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야가 갈수록 이상해지고 있다. 처음 이 프로그램은 가깝고도 막상 먼, 친하면서도 실제로는 잘 모르는 ‘장모와 사위’ 라는 공식적 사회적 관계에서 인간적 평등적 관계로 변화되는 과정을 리얼하게 보여주자는 컨셉이었던 것 같다.

 

가족의 일원으로 함께 있을 땐 꽤 친근했던 장모와 사위가 막상 일대일로 남았을 땐 상당히 어색해 보는 이까지 불편할 정도였다. 그래서 그들이 힘들지만 여러 사건을 일으키며 투박하고 진실 되게 한 걸음 한 걸음 서로를 알아가며 접근해 가는 과정은 남녀 간 사랑이야기처럼 짜릿한 맛은 없었지만 은근하면서 꽤 잔잔한 재미가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병이 되었다. 이미 일어날 수 있는 해프닝은 모두 소진되었고 처음 배우들이 아닌지라 낯설고 어색해하던 장모와 사위들은 이제 전문 연예인 뺨치는 연기력과 예능감을 뽐내고 있다.

리얼을 벗어나 어느 순간부터 그들은 어떻게 해야 시청자들이 재미있어 하고 시청률이 올라가는지 꿰뚫으며 자연스런 연출을 알아서 해낸다.

 

물론 없는 일을 억지로 만들어내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도 모르게 전에 시청자들이 즐거워했던 반복적인 말과 사건들을 연출하고 있는 만능엔터테이너 장모와 사위를 보노라면 이제 그만 이 프로그램도 끝내는 것이 맞겠다는 생각을 한다.

 

배우가 아니어도 기회와 경험과 시간만 주어진다면 누구나 연예인이 될 것처럼 보이는 이 프로그램의 목적은 초기에 이미 충분히 달성되었으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신년 초부터 난데없이 심야영화를 봤다. 연휴에 일이 있어서 어딜 나간 지 못한 것이 억울하다는 와이프의 볼멘 제안에 내키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동의.

 

늦은 시간이라 상영시간에 맞춰 선택한 영화는 <내부자들> 이다. 2015년 개봉작인데 감독 판으로 다시 올리며 흥행을 하고 있단다. 얼마 전 영화를 먼저 보고 온 동료 직원이 다소 민망한 장면이 있다며 너스레를 떤 기억이 났다. 그 때는 무심코 넘겼는데 막상 보니 고개가 끄덕 끄덕^^::

 

주제는 명확하다. 우리나라 정계, 재계, 언론의 3대 권력카르텔의 추악한 모습을 리얼하게 보여주자는 것. 우리나라 정치판을 보건데 내용은 새삼스러울 것이 없음에도 막상 화면으로 생생하게 보고 있으려니 속이 영 좋질 않았다.

 

“설마 저 정도는 아니겠지.”와 “실제로는 저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거야.”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본 영화는 장장 3시간이라는 긴 러닝타임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탄탄한 구성과 흡입력을 갖추고 있었다.

 

특히, 나쁜 놈에서 좋은 놈으로 변신하며 정치깡패 역을 훌륭히 소화해낸 이병헌의 연기는 악역의 이미지로 그를 낙인찍는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잘 어울렸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영화에서 자주 느끼는 것이지만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내용이 많아 다소 식상한 느낌 역시 지울 수 없었다. 부패한 국회의원, 비자금을 조성하는 재벌, 정치권력과 한통속인 보수언론, 까라면 까라는 한 마디로 정의되는 권력의 시녀로서 검찰 등 어지간한 드라마에서도 자주 보아왔던 소재들이다. 단지 그것들을 일원화시켜 통째로 보여주었을 뿐이다.

 

특히, 성질 급한 관객이라면 못 볼 가능성이 많은 엔딩자막 삽입 장면에서 논설주간 이강희(백윤식 역)가 감옥에서 읊조리는 나레이션은 이 영화의 핵심을 말한다. 냄비의 속성을 지닌 우리나라 국민들을 조롱하며, 밝혀진 진실은 곧 묻히고 다시 예전의 권력체계가 다시 복원될 것이라는 그의 말속에서 감독은 똑똑한 관객을 무시하고 다시 한 번 직설적으로 이 영화의 주제를 알려주려 애쓴다. 3시간 동안이나 봤음에도 멍청한 국민들은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영화로만 기억하고 또 잊어버릴 것이 걱정스러웠나 보다.

