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이야기되는 사건, 배제되는 고백, 망각의 입  

 

 




"그 사이 그녀는, 심문이 왜 '삶의 세세한 구석까지 파고드는지' 잘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런 심문이 전적으로 정당하다는 것쯤은 아주 잘 알게 되었노라고 했다. 하지만 심문할 때 거론한 세세한 사항들을 어떻게 『차이퉁』이 알게 되었는지 그녀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다고 했다."

- 하인리히 뵐,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바디우는, "사건은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존재방식을 결정하도록 강요하는 것이다"(Badiou,1993/2001,p.54)라고 정의했다. 우리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사건이 그동안 유지되어 왔던 자신의 일상에 어떤 균열을 일으키는 것을 느낄 때가 많다. 사람들은 감정의 균열을 미디어를 통해, 타인과의 대화를 통해 공유하면서, 다가온 사건의 정보를 습득하는 것을 즐긴다. 혹은 다가오는 사건이 가져다 준 균열이 삶의 변화로 느껴질 때도 있으며, 개인은 그 변화에 자성의 기운을 싣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 이야기되는 사건의 운명은, 그 사건이 어떤 큰 가치와 의의를 지닌다고 하더라도, 망각의 입 안에 빨려 들어가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사건을 침묵함으로써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사건에 대해 이런 저런 말들을 쏟아 부으면서, 그것을 쏟아 부은 말 만큼 비례하는 빠른 시간 속도로 잊어버린다. 혹은 잊어버리고 싶어 한다. 하지만, 이야기되는 사건의 운명을 우리가 고스란히 삶의 질서로 받아들일 때, 정작 그 사건을 구성하고 있는 각각의 담론들이 어떤 모양새를 취하고 있는지, 무엇보다 우리의 격앙된 분노를 자아내게 하는 사건 속 인물의 비정상성이, 사실은 비정상성을 분류하고, 판단하는 담론들의 곡해로 만들어진 것은 아닌지를 망각하게 만든다. 결국 그것은 용의자 / 살인자 / 피고인 / 인간쓰레기 등으로 명명된 인물이 사건을 통해 말하고 싶은 고백들이 사회와 공유되는 길을 차단한다. 진즈부르크의 시도처럼, 단순한 일화나 하나의 악명 높은 사건사로 전락할 위험은 존재하지만, 한 평범한 개인의 삶을 어떤 소우주 속에서 추적하는 사건사(cf.Ginzburg,1976/2001,p.41-42)는, 단순한 개인의 전기 연구 차원이 아닌, 그 개인의 고백을 둘러싼 다양한 담론 관계를 분석함으로써, 그 담론이 가려 놓은 개인의 고백을 차분하게 바라보는 효과를 가져온다. 연구자는 이러한 효과를 공유하기 위해 사건의 재활용, 기억의 재활용을 도모하는 '사건사'의 시선으로 두 살인자의 삶을 추적할 것이다.1) 무엇보다 여기에 푸코적 시선을 가미한다면, 우리는 푸코의 '사건화'가 가져다주는 담론 간의 전쟁 속에서 개인의 고백은 어떻게 해석되며, 분류되고, 이용되는지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2) 그랬을 때 우리는 "과거의 진실을 가시화 시킨 것이 아니라, 이 진실을 가능케 한 조건들을 가시화 했고, 이러한 진실의 생산이 그것을 발화하는 현재의 글 쓰는 주체에게 작용하는 방식을 밝히려 시도"(심세광,2003,254쪽)하는 푸코의 시선을 체감할 수 있다.

