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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근 교수의 『그들은 소리내 울지 않는다』를 흥미롭게 읽었다. 송호근 교수의 이 책은 젠틀하다. 하지만 그 속에 저자의 야심이 가득 들어 있음을 느낄 수 있는 책이기도 했다. 쉽게 정리하자면 송 교수는 '50대의 김난도'가 되고 싶어하는 것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봤다. 하지만 어떤 조언 위주의 글보다는 자신을 포함시킨 경험을 바탕으로 한, 타인과의 땀냄새/침냄새가 섞인 젠틀한 필드워크를 선보인다는 점에서, 저자가 나름 요즘 텍스트들을 챙겨보고는 있구나라는 점도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그런 맥락에서 그는 '50대의 엄기호'가 되고 싶어하는 듯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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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 스스로 착각하고 싶지 않은 것은 '필드워크적 글쓰기'란 것이 비단 젊은 연구자의 전유물은 아니라는 점이다. 땅과 사람 그리고 접촉의 순간을 만끽하고 싶어했던 많은 연구자가 있어왔다는 점에서 그의 필드워크적 글쓰기에 기반한 50대 베이비부머를 향한 그만의 인류학은 사실 그리 신선한 접근 방식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외려 필드워크가 지향하는 경험의 지향성은 소위 "~해봐서 아는데"라는 한국 중년 특유의 커뮤니케이션 스타일과 매우 가깝다는 점에서, 이 책의 필드워크적 글쓰기에 담긴 어떤 태도는 한국 중년 남성들이 흔히 갖는 약간 불쾌한 커뮤니케이션 스타일과 교묘하게 만나는 지점이 있다.
다만 태도의 젠틀함에 섞여 그 교묘함이 약간 순하게 보여진다는 느낌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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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참 순진한(?) 것이 왜 세대론을 통한 아픔의 위치와 그 중요성이 비단 베이비부머에겐 가면 안 되냐고 아우성치는 것을 숨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어쩌면 내가 교묘하다고 쓴 이 표현이 미안할 정도로 저자는 우직하게 베이비부머의 가치 좀 한국 사회가 알아야 한다고 점잖게 그리고 자신이 '사회과학자'라는 그 전문성을 지긋이 내세우면서 책의 결말을 보여줄 때까지 그 태도를 멈추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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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대학원생들이 자리잡은 교수들 가운데 술자리를 같이하거나 대화를 하면서 느끼는 어떤 학자형 대화의 연구 대상으로도 삼을 만하다. 저자는 호구조사를 싫어한다고 했지만, 조상이 누구이냐면서부터 시작되어 그 조상과 관련된 역사적 정보를 꺼내어 공유해주고, 나름 젊은 친구들과도 그 호흡이 끊기지 않을 만큼의 유연함을 선보이면서, 묘한 온기를 내비친다. 그러면서 자신 또한 연약한 아버지이자 평범한 아버지이지만, 지적으로 화려하되 경제적으로는 (이 책에서 많이 쓰이는 '운좋다' 등으로 살짝 자신이 이루어놓은 어떤 태도가 자만으로 보일까봐, 그 수위를 낮추고자 겸양된 표현의 전략을 쓰는) 못 미친 과거를 돌아보면서 자신의 위로 대상과 수평적이지만, 그 나름의 차별성도 있음을 은근히 드러낸다. 나는 바로 이 지점이 이 책에서 정말 못마땅하다. 수평과 수직의 위치를 교묘하게 겹쳐놓으면서, 내가 이들을 위로하고 있지만 그래도 나는 뭔가 관찰자/연구자적 위치에서, 라는 그 객관성으로 그 의중을 숨기면서, 자신이 한국 사회에서 얻은 성과들을 인정해달라고 하는 듯한 묘한 뉘앙스가 이 책에 대한 기분 나쁜 내 감정을 숨길 수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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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인지 그가 계속 '사회학자'라는 학문적 전문성을 시종일관 강조하는 것도 매우 불편하다. 가교세대부터 시작해서 나름의 개념 설정/선정을 통해 사회를 보는 눈을 공유하는 것은 좋지만, 그런 전문성에 대한 강조가 자신이 위무하려는 세대적 비극-베이비부머의 비극을 온전히 잘 전달하기보단 저자의 나르시시즘 그 이상으론 다가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자는 필드워크적 글쓰기를 통해 최대한 타인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그리고 그것을 젠틀하게 담으려 했지만, 문제는 그 태도의 기본적 설정이다. 구리다/구리지 않다를 떠나서 왜 저자는 '피해의식'과 '알아주지 못함'이라는 정서를 통해 베이비부머를 위로하려는 시도를 시작했을까. 그러한 정서가 지배적이라서 이 젠틀한 필드워크가 내세우는 베이비부머의 특성 '그들의 소리내지 못함'과 '울지 않음'의 결합 '그들은 소리내 울지 않는다'라는 세대적 고통의 특수성에 온전히 공감할 수 없는 여지를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이 젠틀한 필드워크는 구리다 이상의 느낌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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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비부머가 사회 속에서 정녕 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느냐/아니냐를 따지는 것은 이 책에서 저자가 내세우는 메시지를 잘 읽지 못하는 것이리라. 문제는 다시 돌아와서 더 이상 그런 고통의 감수를 보여주면서 사회를 위한 헌신과 희생으로 소리내지 못함이란 상태를 연관시키는 건, 필드워크적 글쓰기가 지향하는 내가 경험하지 못한 또 다른 세계와의 접촉이라는 가치와 전혀 만나지 못함이라는 것. 고로 송호근 교수의 필드워크적 글쓰기는 이미 자신이 내려놓은 사회적 법칙과 개념 틀 그리고 마음의 습관 속에서 자신의 말을 누군가의 입을 대신 빌려 전하는 수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는 이미 정해진 풍경과 그 언어 속에서 그만의 세계관이 정해진 사람인 것 같다. 그 안에서 자신이 만난 사람은 그를 깨우쳐주기보단 그의 꼭두각시라는 느낌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