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에 들어오면서 내가 줄곧 고민하고 있는 문제 중 하나는 "따뜻한 사회과학이란 존재할까?"이다. 학문 간의 통합이 요청되고 있는 이 시대에, '인문학은 따뜻하다', '사회과학은 차갑다'라는 인식이 어찌 보면 우스꽝스럽기도 하지만, 평소 '사회과학을 연구하는 사람'으로 불리는 나에게 온기보다는 냉기가 사회과학과 더 가까이 있다는 것을 자주 느끼게 된다. 물론 사회과학의 냉기는 우리 사회에 분명 필요한 이론을 만들어내고, 맛깔나는 목소리를 동반하게 해준다고 생각한다. 다만, 내가 정작 사회과학을 공부하면서, 내가 속한 사회를, 내가 바라보는 사회를 비판하면서, 그 비판의 대상인 '사회'에 애정이 있는가를 늘 돌아보게 되는 요즘이다.
난 기본적으로 '애정이 있어야' 비판도 가능하다고 보는 사람이다. 나에겐 나를 때로는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여자 친구가 있다. 내가 그 친구의 사고를 존중하는 것은 그녀가 나를 비판해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가 나를 비판할 때의 그 조각들을 조금씩 모으다보면, 이상하리만치 거부할 수 없는 사람 냄새가 묻어 있다. 우리는 이른바 '평가의 시대'를 살고 있다. 커피숍 거울에 대고, 인터넷 커뮤니티에 들어가서, 국회 안에서,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가면서, 가정에서 우리의 입에 그리고 손에 오르락내리락하는 사람들의 수는 몇 명일까 나는 가끔 사람들에게 묻고 싶어진다. 나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잘 비판하고, 잘 평가하는 능력이 예전보다 훨씬 좋아졌다고 생각한다. '비판적 감수성'이라고 할까. 그런 능력들이 예전보다 나아진 것 같은 그런 느낌을 자주 받는다. 그러나, 언어가 넘쳐나고, 그 언어에 담긴 수많은 의미들이 분열되고, 또 분열되면서 우리는 오늘날 너무나 많은 상처들 또한 받으면서 산다.
대학원에 오면, 뭔가 그러한 상처들을 깨끗하게 치유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일종의 안식처라고 할까. 하지만, 아직 모르겠다. 이 곳은 정녕 '따뜻한 사회과학'을 할 수 있는 곳일까, 나는 의문 속에 갇혀 있다. 사람이 들어가야 할 학문에, 사람은 빠져 있고, 오히려 그 '학문'이란 명명의 권위에 눌려, 학문이 사람을 짓누르는 안타까운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듯하다. 사람을 챙기고 가려는 따뜻함은 보이지 않은 채, 자신의 학술적 글쓰기 안에 들어있는 비판 의식 내 언급되는 사람들은 영문도 모른채 희생된다. 그리고 그러한 희생이 더더욱 잘 될수록, 글쓰기를 수행한 연구자는 좋은 논문을 발표하겠다는 욕심에 그 희생의 고통을 지나친다.
사회에 대해 말을 하려는 노력들보다는, 그 사회를 도구로 삼아, 누구로부터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강해지고 있는 것이 내가 한국 사회 내 대학원에 속한 한 사람으로서 느끼는 '위기'라면, 이것은 정녕 과잉된 것일까. 사람의 존재를 연구하며, 사람의 절실함을 외면하지 않고, 사람의 고통과 비애를 함께 고민하고 또 다른 나아감의 연대로 지칭될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학문을 한다는 것은 정녕 어려운 것일까.
누군가 나에게 당신은 무슨 공부를 하십니까? 혹은 무슨 연구를 하세요? 혹은 무슨 전공이냐고 묻는다면,,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따뜻한 사회과학을 바라는 사회과학'을 전공하고 있습니다. " 인간을 '이용'하지 않고, '존중'하는 지적인 대화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출세와 야욕에 휩쓸려, 일시적으로 인간을 사용하고, 내팽기치는 것이 행여 글쓴이의 테크닉으로 좋은 논문으로 평가받을지라도, 그 좋은 논문을 평가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대상자는 바로 당신의 지도교수가 아니라, 당신의 연구 속에 들어있는 연구대상자, 바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은 정녕 사람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오늘 내게 던져진 영원한 숙제다. 그리고 당신과 함께 고민하고 싶은 숙제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