   


  3-1. 19세기 프랑스의 한 청년, 피에르 리비에르의 수기

 

 나는 내 성격과, 그 행위 전과 후에 품은 생각을 설명하기로 약속한 바, 여기서 나 자신의 생활과, 오늘까지 마음을 점하고 있던 생각을 짧게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Rivière,1835; 1973/2008,p.177-178에서 인용)


  

 

 

 

1971년 푸코의 제안으로 시작되어 1973년까지 약 2년여에 걸쳐 진행된 콜레주 드 프랑스의 비공개 세미나에 참여한, 상이한 지평에서 활동하는 연구자들의 공동 연구의 결실이, 『내 어머니와 누이와 동생ㆍㆍㆍ을 죽인 나, 피에르 리비에르』(1973) 라는 책으로 출간된다. 1971년 푸코는 세미나에 참석한 10명의 연구자들에게, 자신이 파리 국립도서관 서고에서 우연히 발견한 피에르 리비에르의 『수기』로 공동 연구를 제안했는데, 푸코는 이 존속 살해범의 수기에서 남다른 구석을 발견한다. 그것은 리비에르가 '살인범'의 처지라서가 아니라, 그를 범죄자로, 광인으로 규정하고자 했던 당시 법 담론, 정신 의학 담론의 경쟁 관계 속에서 형성된 진리라는 것은, 견고한 것이 아니라 더 파헤쳐 봄으로써 해체될 수 있는 것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피에르 리비에르, 그는 1835년 6월 3일 자신이 살고 있는 오네 읍 '라 폭트리'라는 마을에서 자신의 어머니 빅투아르 브리옹, 남동생 쥘 리비에르 브리옹, 여동생 빅투아르 리비에르를 살해한다. 체포 이후, 그는 곧 법 담론과 정신의학 담론의 '분류의 놀이'에 속하게 되는 데, 그런 '분류의 놀이' 속에서 '광인'과 '야만인'으로 규정되어버린 리비에르는 자신의 수기에서 “내가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을 적어도 들어주기라도 하는 것, 그것이 내가 원하는 전부입니다”(PeterㆍFavret,1973/2008,p.365)라고 밝힌다. 이 말을 리비에르에 대한 동정으로 가기 위한 지름길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더욱이 살인자를 향한 면죄부를 줄 것이냐, 말 것이냐의 직접적인 여부로 가는 것도 조금은 소란스럽고 즉각적인 문제 제기다. 이것은 한 어린 농부의 살인을 우리가 어떻게 사회적인 것으로 볼 것이냐의 기로에 서 있는 것과 더 연관성이 있다. 푸코와 함께 리비에르에 관한 연구를 수행했던 장 피에르 페테르와 잔 파브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불행한 침묵의 세계였던 농촌 사람들은 그 상태를 받아들이는 것을 그만두고, 의미 깊은 증상과 같이 그것을 밖으로 표출하며 바깥쪽에서 무시무시한 범죄를 일으킨다. 증상이라고 말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 그것에 대해서 즉시 주목할 만한 논문이나 기록을 많이 쓴 이들이 의사들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농촌의 말 없는 사람들이 드디어 증언하는 법을 안 것이라고 생각한다.(중략) 그들 가운데 어떤 자들은, 마치 지식이나 이성은 흔들리는 것을, 그리고 토착민이 발언하고 그것을 남이 들을 수 있게 하려면 먼저 죽이고, 그 때문에 죽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자기 생명을 희생하는 기회를 발견한다. 그들의 행위는 언어였다(강조 : 필자). 그들은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까? 왜 범죄라는 이 무시무시한 언어를 이야기하는 것일까?"(PeterㆍFavret,1973/2008,p.351-352)

 

