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많이 놀랬다. 어제 세경과 지훈의 장면. 어떤 사람들은 김병욱 감독의 '우울증'전력을 꺼내며, 변태 혹은 정신병자가 아니냐는 비난을 퍼부었다. 어쩌면 이러한 분노는 하이킥에 자신의 삶을 많이 겹쳐 주었던 이들이 던진 당연한 감정 표현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좀 크게 보자면 사람들의 분노는 '기능'에 대한 제자리를 '하이킥'이 벗어나는 데 출발한다. '기능의 제자리'란 무엇일까. 사람들의 변은 그렇다. '하이킥'은 시트콤이 아닌가. 시트콤의 기능은 무엇인가. 웃겨야 제 맛이 아닌가. 그런데 이 무슨 '병맛'결론인가. 사람들은 '달달한' 장면을 기대했을 것이다. 금요일 저녁, 고된 5일을 보내고 텔레비전 앞에서 '보사마'의 플로우를 기억하고, 해리와 신애의 기분 좋은 싸움을 한 번 더 보고, '지세',-'정준'인지, '지정'-'세준'인지 그 러브라인의 끝을 가늠해보며, 어찌되었든 따사로운 기운을 느껴보고 싶었을 것인다. 그러나, 하이킥은 어겼다. 사람들의 이야기대로라면 하이킥은 '시트콤'의 본분을 지키지 않은 것이다. 

여기서 김병욱 감독의 의도를 마음대로 해석해 보는 것이나, 대중의 분노를 이해하려는 듯한 모습 그 어느 하나를 선택한다는 건 내게 별 의미가 없다. 다만, 사람들의 분노 속에 섰인 그 '기능'의 측면은 곱씹어보고 싶다. 사람들은 이제 문화에서 '본분'을 찾는다. 문화는 어떤 풍요로운 상상 혹은 깊숙한 절망에 대해 그 어떤 장르를 넘어가며, 자신의 왕성함을 소통할 수 없다. 사람들은 문화에서 '투자'를 찾는다. 그 '투자'만큼 '적절한 기능'을 해달라. 너무 많이 나가지도 말고, 너무 적게 나가지도 말라. 내가 시간과 돈을 투자했으니, 그 시간을 '보상'해라, 그 '돈값'을 해라.  (이건 원래 그랬지만, 오늘날 더 심해지는 것 같다)

이런 '보상'의 논리에서 보자면, '하이킥'은 엄청난 돈을 빌리고, '야간도주'를 한 셈이다. 그러나, 문화의 성장은 사람들의 의표를 찌르는 그 '야간도주'에  있었다. 비록 어두운 밤 시간을 택해, 많은 이들은 잠을 자고 있었고, 밤을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기억하고 있지만. 문화는 사람들의 기대와 어긋나는 어떤 '압도적인 선'을 만들면서 우리에게 기능을 뛰어 넘는, 풍요로운 문화의 형식을 만들어 낸다. 문화 그 스스로가 사람들과 함께 만들어 간 문법은 그리하여 웃겨야 할 작품에 웃겨야 한다, 울려야 할 작품에 울려야 한다는 당위론을 넘어, 그것을 분열시키는 힘에서 자신의 문법을 더욱 확장해간 것이다. 

텔레비전의 형편은 영화에 비해 여전히 그 '야간도주'를 모색할 처지가 여의치 않다. 조지 루카스 감독은 관객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 좋은 영화의 척도라고 했지만,  사람들은 텔레비전 게시판을 통해 늘 한 편의 드라마를 '감시'하고 '간섭'하면서, 작품에 손을 댄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감시와 간섭을 한편으론 텍스트에 대한 애정을 가진 사람들의 뜨거운 모습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런 애정 가운데 너무나 '본분'과 '기능'을 외치며, 소위 '역할론'이라는 것으로 문화의 텍스트를 소비하는 것에 나는 반대한다. 텍스트는 텍스트 스스로에게 배반을 하고, 반칙을 함으로써 성장해왔던 것이 우리네 문화사가 아니었던가. 

거칠게 말하자면, 사람들의 이런 '순수-기능주의'가 순수함의 모랄로 이어질까 두렵다. 웃김의 공간에 반드시 웃어야 함이 강요된다면, 나는 그것을 '순수'라는 이름의 문화적 폭력이라고 말하고 싶다.  

나는 언젠가 <아바타>를 보고 오면서, 그 '기술'의 광경으로 인해 같이 본 친구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언젠가, 우리가 영화관에 들어가, 안경을 쓰면, 원하는 다양한 결말이 있고, 그 결말 중 하나를 골라, 각자가 원하는 그 결말대로 극의 서사를 즐기는 시대가 오지 않을까 하고. 하지만 이런 '첨단적 결말'보다, 나는 또 다른 '폭력적 결말'이 좋다. 사람들이 시트콤이라는 장르에 대한 '웃겨라!'라는 당위를 앞세워 분노할 때, '하이킥'이 보여준 이 '폭력적 결말'은 한편으로 구리지만, 한편으로는 '기능'에 벗어나 자신의 자유로움을 펼치고 싶은 한 샐러리맨의 상상 같아, 또 다른 위안을 얻는다.  

몸은 칸막이로 구획된 사무실 책상 안에 묶여 있지만, 마음은 탈주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 칸막이에 채워진 순수와 기능, 네 본분을 하면 그거로 된 것이다라는 압력을 벗어난, 소심한 분노의 다른 형태인지 모른다. 나는 이런 도주라면 언제든지 환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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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3-22 2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꼭 웃겨야한다는 약속된 해피엔딩에 대한 기대도 그렇지만, 저는 굉장히 현실적인 엔딩이지 않을까 했거든요.

사실, 현실에서 그 둘 사이의 러브라인이 성공할 확률이 얼마나 될까요? (죽음이라는 메타포는 반드시 물리적, 신체적 죽음을 떠나 둘 사이의 관계가 파국일 수 밖에 없음을 나타내는 것일 수도 있을텐데 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어쩌면 사람들은 그 드라마를 통해 의기소침해 있던 자신의 일상에도 혹여나 숨어있는 재미 같은 것들을 찾아내려했으나, 결국 현실은 현실이다라는 결론에 더 열 받아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았었어요.

그런의미에서 저는 폭력적 결말이라는 말씀에 정말 동의해요. 적당히 가려주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거죠. 현실을 보상해줄 가장무도회에서 그 가면을 동의 없이 벗어던지고 추한 몰골이라는 진실을 드러내면 소리지르며 도망가는 사람들처럼..



얼그레이효과 2010-03-29 0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족한' 글인데 '탁월한' 답을 얻어 기분이 좋습니다. 좋은 멘트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