 

쓸데없이 기억력이 좋은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국민들이 앓고 있는 <정치에 대한 반복성 기억장애>와 예수님보다 넓은 오지랖을 자랑하는 <정치인에 대한 반복적 용서>가 이 모든 참상을 영화 속 픽션으로 축소해버릴 것이 뻔하지 않은가?

 

탄탄한 구성과 연출력, 배우들의 힘 있는 연기에 힘입어 3시간을 1시간처럼 재미있게는 봤지만 왠지 석연찮은 생각들이 머리를 어지럽힌다. 이 권력의 부조리를 전 국민이 다 알고 있음에도 누구도 영화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 “거긴 원래 그래”, “우리나라 정치는 절대로 변하지 않아.” 이 철저하게 학습된 무기력과 무관심의 효력은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교과서적인 말은 끊임없이 죄를 짓고 상습적으로 회개와 참회를 규칙적으로 하는 사람들이 들고 다니는 성경, 불경 속 계율만큼이나 공허하지만, 주권이 결코 박제된 미이라가 아님을 역사는 가끔씩 보여준 적이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그러나 평생 몇 번 주어지지 않는 투표로서의 심판 기간은 이 모든 것을 담기엔 너무도 짧다.

 

추신 : 쓰고 난 뒤 다시 드는 기분나쁜 생각들

 

7~80년대였다면 감히 제작도 못했을 영화.

90년대라면 검열로 난도질당해 줄거리 파악이 힘들었을지도 모를 영화.

직접적으로 정치권력을 이렇게 조롱해도 어떤 외압도 받지 않고 버젓이 개봉했다면 그것 자체로 우리 사회가 그만큼 민주화되었다는 반증일까? 그래서 위안을 삼아도 되는 걸까?

2000년 무렵만 됐어도 그렇게 생각하고 마음이 편했을 건데 지금 이 불편함의 이유는 뭘까?

 

이런 수준의 영화정도로는 관객 즉 국민이 불순한 생각을 감히 하지 못할 것이며.

설사 생각한다 한들 픽션으로 그러진 선을 넘지 않을 것이며.

설사 선을 넘는다 한들 무에 그리 대수냐? 하는 오만한 생각을 누군가 하고 있지 않을까?

 

아니 어쩌면 우리는 보이지 않는 선을 그어 놓고 서로 넘지 말자는 침묵의 카르텔을 스스로 열심히 지키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가정의 평화를 위하여 내 삶의 안위를 위하여 그리고..............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saint236 2016-01-08 2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는 내내 불편했습니다. 민망한 내용보다는 그 일들이 벌어지는 카르텔을 보면서요. 님이 말씀하신대로 이 영화가 영화로 끝날지, 아니면 현실로 이어질지는 아직은 모르겠네요. 다만 전자일 가능성이 크다라는 생각에 속상하기는 합니다.

책을베고자는남자 2016-01-09 1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계속 차곡차곡 쌓다 보면 언젠가는(?) 뭔가(?)가 일어날 지도 모르죠. 카르텔의 정해진 균형이 깨지는 날이 반드시 오리라 믿습니다. 그건 과거의 역사가 계속 증명하고 있으니까요.
 

6.25, 6.25사변, 6.25전쟁, 한국동란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며 국제적으로는 한국 전쟁이라 불리는 이 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소련의 지원으로 군사력을 키운 북한이 38˚선 전역에서 남침하면서 시작되었고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였다.

국군은 북한의 앞선 병력과 무기에 밀려 한 달 만에 낙동강 부근까지 후퇴하였고 미국 주도로 유엔 안전 보상 이사회가 열려 파병된 유엔군의 9월 15일 인천 상륙 작전의 성공으로 서울을 되찾고 압록강까지 진격하였다. 하지만 북한의 요청으로 중국군이 개입하자 다시 서울을 빼앗겼으며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치열한 소모전이 계속되었다. 