 "누군가에게 들려지려면 살인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PeterㆍFavret,1973/2008,p.360)는 견해 속에, 리비에르의 수기는 상호 배타적인 두 언어, 다시 말해서 사법 용어와 정신병 환자의 용어가 서로를 부정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던 당시의 담론 체계 내에서, 부차적인 지위로 밀려난다. 이에 대해 진즈부르크는, 리비에르의 증언을 왜곡이나 비상한 추론 체계에 의존하지 않고 해석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의 증언을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없다. 유일하게 남은 적법한 반응은 망연자실과 침묵뿐이라고 평한다(cf.Ginzburg,1976/2001,p.35-36).3)  리비에르의 수기는 '사법과 의학의 수다스러운 기계'(PeterㆍFavret,1973/2008,p.365) 속에서만 존재했다. 당시 이제 막 탄생 중에 있는 정신의학이 그에게서 얻어내려고 한 것은 죽음이었다4). 그에게 특사를 내림으로써 사람들은 그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것을 거부한 것이고, 결국 토착민의 언어도 어떠한 무게도 없고 괴기스러운 효과도 없음을 선언한 것이다. 이러한 범죄자들은 언어를 농락하는 것처럼 죽음을 농락하는, 정신이 혼란한 어린이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이 말하고 다니는 원한은 존재 이유가 없고, 공상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PeterㆍFavret,1973/2008,p.376). 리비에르의 수기에는 그의 인생사가 다 담겨 있었다. 그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갈등을 낱낱이 공개했으며, 그가 읽었던 종교 관련 서적들, 어렸을 때부터 했던 습관들과 놀이들을 상세히 설명했다. 그는 스스로를 "육욕에 사로잡혀 고민하고 있었"(Rivière,1835 ; 1973/2008,p.180에서 인용)던, "일행 중에 여자가 있을 때에는, 그들에게 말을 걸 수가 없었"(Rivière,1835 ; 1973/2008,p.181에서 인용)던 남자로 밝혔으며, "자주 개구리나 새를 묶어놓고 찔러 죽이며, 세 개의 못을 동물의 배에 박아 넣어서 나무에 고정시키는 것"(Rivière,1835 ; 1973/2008,p.185에서 인용)을 했던 이로 기술했다. 이 수기는 결국 '이야기 되는 사건'의 굴레에 빠지게 된다. 여기에는 당시 신문의 논조도 한 몫 한다. 푸코는 「이야기되는 살인」이란 책 속 글에서, 리비에르의 이야기를 기사로 실은 19세기 통속 신문의 보도 행태를 분석한다. 푸코의 분석에 따르면,

 

"리비에르의 이 이야기는 적어도 그 형식면에서 보자면 삼류 신문의 살인 기사로서, 당시 민중의 범죄에 관한 기억을 형성하던 일련의 서술과 유사하다. (중략) 통속 신문에 아주 빈번하게 나타나는 상보, 정황, 설명이라는 말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런 표현들은 같은 사실에 대해서 신문이나 서적에 부여하는 중요성과 관련해 이런 종류의 어법이 수행하는 기능을 탁월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변형을 위해서는 한편으로는 평소라면 품위나 사회적 중요성이 결여되어 있어 어차피 들어가지 않을 것 같은 요소인 인물, 이름, 행위, 대화, 물체 등을 서술 속에 도입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상기한 것과 같은 모든 자질구레한 사건들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 대단히 특이하고, 진기하며 이상하고 독특한 사건이라는 인상을 주어야 한다(강조 : 필자). 이렇게 해서 통속 신문적인 서술은 습관화된 것과 경이로운 것, 일상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을 교환하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교환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중요한 조작이 일어난다. 즉 사람들이 실제로 목격한 것,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것처럼 마을이나 읍내에 퍼지는 이야기가 모두 기상천외라는 모양을 취하며(강조 : 필자) 누구에게나 회자되어 일반적으로 기록되게 된다. 이렇게 해서 그 이야기는 결국 인쇄되기에 적합한 것이 된다. 곧 문학으로의 이행인 것이다"(Foucault,1973/2008,p.381).



 19세기 초 무렵의 삼류 신문은 일반적으로 2부로 나눠져 있었다. 제1부는 사건의 객관적인 이야기로 익명의 목소리로 이야기되었다. 제2부는 범인의 애가이다.

