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을 공부하는 것이 아닌, '예술사회학'을 공부하게 되면, 좀 못된 심성이 스며든다. 내가 바로 그런 인간이다. 예로 들어, <아버지는 똥이다>같은 제목의 영화가 있다고 치자. 그 작품이 평단에 좋은 평가를 받는다. 누군가가 그 영화를 만든 사람에게 '천재성'이라는 표현까지 서슴치 않고 사용할 때, 나는 그 사람의 궤적을 조사하고 싶어진다. 왜 저런 제목을 달았을까? 평소에 저 영화 감독이 튀는 행동을 잘한다고 하는 데, 저런 행동에는 어떤 의도가 숨어 있는 것이 아닐까? 등등. 요즘 영화문화를 지배하는 담론인, "각자의 취향이 있으니까요 뭐." 같은 반-지성주의와 지성주의 사이에 걸쳐진 '패배적 다원주의'로 무장한 이들의 생각과는 또 다른 영역인데, 이러한 '조사 취미'를 갖게 되는 과정을 밟고 싶다면, 피에르 부르디외의 책을 자주 읽으면 된다.
나는 그동안 늘 '홍대형 인간'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에게 주목해왔다. 물론, 여기서 '홍대'는 홍익대학교에 다니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다분히 상징적인, 부르디외 식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홍대'라고 부르는 상징적 공간 안에서 활동하는 사람들, 그러면서 그 공간 안에서 특징적인 문화 자본을 습득하고, 자신들의 코뮤니타스를 설정해놓는 사람들. 나는 그들의 커뮤니케이션에 익숙해질 기회가 있었다. 이것은 물론 일반화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다만 누적된 경험에서 오는 정리 단계다. (이는 물론 '홍대적 감수성'을 확보한 다른 지역의 사람들도 해당된다.)
예로 들어, 카페에서 공부를 하니, 잘 된다는 사람이 즐겁게 자신이 카페에서 공부를 하는 이야기를 풀어낸다. 그러면 '홍대형 인간'들은, 특유의 '예술적 감성'으로, "난, 그런데 가면 왠지 공부하는 것 티 내는 거 같아서 싫던데.."라고 말한다. 물론, 여기에 '예술적 감성'이란 의미를 개입시키지 않아도 될지 모른다. 다만, 내가 이 의미를 넣는 건, 이 의미의 개입이 다른 대화에서도 비교적 유사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남들이 편안하게 이야기 하는 주제에 대해서, 그들은 근본적인 의미를 되물으면서 분위기를 숙연하게 /어색하게 만든다. 예로 들어, 사람들이 정치에 관련된 주제에 대해 활발하게 자신의 의견을 꺼내놓는다. 그럼 홍대형 인간은, 조용히 있다가, 웃으면서 한 마디 건넨다. "과연, 정치라는 게 무엇일까요?" 이런 커뮤니케이션의 작용은, 열정적으로 이 세계를 옹호하거나, 혹은 부정하는 사람을 순식간에 무안하게 만들어버리는 효과로 나타난다.
이런 '조사 취미'가 갖는 딜레마는 도덕과 예술의 접합 지점에서 드러난다. 그리고 그 접합을 만들어내는 사회와 유/무관한 예술가들의 생활에 대해 내가 개입하고자 할 때, 갈등이 일어난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천재성'에 대한 의구심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 내내 자위행위가 나오고, 구토를 하고, 그 안에서 기이한 재미를 주는 영화들이 있다. 그런 영화들을 만든 감독의 사생활을 알게 되었을 때, 가령, 야, 저 사람. 영화만 골때리는 줄 알았는데. 사람도 골때려. 노래방에서 팬티까지 벗고 노래하고 난리도 아니래.라는 말을 들었다고 하자. 그러면 이 의구심은 영화의 내용과, 그 영화가 받았던 평가(평가가 좋으면 좋을수록) 그리고 만든 사람의 생활-성격에 대한 연관성으로 압축된다. 소위 영화를 팔기 위해 저런 것 아니야?라는 진부한 '노이즈 마케팅'식의 질문은 물론 아니다. 이건 부르디외가 말하는 개인의 하비투스, 그리고 그 하비투스에 연관된 장 내부의 특성을 면밀한 체계로 구조화시켜 보는 작업이다.
