 '국민'들은 삶의 공기가 탁함을 알고 있지만, 그것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게 만드는 국가의 '자세'는 그것에 저항하는 국민의 '행위'를 너무나도 안이하게 '반(反)'이라는 언어로 규정해버린다. 더욱 문제인 것은 그러한 국가와 개인 간의 관계 가운데, 삶을 살아가는 자신의 권리를 그냥 놓아두는 것 자체만으로, 자신은 정상적인 사람들이 갖고 있는 그 권리 자체를 여전히 잘 지키고 있다는 대중의 인식이다. 권리라는 것은 행사함으로써, 그 모순과 발전을 함께 체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권리'의 무게를 가볍게 여기는 것은 아닐까. '권리를 위한 권리'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본 책의 메시지는 그래서 소중하다.  이런 맥락에서 주권과 주권이 충돌하고, 이 충돌의 과정이 결국 한 국가 안의 사람들 간의 이질성을 자연스럽게 생산한다. 내가 갖고 있는 주권은 더 나은 주권이며, 더 나은 주권은 '당신'이 가진 주권은 별로 생각할 가치가 없으며, 이로써 당신이 삶을 살 '자격'마저 어쩔 수 없는 강함과 약함의 운명 속에서 생각되어야 한다는 것의 굴레에 빠진다.  

이 운명의 갈등은 나는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할 문제이자, 더 나은 사회로 가기 위한 통로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적어도 그러한 통로를 만드는 과정 속에서, 그 통로가 더욱 견실하려면, 우리는 '동등한' 게임의 규칙을 세울 필요가 있다. 그러나, 국가와 국가, 국가와 개인, 개인과 개인의 관계 속에서 이 '동등한' 게임의 규칙을 고수하려는 사람, 심지어 만드려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는다. 오직 자신만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자격'이 있다는 것에만 혈안이 된 사람들의 목소리가 자본의 힘과 결부되어 늘어나고 있는 것 같다.  

한나 아렌트가 주장했던 것처럼,,결국 인간이 인간의 평화를 위해 만들어 놓았던 규칙,,질서..법의 생산.,.그리고 그러한 제도의 증가가..인간의 행위 자체를 옥죄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딜레마를 어찌할 것인가. 정치를, 경제를 욕할 것인가? 그것은 너무 안이한 문제 해결 의식이다. 결국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행위를 점검할 필요가 있다. 준엄한 자기 비판 의식이 없다면, 결국 우리는 '~탓'의 정치를 일상 속에서 순응적으로 체험하는 사람으로만 남겨질 것이다. 그리고 그 '~탓'의 정치는 그 어떤 해결의 실마리도 가져다주지 못한 채, 또 다른 이들의 생각을, 문제의식을 '구경거리'로만 간주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지금 국가를 '상태'로서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국가를 '~탓'으로 돌려, 국가 자체를 문제화하는 것을 넘어, 인간인 '나'의 상태와 함께 점검해야 한다. 그랬을 때, 우리는 얼마나 국가와 개인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지, 그리고 국가가 인간에게, 인간이 국가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있었는지를, 그리고 있는지를, 그리고 있을지를 복기, 분석, 예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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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 선언
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지음, 강유원 옮김 / 이론과실천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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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알다시피 이 시대에 '선언'은 사라졌다. '엥?'이라고 하겠지만, 내말인즉슨, '선언다운 선언'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 시대를 앞서 나가려는 선언은 없다. 항상 '사후적인', 어떤 것에 대한 뒤늦은 예비책, 방어책들만이 가득하다. 아직 서른 살이 되지도 않은 두 젊은 청년이 이 세상의 모순을 직시하고, 이 선언문을 썼을 때를 직접 보고 싶은 마음 가득하다. 그러고 싶은 이유는, 이 책이 우리의 '지적 골동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공산당 선언'은 여러 출판사의 버전으로 나왔지만, 강유원이 번역한 이 책은 맑스와 엥겔스에 대한 어떤 아련함이 남아 있으면서도, 이 아련함이 위대한 선언문을 박제물로서 여기지 않도록 하려는 잔상이 남아있는 것 같아 권하고 싶다. 이 책이 나온 시기는 공산당선언 160주년 즈음이었는데, 역자인 강유원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60년 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주의를 유럽에 떠돌고 있는 유령이라 말했다. 2008년 오늘, 공산주의는 전 세계 어디에도 자리잡지 못한 채 떠돌고 있는 유령이다. 160년 전에는 공산주의를 토벌하기 위한 신성한 몰이사냥이 조직되었으나 2008년에는 무관심이라는 사태가 공산주의에게 벌어지고 있다. 공산주의는 세계의 많은 세력들에 의해 유의미한 세력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지금은 공산주의의 '견해', '목적', 그리고 '경향'을 다시금  '공공연하게 표명'할 의의가 있는지를 분명히 해두어야 할 때이다. 121쪽. 

