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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과장을 보태어) 사람들과 수다를 떠는 자리에서 '나는 꼼수다' 이야기는 여태껏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나왔던 것 같다. 적어도 그 대화 자리에서 내가 '나꼼수의 열혈 청취자'라는 입장에 서 있던 적은 없었다. 늘 끌려 다니면서 나도 들어봐야 하나, 이 정도 생각이 왔다 갔다 하며 고개만 끄덕이는 수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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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도전. 그러나 나는 10분 정도 듣다가 정지 버튼을 누르고 말았다. 그 이유는 뭐 사람들이 다 들으니까 나는 하기 싫다, 류의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희화화'의 묘미만 대중들이 간직한 채 '정치'라는 본질에 대한 회피가 우려된다는 일부 시각에 동의하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따로 말할 기회가 있겠지만 마치 문화연구의 '성찰 게임'에서 늘 등장하던 문화연구가 정치의 연성화를 가져온 것이 아니냐, 라는 추억 '돋는' 시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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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었다. 김어준의 웃음 소리가 싫었다. 이것은 내 귀와 라디오라는 매체, 그 매체를 통해 연결되어 있는 김어준과 나의 감정 교류에 대한 문제였다. 그렇다고 김어준씨 청취자 입장에서 부탁하는데 제발 그 웃음 좀 어떻게 해주시오! 하고 드라마 끝나는 마당에 제발 우리 주인공 죽이지 말아주세요~ 같은 요청을 하고 싶진 않다. 이 프로가 당당하게 내세우는 '싫으면 안 들으면 되니까' 그 룰을 난 지키려고 하고 그래서 앞으로도 '나꼼수'는 듣지 않을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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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꼼수'와 '나꼼수'를 듣는 대중. 그리고 그 두 항에서 피어 올랐던 '영향력'의 문제. 이 문제에 대해 인터넷은 고맙게도 우리에게 뛰어난 시각을 가진 사람들을 주시어 풍성한 관점의 바다에 풍덩 빠지도록 한다. 그러나 나는 잠시 육지로 내려와 저 바다에 빠진 사람들을 쳐다 보며 비평을 하기 보다는 전혀 다른 영역을 고민하고 싶었다. 저 멀리 보이는 희미한 섬과 같은 고민이자 그래서 아직은 '동의 지수'는 미약할지 모르겠다는 그런 고민.
5.
그 고민은 그냥 김어준의 웃음 소리에서 느꼈던 부담감, 내 귀, 라디오, 미디어라는 각각의 항. 그리고 그 항이 만들어내는 의미들. 어쩌면 좀 과학적인 문제라고도 볼 수 있겠다. '나꼼수'는 올해 '귀'라는 인간의 신체 기관과 정치의 긴밀함을 무엇보다 두드러지게 보여준 인상 깊은 사례가 되었다. 사람들의 귀는 아직 라디오라는 매체를 버리지 않았고 늘 새로운 것을 갈구하는 대중에게 '나꼼수'는 귀를 달달하게 만들어주는 풍성한 이야깃거리들을 보장했다.
6.
이런 생각을 문득 해봤다. 정치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이 쉽게 피곤함을 느낀다고 하는, 말을 자주 사용하는데 인간의 신체 기관 중에서 정치 때문에 가장 피로도가 누적된 곳은 어디일까. 의외로 나는 '눈'보다 '귀'일 것이라는 생각을 해봤다. 이 피로도 누적의 문제는 반대로 생각하면 우리가 살면서 정치와 관련하여 어떤 신체 기관을 가장 많이 사용할까, 라는 능동의 문제와 연결된 것이기도. '귀'라는 신체 기관의 중요성을 개인적으로 새삼 돌아보게 되었다.
7.
조금 더 나아가 '나는 가수다'에서 내가 느꼈던 감각의 문제는 '시각'이었다. 관중들이 눈물이나 감동을 받는 장면을 클로즈업하면서 나타나는 '감동의 강요'. 나는 이 프로그램이 주는 '시각적 피로도'에 관심이 갔다. 이 프로그램은 기본적으로 '듣기'라는 행위에 기초한다.(왜 프로그램이 시작되면 텔레비전 음향 모드도 '음악 모드'로 바꾸면 더 좋은 사운드를 감상할 수 있다는 친절한 자막도 나오지 않았던가) 그러나 텔레비전이라는 공감각적인 매체에서 아무래도 신경이 쓰이는 기관은 '시각'이기에 '나는 가수다'가 내게 주는 시사점은 이런 것이었다. 만약 이 프로그램이 '아이돌 위주의'(그리고 이 아이돌이 시각문화를 대표하는, 즉 비디오 스타가 라디오 스타를 죽이고 있는 마당에, 라는 가정에서 시작한 프로그램이라면) 판도를 우려하며 더 좋은 음악을 대중과 공유하겠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면 결국 '대세 자체'는 여전히 거스를 수 없었다는 점. 청중평가단은 이 프로그램에서 노래가 빠르든 느리든 신나든 슬프든 퍼포먼스라는 시각 중심적 행위를 좋아했고 프로그램 또한 관객의 반응이라는 시각적 퍼포먼스를 최대한 이 프로그램의 대단함을 강조하려는 전략으로 활용했다.


8.
반대로 이제 내가 '나꼼수'에서 느끼는 피로도의 전이는 '귀'에서 '눈'이 될 것 같다. 라디오는 라디오대로 놔두었으면 하는 그 고유성. 하지만 이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자 바로 자동적으로 여기저기서 흘러나왔던 "이거 결국 책으로 나오겠지?"하는 반응이 실제 결과물로 나타났을 때. 나는 '읽기'라는 시각 문화와 '듣기'라는 청각 문화의 중요한 행위를 떠올렸다. '닥치고 정치'라는 제목은 그래서 내겐 신선하기도 했다. 기본적으로 '닥치다'라는 것은 말하기 - 듣기의 문제인데 나는 이 문제가 '보기'의 영역도 해당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꼼수다 뒷담화'라는 제목도 말하기 - 듣기의 문제를 연상시킨다. )
9.
하지만 이 피로도 자체를 내버려두는 짓은 하지 않으리라. 그 피로도가 주는 괜한 생각들. '알맹이'도 없이 괜히 '나꼼수'때문에 엄청 팔리는 관련 책에 대한 시샘 등을 포함한 그런 것 말이다. 라디오가 비디오 스타를 죽이는 날이 과연 올까? 근데 비디오가 라디오 스타를 죽였다는 그 유명한 노래 제목을 곱씹어 보니 사람들이 그렇게 단순히 하나의 감각에만 치중했을까, 라는 엉뚱한 의문이 든다.
10.
정치 커뮤니케이션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매번 실적 올리기 위해 하는 대선 후보자들의 tv토론 담화 분석 같은 그런 진부한 논문 말고 한국인들은 정치를 통해 어떤 신체 기관을 가장 많이 활용하는가, 같은 그런 논문을 읽고 싶다. (부탁합니다. 저는 그 동네를 떠나서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