이 기묘한 가사에서 범죄자는 자신의 행위를 상기하고, 자신의 경험에서 교훈을 끌어내며 양심의 가책을 표명하며, 죽음의 순간을 맞이하는 자신에 대해 공포와 연민을 나타낸다(Foucault,1973/2008,p.394).  당시의 신문은 신중하게 병사의 영광스러운 후문과 부끄러워해야 마땅한 살인범의 행위를 나누고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 신문은 법규를 예증하고, 그 바닥에 있는 정치 도덕을 전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범죄 이야기는 그 존재 자체를 통해 살인이 지니는 양면을 찬미하고 있었다. 범죄 이야기의 폭 넓은 성공은 인간이 어떻게 해서 권력에 반항하고 일어나 법을 범하고, 죽음을 통해 죽음의 위험에 몸을 내맡기는 것이 가능한지를 알고 싶어 하고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욕구의 존재를 명시하는 것이다(Foucault,1973/2008,p.393).5) 우리는 이러한 명시 속에서 리비에르의 고백이 다뤄진 행태가, 하인리히 뵐의 소설『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에서 주인공 블룸이 처한 것과 유사함을 발견할 수 있다.6) 그들의 살인은 입이었다. 그리고 그 입은 다른 사람과의 귀에 도착하길 원했다. 그러나, 현실 권력은 그 입을 통해, 정작 그 입에서 나오는 진실을 막고자 했다. 입을 열게 함으로써 입을 막아버리는 아이러니. 막혀진 입에서 새롭게 개입되는 입들. 그리고 그 새로운 입들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대중의 입들. 법 권력의 심문 과정 속에서 나온 고백들, 그리고 그 고백들을 전달하는 언론 권력은 두 사람의 고백을 각자의 담론 체계에 부합하는 데 신경을 쓴다. 살인이라는 ‘보이는 폭력’ 앞에, 우리는 그 살인이 던지는 사회성, 공공성을 체감할 수 있는 이야기들을 개인의 것으로 누락시키는 현실 권력의 담론을 ‘보이지 않는 폭력’으로 사유할 수 있다. 이야기되는 살인의 운명 속에서 사람들은 법을 어긴 사람과 법을 어기지 않은 사람, 건강한 정신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분류 체계를 진리로 받아들이고, 언론은 그러한 진리를 더욱 부각시키기 위한 수사들을 고안한다. 공동 연구자 필리프 리오는 리비에르를 둘러싼 의학제도와 사법제도 내 담론이 서로 대응하는 가운데, 두 담론의 전쟁은 어떤 공모를 발휘한다고 분석한다. 즉, 리비에르의 생애를 재구성하는 것에서 그의 수기를 제외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수사와 검진을 위한 생의 재구성 과정에서 수기의 제외를 요구하는 것은 수기가 몇 가지 분명한 시점에서 의사나 사법관의 주장과 엇갈리기 때문이 아니라 수기 전체가 의사나 사법관의 해석과 합치하지 않기 때문이다(Riot,1973/2008,p.456).7)

 리비에르의 이야기는 살인이란 극단의 언어로 자신의 삶을 '고백하고 싶었던 인간'이 현실 권력의 담론적 쟁투 속에서 그 고백이 어떻게 이용되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우리는 그 고백의 운명을 사회학자 엘리아스가 소문에 대해 했던 말로 대신 표현할 수 있을 듯하다. 즉, "예배가 끝난 후 클럽이나 주점, 또는 연극공연이나 연주회에서 입방아가 작동되는 광경"(Elias,1965/2004,p.166), "집단 안의 위상을 두고 벌어지는 경쟁의 압력 속에서 다른 수다쟁이보다 더 좋은 뉴스거리를 가졌을 때, 더 많은 관심과 더 큰 박수를 받을 수 있다는 관심 경쟁"(Elias,1965/2004,p.171), "단결력을 유지하고 강화하지만, 그것을 산출하지는 않는 수다"(Elias,1965/2004,p.175)로의 귀결. 리비에르의 고백은 널리 이야기되지만, 그 이야기를 향하는 시선에서 진리는 개입하려는 이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그 문을 열어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구경꾼인 '나'인 것이다. 이야기되는 살인의 운명은 비단 19세기 프랑스의 한 청년에게만 나타난 것인가. 2007년 미국의 버지니아 공대에서 자신의 동료들과 스승을 살해한 재미교포 청년 조승희의 이야기는 리비에르의 이야기와 맞닿아 있는 지점이 있다.