1848년 이후에 엥겔스가 계속해서 덧붙인 서문을 읽을 때는 이제는 곁에 없는 동료 맑스를 그리워하는 엥겔스의 감동스러운 문장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자신들이 만든 <선언>의 공과를 지적하며, 그러한 공과에 대한 직접적이며 강제적인 개입이 아닌, 역사가 위치한 그 자리에서, 그 자리를 경유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역사에 대한 의지와 실천을 묻는 엥겔스의 겸허한 문장도 인상적이다. 

나는 요즘 자크 르 고프의 <돈과 구원>, 앨버트 허쉬먼의 <열정과 이해관계>와 함께 본 책을 읽으면서, '국가 - 이데올로기 - 자본 - 개인'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자본주의가 '교환관계'에 의해 작동하고 있다는 맑스의 놀라운 통찰력, 그리고 그 교환 관계 속에 숨어 있는 인간과 인간의 불평등한 주고받음은 오늘날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탈피할 수 없는 속성이다.  중세 시대 국가와 종교가 하나가 되어, 인간의 행동을 규제하고, 특히 인간의 열정과 흥미를 감시하던 시기가 있었다. 돈을 매만지는 것이 나쁜 것으로 여겨지던 세상에, 점점 더 딜레마에 빠져가는 세계는, 자본주의를 향한 길을 통과하게 될 준비를 한다. 상업의 발흥과 함께 서로 간의 물질이 오고가고, 사람들의 물질성은 '이해관계'라는 단어와 결부된다. 즉, 이러한 이해관계를 통해 당시의 지식인들은 일정한 좋은 '정치적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아니다의 갑론을박을 벌인다. <국부론>을 쓴 애덤 스미스는 여기서 무한한 인간의 합리적 이기심, 인간이 자신을 향한 이해관계를 펼치는 행위가 오히려 공공적 가치를 드높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산업의 발전과 함께 인간의 이러한 합리적 이기심이 마냥 좋은 미래만을 담보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 스스로도 신뢰할 수 없었던 측면이 있었다.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관계가 맑스의 표현에 의하면, 생산관계, 생산양식, 생산력의 3항에 묶이면서, 이제 이 두 계급의 갈등이 시작된다. 국가사회학에서 맑스는 국가라는 것이 끊임없는 계급의 투쟁이라고 주장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맑스는 저 선사시대부터 산업이 발전하고 있는 당시까지를 존재의 역사, 물질의 역사로 바라보면서, 그 시간을 관통하는 물질성이 가져다 준 풍경의 비극을 우리가 막지 않아야겠냐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러한 주장을 통해 맑스는 노동자들의 각성을 촉구하며, 새로운 판을 짤 것을 촉구한다.  