3년 동안의 전쟁으로 인명 피해가 약 450만 명에 달하고, 남한의 43%의 산업 시설과 33%의 주택이 파괴되었다. 남북한은 휴전 상태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6.25전쟁은 우리 민족에게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상처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골을 남기며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비극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역사적으로는 비극이지만 문화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전쟁은 훌륭한 소재다. 세계1,2차 대전을 무대로 쏟아져 나온 주옥같은 명작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이데올로기 전쟁을 예술로 승화시키기에는 넘어야 할 장벽이 너무 크고 높았다. 반공이 국시인 나라에서 국가보안법의 시퍼런 서슬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설사 용기를 낸다 한 들 작품이 세상에 나올 가능성은 거의 없었으니 두고두고 안타까운 일이다.

수준 높은 작품은 고사하고 오히려 이를 이용한 단순한 반공 영화들이 대중성을 확보하고 독재정권의 안보교육 수단이 되었으니 어릴 적 본 대부분의 영화들이 그러했다.    

그래서 어린 시절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지키려는 뜨거운 조국애를 가진 정의롭고 용감무쌍한 국군의‘암행어서 출두’식 무공에 속수무책으로 쓰러지는 공산당을 통쾌한 갈채로 환호하곤 했다. 내게 북한군은 총을 맞으면 비명을 지르고 낙엽처럼 쓰러지는 단역배우였다. 그들에게 인간으로서 고뇌는 사족인 것이다. 든든한 형님 같고 자애로운 아버지 같았던 잘생기고 용감한 국군 아저씨들이 권위에 약하고 자기합리화에 능한 나약하고 불쌍한 전쟁의 희생자에 불과함을 안 것은 먼 훗날이었다.    

이러한 배경을 꿈에서도 알 리가 없는 아이들에게 1950년대의 역사가 얼마나 피부에 와 닿겠는가? 나 역시 말로, 글로, 영상으로만 접했던 일인데 말이다. 하지만 투철한 반공 교육을 받고 자란 구세대는 나중에 진실을 접했을 때 그때의 비극을 짐작으로나마 느낄 감성적 여지는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역사책 속의 빛바랜 과거가 아닌, 아직도 끝나지 않은 비극임을 보여주고 싶어서, 보여주기에 이 영화만큼 좋은 자료는 없을 것 같기에 <태극기 휘날리며>는 각별하며 소중하다.   

우애가 돈독하고 행복했던 평범한 한 형제가 전쟁에 휘말리며 형은 동생을 살리기 위해 전쟁광이 되어가고 동생은 그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며 차츰 어른이 되어 간다는 줄거리는 비록 이데올로기를 정면으로 비판하진 않지만 전쟁과 가족은 결코 양립할 수 없다는 당연한 진리를 감성적으로 파고들며 설파 한다.  

미친 듯 달려드는 전쟁의 피바람 속에서도 결코 지울 수 없는 뜨거운 가족애와 형제애는 6.25라는 거대한 민족의 비극을 더욱 선명하게 대비시키며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반전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저들은 가해자요 우리는 피해자라는 이분법을 뛰어 넘어 가해자가 피해자고 피해자가 가해자라는 등식을 보여 주려 애쓴다. 오락용을 제외한 전쟁영화의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모두가 전쟁의 피해자가 되는 걸로 첨예한 이데올로기를 피해 가며 작품성과 대중성을 확보한 것이다.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에 말려 든 수많은 개인들의 운명이란 얼마나 가녀린 것인가?

액션과 세트가 마치 포화의 한복판에 서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며 선을 넘지 않는 이념적 갈등과 장동건과 원빈의 열연이 보태져 보는 내내 집중하게 만든 영화.

2004년 개봉 당시 사상이나 경제적 문제로 다른 장르에 비해 제대로 된 작품이 나오기 힘들었던 스펙터클 전쟁영화를 우리도 이제 만들 수 있구나 하며 감탄했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무려 10년이나 지난 작품이건만 다시 봐도 썩 괜찮은 영화다. 배우의 절정기를 맞고 있던 장동건의 젊은 얼굴과 원빈의 푸릇푸릇한 얼굴을 다시 보는 것도 나름 별미다.    