나는 스스로 이런 예술가들의 독특한, 그리고 그런 예술가들의 삶과 양식을 습득하는 특정인들의 라이프스타일을 '소외 취향'이라고 부른다. 이제 고민은, 얼마 전 아프락사스님이 올려주셨던 정치에 대한 '기계적 균형'의 맥락이 과연 내가 '홍대형 인간'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특성과 어떻게 연결될 것인가의 지점이다. 이 부분은 아직 숙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일단, 나는 정치가 '취향화'되고 있으며, 이 '취향화'과정이 갈수록 심해질거라는 생각이 확고해지고 있다. 사실 정치라는 영역 안에서 유일하게 남은 건, 이제 스타와 팬, 그것을 지켜주는 건 '도덕의 언어'라는 생각이다. 예전 '시사인'의 특집 기사 제목처럼, '팬클럽 민주주의'라고 하는 형태. 이 팬클럽 민주주의가 주는 길은 두 가지다. 하나는 '오타쿠'로서, 자신의 스타가 무슨 짓을 하든, 그 스타에게 '쉴드'를 치는 것으로서 삶의 만족감을 찾는 라이프스타일. 우리가 잘 아는 '아버님들'의 출몰도 그런 면에서, 우리 시대의 또 다른 '오빠부대'이며, 이건 다분히 최근 현상이 아니라, 역사가 빚어낸 산물이기도 하다. 이 산물은 역사에 무지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이며, 역사를 간과하고 싶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이기도 하다. 다른 하나는 '탈퇴의 자유로움'이다. 스타가 좋아서, 취향을 바꾸는 사람들, 아니면 갑자기 '급취향'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도덕적 언어의 붕괴, '도덕적 사건'이 터질 때, 혹은 언론이 그렇게 도덕적 담론을 만들어, 인물의 완벽성, 특히 그 인물을 구성하는 도덕적 전기를 파괴하려 할 때, 팬들은 당황하고, 분열한다. 그리고 자신의 엄청난 정치적 열정이, 이 도덕적 담론에 의해 붕괴됨을 보고, 자괴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정치적 공간 안에서 '소외 취향'을 가진 자가 있을 듯하다. 그러나, 이 '소외 취향'을 가진 자에 쉽게 선입견을 씌우기엔 조사가 필요하다. 그들의 소외 최향이 다수가 유시민을 좋아하는데, 나는 김문수를 좋아하면 안 되요?라는 식으로 표현된다고 해도, 그 사람이 근거를 가지고 김문수를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 소외 취향에 대한 감수성은 무지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문화 자본을 갖고 있는. 학력 자본에 기반한 것임도 간과할 수 없다.
학력 자본이라는 것과 연관만 살짝 시킨 채 이야기 다시 하기. 다른 맥락에서, 이 '기계적 중립'을 알바라고 치부하면서, 그 중립을 표하는 사람을 '무지하다'고 쉽게 무시해선 안된다는 사실이다. (이건 내가 부르디외의 책을 보면서 느낀 생각이다. 부르디외는 세상 사람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의견을 드러내는 것과 관련하여, 학력 자본과 계급이 갖고 있는 특성을 흥미롭게 연구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의견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 정확히 말해, 자신이 학교에서 배운 것과 그 배운 것을 정치에 대해 연관시켜 말하는 것을 즐겨사용한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하지만, 그는 의심한다. 정치적 의견을 표출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로 시작하는.) 오히려, 그런 '기계적 중립'은 '나'가 배웠다는 사실. '나'가 배운 사람이라는 사실을, 공동체 안에서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려는 효과가 있는 것이 아닐까라고 의심해볼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은 그것을 이전의 역사가 준 씁쓸한 교훈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이건 내 조사취미가 가져다 준 습관적 사고이기도 하다.) 즉, 그들은 정치적 현실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이전에 말해왔던 편향성을극복하고, 합리적으로 세상을 보고 있다는 스스로에 대한 성찰을 드러내보이기 위함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합리화하기 위함이다.하지만, 이 성찰의 방향에 대해 우리는 다시 의심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우리가 '기계적 중립'에 대해 불편함을 드러내야만 하는 시도가 되기 때문이다.
나는 그래서,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오히려 '배운'사람들이 합리성, 공정성,객관성이라는 언어로 먼저 시작하며, 그 안에서 자신의 정치적 교양을 뽐낼 때, 그 정치적 교양을 갖고 있는 사람일수록 의심해본다. (오히려, 내겐 그들이 '알바'이다.) 그것이 기계적 중립으로 이어질 때, 그들이 내세우고 싶은 것은 '정치'인지, 아니면 '자신의 배운 능력'에 대한 표현인지, 나는 아직 구분이 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