나는 아직 많은 나이를 먹지는 않았지만, 이 책을 자신의 지적 골동품처럼 자랑하거나, 혹은 자신을 '좌파'라고 당당히 소개하면서 이 책을 자신의 액세서리처럼 말하는 사람을 자주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은 '지적 골동품'도, 자신을 좌파라고 규정하는 사람들의 '좌파 액세서리'도 아니다. 맑스와 엥겔스가 써내려간 이 선언문의 당당함 만큼이나 내가 주목하는 것은 그들이 역사를 바라보는 데 있어 갖추고 있는 어떤 겸허함이다. 이 책을 읽는 사람은 앞에 나와 있는 초기 선언문 하나만을 읽고 다 읽었다는 티를 내지 않기를 바란다. <선언>이 나온 후, 이후 여러나라의 언어로 번역된 <선언>의 서문을 다 읽은 후, 우리는 그 <선언>을 둘러싼 당대의 반응들을 차분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 책은 어느 위대했던 젊은 두 청년의 야심이 묻어나는 삶의 고백이다. 그리고 이 고백의 중심에는 '사람'을 챙기려는 의지가 있다. 지금 당신, 사람을 챙기려는 의지가 있는가. <선언>은 여전히 책을 만지는 당신에게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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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하이카라 여성을 데리고 사누: 여학생과 연애 살림지식총서 151
김미지 지음 / 살림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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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릴린 멜롬의 <유방의 역사>라든지, 한스 페터 뒤르의 <에로틱한 가슴>과 같은 책을 읽을 때면, 늘 국가의 이중성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 이중성은 정확히 누구에게 나타나는가? 일반화시키기는 어렵지만, 여성은 국가의 이중성에 의해 역사적으로 많은 피해를 받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 넓게 나아갈 필요도 없다. 박정희 시대, 전두환 시대, 우리가 휘황찬란하게 여기고 있는 '경제적 발전'이라는 이름 아래, 국가가 은폐하고 있는 역사적 진실은 분명히 더 드러내야 할 부분이 많을 것이다. 남성 또한 그렇지만, 한국의 여성은 역사적으로 '동원'의 존재였으며, 그러한 존재를 뛰어 넘어, 여성의 능동성과 적극성을 모색하려는 작업이 이 순간 강해지고 있음은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일 것이다.  

책 제목에서 바로 연상되는 것처럼, 이 책은 1920~30년대 한국 사회 내에서 학교를 다니며, 교육을 받았던 여성들을 국가가 당시 사회가 어떻게 바라보았는가를 개괄한 책이다. 공지영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에서도 느낄 수 있는 대목이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에 암묵적으로 혹은 직접 드러날 정도로 '높은 교육을 받은 여성'에 대한 인식은 이중적인 것 같다. 그것이 이제 '결혼'이라는 제도에 묶이면, 상당히 현실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주위에서 많이 본다. 높은 학벌을 가진 남성 - 남편이 될 사람보다 좋은 학벌을 가진 여성이라는 구도가 있다고 친다면, 우리가 드라마에서 너무나 지겹도록 봤다시피, 여성은 '문제화'된다. 고집이 강할 것이다? 성격이 드셀 것이다? 등등등. 여성이 진정으로 그동안 갈고 닦았던 '능력'은 일순간, 하나의 '성격'으로 치환되고, 그 능력을 통해 사회에 나가서 말하려고 하는 진심은 다분히 논외거리로 치부된다. 바로 그 현실이 바로 오늘날의 것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바로, 역사가 필요한 것은 이 시점이다. 이것은 역사적 인식을 통해 과거의 형상을 되새기면서, 그 당시 사회가 갖고 있는 시대상의 면면들을 꼼꼼하게 살펴보고, 그 면면과 오늘날의 풍경들을 비교하면서, 우리 스스로 어떤 자세를 갖는 것을 말한다.  