한국 블록버스터의 신기원을 기록한 <쉬리>로 남북 간 불행한 역사의 아픔을 다룬 강제규 감독은 다시 이 영화로 1,000만이 넘는 관객 수를 기록하며 대성공을 이룸으로서 분단이 갖는 의미를 감성적으로 잘 표현할 수 있다면, 이데올로기 문제가 터부시 되는 한계를 극복하고 예술성 뿐만 아니라 대중에게도 충분히 어필하며 상업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좋은 선례를 남겼다는 점에서 한국 영화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다만 전쟁과 이데올로기의 참된 모습이 가려질까 걱정이 될 만큼 재미가 있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일 것이다. 오락성은 늘 진정성에 앞서니까 말이다. 그래서 아들이 이 영화를 너무 재미있게 봤다고 해서 걱정이 된다. 전쟁은 결코 재미있는 일이 아니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매년 한 해를 마무리한다고 덮고 내년 한 해 열심히 해보자고 뻥치기만 한지 수년이다.

인생이 어떻게 연도 별로 정리가 되겠는가? 그럼에도 연말과 새해엔 꼭 다짐을 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 안하는 것보단 낫겠다.

 

성찰엔 늘 반성을 전제로 한다. 잘못 해야 고칠 것 아닌가? 자기반성의 시간을 형식적으로나마 가진 다음에야 새로운 일을 다짐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그래서 반성한다.

직장에서, 가족에게, 부모에게, 나를 아는 이에게 지난 1년 저질렀던 수많은 잘못을 한꺼번에 반성한다.

내년 한 해는 일괄적으로 위 분들에게 1% 더 잘하도록 노력하겠다.

설마 1%정도는 하겠지?^^

 

금년 한 해 내게 알라딘 서재가 가진 의미는 작년과 분명 다르다. 가입은 2011년에 했지만 관심을 가지고 제대로 읽고 쓰기 시작한 건 금년부터 이기 때문이다. 일상에 쫓기듯 산 나날들이었지만 마음 한구석에 “늘 글 한줄 올려야 되는데”하는 생각을 달고 살았다. 제법 잘 썼다고 자화자찬하고 싶은 글도 있지만 대부분의 글은 이런 수준의 글을 과연 올리는 것이 맞는가? 고민하면서도 귀찮아서 성의 없이 올렸음을 고백해본다.

 

질보다 양에 집착하는 내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일단 많이 쓰는 것이 기본이라며 궁색한 합리화도 많이 했다. 하지만 일 년이 지난 지금 알라딘서재에 꿋꿋하게 새겨져 있는 많은 내 글들을 보노라면 못난 자식이라도 다 내 귀한 내 새끼들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한다.

 

비록 원하는 만큼 발전했는지는 자신하기 힘들지만 확실한 건 작년 보다 많이 읽었고, 많이 썼다는 것이다. 내년에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쓸 것이다. 이것만 해도 난 발전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위안하고 싶다. 하고 있다는 것은, 그것도 계속 하고 있다는 것은 정말 중요한 것이라고.

 

마지막으로 알라딘 서재를 사랑하시는 모든 분들께

지난 1년 동안 보잘 것 없는 제 글들을 읽으시느라 귀한 시간을 할애해주신 모든 분들께 정말 진심으로 감사 인사드립니다.

누군가 제 글을 읽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기쁘기도 하지만 그보다 몇 배는 부담이 되는 것임을 다들 공감하시리라 믿습니다.

가볍게 눌러 주시는‘좋아요’와 관심어린 댓글 하나에도 마치 내가 글을 잘 써서 그런 것처럼 착각하며 으쓱했던 자신이 부끄럽기도 합니다.

 

내년 한 해도 열심히 읽고, 열심히 쓰며, 열심히 생각하여 금년보다 1% 더 잘했다고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다들 1년 동안 열심히 사시느라 고생하셨으니 잊지 말고 소중한 자신에게도 고생했다고 토닥여주시고 칭찬해주시는 시간을 꼭 가지시기 바랍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내년에 하시는 일 다 잘되시길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2016년 마지막 날 종무식을 앞두고...


