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의 심리학 - 누가 권력을 쥐고, 권력은 우리를 어떻게 바꾸는가
브라이언 클라스 지음, 서종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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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하다 아파트 게시판에 붙은 공고문을 보게 된다.

입주자 대표와 각 동 대표를 뽑는 선거 공고다.

엘리베이터 올라가는 동안 힐끗 한 번 보고 잊어 버렸다.

 

얼마 뒤 다시 공고가 붙었다.

입후보자의 경력이나 출마의 변을 써 놓았다.

후보자의 수는 많지 않았다. 대개 한두 명이다.

경쟁이 그다지 치열한 것 같지는 않다.

 

그들의 경력에 특별한 점은 없어 보인다.

전기기술자, 보험설계사, 회사원, 건축가, 사업가 등 평범하다.

심지어(?) 고졸도 보인다. 이런 일에 반드시 대졸 학력이 

필요하다는 근거는 없다.

다만 1,200세대가 넘는 이 거대한 아파트를 대표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대학을 나온 사람이어야 한다는 편견 가득한 생각도 스쳐 지나간다.

 

다시 얼마 후 당선 공고가 뜬다. 그 사람들이 그대로 당선되었다.

전직 사업가가 입주자 대표가 되었다.

난 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관심도 없었으니 투표도 하지 않았다.

아니 입주자가 투표를 하는 직접 선거인지 아니면 동 대표를 먼저 뽑고

그들 중 입주자대표를 호선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냥 어느 날 그들은 나와 입주자들의 무관심 속에서

실거래가로 약 7,000억의 자산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매달 약 5억원에 달하는 관리비를 5,000여명의 입주자가 납부하고 있는

대단지 아파트의 관리사무소를 통제하고 각종 자치 규약을 만들며,

시설 가치와 입주자의 복지 수준을 올리고 내릴 수 있는

주요 과정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리에 앉게 된다.

단지 그들이 하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아파트 거주자 중에는 아파트 관리에 필요한

행정, 회계, 법률 전문가도 있을 것이고

건물 관리에 필수적인 건축, 전기 설비 전문가도 많을 것이고

교수, 박사, 회사 간부 아니 전직 대기업 CEO도 있을 수 있다.


그런데 결과는 이러한 전문가들과 전혀 경쟁하지 않은

입주자 중 단 1%에 불과한 소수의 무리가 자리를 차지한다.

그들이 그들을 제외한 절대 다수의 아파트 거주자와 다른 점은 딱 하나

아파트 입주자를 위해 열심히 봉사하겠다는 마음과

그 마음을 현실에 구현하겠다는 강한 실천 의지다.

당연히 지금은 그들의 마음과 의지의 진위를 확인할 방법은 없다.

 

과연 그들이 순수한 봉사 정신 만으로 나왔을까?

그렇다면 아파트마다 왜 그리 시끄러운 일이 많을까?

입주자 대표하고 누구하고 싸움이 붙어서 서로 고소하고 난리라더라.

누구는 업자한테 돈 먹고 사업을 줬다더라...등등

 

물론 지금은 과거에 비해 아파트 관리가 많이 개선되었다.

아파트 자치규약과 회계 준칙에 따라 각종 사업에

공개입찰을 하는 것이 원칙이고

중요한 결정은 입주자 총회 같은 데에서 민주적 절차에 따라

결정되고 있는 줄 안다.

 

하지만 그들을 견제하고 감시해야 할 주민의 절대 다수가

그들이 뭘 하고 뭘 결정하는지 관심이 없는 현실에서

밀실에서 어떠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어찌 알 것이며

그들의 청렴과 결백을 어떻게 보장받을 수 있겠는가?

 

공고문을 보면서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잘 뽑아야 하는데.....내가 하면 잘할 것 같은데...

하지만 난 먹고 살기 바쁘고, 감투에는 관심도 없고, 또 귀찮기도 하고

나 아니어도 할 사람 많은데 굳이 내가 나설 이유도 없고,

또 괜히 하다가 이상한 사람들 만나면 성가신 송사에 휘말릴 수도 있고.....

