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중이 <마음의 사회학>과 그 이전에 발표한, <87년 체제 이후의 스노비즘의 계보학>에서 말하고 싶었던 핵심적 주장은, 문화가 우리를 동물로 만드는가?라는 물음인 것 같습니다. 이 물음은 또한 단순한 인상 비평이라고 하기보다는, 그가 한국 사회의 문화적 기류를 살펴보며 내린 하나의 진단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가 87년 체제 이후의 문화 기류를 분석한 내용을 전부 다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문화가 우리를 동물로 만드는가라는 질문 자체는 상당히 중요한 사유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저는 일정한 동의를 하는 바입니다.
문화와 비문화를 가르는 경계에는, 문화와 인간이라는 두 연관된 요인이 있습니다. 인간이 단순한 '조에'로서의 삶이 아닌, '비오스'의 삶을 산다는 것은, 분명 생각한다는 행위를 통해, 정치를 만들어내는 부분도 있겠으나, 여기서 우리는 '문화의 힘'을 간과해서는 안 될것입니다. 인간이 문화와 결부되었다는 점은, 한편으로는 인간에게 일정한 자존감을 부여한 지점이라고도 생각합니다. '문명'의 차원을 넘어, 공동체를 인식하고, 사회를 인식하며, 그 속에서 특정한 실천 양식을 만들어내는 것, 그것에서 우리가 문화의 기본 바탕을 찾을 때, 인간은 다양한 규칙과 제도를 만들어가며, 특정한 삶의 형태들을 계속해서 생산했고, 발전시켜왔습니다.
이러면서 사람들은 '어떤'문화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다들 잘 아는 고급문화와 저급문화라는 대립쌍이 만들어지면서, 오르테가 이 가제트, 리비스 같은 사람들의 시선을 견지한 이들과 그것에 반하는 문화주의자들이 격론을 벌였죠. 하지만 이런 논쟁 속에서 우리가 그 누구의 편을 들 것인가라는 문제를 넘어, 더 초월적인 사실로 다가온 것은 문화는 우리의 삶에서 이제 '잔여'나 단순한 '반영'이 아니라, 문화 그 자체가 우리 삶의 일부로 들어왔다는 점입니다. 문화의 무분별한 '감염 효과'로, 달라지고 있는 문화적 기류를 폄하하는 자들도, 그런 폄하에 대응하고자 현재를 지배하고 있는 문화적 흐름을 승인하는 자들도, 이제 문화는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그 유명한 표현, '일상의 방식'이 되어갔던 것을 거스를 수 없었습니다.
'사회적인 것에서 문화적인 것의 침식'. '문화적 우세종'(프레드릭 제임슨)이라는 표현 속에서, 마이크 페더스톤이 감지한 것처럼, '신지식인(부르디외)'들은 '그들만의 문화'에서, '그들(대중)'의 문화로 비평의 지점을 변환, 확대시키기 시작했고, 예술은 더 이상 진공상태에 머무를 수 없었습니다. '순수적 진공'을 지향하는 예술의 의미는 이제, 그 진공 상태의 외부를 파헤치고, 예술이 다른 기류와 '섞일 수 있음'을 인정했습니다.
'문화적 전환'. 그 기류 속에서 이제 꽤 시간이 흘렀습니다. 문화는 넘쳐나지만, 우리는 그 넘쳐남 속에서 어떤 새로운 개념들을 도출하고 있지는 못합니다. 지금 지식인들은 '타인지향형 비평'속에서, 순간순간의 문화적 장면들을 쉬운 표현, 명랑스러운 수사들로 언급하는 것으로 자족하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런 미시적 해석들, 사건적 비평 속에서, 그 해석과 비평을 아우르는 거시적 시선을 만들어 본 김홍중에게 있어, 지금의 이 '문화 과잉'은 90년대 대중문화담론의 과잉을 걱정하던 비판적 대중문화론자들과는 좀 다른 맥락에 위치한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는 <마음의 사회학>을 통해 우리가 문화를 통해 (다시)'동물'로 돌아가는 것인가.문화는 우리를 인간이 아닌 동물로 만드는가의 문제를 제기한 것인가.
