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에 들어와서 글쓰기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이 문제. 논문의 첫 머리에 소설 몇 구절을 인용하는 것에 대해 친구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나는 예전에 이 대화의 내용을 졸업논문 준비 세미나 시간에 발표했고, 지도교수와 동료들은 깊은 관심을 나타내었다. 이것은 어쩌면 지난 날 내가 무심코 저질러버린 짓에 대한 반성. 논문이란 과연 무엇인가?  연구란 과연 무엇인가? 에 대한 성찰과도 이어진 것이었다.  

내 경험을 소개하자면, 나는 2008년에 대학교 총학생회를 연구 대상으로 하여 문화기술지를 쓴 적이 있었다. 나는 이 연구를 통해 과거 pd나 nl같은 노선에 의해 좌우되었던 기존 연구의 시선에서 벗어나, 대학교 총학생회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의 일상을 스케치하고 싶었다. 그러면서 그들은 대체 잠은 언제 자는지, 스트레스는 어떻게 푸는지, 교수와의 관계는 좋은지, 바쁜 시간 쪼개어 연애는 하는지,혹시 선배가 등떠밀어 출마한 것은 아닌지, 등등 관련 연구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질문들을 준비했고, 나름의 틀을 구성하여, 그들이 차마말할 수 없는 부분들이 어떻게 그들을 차갑게 보는 학생들의 시선과 대립되는지를 조명하고자 했다. 문화기술지라는 연구 방식을 아우르는 질적 연구의 경우, 최근에 강조되는 키워드 중 하나가, 바로 '치유적 글쓰기'인데, 이는 연구를 하는 사람과 연구 대상이 된 이들이 함께 연구 문제를 놓고 서로가 사회를 살아가면서 느꼈던 삶에 대한 상처들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라는 부분들을 고민해보는 것이었다. 특히 이 경우 연구를 하는 나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은 그런 그들의 상처를 오해하지 않도록 오히려 더 냉정해야 한다. 그리고 나 스스로를 더 돌아봐야 한다.  

특히 난 당시 논문의 그 '딱딱함'이 싫었고, 내 연구 주제를 뭔가 재미있게, 뭔가 따뜻하게, 쓰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문화연구라는 '혼성과 절합의 지식 장'이 있기 때문에, 그런 욕심은 쉽게 이루어질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문제는 논문을 다 완성하고 나서, 그리고 발표를 하고 나서, 지도교수와 동료들에게 칭찬을 듣고 나서부터 발생했다. 어떤 죄책감? 내가 정말 이렇게 해도 되는 건가?같은 생각들이 논문을 쓰고 난 지 일 년 후(2009년),  세게 닥쳤다. 폭풍의 눈은 이것이었다. 내 논문에 인용된 소설들. 내 기억으론 강석경의 숲속의 방과 이문열의 젊은 날의 초상 중 기쁜 우리 젊은 날의 한 대목이었다.  

난 논문을 쓰던 당시 나를 이렇게 합리화시켰던 것 같다. "그래. 나는 딱딱한 논문만 읽는 사회과학도가 아니라구. 난 평소에 소설도 읽으면서, 이렇게 내 감성도 키워가고 있다구." 난 거북 등껍질 같은 그 딱딱함이 싫었고, 그래서 한때 '문학 같은 논문'을 쓰고 싶다는 대책 없는 선언을 동료들,그리고 교수들에게 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내 글쓰기 자세에 대한 반론이 들어왔다. 국문학을 전공한  오랜 친구가 나의 논문을 보더니, 일침을 놓는 것이었다. "오빠, 난 이렇게 요즘 문화연구자들, 자기 연구에 소설을 딱 앞에 갖다 놓고 시작하는 거 마음에 안 들어. 너무 무례한 거 아닌가? 문학에 대해. 소설에 대해" '무례'라는 표현이 인상 깊었다. 난 도대체 내가 인용한 소설에 대해 어떤 무례를 저질렀던 것일까? 