 

그렇게 똑똑하고 능력이 있는 다수의 우리는

지극히 평범하고 심지어 나보다 못할 수도 있는 사람들에게

내가 가지고 있는 소중한 재산을 관리할 수 있는

권한을 아주 쉽게 내어 주고 만다.

 

그리고 이 상황은 동문회, 산악회, 동호회 등 큰 이권이 없는 사적 모임부터

마을 공동체, 직장, 정치 단체, 국가 기관까지 그대로 이어진다.

 

규모만 다를 뿐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권력은 늘 탐한 자에게만 돌아가고 그들은 우리의 무관심을 발판 삼아

별다른 경쟁 없이 조직의 장이 되어 시스템을 장악하고 오염시키며

부정부패를 일삼고 아랫사람을 마음껏 지배한다.

 

결국 그들의 정체를 한참 뒤늦게서야 알게 된 우리는

그들을 욕하며 끌어 내리려 하지만 이미 공고하게 자리를 잡은 그들은

그 자리에 올라간 것처럼 쉽게 내려 오지 않는다.

 

온갖 희생을 치르고서야 겨우 바로 잡았지만 다시 과거를 되풀이한다.

개혁을 부르짖고 나온 후보가 다시 똑같은 전철을 밟고 있는 걸

수없이 반복해서 보게 된다. 역사는 늘 그러했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갖게 된다.

 

첫째, 더 악한 사람이 권력을 가지게 되어 있는가?

둘째, 권력은 사람을 나쁘게 만드는가?

셋째, 왜 우리는 우리를 통제할 권리가 전혀 없어 보이는 사람이

         우리를 통제하도록 놔두는가?

넷째, 부패하지 않을 사람에게 권력을 주고 그 권력을 공정하게

         행사할 수 있게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대충 답은 이러하다.

 

첫째, 부패하는 사람들은 권력에 더 이끌린다.

이들은 대개 권력을 얻는데 더 능하다.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따지지 않는 마키아벨리즘

세상을 자신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나르시시즘

타인을 자신의 목적에 대한 도구로 생각하는 사이코패스

 

지도자로서 가장 적합하지 않은 이러한 세 종류의 사람들이

남을 지배하려는 욕구가 강하고 실제로 성취할 가능성도

높다는 것이 비극의 시작이다.

 

평범한 사람들은 별로 갖고 있지 않은

이러한 특성들을 가진 소수의 사람이 겉으로 보기엔

오히려 더 진취적이고 능력이 있어 보이고

심지어 매력적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둘째, 권력자는 권한을 행사하는 과정에서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과대망상에 사로잡히기 쉽다.

흔히 하는 말로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것이다.

 

권력은 심지어 사람 내부의 화학적 분비까지 바꾼다고 한다.

개혁을 부르짖었던 사람이 자리에 앉은 뒤 독재자로 변질된 수많은 사례를

우리는 역사에서 쉽게 만날 수 있다.

권력은 필연적으로 부패하며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유명한 말은

상당 부분 진실이다.

 

여기에 나쁜 시스템은 날개를 달아 준다. 심지어 좋은 시스템도 망쳐 놓기 일쑤다나쁜 지도자를 법과 제도로 제어하는 것도 쉽지 않다는 걸 

역시 수많은 사례가 알려 주고 있다.


셋째, 우리는 석기시대적 뇌와 관련된 비이성적 이유로 이들에게 끌린다.

사냥을 잘해서 우리를 배불리 먹게 해줄 것 같은 사람

싸움을 잘해서 우리를 안전하게 보호해 줄 수 있을 것 같은 사람

현대로 바꾸면 잘생긴 사람, 말을 잘하는 사람, 카리스마가 넘치는 사람,

쇼맨십이 탁월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지도자를 뽑는 것을 좋아하는 배우나 짝을 선택하는 것과 혼동하는 경향이 있다이성과 지성으로 세밀하게 따지는 대신 그럴싸한 이미지의 

포장에 잘 넘어간다.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 막상 손은 비이성적 호감도에 현혹되곤 한다.

