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요즘 flick에 자주 들어가보는 편이다. 내가 관심갖는 문자-언어를 치면, 그것과 연관된 이미지들이 어떤 것이 있을까를 보는 것. 그 재미에 빠졌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연관된'에서 오는 사람들의 생각에 호기심을 갖고 접근하게 된다. 위 사진은 '똘끼'란 단어를 치니 나온 사진-이미지였다. 이 이미지에 대한 내 해석 이전에 왜 내가 '똘끼'라는 단어를 쳤는지 설명해야 할 것 같다. 몇 년 동안 부족하지만 '선배'노릇을 하면서 몇몇의 고민상담을 해줬다. 많지는 않았지만 만남을 통해 그들이 터놓는 고민은 '똘끼 있는 사람에 대한 부러움'이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친구들은 '똘끼 있는 글쟁이'가 되고 싶었는데, 그들은 스스로에게 필요한 것이 '똘끼'라고 여긴 모양이었다. 그런데 대부분 이런 경우 고민을 털어놓는 친구들은 순둥이가 많다. 내가 겪은 친구들도 그러했다. 그들의 고민은 정리하면 두 가지였다. 첫째, 똘끼 있는 글쟁이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둘째, 똘끼 있다고 여긴 매력적인 글쟁이를 실제로 만났는데, 그 사람의 삶을 마주하다보니 실망했다, 어찌 해야 할까였다.
# 2
내가 관심을 가진 건 두번째 문제였다. 글을 통해 나타난 어떤 똘끼. 평범한 삶이라고 여겨지진 않은 삶을 살았다고 고백하며, 그런 삶을 진술하는 글쟁이에 대한 동경이 실제 필자와의 만남으로 이어졌을 때, 적잖은 친구들이 '실망'이란 단어를 꺼냈다. 그리고 함께 따라오는 것이 '상처'란 단어였다. '상처'라는 단어가 이끌고 나오는 사례들은 주로 글쓴이에 대한 도덕성과 연관이 있었다. 그리고 이건 아마도 '술자리'에서 우연찮게 파열되어 나오는 의외의 언어들. 그 언어들이 '글'로 만났을 때는 좋았지만 실제 삶에서 가까이 마주 하여 '말'로 듣다 보니, 그것이 주는 실망감이란 게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 실망감은 삶에서 상당히 많은 일탈을 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자신보다 싱거운 사람이라고 판단하게 만드는 온순함이라든지, 자신의 글이 섹시한 것이지, 자신의 몸이 섹시한 것은 아닌데 글과 몸의 섹시함을 함께 PR하는 어긋난 자신감이라든지, 그리고 알고보니 글에선 상당히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경험왕'임을 자임한 이가 알고보니 대학로에서 연극 한 편 제대로 본 적 없이 쭈뼛쭈뼛 남의 눈치만 보며 이리저리 부산을 떠는 이었다는 데서 오는 매력없음 같은 것이었다.
# 3
문제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도덕성'과 연관된 문제는 그랬다. <오빠는 필요없다>와 같은 책에서 저자의 견해를 통해 감지할 수 있는 흔한 '진보- 오빠'들의 취약한 섹스 문제, 사회에 대해 그렇게 철있는 견해를 제시하면서도 실제 삶에서는 융통성이 없고 리더쉽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우유부단함도 연결지어 나오는 '고민의 입냄새'말이다. 결국 쉽게 말해서 글과 행동의 괴리에서 오는 매력 포인트의 산산조각. 친구들은 그것이 깨진 것에 대한 상처를 안고 살았다. 그리고 다시는 '만나지'않겠다는 다짐을 한 이들도 있었다. "그래..만나지 마..다음부터.." 이렇게 말하기엔 나도 뭔가 찝찝하고 견디기 어려운 상황. 그런 분위기가 가져오는 복잡함들이 몇 달 동안 내내 지속되었다.
# 4
다른 하나. '똘끼'의 문제. 우리는 '똘끼있다'라고만 하면 으레 떠오르는 장면들이 있다. 일탈적인 무엇. 평범한 사람들이 쉽게 할 수 없는 무엇. 안이한 설명일 수 있지만 위의 이미지처럼 F#CK 과 중지의 들어올림은 음반 재킷이나 틴에이지가 나오는 영화에서 흔한 반항의 표식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이내 우리는 이 표식의 대중화와 시시함에 대해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색다른 똘끼를 찾아 헤멘다. 특히, 젊은 날. 우리가 더 평범하게 그리고 세상 속 굴레에 갇혀 있다 생각될 때 갈망하게 되는 똘끼라는 모델, 그리고 똘끼의 모델들. 과연 그 모델들을 프로그램으로 만들어 그걸 따라해보는 것이 똘끼일까라는 어느 정도 진부하지만 영원한 과제로서의 고민이 여기 있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요즘 '과잉 순응'도 하나의 똘끼가 될 수 있을까 고민 중이다. 강준만은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쿨에너지』에서 <하얀 거탑>의 장준혁을 예로 들며, 그는 '과잉순응의 정치학'을 추구한 캐릭터라고 말한다. 그의 주장인즉슨, 장준혁은 현존하는 체제를 '과잉'상태로 받아들임으로써, 그것으로 인한 체제 자체의 폐해들을 폭로하고 있다는 것이다. 조금 다르게. 나는 요즘 이런 모델을 생각해본다. '과하게 착하게 살기'. 과하게 착하게 산다는 것이라는 인간의 캐릭터가 우리 시대의 괜찮은 저항의 한 방식이 될 수 있을까. 뭔가 다자이 오사무 냄새가 나지만, '똘끼'의 전형적인 면만을 답습하고 그것을 동경하려는 이들, 그리고 그들이 동경하는 이들이 창출하는 똘끼도 어쩌면 '똘끼의 유형'중에 나온 진부한 퍼포먼스일지도 모른다는 의심들. 그 사이에서 나는 과잉된 착함이 이 시대를 견딜 수 있는 '매력적인 반대'인지 다시 한 번 되짚어 보게 된다. '착함'이란 것이 왠지 '똘끼'를 추구하고 동경하는 이들에겐 늘 매력없이 "아..오빤 참 좋은 사람이야..그런데..남자로선.."과 같은 반응과 같은 시대에, '과한 -착함'이 갖는 다양한 생활 속 사례들을 접하고 싶다. 가운데 손가락 들어올리기는 '똘끼'에도 쳐주지 않는 세상에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