당시 이런 고등교육을 받는 여성들을 부정적인 스테레오타입의 범주 안에 넣은 대표적인 사람들은 바로 남성 지식인들이었다. 이것은 사실 이 시기의 일만은 아니었다. 예로 들어 우리에게 '현모양처'의 대표로 불려지고 있는 신사임당의 경우를 본다면, 신사임당은 당시 상당한 그림 실력을 갖고 있던 화가였다. 그러나, 신사임당의 이러한 뛰어난 실력이 점점 그러한 그림을 즐겨보는 양반들 사이에서 오르락내리락 거리고, '녀자'가 더욱이 집에서 살림살이를 하며, 남편을 내조해야 할 처지에 있는 '녀자'가 어떻게 뛰어난 남자 화가의 실력과 대등한가를 두고, 설왕설래를 벌이면서, 당시의 조선 지식인들은 신사임당의 그림들을 평가절하하려고 애썼다. 그 중심 인물 중 한 명이 '송시열'이다. 송시열로 대변되는 남성 지식인들의 신사임당 그림 실력에 대한 평가 절하는, 결국 그녀의 뛰어난 산수도를 논외로 간주하고,  '아녀자'가 충분히 취미삼아 그릴 수 있는 '조충도'의 존재를 강조함으로써, 그녀를 제한적 담론 안에서, 가정이라는 담론 안에서만 머물게 했다. 

이러한 메카니즘을 바로 이 책에 견주어본다면, 여성은 '하나의 대상화'로써, 언론과 지식인의 비난거리가 되었다. 책의 표지가 분명하게 보여주듯이, 국가는 여성의 배움을 용인하면서도, 그 용인의 시선을 '우려'의 시선과 함께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국가는 바로 사회에 이러한 이중적 시선을 넌지시 던져주면서, 여성의 배움을 둘러싼 의미들을 옥죄인다.  

이 책 하나를 통해, '하이카라 여성'을 사회가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를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런 책들을 자주 접하다보면, 국가와 여성의 관계, 그리고 그 관계를 간주하고 작동시키는 일정한 복잡다단한 메커니즘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학문은 그러한 메카니즘을 발견하고, 만들어내고 전복함으로써, 오늘날 우리의 '사건'과 '현상'에 일정한 의의를 주려는 노력을 벌인다. 고로 나는 이러한 책이 작은 '상식'의 선에서만 머무르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이 책의 얇은 외형이 마치 "아, 옛날에 이런 일도 있었구나"라고 생각하게 만든다면, 큰 오산이다. 작고 얇은 책에서, 꽤 따갑고 무시무시한 메시지가 숨어 있다. 그것을 발견하고, 더 찾아보려는 노력은 독자의 몫이다. 저자 또한 그것을 '과거에 대한 상식'으로만 머무르지 말고, '오늘날의 문제화'로 삼길 바라는 듯하다.   

이 책의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당시 여성들이 교육받았던 학교에 대한 별명이다. 이 별명이 오늘날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여대'에 대한 인식과 겹쳐있는지를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작업일 것 같아, 책 속 내용을 일부 발췌해 본다. (인식과 겹쳐있는지를 비교해보는 것은 단순히 우리 입의 도마위에 오르는 소재로서의 인식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과연 하나의 대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의 틀을, 역사적 의식 속에서 찾아보는 것이다.)

"당시 우스개 소리로 부르던 여학교 별명들이 있다. 경성정신여학교는 정신병학교, 동덕여학교는 똥똥학교(영문명 Dong-Duk에서) 학교라는 별칭으로도 불렸고, 배화여학교는 배워학교 즉 견습학교, 이화여학교는 외화(외화 = 사치) 학교라 하기도 했다. 특히 이화학당과 이화여전은 '로맨스 제작소', 유행의 원천지'로 유명하다는 말과 함께, '조선의 씨크걸의 집합지'라고 소개되고 있다. (<여학교 통신>, [신여성], 1933.6).

나는 이후 다른 글을 통해 한국 사회의 '여대'에 대한 인식을 정리해 볼 생각이다. 이 책은 일정한 도움을 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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