 

넷째, 그러면 이것을 막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나?

원인에 대한 분석은 명확하고 탁월하지만 그에 대한 해결은 어렵고 모호하기 일쑤다.

사람을 속이는데 우리보다 한 수 위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이코패스를 우리가 어찌 쉽게 알겠는가?

 

그렇다고 그러한 사람들이 내 삶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도록

놔두는 것은 너무나 억울한 일이니 두 눈을 똑바로 뜨고

항상 의심의 눈초리로 살펴보는 수밖에 없다.

 

처음부터 가장 훌륭한 사람을 뽑는 시스템이 이상적이지만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현실에서 그런 이상을 구현하기란 쉽지 않다.

 

어쩌면 현대 민주주의는 뽑혀서는 안 되는 최악의 사람을 최대한 거르거나

아니면 불가피하게 지도자가 되었더라도 최소한의 희생으로

시스템을 유지하도록 하는 현실적인 방향 외 더 나은 선택지가 없다는 게

한계일 수 있다.

 

어찌 되었든 오랜 시간 동안 민주주의는 각종 법과 제도를 만들어

권력을 감시하고 제어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물론 독재자들은 헌법과 삼권분립, 국민의 주권을

아주 쉽게 종이처럼 구겨 내팽개치곤 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을 쫓아낸 명분도 헌법이고 국민의 주권이고 자유였다.

 

지도자가 시스템을 제멋대로 운영하고 있다면

겉모습이나 말과 상관없이 그는 이미 독재자다.

잘못된 지도자를 통제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잘 작동되는지 감시하는 마지막 보루는 어쩔 수 없이 그들을 뽑은

국민의 몫이 될 수밖에 없다. 원인자 부담, 결자해지다.

 

석기시대처럼 가족 단위의 무리가 사냥과 채집으로

생을 영위하던 시대에는 지도자가 별로 할 일이 없었다.

그러나 인류의 문명이 시작되면서 집단으로 모여 살게 되었고

집단의 질서를 효율적으로 유지할 대규모의 관료조직이 필요해졌고

당연히 그 조직을 지휘할 강력한 리더의 존재가 필수가 되어 버렸다.

 

그런데 정작 리더가 꼭 되어야 할 착하고 능력 있는 사람들은

정작 권력에 관심이 없고 절대 지도자가 되어서는 안 되는

인간들이 쉽게 권력을 얻는 아니러니는

문명의 역사가 이어지는 동안 꾸준히 그리고

변함없이 존재하는 딜레마이기도 하다.

 

다수의 착하면서 권력의지가 없는 국민은 어쩔 수 없이

민주주의 성패의 관건인 소수의 능력도 없고 착하지도 않으면서 권력욕만 엄청난 후보자들을 어떻게 가려내고, 솎아 내고, 이미 늦었다면 쫓아낼 것인지를  고민해야 할 의무를 원치 않아도 떠안고 있는 것이다.

 

어느 북유럽의 지방의원이 우리나라에 출장 오면서 받은 출장비를

막상 쓸 일이 없자 귀국해서 그대로 반납하는 장면을 TV에서 본 적이 있다.

그 의원이 그렇게 한 것은 그 사람이 착해서 그런 게 아닐 것이다.

시스템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지도자가 법과 질서, 시스템에 따라 행동하는지를 늘 감시하고

그래서 따르지 않은 죄에 대해 확실히 책임질 수 있도록 해서

지도자 스스로 늘 감시받고 있다는 느낌을 명확하게 주지시키는 것

 

선하며 능력이 있지만 권력의지가 부족한 사람이

지도자를 꿈꾸고 다가설 수 있는 다양한 유인책과 선출 방법을 모색하는 것

결국 늘 지배받고 있는 우리 다수의 몫이다.


우리의 희망과 선한 의도를 늘 한결같이 배신하는

소수의 그들을 우리 삶에서 제거할 수 있고 없고는

다시 한번 강조하건데,


그들을 뽑고 지배를 받는 우리의 관심과 실천 외 뾰족한 해결책이 없다

그들은 늘 우리의 게으른 무관심의 약점을 파고 들 궁리만 하고 있다는 걸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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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運命)이란 무엇이고 바꿀 수 있는 것인가?

