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슈퍼볼 하프타임. 자넷 잭슨과 저스틴 팀버레이크가 공연중이었다. 공연이 끝날 무렵, 미디어사에 길이 남을 장면 중 하나가 펼쳐진다. 팀버레이크는 잭슨의 가슴이 가려진 특정 부분을 잡아 뜯었고, 별모양의 악세사리로 자신의 유두를 가린 자넷 잭슨이 황당한 표정을 짓는다. 다음 앨범 광고를 위한 자넷의 의도된 연출? 아니면, 팀버레이크의 손 힘이 생각보다 너무 세서 생긴 돌발 사고? 당시, 군대에서 본 이 장면- 이후 이 사건은 '니플 게이트'로 명명된다. 니플은 여성의 젖꼭지를 뜻한다-이 기억난 나는, 대학원에 입학해서 첫 학기 소논문으로 <가슴노출의 사회학>을 썼다.(당시 연구방법론을 아직 배우지 않은 터라, 좀 산만한 아티클로 끝났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꽤 아까운 글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살려보려고 노력중이다.)
한국에서도 이런 가슴 노출을 두고 난분분한 견해들이 펼쳐졌다. 의도적인 것이냐, 혹은 정말 우연적으로 발생한 사고냐? 사람들은 처음에는 방송사를 질타하는 쪽이었다. 예로 들어, <일요일일요일밤에> '조향기 사건'. 다이빙을 한 배우 조향기의 비키니가 벗겨지고, 그것이 방송 그대로 나갔다. 사람들에게 '가슴 노출'이 주는 문화적 파급 효과를 거의 처음 인식시켜준 사건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더 큰 화제와 논란을 야기했던 '씨야'시절의 남규리의 가슴 노출. 사람들은 이 노출을 둘러싼 보도 형태를 비판하기도 했고, 더 나아가서, 남규리의 소속사가 펼치는 '전략의 이면'에 대해 캐고 싶어했다. 이 사건은 사람들에게 이제 연예인의 가슴 노출이 뭔가 '의도'가 있을 것이라고 판단한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물론 우리는 진실 자체를 알 수 없다. 단지 의혹의 소비만이 있을 뿐이다.
미디어 테크놀로지와 시각성
이제 사람들은 가슴노출을 정밀하게 볼 수 있는 도구를 얻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인터넷이다. 자기 자신이 직접 수행하지 않아도, 다른 이들이 성실하게 그리고 예민하게 캡처해 놓은 장면들을 통해, 추측과 의혹이 난무한다. 가령 개그우먼 곽현화의 경우. 그녀의 옷에서 유두가 삐져 나왔다, 이것은 유두가 아니라 조명의 문제다라고 설왕설래가 많았다. 사람들에게 이러한 논란을 제시해 준 것은, 지나가는 장면을 포획할 수 있는 미디어 테크놀로지의 기능 때문이었다. 곰플레이어나 KMP 등으로 논란 장면을 보고, 그 장면만을 캡처해서 사람들과 대화하고 싶은 욕망. 그것이 실현된다.
가슴노출과 영화문화
이제 사람들은 90년대식 영화문화 관련 밀담처럼, "에로 영화는 아무리 그래도 이야기가 살아 있어야 해. 그런 에로 영화가 얼마나 좋은 줄 아니?"라는 구별짓기 놀이를 하지 않는다. 인터넷에 넘쳐나는 '야동'. 이제 원하면 원하는 만큼 자신이 요구하는 어떤 상을 장르별로 볼 수 있는 세상에서, 더 욕망되는 대상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셀레브리티'의 노출이다. 지금도 인터넷 다운로드 시장에는 특정 영화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연예인의 베드신 모음집만 따로 업로드되는 문화가 이미 오래전부터 넘쳐났다. 가령 김혜수의 경우, 그녀가 베드신을 찍고, 노출을 감행했다고 해 화제가 된 <얼굴없는 미녀>는 영화 자체보다, 그녀의 가슴과 엉덩이가 보이는 편집본이 더 큰 인기를 얻는다.
