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불을 깔아 놓지 않은 딱딱한 바닥. 조용히 돌아가는 선풍기 바람 소리에, 몸을 누이면 솟아나는 '미열'이 감지된다. 방에 남은 건, 약간의 입냄새. 그리고 불쑥 튀어 나오는 옛 기억들. 하필 쓰라린 기억이라 놀란 마음에 외계어로 급조해 본 욕으로 그 기억을 쫓아내면, 행여 누군가 듣고, 내 외계어가 그 누군가의 잠들기 직전 대화 소재로 쓰이지 않을까,라는 희안한 상상을 한다. 

문장 A -> B -> C- > D를 꼼꼼하게 혹은 차분하게 읽으려고 집었다 놓았다 하는 책 더미 속에서, A->C로 바로 훅 넘어간 채, 그래 '읽었다'라고 넘겨버리는 책의 운명. 우물에 빠지기 전, 자신의 손을 잡아달라고 애원하는 책의 얼굴을 무시한 채 떠나면, 갑자기 귀신처럼 그 책이 어느새 내 앞에 나타나 있다. "그땐 내가 정말 미안했어.."라는 말을 할 새도 없이, 책은 내 목덜미를 콱 물어버린다.  인간인지, 흡혈귀인지 분간이 안 가는 시간. 아침에 일어나면 입에서 나는 피냄새로, 어젯밤에 나도 모르게 진행된 '흡혈귀였던 시간'을 곱씹어본다. 비록 그 시간의 덩어리는 내 송곳니에 물린 사람들만이 알고 있겠지만.   

3

낮이 되면 왠지 어젯밤 내게 물렸을 것 같은 사람들이 나에게 이상한 역공을 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뜨거운 여름에 때 아닌 긴 셔츠를 입고 자신의 땀냄새를 지하철 온 곳에 풍기는 아저씨가 어제 심하게 물렸던 사람이었나 보지? 모처럼 사람 없는 카페에 들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켰는데, 주문한 지 20초도 안 되어 나온 그 커피에 들어간 양심과 성의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메신저 친구와 키득키득거리는 저 점원이 어제 내게 물렸던 사람이었나 보지?  

책의 내용과는 전혀 관련 없는 상상들이 책을 읽은 후 찾아올 때, 내가 굳이 이 책 속 사람들 은교와 무재에게 감동 받지 않아도, 그들이 만들어놓은 여백 속에서, 내 스스로의 '짧은 소설을 쓸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을 때. 이것은 참 좋은 책이구나,라는 그 단순한 표현이 사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진정성이었음을 인정하게 될 때. 웃어야 하지도, 울어야 하지도, 차라리 웃지도 울지도 않아도 된다는 그 중립 자체마저도 신경쓰지 않아도 될 때. 그 '아무렇지 않음'이 주는 편안함을 나는 왜 이렇게 어렵게 받아들이려 했을까라는 반복적인 후회를 하게 될 때. 결국 내게 남은 건 '나'밖에 없다는 그 사실이 비극이 아닌 위안이 될 때. 

일제 시대의 기억을 꼭 거치는 땅부자가 아니더라도, 자신의 속물성을 가린 채 세상의 모든 위악을 다 뽐내려는 고시 준비생이 아니더라도, 대뜸 그리운 외할머니의 포근한 사랑을 자신의 부모에 대한 치유제로 사용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꼭 밟길 원하는 그 장소에 우리가 있지 않더라도, 진행될 수 있는 이야기의 잠입은, 의도하지 않은 때와 곳에서 일어나리라. 

A -> B ->C ->D를 지켜가며 모처럼 읽은 소설 <백의 그림자>에서, 나는 읽기의 윤리를 생각해본다. 오랜만에 놀러 간 친구네 집 책장에서 문득 발견되어 걸린  생선이 파닥파닥거리지 않고, 그 큰 눈만 뻐꿈거리고 있을 때. 생선을 개를 쓰다듬듯 만져주면, 신기하게도 비린내는 '참을 수 있는 아름다움'이 된다. 쓰다듬는다는 것이 읽기라면, 이 책은 읽기의 윤리를 우리에게 묻는듯하다. 많은 책이 사실 그런 윤리를 요구하겠지만, '미워할 듯'좋아하는 것과 '좋아할 듯'미워하는 감수성이, '우리 동네'의 윤리가 된 상황에서, 내가 책에 정직해지면, 책도 나에게 정직하다는 읽기의 윤리. 그것을 솔직하게 뽑아내는 언어가 있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이다. 흡혈귀가 되어, 이 생선을 물지 않아서.   

(내가 흡혈귀가 되지 않도록 이 책을 건네준 친구 참참에게 감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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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8-13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에게 내가 남아있다는 사실은 정말 축복인건데...^^

얼그레이효과 2010-08-14 00:18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마기님. 그것을 고맙게 여긴다고 고백하기가 왜 이리 어려운지요. 아직 제 삶에 대해 정직하지 못하나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