()이란 내가 사는 세상이고 환경이고 바깥이고

()이란 나 자신이며 내부며 능력과 쓰임새의 크기와 범위이다.

 

기본적으로 운명이란 타고난 것이다.

내가 태어난 세상도 내 부모도 내가 결정한 것이 아니고

내가 잘하고 못하는 것도, 내 외모도 성격도 다 내가 정한 것이 아니다.

 

운이란 흐름이고 움직임이며 세력의 강약이며 리듬이며

나를 포함한 세상이 가는 길이기에 접근하고 통제하기 어렵지만

명이란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과 자질이며 성정이기에

운보다는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이 상대적으로 더 크다.

 

운은 유동적이면서 고정적이고 정해진 길이지만 

다른 길의 가능성이 열려 있고

명은 고정적이지만 자신의 의지에 따라 변화가 가능하다.

결국 운명이란 정()과 미정(未定)의 가능성을 다 품고 있다.


힘의 크기로 명은 무조건까지는 아니더라도 대부분 운을 따를 수밖에 없다.

명은 운을 거부할 수 있지만 작은 명이 큰 운을 움직이려면

그만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어야 하며 결과에 대한 희생과 책임이 있다.

명에게 운이란 목줄을 채운 호랑이와 같은 것이다.

 

호랑이는 결코 길들일 수 없는 맹수기에

먹이를 주고 잘 달래서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갈 수 있지만

잘못하면 목줄을 끊고 나를 잡아먹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처럼 운은 명을 쉽게 누를 수 있는 반면에 명은 운을 함부로 하기 어렵다.

 

운이란 강물처럼 흘러가는 것이라 댐으로 가두거나

역류시키려 한다면 혼란이 올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거대한 흐름을 따라가면서

시간을 두고 조금씩 방향을 트는 것이다.

방향을 조금만 틀어도 시간이 지날수록 그 각도는 점점 커질 것이고

결국 긴 시간이 지난 후에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르고 있을 것이다.

 

흔히 말하듯 운에 맡긴다는 의미를 오해하면 안 된다.

운을 움직일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한 후에야 운에 맡길 수 있는 것이다.

즉 진인사이후대천명(盡人事以後待天命)의 자세이다.

진인사 즉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명을 다한 것이고 

대천명 즉 하늘을 기다린다는 것은

운에 그 노력의 결과를 맡긴다는 것이다.


중요한 건 진()이다. 한 점 후회도 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끌어모아

남김없이 불태워야 진이 되는 것이다.

내가 더 이상 할 것이 없을 때라야 하늘의 뜻을 기다릴 자격이 되는 것이다.

내가 할 노력이 아직 남았다면 더 노력해야지 운을 기다려서는 안 된다.

 

이것이 운을 대하는 자세다.

운을 기대하지 말고 스스로 노력하라는 말이다.

내가 노력하지 않고 운을 기다리는 것은

로또를 사고 당첨을 기대하는 것과 똑같다.

그런 횡재수는 불길할 수 있다. 노력이라는 대가를 먼저 결제하지 않고

덜컥 얻는 결과는 카드로 물건을 사는 것과 같다.

 

결국 고지서가 나중에 날아온다. 고지서에는 지불 하지 않은 노력 대신에

여러 가지 불운이 적혀 있을 수 있다.

그러니 아무런 이유 없이 갑자기 찾아오는 횡재는

일단 경계하고 조심히 다뤄야 한다.

 

운과 명은 우주의 법칙이 인간에 적용된 질서다.

과거엔 운을 알기 위해 음양과 오행을 통한 천문, 주역 등을 연구하였고

명을 알기 위해 유학, 명리를 공부하였다.

지금은 물리학과 같은 자연과학으로 운을 알아내려 하고

경제학, 심리학 등 다양한 학문으로 인간의 명을 분석하고 응용한다.

