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
어제 (1)을 쓰고 나서, 읽고 또 읽었다. 드는 생각은 "내가 일을 넘 크게 벌렸나?" 왜냐하면 난 이 책이 주는 메시지 자체를 부정하진 않기 때문이다(나같은 미천한 블로거에게 '논쟁'이란 것은 과분하고, 또 그것을 잘 할 능력은 그렇게 뛰어나지 않다 - 기대했던 사람들에게는 미안하다). (1)에서 느껴지는 내 표현의 애매모호함, 그리고 부적절함 등이 없었는가를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이하 '열노가')를 재차 읽으면서 돌아보게 되었다. (2)에서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전에, 일단 (1)에서 내가 꺼냈던 몇몇 시선들을 다시 주워담아 정리하고, 더 명확하게 내놓으면 다음과 같다.
첫째, '감정사회학' 이야기를 꺼냈다고 해서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이하 '열노가')를 아카데믹한 위치에 놓고 바라보려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최근 몇 년간 국내 번역된 일부 인문,사회비평서 및 연구서 그리고 국내 연구서 및 문화비평집들의 경향을 쭉 뒤돌아보니 중요한 키워드는 '감정'이었고, 또 감정을 심리학이 아닌 사회학적 시선으로 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흔적/성과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정도를 말한 것이었다. 그 경향 속에서 '열정'이라는 키워드로 오늘날 한국의 자본주의를 분석한 '열노가'를 위치지을 수 있겠다 정도의 의견이었다.
둘째, '열노가'가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는 문화산업 종사자들의 아픔과 현실,그것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환기시키기 위해 들인 정성과 시선에 대해 조금 아쉬움을 표한 대목은, 내용 자체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저자들이 주장하는 시각들이 더 견실하고 촘촘하게 제시되면 좋았을텐데,라는 차원의 아쉬움이었다. 난 이 책 전반의 내용을 동의한다.
셋째, 난 '열정 노동의 이론화'과정이 조금 더 두텁게 서술되었으면 하고 바랬다. 이론과 개념 설정에 대한 인식이 무조건 "저 높은 곳을 항하여"(찬송가 제목이다)모드 일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이론화 과정'을 거쳤다고 저자들이 책 속에서 말을 한 상황에서 이론화 과정을 시도함으로써 생기는 어떤 책임감 같은 것?은 분명 있어야 한다고 봤다. 그리고 그 책임감에는 '열정 노동'을 개념으로 만드는 데 있어 더 충실한 참고 자료의 제시 혹은 열정 노동을 언급하면서 이런 언급을 책 속에 계속함으로써 이 개념 설정이 갖는 한계는 없을까라는 성찰이 진중하게 고려되었으면 하는 내 아쉬움이 충분히 피력될 수 있다고 봤다.
# 6
넷째, '열정 노동'의 이론화 과정을 책을 통해 지켜보면서 내가 이미 제시된 유사 주장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음에 대해. (2)는 이 부분 부터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사실 '유사 주장'이라는 표현을 써 놓고, 이 표현이 충분히 내 생각을 전달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유사 주장? 그럼 이 책 이전에 이미 이런 논의를 한 사람이 있었단 말인가? 일차적으로 이런 생각이 들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책을 읽은 사람은 알겠지만 저자들은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 다만 내가 '유사 주장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든 것은 저자들이 서문에서 잠깐 꺼내놓은 우려. "우리는 곧, 대체 어떤 것이 열정 노동이 '아니라고'할 수 있는지를 고민해야 하는 처지에 이르렀다"(15)에서 보듯, 저자들이 염두에 둔 '열정 노동'의 대상이 처음에는 프로게이머와 문화 산업의 종사자들이었는데 그 범주를 확산시킬 필요성을 느꼈다는 데서 시작된 이 책이 가진 어떤 야심에 대한 우려였다.
'열노가'는 참 다양한 주제들을 건드리고 있다. 근래 논의되어 왔던 그리고 지금도 현재 진행중인 사회적 논제들을 다 끄집어 내고 이야기하고 있었다.'88만원 세대' 이야기, '학자금 대출 제도', '자기 계발 담론', '면접 문화 - 준비 과정과 기업 면접의 현실 그리고 스펙', '노동자의 죽음', (<마음의 사회학>이후 부쩍 자주 언급되는) '속물, 진정성', '보보스', '창조 경제', '신지식인', '벤처기업의 굴곡', '90년대는 문화의 시대', '신자유주의', 'IT 산업', '문화산업에 대한 정부의 지원과 오류', '한류', '고 최고은 작가의 죽음', '오디션 프로그램의 폐해', '활동가(달리 말하면 사회운동가)의 죽음', '윤리적 소비', '사회적 기업', '고령화와 저출산율', '재스민 혁명', '대안 경험의 상품화'문제 등등. 누구는 책을 읽고서 저자들의 의견처럼 이 다양한 논제들이 '열정 노동'으로 다 꿰어질 수 있을 것 같은데요?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난 그 입장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저자들이 고생해서 각각의 구슬을 꿰고 있지만, 일단 저 하나 하나의 구슬을 '열정 노동'으로 꿰기 이전에 한 구슬, 한 구슬 자체도 참 할 말이 많을 것 같은데, 그냥 가볍게 훑고 지나가는 듯한 느낌? 거기서 발생하는 산만한 구성? 그 '방식'에 대한 아쉬움을 (1)에서 말하고 싶었다는 게 내가 '열정의 계보학은 완성되었는가'를 쓰게 된 목적이다.