    

 

 

 

   3-2. 21세기 미국의 한 청년, 조승희의 흔적



"너흰 나를 코너로 몰아넣고 선택의 여지가 없게 만들었다 ㆍㆍㆍㆍㆍㆍㆍ너흰 너를 십자가에 못 받아 죽이고 싶어 한다. 너희들은 내 머릿속에 암 덩어리를 집어넣었고 내 심장을 테러했으며 내 영혼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싶어 한다"

- 2007년, 조승희가 NBC에 보낸 선언문 중에서 -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인 후안 고메스 후라도의 『매드 무비』는 '조승희 사건'으로 명명된 2007년 4월 16일에 있었던 미국 버지니아 공대 총격 사건을 재구성한 논픽션이다. 만약 푸코가 살아 있었다면, 후라도의 이 책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수행했을 것이다. 그것은 후라도와 푸코가 'Psy(정신의학, 심리학, 정신분석학) 담론'을 대하는 시선의 차이 때문일 듯하다. 후라도는 「일그러진 정신의 해부학」이라는 책 속 테마를 통해, 조승희의 살인이 일어났던 이유를 분석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살인 사건에서 익숙하게 보던 조사 과정에서 목격하는 것처럼, 후라도는 조승희의 심리를 분석하고 있는 법의학자, 심리학자의 이야기들을 기본적으로 신뢰하는 차원에서 이야기를 전개한다. 미국 드라마나 영화에서 범인을 대하는 장면을 흥미롭게 처리하는 조사 과정의 수사로 동원되는 듯한 'Psy 담론'은, 결국 조승희의 불행을 조승희 만의 것으로 남겨 놓는 데 일조한다. 프로파일 속에서 조승희는 "내게 한 마디만 말해줘 내게 신호를 줘 내가 어디를 바라봐야 할지 가르쳐 줘 내가 뭘 찾을 수 있을지 말해 줘"(Jurado,2007/2009,p.135)라는 가사가 실린 얼터너티브 락 그룹 컬렉티브 소울의 「Shine」을 반복적으로 즐겨 듣던 우울한 청년, "결코 입을 여는 법이 없었고, 사교성이 부족했으며, 감정을 드러내는 법이 없었"(Jurado,2007/2009,p.140)던 청년, "「텍사스 전기톱 살인 사건」처럼 극히 폭력적인 영화를 분석하면서 현대의 잔혹행위에 관해 다루는 과목을 신청"(Jurado,2007/2009,p.154)했던 대학생으로 규정된다.