흔히 우리가 고수하는 작가영화의 존심? 그것도 가슴노출과 관련된 영화문화 안에서 퇴색된다. 적잖은 사람들은 홍상수의 다음 메시지를 궁금해하기도 하지만, 홍상수가 감독하는군, 그럼 이번에 참여하는 그 배우 또 벗겠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꽤 많은 비율을 차지한다는 것을 연구 과정을 통해 알았다. 사람들은 <생활의 발견>에서 추상미와 엄지원의 노출 부분만을 딱 떼어 내거나, <극장전>의 엄지원이 보여준 노출을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해 품평하며, 영화 안에서 가슴을 떼어낸다. 이른바 물신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물론 박찬욱도 예외는 아니다. <올드보이>의 강혜정이나, <복수는 나의 것>의 배두나에 대한 노출신을 복기하며, 사람들은 그녀들의 노출을 또 기대하는 놀이를 벌인다.)
사람들이 여기서 어떤 포장 전술을 펼치기도 했다. 영화 자체가 좋아서 보다 보니, 그런 장면도 있는 거지 뭐에서부터 아예 목적 자체를 여성 배우의 노출이 과연 어떤 정도인가를 확인하고 싶어서라는 이유도 꽤 있었다. (최근에는 박찬욱 감독의 <박쥐>의 김옥빈, 유하 감독의 <쌍화점>의 송지효, 김대우 감독의 <방자전>의 조여정까지. 그래서 사람들은 너무나도 쉽게 노출을 기대하는 스타가 누구누구인지를 미리 점찍어보는 대화를 커뮤니티 안에서 자주 유통시키고 있었다.)
진짜야? 가짜야?
남성들이 많이 활동하는 대형 인터넷 커뮤니티를 돌아다니면서 연구한 결과, 참여 유저들이 가장 많이 이야기하는 테마 중 하나가 여성들의 가슴에 대한 이야기였다. 특히 연예인들의 가슴 크기에 대한 의문들. 자연산인가? 성형인가?로 부터 시작해 유두의 색깔과 섹스경험이란 전혀 관련없는 루머들의 확산과 공유까지. 그 주제는 다양했다. 남자들은 대체로 성형 가슴을 판별하는 이른바 '판단 놀이'를 자주 감행했는데, 여배우들의 섹스신 때, 가슴이 봉긋 솟아오른 형태로 유지되냐? 아니면 평평하게 펼쳐져 있냐?를 몇몇 영화의 캡처 장면을 대상으로 나름의 분석들을 내놓았다. (나는 최근 개봉한 <방자전>의 주연 배우 조여정의 노출을 두고 인터넷에서 나누는 이야기를 주목했는데, 내가 앞에서 설명한 유사한 상황이 발생했다.)
가슴 노출은 과연 어디까지인가?
가슴 노출을 둘러싼 기사들을 분석하고, 또 사람들이 가슴을 노출했다고 주목하게 된 현상을 볼 때, 과연 가슴 노출에서, 가슴은 어디까지를 지칭하는 것인가에 대한 판단 기준이 애매했다. 가령 90년대 섹시 아이콘이었던 '룰라'의 여성보컬 김지현이 노출이 심한 상의를 입고 퍼포먼스를 했는데, 며칠 후 관련 기사를 보니, 기사에서 '가슴 노출'이란 표현을 쓰고 있었다. 근데 사람들의 반응을 보니, 가슴 노출에서 중요한 건 '여성의 유두가 드러났는가, 안 드러났는가'의 문제로 나뉘어지고 있었다.