그랬을 때 '열정 노동'이 이론화되는 과정이 담긴 3장<오렌지 족, 그리고 '신지식인'의 열정>은 저 다양한 주제들이 커버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챕터로 구성되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3장은 저자들이 집중적으로 조망하는 '문화산업의 종사자들', 그들이 90년대 소비문화의 주체로서 그들이 향유하고 있던 소비문화 혹은 대중문화에서 만들어놓은 / 느낀 어떤 정서, 어떤 쾌락, 어떤 문화적 취향을 그들이 생산하는 주체로 변모하면서 상품으로 직접 만들고 그것으로 돈을 벌 수 있다는 과정의 지원과 한계들에 대한 서술에 더 치중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래서 난 (1)에서 '헐겁다'라는 표현을 쓴 것이다. 저 다양한 주제들을 꺼낸다는 것은 저 다양한 주제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키워드가 존재할 수도 있겠으나, 내 입장은 저 하나하나의 주제들도 책 한 권, 한 권으로 담기에도 모자랄 수 있는데, '열노가' 한 권이 모든 짐을 다 떠 안고 가는 것은 아닌가에 대한 걱정이 든 것이었다. '관통'이라고 하기엔 건드리는 주제들 하나 하나가 만만찮은? 그래서 독자의 입장에서 볼 때 열정 노동 > 88만원 세대 담론 + 오디션 프로그램의 폐해 + 한류 + 대안 경험의 상품화 + 기타 문제 등등으로 처리될 수 있는 문제인가라는 의문을 낳을수도 있겠다는 인상 정도를 언급하고 싶다. 이런 맥락에서 난 아마도 책을 읽기 전에 '열정 노동'에 대한 '독창적인 서술'을 기대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본 책은 '열정 노동'의 언급 속에서 열정 노동이 껴 안고 있는 다양한 사회적 논제에 대해 이미 언급된 좋은 시각 몇몇 자체를 끌어 와서 '선택'하고 간략하게 서술한 정도라는 인상이 강했다. 서동진의 무엇? 엄기호의 무엇? 리처드 세넷의 무엇? 지그문트 바우만의 무엇?을 부속적으로 인용하는 차원에서 그친. 사회비평집 같은 구성에 사회 문제에 대한 보고서 같은 구성이 혼합되면서 느낀 어떤 산만함이 계속 아쉽게 나타나는 것은 이 때문이었을까. 독자로서 충분히 문제를 제기해봄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리하자면 이 인용된 견해들, 다양한 사회적 논제들이 열정 노동이라는 개념을 만드는 데 가까이 참여하고 있는 것일까? 혹시 저자들은 예전부터 가지고 있던 다양한 사회적 논제들에 대한 자신들의 생각을 이 한 권의 책을 빌어 '다 언급하자!'라는 열정 아래, '열정 노동'이라는 그 용어를 무리하게 '끌어온'것은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책을 읽는 내내 들었다.
또 하나. 독자로서 아쉬움을 느낀 건 열정이 한국 사회에서 어떤 의미로 담론화되어 왔는지에 대한 역사적 서술이 빈약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열정의 역사적 시원을 찾으라고 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 한국의 사회문화적 배경 속에서 적어도 저자들이 명시해놓은 그 90년대를 분기점으로 해서, 70년대 노동 구조에서 열정의 사회적 맥락, 80년대 노동 구조에서 열정의 사회적 맥락 같은 것에 대한 언급 같은 것. 그랬을 때 열정을 둘러싼 담론적 맥락의 굴곡 및 단절 등이 열정 노동의 개념을 더 도드라지게 보여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 완수되면 본 책에서 강조하는 90년대의 문화에 대한 소비의 열정 그리고 그 이후 그 열정을 관리하는 국가와 기업에 대한 미진한 인식에 대한 서술을 주안점으로 삼아 '열정 노동'이 오늘날 문화산업의 특수성과 그 종사자들의 특수성을 더 돋보이게 해주지 않을까라는 설정 같은 것을 독자 입장에서 기대했던 것 같다.