 

현대는 운이든 명이든 모든 걸 과학에 기댄 인간의 힘으로 좌지우지 할 수 있다고 믿는 오만한 시대다. 그러나 인간이 제아무리 위대하다 한들

거대한 우주 앞에서는 티끌같은 존재다.

 

천명(天命)을 받들고 천운(天運)을 따르는 것은

글자만큼 대단하지도 고루하지도 않다.

천명과 천운은 성경, 코란, 불경에도 있고 수많은 인류의 지혜에 다 있다.

 

하늘의 명이 별것은 아닐 것이다

바른 마음으로 스스로 사랑하고 탓하지 않으며

최선을 다해 사는 자세일 것이고 천운을 따른다는 것은

자연과 자신의 삶을 사랑하며 과한 욕심을 가지지 않으며

뿌린 대로 거두는 인과응보의 법을 믿으며 살아가는 것이리라.


바른 자세로 명을 받들고 자연의 법대로 가는 운을 겸손하게 따르는 사람을

하늘도 분명히 함부로 하지 않을 것이니

그렇게 하늘이 좋아하는 길이 천운의 순리고 조화고 질서이며

그 길을 따라가는 자가 천명을 다하는 사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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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4-03-27 0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이 들고 보니 이젠 주역이 더 큰 관심으로 다가오네요.

책을베고자는남자 2024-03-27 0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자가 위편삼절까지 하면서 공부했다는데 과연 주역이 그정도까지 가치가 있는 것인지에 대하여는 아직 확신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공부가 부족한 탓이겠지요...
 
정의란 무엇인가 - 한국 200만 부 돌파, 37개국에서 출간된 세계적 베스트셀러
마이클 샌델 지음, 김명철 옮김, 김선욱 감수 / 와이즈베리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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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일까?

사전적 정의는 사회나 공동체의 올바른 도리나 이치다.

어떤 조직을 운영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게 기준이다.

정의는 기준으로서 사회를 운영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그 기준이 무엇인가를 논하는 게

결국 정의가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와 같은 의미다.

 

흔히 세상은 불공평하다고 한다.

그 말에는 자연이 분배의 정의를 실현하고 있지 않는 것에 대해

필연성까지는 아니더라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숙명적인 권유를 깔고 있다.

다시 말해 그냥 운이니 따지지 말고 받아들여라 라고 말하는 것이다.

 

사실 자연이나, 세상은 공평에 대해 관심이 없다.

그렇다고 그런 식으로 세상의 불공평을 일반화 합리화하는 건

잘못된 일이다. 그렇게 대충 퉁치지 말고 구체적으로 따져 봐야 한다.

 

정의가 뭐냐고 사람들에게 물으면 대부분 도덕적인 답을 내놓는다.

다수의 행복을 목적으로 하는 공리주의나

자유주의에 입각한 선택의 자유 같은 이야기로 정의를 논하기 보다는

공평무사해야 한다. 남에게 해를 끼쳐서는 안된다. 법을 지키는 것이다.

올바른 것이다. 등 주로 도덕에 관련된 말로 정의를 대신한다.

 

그렇다. 우리에게 정의란 말 그대로 올바른 뜻이다. 도덕인 것이다.

문제는 도덕도 시대에 따라 그 기준이 변하고 상황에 따라 

변동이 있는 것이다.

시대는 그렇다 치고 현대의 복잡한 문제와 사건을 놓고

막상 정의로운 답을 찾을라치면 여러 답안이 나온다.

 

현재 의사들의 파업이 정의로운가?

정부의 공리주의 입장에서 소수 의사의 이익보다

다수의 국민이 더 피해를 보고 있기에

이익의 총량에서 보면 정의롭지 못한 것 같다.

그러나 애초에 별다른 대화의 노력을 하지 않았기에 완전한 정의는 아니다.

 

자유주의 선택의 입장이라면 

의사들의 자유로운 선택으로 파업을 했기에 정의롭다.

자유로운 시장에 정부가 개입하여 증원을 강요한 것은

시장주의의 입장에서 부당한 일이다.