이러한 문제의식을 인터넷에서 사람들이 즉자적으로 내뱉는 감정의 언어들 같은 예들로 다 환원시키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다만, 김홍중의 역사적 시각을 좀 더 인용해보자면, 87년 체제에서 유지되었던 정치적 실체로서의 적대가 사실상 형식적 민주화를 이루면서 사라지고, 그 자리에 남은 그가 문화적 스노비즘이라고 칭한 이후의 문화적 경향들이 형성하는 '문화적 적대'의 체제가 쭉 유지되면서, 이제 우리 사회가 분출하는 적대의 실체는 정작 그 안이 텅빈 기호로만 존재하는 시간이 오래 가는 듯 합니다.
혁명과 해방이 어려운 이 시대에, 이제 사람들이 자신의 열정을 쏟을 수 있는 마지막 출구는 '문화'가 되어 버렸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거기서 위안을 얻고 분노를 느낍니다. 사람들이 공분을 표출하고, 빨리 그 공분을 소모하여 공분의 대상을 쉽게 망각하는 것도 '실체'가 아닌 '문화적 가상'으로서 대상을 소비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문화적 가상'안에서 대중들이 내세우는 가장 최선의 저항은 결국 '도덕적 소비'일 것입니다. 그 안에서 '실천적 분노'가 일어날 가능성은 없습니다. '문화적 가상'안에서 실체로서의 적대로 추정되는 자들을 향한 풍자나 패러디는 위안을 주지만, 그 위안의 한계는 결국 진지한 저항적 자세를 필요로 했을 때, 사람들이 선택하는 '냉소와 무관심'일 것입니다.
'문화적 가상'안에서 나타나는 '문화적 적대'에서 우려되는 지점은 '도덕적 소비'를 통한 약자에 대한 가녀린 연민이 사회 내부에 깊숙이 들어있는 구조적 문제점들을 개인의 구제 차원으로 환원시켜, 개인을 둘러싼 모순을 지속적으로 밝혀낼 수 있는 연동된 문제들을 외면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문화적 적대'는 오늘날 현대 사회를 휘감는 가장 각광받는 논쟁의 시장입니다. 이 시장은 늘 있어 왔지만, 사람들의 불안이 갈수록 증대되는 상황에서, '스테디셀러'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 '문화적 적대'속에서, 모든 책임은 '개인'이 져야 하는 상황이 옵니다. 리처드 세넷이 <뉴 캐피탈리즘>에서 '르상티망'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였듯이, 상류 지점에 대한 모순을 알지만, 그 모순이 사회적으로 해결되지 못했을 때, 대중들은 하류 지점에 있는 자들을 향한 '원한'을 강하게 표출하게 됩니다. 사회적으로 안정된 위치에 있지 못하는 자들에게 책임을 물을 때, 우리는 '적대감'을 표출한다는 것이 우리 시대 가장 강력한 보험이라는 점을 하나의 위안거리로 삼게 됩니다.
그러한 적대감이 가중될 때, 김홍중의 경고처럼, 우리는 문화를 통해 특유의 자존감을 확인했던 인간이 아닌, 늑대처럼 으르렁거리며, 서로의 인정 투쟁에 갇힌 동물이 될 지 모릅니다. 이건 지극히 상식적인 진단 같지만, 앞으로 가중될 현상인 것 같기도 합니다. 개인은 국가로부터 개인의 욕망 억제를 요구받고, 사회가 부과하는 책임을 국가의 지도자는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이것에 저항하려 하기보다는, 생존을 위한 인내로 받아들입니다. 그 안에서 문화의 보수화는 '두 개의 영역 이데올로기'(남성의 영역, 여성의 영역이라는 전통적 구분)을 다시 선호하게 되고, 모든 사안에서 '도덕 정치의 과잉'이 발생합니다. 이 안에서 시민사회도 절대 선의 위치에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또 다른 코뮤니타스를 꿈꿔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