# 7
앨버트 허쉬만의 1977년 저작 <열정과 이해관계>라는 책이 생각난다. '열노가'와 밝히려고 하는 견해의 차이는 있지만, 열정과 자본주의의 속성을 연결지어 보려했다는 점에서 두 책은 비슷한 점도 있다. '열노가'는 최근에 출간된 바바라 애런라이크의 <긍정의 배신>과도 함께 읽으면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열정이라는 좋은 감정의 상태, '긍정'이라는 인간이 누리고 싶어하고 지속시키고 싶어 하는 감정의 상태. '열노가' 나 '긍정의 배신' 모두 이 올바른 감정들을 '전유'하는 국가, 기업, 사회적 분위기에 일침을 가하고 있다. 슬라보예 지젝이 <처음에는 희극으로, 다음에는 비극으로>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요즘 성행하는 '행복학'이 오늘날 자본주의에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은, 신자유주의를 하나의 '문화'로 봄으로써 현대인들에게 감정과 경제의 관계가 이로 인해 발생한 상징성은 어떤 압박감으로 다가오는지. 우리는 그 친밀한 유혹에 대해 생각보다 많은 비평의 언어들을 접하고 있고, 거기에 아랑곳하지 않는 사회 현상도 맞닥뜨리고 있다. 우리는 이 좋은 감정을 '성행'한다는 차원에서만 볼 것이 아니라, 그 감정을 측정 /관리/평가하려는 체계에 대한 비판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그런 면에서 '열노가'가 '열정 노동'을 통해 강조하려는 것은 열정의 제도화, 열정의 프로그램화, 열정의 서열화일 것이다.
앨버트 허쉬만은 열정이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학자들의 다양한 논의 속에서 통제받아야 하고, 관리받아야 하며, 억압되어야 하는 감정이었음을 밝혔다. '(역사인류학자 리하르트 반 뒬멘이 쓴 <개인의 발견>을 보면 이 시기가 인간에 대한 탐구가 확산되는 시기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런 탐구의 열의와 그 결과는 개인의 힘을 발견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그 개인의 힘을 활용하여 지배의 언어로 삼으려는 노력도 있음을 유추해볼 수 있다.)'열노가'도 언급하는 부분이지만, 열정은 차고 넘치는 감정의 문제이기 때문에 '적당한' 감정이 사회적으로 무해한 것이며, 그것을 고안하기 위한 논의들, 그리고 실천들이 일어난 것이다. 허쉬만은 그것을 학자들의 논의에서 발견했다. 흄,스피노자,몽테스키외, 애담 스미스 등등. 열정이라는 것, 특히 돈에 대한 소유욕과 같은 탐욕으로 열정이 저급하게 치부되면서 이것은 곧 국가를 통치하는 통치자가 나라를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가에 대한 매뉴얼을 만들기, 그리고 그 통치가 잘 이루어지기 위해 통치자의 밑에 있는 사람들의 정서를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의 차원에서 '열정'은 예전부터 위험하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나쁘게만 볼 수 없는. 그래서 더 좋은 방식, 더 유연한 형태로 변환시켜 사람들을 적당히 구슬릴 수 있는 감정으로 발명되어야 했다. 그 결과 '이해관계'라는 용어(경제행위에 포함되는 상거래를 지지하기 위한)가 열정과 함께 사용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사람들에게 점점 중요해지는 돈, 그리고 그것을 활용하는 경제 행위가 사회에 도움이 될 것이며, 국가의 통치에 도움이 될 것이며, 그리고 개인의 이익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등등 다양한 견해들이 나왔다. 하지만 공통적인 지점은 열정이 이해관계라는 '무해한 열정'을 지칭하는 용어로 전환되면서 그것이 예측 가능하고 안정적이라는 형태로 유지되기 위한 '전략적 개념'으로 쓰였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허쉬만의 발견을 통해 열정의 '전략적 개념'과 '열노가'가 주장하는 '열정의 제도화 속에서 자본주의 체제가 각인시키는 어떤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을 듯하다. 열정의 관리!
우리가 한때 신자유주의라고 크게 이름 붙이며 비판의 테마로 삼았던 이 체제가 인간의 문화적 형태로 잠식하면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일상 속 상징. 그 상징의 핵심어들이 우리 삶에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발견하는 작업들이 증가하고 있다. 가령, 최근 서동진이 <무엇이 정의인가>에서 밝힌 신자유주의가 내세우는 그 정의의 윤리에 새겨진 '책무성'과 '투명성'은 우리 사회에 상당히 공정하고 옳은 감정의 한 형태, 혹은 사유의 한 형태로 다가오는 듯하지만, 자본주의는 오히려 그런 '성찰적 사유'가 기업 혹은 국가, 혹은 시민단체까지 그들의 이미지 신장을 위한 도구로 쓰일 수 있음을 은밀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열노가'가 추출한 신자유주의의 문화적 상징은 '열정'이었다. 노동은 인간의 열정이 담김으로써 그 개인이 추구하려는 목표, 의지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지만, 저자들은 거기서 더 나아가 그러한 과정을 함부로 재단하고 비인격적으로 개인의 열정을 무시해버리는 이 사회에 대해 한탄하며 분석의 언어로 더 당당하게 맞서야 함을 설파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신자유주의의 문화적 상징을 추출하고 그것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열노가'의 미덕은 존중하고 공유하고 싶다. 그리고 그 미덕의 공유는 이 책이 가장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오늘날 노동의 의미 / 노동자의 의미'를 이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적극적으로 끄집어낼 수 있는 용기로 이어져야 할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열노가'는 우리에게 가장 기본적이지만 그 '우리'가 회피하려는 질문을 책을 읽고 질문해볼 것을 권한다. "당신은 노동자입니까?"
- 못난 독자의 글 끝. (한국 보안업체는 이지아와 서태지의 신비주의를 본받아라! 본받아라! 쿨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