 

마지막으로 파업의 가장 큰 희생자인 국민의 입장인

도덕론으로 본다면 의사가 직업인에 앞서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특별한 사명을 지고 있다고 보기에 어떠한 이유로도

환자를 떠나서는 안 된다는 의료인의 자세를 이유로

정의롭지 못하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의사들은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자동차공장에서 파업하는 건 정의롭고 

의사가 파업하는 건 정의롭지 못한 것인가?

내가 하는 일이 직업적으로 생명을 다루는 일이 되었을 뿐

자동차를 만드는 것 보더 더 가혹한 잣대를 들이대는 건 부당하다고 말이다.

 

그렇지만 열심히 공부해 자신의 노력으로 의사가 되었다는

현대의 능력주의에 입각한 공정한 기회균등을 넘어서

태어난 집안과 타고난 머리, 그리고 의사가 대접 받는 시대까지도

분배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롤스의 완전한 평등주의에 따른다면

의사들은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사회에 내어 놓아야 하는 것이다.

 

당연히 이 사태의 답은 파업이 일어나기도 전에 이미 정해져 있다.

정부의 인내를 바탕으로 한 어렵고도 기나긴 대화와 설득의 노력

그리고 그에 대한 의사 집단의 똑같이 어렵고도 고민스러운 협상과 타협의 노력

하지만 현실은 늘 빗나간다.

정부나 의사나 국민의 생명을 지켜야 하는 목적은 같지만

각자의 정의만 부르짖을 뿐 국민을 위한 정의는 보이지 않는다.

 

열 명을 살릴 것인가 다섯 명을 희생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공리주의식으로

해결하기는 쉽다. 다수를 택하면 된다

그러나 막상 그 대상이 내 가족이라면

그 경우에도 공리주의에 손을 들어줄 수 있을까?

 

이렇게 정의를 말하기는 쉽지만 구현하기는 쉽지 않다.

누구나 정의의 뜻을 알고 있지만 막상 현실의 구체적인 사례에 들어가면

다양한 가치관만큼이나 기준을 잡기도 어렵고 헷갈리기 쉽다.

어찌 보면 정의란 개인의 가치관만큼 다양할 수 있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급속한 발전을 이룩한 나라에서는

더욱 정의의 기준이 제멋대로이기 쉽다.

현대의 정의는 민주주의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민주주의 하면 당연히 따라다니는 다수결의 원칙이란

결국 다수의 행복이라는 벤덤의 양적 공리주의와 일맥상통한다.

 

고속도로가 지나가서 사라지는 마을의 주민에게 정의를 묻는다면

충분한 보상을 받지 못한 자신들의 희생이 정의라고 대답하진 않을 것이다.

그 도로를 이용하는 다수의 이익을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며 강행하는

정부의 의지는 공리주의의 입장을 대변한다.

이렇듯 오늘날 국가의 정책은 상당수가 공리주의를 깔고 있다.

 

동성끼리의 결혼의 합법화에 대한 정의는 무엇인가?

자유주의의 입장에서 따지면 개인의 선택이니 정의이고

공리주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지 않을 수 있고

도덕주의의 입장이라면 보수는 아니라 할 것이고

진보의 입장이라면 정의라 할 것이다.

 

이렇듯 현대의 문제들은 대부분 정의를 그저 단순히 옳고 그름으로 

재단하기엔 너무 다양한 이해관계와 가치관을 담고 있다.

정의는 모든 문제를 풀 수 있는 수학의 공식이라기보다는

같은 답이지만 푸는 방식이 여러 가지인 수학 문제에 가깝다.

 

어쩌면 현대의 정의란 결국 다수가 찬성하는

도덕이나 가치관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도덕주의의 질적 공리주의 버전이 아닌가 싶다.

민주주의에서는 결국 어쩔 수 없이 다수결이 최선이자

최후의 답 또는 해결책이니 말이다.

