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시작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많이 망설였다. 내가 속해있는 곳을 '고발'해보겠다는 것이냐, 아니면 판 자체를 바꿔보겠다는 것이냐, 스스로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약 일 년 반 동안 고민하면서 내린 결정은 글을 써야겠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무엇을? 당신이 속해있는 그곳이 어디인데? 대학원이다.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요즘 사람들 입에서 "대학원이나 가 볼까?"라고 인식이 되는 그 '대학원'이 맞다. 대학원에 들어온 사람들은 알겠지만, 그런 '대학원이나'하던 자신이 대학원 특유의 장 논리에 차츰 적응해가는 것을 보면서, 그런 말을 하는 사람과 더불어 그런 말을 했던 자신도 '타자화'시킨다. 쉽게 말해서,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말아라, 대학원이 사실 들어오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데?"부터 시작해서, "막상 들어오면 죽어, 졸업을 누가 함부로 시켜주나?" 등등 다양한 반응들을 체내에 흡수하거나, 몸 밖으로 끄집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대학원을 '대학원사회'로 명명함으로써 나타나는 다양한 의미들을 고려해볼 때, 대학원은 '대학원이나 가볼까?'의 그곳이 맞고, '막상 들어와서 제대로 하면 지옥같은 곳'의 그곳도 맞다. 대학원을 거친 많은 조언자들이 그렇듯이 이 곳은 정말 '혼자놀음'에 따라 자신의 운명이 갈리는 곳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지금까지 글을 보면, 상당히 오랫동안 대학원 생활을 한 것 같지만, 미안하게도 나는 이제 일 년 반 정도 대학원 생활을 한 20대 석사과정생이다. 대학원 생활을 오래 할 수 있을 만큼 재정적인 기반도 탄탄하지 못할 뿐 더러, 이 곳에 살면서 나에게 다가오는 이상하리만치 불쾌한 자극들이 이 곳을 탈출하자고 유도하고 있다. 근데 내 심경이 좀 복잡하다. 뭔가 이 곳의 어두운 기운들을 다 '까발리고' 가고 싶다. 이건 비단 내가 속한 대학원 한 곳 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 사회 내 속한 대학원 전체를 한 번 '까발리고'싶은 생각으로 가득찼다. 그러기위해선 탈출과 동시에 오랜 기거도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알려면, 그리고 더 많이 이야기를 나누려면 나는 '내부고발자'의 위치에 있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인생을 살면서 우리가 자주 목격하는 질문의 유형이 있다. 일례로 영화나 드라마에서 자주 나오는 대사, "이봐 인생은 두 가지 타입의 사람이 있지"같은 것 말이다. 그런 일정한 질문의 유형 중에 또 하나는 우리가 아주 어릴 적부터 들어온, 그리고 주입받는 "자네는 인생을 살면서 무엇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나?"와 같은 것이 있다. 나는 살면서 전자의 질문보다는 후자 쪽을 스스로 많이 고민해 봤다. 이제 20대 후반을 바라보는 나이에서, 인생을 다 산 사람처럼 무엇을 읊조린다는 것이 많은 인생의 선배들에게 죄송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답을 공개하자면, 나는 '역사'와 '교육'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교육'은 요즘 내가 가장 걱정하는 부분이다. 이것은 사실 한국 사회 전체가 어찌할 수 없는 복잡다단한 기운에 둘러싸여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교육은 국가의 문제, 개인의 문제이며, 이것을 좀 더 심화시키자면, '문화'의 문제이다. 교육이 문화라는 것과 연결될 때, 우리나라의 교육 문화는 단순히 스승과 제자의 관계, 공교육과 사교육과 같은 '교육 현실'의 차원을 넘어,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것 같지만, 가장 자리가 잡혀있지 않은 대목이다.
나는 참고로 교육학을 전공한 사람은 아니다. 나는 커뮤니케이션학이라고 하는, 많은 사람들이 신문방송학이라고 알고 있는 학과에 속해 공부하고 있다. 나의 전공을 밝히는 이유는, 우리나라의 '교육문화'에 대한 성찰을 위해서다. 내가 속한 커뮤니케이션학은 특히 한국 사회에서 가장 깊이가 없는 학문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이 학문은 오늘날 스스로 신자유주의의 노예가 되길 바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느새 이 학과는 성찰할 수 있는 지식인을 키워낼 수 있는 지적 토양의 장이 되기보다는, 사회에서 한 번 뜰 수 있는 짭짤한 '기능인'만을 키우는 학과로 전락하고 있다. 물론 사회를 비판하는 것만이 커뮤니케이션학의 최종 목적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공부를 하는 사람이라면, 나는 '사회'와 결부되어 있어야 하며, 사회에 대한 관심을 '도구화된 목적'의 차원을 넘어선 무엇으로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누가? 대학원생들이, 그리고 학부생들이.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 사실 나는 이것이 교수들만의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연구에 '도구화'되는 제자들, 그 과정 속에서 '벌벌 기어야'하는 제자들의 입장을 나는 대학원에 들어가기전에 많이 들어왔고, 각 종 기사로 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 문제가 대학원생들의 몫도 있다고 이제 생각한다. '요즘 대학원생'들이란 표현이 거슬릴 수 있겠지만, 나는 과감히 쓰겠다. '요즘 대학원생들' 의 문제는 사실 대학 사회 내 다양한 문제들에 묻혀, 그리 적극적으로 언급되지 않았지만, 분명 심각하고 중요하게 고민해 봐야 할 측면이다.
나는 바로 그 측면을 앞으로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어떤 학문의 외피로 인한 현학적 문체를 떨구어내고, 최대한 거칠게 쓸 것이다. 나는 사실 이 '대학원'사회의 어두움에 대한 성찰이 한국사회에서 적극적으로 안 이루어지는 것에 대해 선배연구자를 비롯하여 수많은 교수들을 질타하고 싶다. 하지만 그러한 질문 속에 나 또한 얽혀 있으며, 나는 이러한 이중적 위치 속에서 반성의 주체로서, 대안을 모색할 수 있는 주체로서 성장하고 싶은 마음 또한 숨길 수 없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꺼낼 수 있던 것은 대학교 4학년 때부터 알았던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 때문이었다. 그의 사회학은 소위 '재귀 사회학'으로 불리면서, 그는 학자 자신이 연구를 할 때, 자신을 둘러싼 여건들을 성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고 강조한 사람이었다. 피에르 부르디외의 저작들 중 <자기 분석에 대한 초고>라는 책이 한 권 있다. 나는 지난 겨울에 그 책을 읽으면서, 나를 성찰할 수 있는 '기록'의 순간이 필요함을 계속 재촉했고, 그 결심을 오늘에서야 내렸다.
성찰할 수 있는 인생 속 몇 번의 시기 가운데, 나는 지성의 최고점을 찍을 수 있는 데 사람들이 현실적으로 가장 고려하고 있는 '대학원'이라는 공간이 사실은 얼마나 무기력하고, 혹은 얼마나 수동적이며, 얼마나 기능적인지를 말하고 싶다. 그러나, 이것은 희망을 위한 자기 성찰의 측면으로 이해되었으면 한다. 나는 기본적으로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러한 긍정을 위해선 (요즘 들어 드는 생각이지만) 계속 쓴 물을 단 맛이 느껴질 정도로 마셔야 할 것 같은 자세가 필요함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