 'Psy 담론'은 조승희가 남겨 놓은 삶의 흔적들을 정리하고 재구성하면서, 그가 '반환 증상'8)의 수행자로서 자신만의 음모 이론에 빠져서 이성과 감정을 혼돈하려고 했다고 분석한다. 책의 내용에 따르면, 조승희가 고등학교 때 자신의 증오를 전하는 체계를 스스로 갖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글쓰기였다. 그 글쓰기에서 나타나는 타인에 대한 증오의 끄적임은 'Psy 담론'의 권위를 내세울 수 있는 중요한 먹잇감이 된다. 그 글쓰기 속에서 조승희가 세상을 향해 내뱉는 증오의 언술이 직접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더라도, 'Psy 담론'의 수행자들은 조승희가 NBC에 보낸 선언문에서 발견된 '피', '십자가' 등의 단어에  '예수 그리스도와 희생양'의 모델을 심어 넣고, 그것이 바로 전형적인 편집증 환자가 보여주는 극단의 언어라고 주장한다.  또한, 조승희가 학창 시절에 직접 쓴 희곡 「리처드 맥비프」는 조승희를 광인으로 규정하는 단서로써, 이는 'Psy 담론' 체계 내에서 상징 부여와 해석의 틀에 합치될 듯한 거리를 제공한다.9) 여기서 우리는 'Psy 담론'의 학문적 실효성을 논하려는 쪽으로 몰아가는 함정의 우물을 파는 대신, "말하게 하기의 임상적 체계화에 의해, 고해를 자기 성찰과 배합하고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해독 가능한 징후 및 증후 전체의 전개와 결합하기, 심문, 자세한 질문서, 기억의 환기를 노리는 최면, 자유로운 관념 연합, 즉 고백 절차를 과학적으로 수용 가능한 관찰의 영역으로 재편입시키기 위한 그만큼 많은 수단"(Foucault,1976/2004,p.87)들이, 우리가 '사건'속에 놓인 개인의 고백- 그 사건 속에 개인이 행하는 언어를 고백으로 인정한다면 -에서 구조적인 것, 정치적인 것, 공공적인 것을 논의할 수 있는 영역을 마련하는가라는 문제화의 우물을 파야 할 것이다. 이 지점에서 심세광이 지적하는 다음의 내용은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조승희, 유영철 등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엽기적 사건이 있을 때마다 언론을 통해 신속히 확산되는 범인에 대한 정신감정의 담론은 대체적으로 '정신분열증적 착란'과 '편집증'의 범위를 왔다 갔다 한다. 그래서 유효성의 범위는 리비에르 사건 당시 의사들이 거의 만능적이었던 '편집증'을 가지고 정신 감정을 했던 것과 별반 차이 없이 한없이 넓기만 하다. Psy 담론의 절대적인 지배와 거기로부터 결과 되는 범죄 행위에 대한 해석과 지각 방식은, 폭력 행위가 수반하는 정치적 차원을 거부하고 숨겨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기 십상이다. 달리 말하면 정치인들은 그 폭력 행위가 고립되고 소외된 개인 특유의 비정상적 광기의 소산이라는 점을 힘주어 강조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살인자의 '미친' 행동은 정치나 정치인들, 사회 ㆍ경제와 무관하지 않으며, 미친 방식으로든 난폭한 방식으로든 정치 ㆍ경제ㆍ사회의 현실태에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을 듯하다.  Psy의 담론과 권력은 사후 진단과 판결을 내려야 하는 순간에 완전히 편안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조승희와 그와 유사한 범행을 저지른 자들은 종종 오래전부터 정신의학과 그 권력이 관리했지만 결국 범죄 행위를 막는 데 실패하고, '사이코패스'와 같은 엉성한 용어로 해석하는 무기력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정신의학, Psy 제도는 '광기'를 관리해왔다. 모든 것을 말할 수 있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하지만 정작 그 실천이 계속해서 문제를 불러일으키는 지식이 이상스럽게 우리의 공적인 공간을 엄습해 지배하고 있다. 개인의 잔혹 행위를 사회라는 공동의 신체로부터 분리하여 그것을 과학이라는 라벨이 붙은 공간에서 기성의 범주에 따라 명명하고 분류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 위반적이고 파괴적인 행위가 설사 광적인 구축 내에서일지라도 현시하려고 하는 문제와 대면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이다(심세광,2008,527-528쪽).

 

 사법 제도와 의학 제도는 법 집행의 대상자이자 증후와 진단을 도모하는 대상자로서의 입과 조우하여, 그 조우의 결과를 언론의 입을 매개로 세상에 내놓는다. 하지만 우리가 두 사례에서 보듯이, 입과 입의 관계는 차별적이다. 이러한 차별은 하나의 진리로서 사건을 바라보는 우리의 입에 나타나고, 우리의 입은 그 진리를 여과 없이 받아들인다. 그리고 앞으로 다가오는 사건에서 우리는 그러한 진리를 다시 가져다 줄 진리 생산자로서의 입에 신뢰를 보낸다. 그러나 우리는 진리에 대한 신뢰를 진리를 생산하는 실천에 대한 자기 검열의 측면으로 치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오히려 자기 검열이란, 사건이 일어났을 때 사회와 그 사회에 함께 속한 타인의 시선에 부응하는 차원의 '깔끔한 입'의 생산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리하여, 입들의 생산 속에 나타나는 고백의 진리들은 비판의 지점에 빗겨져 나간 채, 사건에 대한 고백 속 성찰을 일원화하는 차원으로만 가고 있지 않은가. 그 성찰 속에서 정작 타자는 존재하는가. '깔끔한 입'으로 무장한 우리의 성찰은 결국 나 스스로의 존재를 확고히 하기 위해 타자를 이용하는 고백의 단계에 머문 것은 아닌가. '깔끔한 입'의 존재는 정작 우리에게 사건의 의미를 더 소모시키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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