5  

바로 지점을 콕 찝어보면, 내 무례는 문화연구가 갖고 있는 한계에서 시작한다. 문화연구는 미학적 관점에 약한 부분이 있다. 미학적 판별보다는, 그것을 둘러싼 사회적 맥락. 흔히 우리가 말하는 제도, 환경, 기술 등등에 밀착하다보니, 내가 읽고 있는 /접촉하고 있는 텍스트에 대한 꼼꼼한 독해는 사라지고, 그 독해를 둘러싼 '사람들의 행위'에만 집중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나는 '사람들의 행위에만 집중하다'란 측면에서 두 가지 문제를 쉽게 지나치고 말았다. 첫째, 내 서재에 있는 소설 중, 요 놈이 이번 내 연구에 적절한 참고가 되겠어. 내 논문을 적당히 부드럽게 만들어 주겠지? 난 그래도 통계돌리는 놈들과는 차별된 그 무엇이 있겠지?라는 어긋난 과시. 결국 나는 연구 대상자가 아닌 '내 행위에만 집중한 꼴'이 되고 말았다. 둘째. 소설에 대한 어림잡기였다. 이는 저자에 대한 어림잡기이기도 했다. 그래, 이 구절은 내가 생각하는 것과 거의 비슷하네, 라는 그 추측으로 인해 핀셋에 걸려버린 몇몇 문장들에 대한 내 예의없음. 그래서 나는 적어도 그 구절들이 나오게 된 맥락들을 꼼꼼하게 챙겨볼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결국 소설 속 사람들의 말을 죽이고, 내 말을 살리고 만 꼴이 되었다.  

소설을 논문의 액세서리처럼 생각하는 문화연구자들(나를 비롯한)의 오류는 이것이다. 그들은 문화를 통해 사람들의 생활을 연구하는 만큼, 소설에 담긴 내용을 생활 자체로만 치부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그래서 내가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다다르지 못한 생활상에 대한 접촉, 그것에만 머무른다) 그랬을 때, 우리가 소설을 통해 느낄 수 있는, 책을 만지면서, 글자를 쓰다듬으면서 생기는 새로운 입체적 시각들, 그 황홀함에 대한 깊은 고민들은 사라지고, 소설의 구절들은 단지 내가 접해보지 못한 세계에 대한 실천으로만 머무르게 된다. 

특히 나처럼 문화를 사회과학적으로 연구하고 있는 사람들의 오류가 여기서 드러난다. 이들은 '문학적 상상력'이라는 개념을 빌어, '문학'과 '상상'이라는 어감이 주는 '부드러운 창조력(?)' 같은 자신만의 기대치를 만드는데, 이것은 깊이 고민해봐야 할 문제인 듯하다. (이들의 관용 표현을 꼽자면, 이와 같다 "역시, 소설을 읽어야 해. 왜 내가 이걸 몰랐지? 소설이 주는 그런 맛이 있거덩요. 문학이 주는 그런 감수성이 필요합니다"같은 과장)그것이 과연 소설 몇 구절을 인용한다고 해서 해결 가능한 것일까? 오히려 이런 '인용의 빈번함'으로 인하여, 연구자인 '나'는 오히려 나의 '지적 빈곤' 그 자체를 과시해버린 것은 아닐까? 소설이 논문의 액세서리가 되었을 때, '억압된 것으로서의 소설'은 결국 내 목을 조를 날이 온다는 것을 안다.  혹시 주위에 소설을 정말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휴대폰 고리에 걸고 다니는 이들을 발견한다면(<-비유적으로 말하자면), 그들의 감수성을 조심하라.  최근에 나온 소설들을 두루두루 이야기하면서, "정말 재미있지 않아?", "난 그거 별로던데"라는 말 정도로 오랜 시간 수다를 떠는 이들,'(원딩)을 조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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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6 15: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고양이 2010-08-16 1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20년간 IT 분야만 했답니다. 그래서인지, 인문 쪽 용어들이 정말 어려워요.
웃으시겠지만, 미학이 무엇인지도 모르겠구, 사회과학적이 무엇인지두 잘 모르겠구.
아마.. 제가 전산 관련 용어로 무엇인가를 다룬다면, 그 분야를 모르는 분들도 마찬가지 느낌일까요?
문득 궁금해집니다.......... ^^

가끔 동시대를 사는 사람인데, 아아, 난 왜이리 모르지 라는 생각과 함께 흥미롭기도 합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8-17 02:42   좋아요 0 | URL
그것도 몰라요?라고 하는 사람이 이상한 사람이겠죠..^^

2010-08-17 10: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17 12:2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