 

우리네 삶이 늘 그러하듯이

답은 항상 정해졌지만 답을 내는 과정은 제각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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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란 무엇인가 - 예일대 최고의 명강의 10주년 기념판 삶을 위한 인문학 시리즈 1
셸리 케이건 지음, 박세연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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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끝이다. 그 뒤에 무엇이 있겠는가?

그렇지만 과학적으로 거론할 가치도 없는 영혼, 영생을

인간은 버리지 않으려 한다.

 

인간의 뇌는 이율배반적이고 모순투성이다.

이성적으로 아닌 걸 알면서도 감정적으로는 믿을 수 있는

독특한 의식 구조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사는 동안 나를 제외한 다른 생명체의 죽음을 여러 번 경험한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식물이든 죽은 다음에 달라진 게 있던가?

남는 건 그저 슬픔이나 사라진 것에 대한 허무 같은 감정 뿐이다.

그래서 인간은 죽음의 허무를 극복하기 위해 기를 쓰고 영혼의 존재를

만들어 내고 믿으려 한다.

 

영혼이 존재한다는 가정에서 죽음 이후의 삶(?)을 논한다면 2가지다.

영생과 환생이다.

환생은 영혼은 지금 그대로의 나이지만 내가 가진 모든 기억이 리셋되기에

결과적으로 나지만 내가 아니다.

윤회의 업을 해결하려는 과정으로서는 의미가 있겠지만

단순히 죽음 이후의 삶이라는 면에서는 별 쓸모가 없어 보인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생이야말로 가장 온전한 죽음의 극복이다.

비록 육체는 소멸했지만 내가 나임을 증명해줄 수는 있는

모든 기억이 담긴 영혼이 그대로 천국에 존재하기에

우리가 원하는 것에 정확히 부합한다.

 

문제는 영생의 가능 여부인데 현재까지 존재한다는

객관적인 근거나 증거는 당연히 없다.

오직 성서의 하나님 말씀과 따르는 사람들의 깊은 신앙심이 전부다.

 

그래서 영혼 등 사후 세계에 대한 모든 이야기는

철학적 사유의 대상이 아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우리는 죽음에 대한 무엇을 이야기해야 하나?

 

500페이지가 넘는 지루한 논리 전개 끝에

인간에게 영혼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이 나쁜 이유는 살면서 누리는 혜택을 더는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죽음이 영생보다 더 낫다 외 별다른 의미를 찾지 못했다.

 

철학은 죽음을 그저 생물학적 종말로 치부하며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고 이야기하지만

죽음이 두려운 건 우리의 감정이지 이성이 아니기에

별로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죽음을 철학적으로 논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죽음이라는 인간의 가장 무거운 담론을 이성으로 정리하는 게 가능할까?

애초에 죽음이 너무 무서워서 결국 종교를 만든 게 인간이지 않은가?

영혼의 존재를 논리적으로 따져서 없다고 한들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줄까?

 

사실 우리는 죽음 이후에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일이기에 그 정체 모를 경험이 두려운 것이고

나라는 존재의 소멸에 대한 무게에 무섭다는 것이다.

 

살아서 누릴 수 있는 것을 더는 못하기에 두렵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져서 무섭기도 하지만

내가 사라짐으로 나의 세계가 소멸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더 두려운 것일 수 있다.

기나긴 인생 끝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사실에 담긴

허무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죽음을 경험한 사람이 없으니

죽음이라는 게 참 낯선 일이기도 하다.

공평하게도 이 세상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지만

아쉽게도 그 누구도 진짜 죽기 전에는 경험할 수 없기에

죽음이란 내 옆의 누군가 죽는 간접적인 경험으로 상상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죽었을 땐 나는 어떤 감정을 가지지만

정작 내가 죽었을 땐 난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니

아무것도 아니라는 게,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게 어떤 의미이고

어떤 느낌인지 알 방법은 없다.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존재하지 않은 적이 없는 우리가 어떻게 그 느낌을 알겠는가?

다른 누군가 내가 그랬던 것처럼 나의 죽음에 어떤 감정을 가질 뿐.

 

존재가 소멸하면 그 존재의 세계도 소멸한다.