댓글(1)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초딩 2015-12-31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해 복 많이 받으소서~
 

‘마리아 수녀원’에 대한 방송을 봤다. 주로 고아나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들을 돌보는 게 주요 업무인 수녀원이다.

사회에 버림받고 평생 그늘진 삶을 살 운명이었던 아이들은 새로운 어머니들을 만나 행복한 삶을 살아갈 기회를 얻게 된다. 여러 명의 아이들에게 고루 사랑과 관심을 주기 위해 고민하고, 그렇게 키운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어머니를 찾아와 즐거운 운동회를 하며. 비록 고아였지만 그 수녀원에서 자랐기에 자신은 행운아였다고 회고하는 모습, 어머니와 똑 같은 삶을 살고자 다시 수녀원으로 돌아오는 신입 수녀들의 당찬 포부들..

이제 늙어서 더 이상 아이를 키울 힘이 없기에 물러나 청소 같은 허드렛일을 한다며 웃으시는 수녀님. 사랑 만 남기고 다 가져가시라고 기도하는 수녀님.

“이렇게 사시는 것이 행복하셨느냐”는 PD의 우문에 해맑게 웃으며“내 얼굴이 지금 행복해보이지 않나요?”하는 늙은 수녀님의 현답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그늘진 곳에서 사랑을 펼치고 있는 참된 종교인에 대한 밝은 면을 잔잔하게 보여준다.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행하는 이러한 선행들을 볼 때마다 나는 늘 궁금했다. 선행을 행하는 사람들은 종교를 가지지 않아도 원래 착하게 살 사람이다. 다만 그들이 종교를 가졌기에 부각되는 것 뿐이다. 종교는 인성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종교를 가지지 않아도 착하게 사는 사람이 있는 반면 신의 얼굴에 똥칠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저들에게 종교란 무엇이고 신의 존재는 어떤 의미일까? 천성이 착해서 선행을 하는 것일까? 아니면 종교로 인해 선행을 하는 것일까? 내 의문은 풀어질 길이 없다.

 

평평한 이 세상을 중심으로 해와 달과 별들이 돌고, 비가 내리지 않으면 기우제를 지내고, 번개와 우레를 신의 노여움으로 받아들였던 고대에 탄생한 종교를 우주 끝까지 파헤치려 애쓰는 첨단 과학 시대에도 똑같이 적용하는 것이 과연 맞는 일인가에 대한 의문은 별도로 하자.

 

학문적인 고상한 정의와 상관없이 나는 종교를 우리가 갖고 있다가 만에 하나 잃어버릴 수도 있고, 시간이 지나 잊어버릴 수도 있는, 인간이 살아가는데 가장 소중한 진리나 규범들을 외부의 안전한 곳에 영구히 보관하는‘은행 금고’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우리가 살다가 필요하면 얼른 달려가 금고를 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보면 되는 것.

아무리 사본이 여러 번 변해도 변치 않은 원본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곳.

 

다만 우리를 둘러싼 환경의 엄청난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종교가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생각이 드는 걸 보면 과학과 종교는 그 쓰임새가 다른 것이 분명하다. 종교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는 신의 존재 유무를 과학의 잣대로 따지는 것 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을 터, 살아가는데 위안이 된다면 족할 것이다. 종교의 가장 좋은 점을 소박하게 말한다면 말이다.

 

그렇다면 아이들을 돌보는 수녀님들 같은 사람들이야말로 초기 종교의 본질에 가장 근접한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일을 서슴없이 저지를 수 있는 명분도 종교에서 나오고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일을 행하도록 북돋는 힘도 역시 종교에서 나오는 걸 보면서 금고에 넣어 둔 원본과 변질 된 가짜의 차이를 생각해 본다.

 

시간이 흐르면서 금고 안에 안전하게 넣어 둔 원본의 존재는 잊어버리고 금고 자체를 신성시하며 숭배하는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은 아득한 옛날 하늘을 쳐다보며 자연의 변화에 벌벌 떨었던 원시인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