가슴 노출의 정치학
당시 이 연구를 하면서 연구자로서 갈등했던 윤리적 태도가 있었다. 일단, 나는 술자리에서 안주거리로 삼는 가벼운 소재주의로 논문을 쓰고 싶지 않았다. 과연 가슴 노출을 둘러싼 연구가 있었을까? 그러다가 찾은 책 두 권이
예릴린 멜로의 <유방의 역사>와 한스 페터 뒤르의 <에로틱한 가슴>이었다. 여성의 유방이 사회문화적으로 어떤 유의미한 관련성이 있는가를 연구한 두 책에서, 나는 가슴노출의 정치학을 공부할 수 있었다. 한스 페터 뒤르는 '문명화이론'을 주창한 사회학자 노베르트 엘리아스의 반기를 든 학자로서, 한길사에서 나온 그의 시리즈가 더 있다. 역사적으로 여성의 신체와 그것에 관련된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의미들을 고찰하는 책 시리즈인데, 문명과 야만, 그리고 이 안에 개입하는 근대적 시선이 어떻게 주조되고 충돌하는가가 궁금하다면, 또 노베르트 엘리아스의 이론에 반기를 든 그의 이견이 궁금하다면, 권하고 싶은 시리즈다.
장 푸케가 그린 <믈룅 성모 마리아>(1451~1452경)
예릴린 멜롬의 <유방의 역사>는 대중이 읽게 쉽도록 쓴 역사서 성격이 강한 책이다. 특히 그녀는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국가가 여성의 유방을 어떻게 이용하는가를 알기 쉽고 명확한 사례로 설명한다. 가령, 중세 프랑스 사회에서, 여성의 수유 행위가 국가 이데올로기와 만났을 때, 그 모성성이 국가의 이데올로기를 어떻게 미화시키는가에 대한 그녀의 시선은 제법 탁월하다. 또, 유방암에 걸린 여성운동가들이 자신의 절제된 가슴을 노출한 채, 길거리에 나가 사회를 향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일 때, 가슴 노출이 갖는 저항에 대해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할 수 있을까의 고민을 던져주기도 한다.
윤리의 충돌
이 연구를 수행하면서 부딪혔던 어떤 윤리의 충돌. 내가 까뜨린느 브레이야의 영화를 볼 때, 그녀가 생각하는 여성 스스로의 성적 주체로서의 행위와 그 의도성을 나는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가의 여부. 과연 브레이야의 시선을 올바르게 정당화시키는 게 당연한가의 여부, 그녀의 의견을 올바르게 소비한다는 것 자체가 도리어 그녀의 의도 자체를 또 한 번 관음증적 시선으로 포장하여 보고 있지 않았는가의 여부가 연구 과정 중에서 스스로에게 제기한 고민거리였다.
구성주의적 관점?
버틀러의 의견을 받아들여, 남자의 경우 / 여자의 경우를 다시 고민해보기. 남성 또한 흰 와이셔츠를 입을 때 런닝을 입지 않는 것이 패션 에티켓이라고 알고 있다. 가령 학교 교정을 거닐다보면, 흰 와이셔츠만을 입고 다니는 남자들이 보인다. 그 남자들의 젖꼭지가 그대로 보일 때, 그 노출에 대해 우리가 품을 수 있는 의미들과 또 차이들은 과연 무엇일까? 이것은 섹슈얼리티 자체로 다져진 어떤 자연적 본능으로 마무리되는 것일까? 아니면, 아주 고도화되고 자연스러운 형태로 채워진 훈련의 언어들이 우리를 이런 시각성으로 유인하도록 하는 담론의 '수행성'이 문제인걸까?
다시 성경을 펴고, 선악과를 먹고 나서, 잎으로 자신들의 몸을 가려 부끄러워했던 아담과 하와를 상상한다.
마솔리노 다 파니칼레가 그린 <아담과 하와의 유혹>(1426경)
마사초가 그린 <낙원 추방>의 이미지들.
왜 하와는 가슴을 가렸을까? 화가의 시선이 어떻게 개입된 걸까? 문명에 대해 다시 생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