나의 죽음은 내가 소유한 세계가 사라짐을 의미하지만

그걸 인지할 난 이미 사라졌으니 아무런 의미도 없다.

 

즉 죽음 이후는 논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논리와 상관없이 살아 있는 내내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과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불안감 사이에서

남은 삶과 죽음의 공포를 반비례로 느끼며 산다.

 

평범한 인간이 평균의 이성을 가지고 죽음을 극복하는 건

애초에 가당치도 않다.

극복은 고사하고 논하는 것도 불편하고 힘들다.

과연 누가 죽음을 직시할 수 있겠는가?

 

두렵고 불편하고 피하고 싶고 아니 그냥 생각도 하기 싫은데..

그래서 죽음은 그냥 묻어 놨다가 때가 되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

그냥 잊어버리고 즐겁게 살다가 순서가 되면 가는 것.

죽을 때 고통스럽더라도 내 생애 마지막 관문을 통과한다고 생각하고

꾹 참고 갈 수밖에 없는 것.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죽음에 대해 최대한 이성적으로 생각한 대처방안이다

더는 전부 가식이고 거짓이라 생각된다.

 

난 죽음이 무섭다.

사는 게 행복하고 좋아서 죽음이 무서운 게 아니고

죽기 전에 병들어서 고생하는 게 싫고

내가 차가운 시신으로 변한다는 게 어색하고 징그럽다.

 

오죽하면 죽은 자에 대해 삼일장, 천도제, 사십구재가 있고

이집트 사자의 서’, ‘티벳 사자의 서등 영혼을 좋은 길로

인도하는 방법까지 적어 놓은 매뉴얼까지 있겠는가?

 

사실 영혼이 없다면 이미 죽은 자에게 그게 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오히려 정작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으로 상처받은

남은 자를 위로하려는 게 진짜 속내가 아니겠는가?

 

결국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성찰의 동력으로 삼으며

앞서간 망자(亡者)로 인해 내 삶이 무너지지 않도록 나를 추스르고

내 차례가 될 때까지 죽음에 방해받지 않는

온전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것.

 

내가 결론 내린 산자의 죽음에 대한 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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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란 무엇인가 - 예일대 최고의 명강의 10주년 기념판 삶을 위한 인문학 시리즈 1
셸리 케이건 지음, 박세연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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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은 철학의 시작과 끝이자 가장 거대하고 깊은 담론이다.

우리가 논의하고 고민하는 모든 것은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 잘 죽는 법으로 퉁 칠 수 있다.

하지만 이 둘은 사실 똑같은 말이다.

잘 사는 사람이 잘 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는 대다수의 철학자들은 잘 사는 법을 이야기했다.

잘 살다 보면 자연스럽게 죽음을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죽음이 두려운 이유는 제대로 된 삶을 살지 못했기 때문이며

후회 없는 삶을 산 자는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올바르고 확신에 찬 인생을 산 자가 어찌 죽음이 두렵겠는가?

 

그렇지만 딱히 내세울 것 없는 삶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겐

쉽지 않은 일이다. 죽음의 공포를 상쇄할 만큼 보람 찬 인생을

산다는 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인가

 

그래서 종교가 필요해졌다. 평범한 사람이 죽음의 공포를

이겨낼 방법은 절대자를 의지하는 수 밖에 없다.

이성적으로 죽음을 극복하고자 한다면 성찰하는 삶을 살면 되고

그러한 노력이 어렵다면 하나님의 천국이나 부처님의 극락을 찾으면 된다.

 

난 종교의 힘을 빌리고 싶지 않기에 힘들지만 전자를 선택했다.

난 아내의 장례식에 춤을 췄다는 장자와 같은 현자가 아니기에

죽을 때까지 불안과 공포를 안고 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쉬운 길을 놔두고 굳이 어려운 길을 가고자 하는 건

죽음을 생각하는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많은 철학적 성찰이 있고

그러한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작은 깨달음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굳이 어려운 책을 보지 않더라도 철학자가 되고 싶다면

늘 죽음을 생각하고 가까이하면 된다.

삶보다 죽음이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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