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 초부터 난데없이 심야영화를 봤다. 연휴에 일이 있어서 어딜 나간 지 못한 것이 억울하다는 와이프의 볼멘 제안에 내키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동의.

 

늦은 시간이라 상영시간에 맞춰 선택한 영화는 <내부자들> 이다. 2015년 개봉작인데 감독 판으로 다시 올리며 흥행을 하고 있단다. 얼마 전 영화를 먼저 보고 온 동료 직원이 다소 민망한 장면이 있다며 너스레를 떤 기억이 났다. 그 때는 무심코 넘겼는데 막상 보니 고개가 끄덕 끄덕^^::

 

주제는 명확하다. 우리나라 정계, 재계, 언론의 3대 권력카르텔의 추악한 모습을 리얼하게 보여주자는 것. 우리나라 정치판을 보건데 내용은 새삼스러울 것이 없음에도 막상 화면으로 생생하게 보고 있으려니 속이 영 좋질 않았다.

 

“설마 저 정도는 아니겠지.”와 “실제로는 저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거야.”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본 영화는 장장 3시간이라는 긴 러닝타임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탄탄한 구성과 흡입력을 갖추고 있었다.

 

특히, 나쁜 놈에서 좋은 놈으로 변신하며 정치깡패 역을 훌륭히 소화해낸 이병헌의 연기는 악역의 이미지로 그를 낙인찍는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잘 어울렸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영화에서 자주 느끼는 것이지만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내용이 많아 다소 식상한 느낌 역시 지울 수 없었다. 부패한 국회의원, 비자금을 조성하는 재벌, 정치권력과 한통속인 보수언론, 까라면 까라는 한 마디로 정의되는 권력의 시녀로서 검찰 등 어지간한 드라마에서도 자주 보아왔던 소재들이다. 단지 그것들을 일원화시켜 통째로 보여주었을 뿐이다.

 

특히, 성질 급한 관객이라면 못 볼 가능성이 많은 엔딩자막 삽입 장면에서 논설주간 이강희(백윤식 역)가 감옥에서 읊조리는 나레이션은 이 영화의 핵심을 말한다. 냄비의 속성을 지닌 우리나라 국민들을 조롱하며, 밝혀진 진실은 곧 묻히고 다시 예전의 권력체계가 다시 복원될 것이라는 그의 말속에서 감독은 똑똑한 관객을 무시하고 다시 한 번 직설적으로 이 영화의 주제를 알려주려 애쓴다. 3시간 동안이나 봤음에도 멍청한 국민들은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영화로만 기억하고 또 잊어버릴 것이 걱정스러웠나 보다.

 

쓸데없이 기억력이 좋은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국민들이 앓고 있는 <정치에 대한 반복성 기억장애>와 예수님보다 넓은 오지랖을 자랑하는 <정치인에 대한 반복적 용서>가 이 모든 참상을 영화 속 픽션으로 축소해버릴 것이 뻔하지 않은가?

 

탄탄한 구성과 연출력, 배우들의 힘 있는 연기에 힘입어 3시간을 1시간처럼 재미있게는 봤지만 왠지 석연찮은 생각들이 머리를 어지럽힌다. 이 권력의 부조리를 전 국민이 다 알고 있음에도 누구도 영화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 “거긴 원래 그래”, “우리나라 정치는 절대로 변하지 않아.” 이 철저하게 학습된 무기력과 무관심의 효력은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교과서적인 말은 끊임없이 죄를 짓고 상습적으로 회개와 참회를 규칙적으로 하는 사람들이 들고 다니는 성경, 불경 속 계율만큼이나 공허하지만, 주권이 결코 박제된 미이라가 아님을 역사는 가끔씩 보여준 적이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그러나 평생 몇 번 주어지지 않는 투표로서의 심판 기간은 이 모든 것을 담기엔 너무도 짧다.

 

추신 : 쓰고 난 뒤 다시 드는 기분나쁜 생각들

 

7~80년대였다면 감히 제작도 못했을 영화.

90년대라면 검열로 난도질당해 줄거리 파악이 힘들었을지도 모를 영화.

직접적으로 정치권력을 이렇게 조롱해도 어떤 외압도 받지 않고 버젓이 개봉했다면 그것 자체로 우리 사회가 그만큼 민주화되었다는 반증일까? 그래서 위안을 삼아도 되는 걸까?

2000년 무렵만 됐어도 그렇게 생각하고 마음이 편했을 건데 지금 이 불편함의 이유는 뭘까?

 

이런 수준의 영화정도로는 관객 즉 국민이 불순한 생각을 감히 하지 못할 것이며.

설사 생각한다 한들 픽션으로 그러진 선을 넘지 않을 것이며.

설사 선을 넘는다 한들 무에 그리 대수냐? 하는 오만한 생각을 누군가 하고 있지 않을까?

 

아니 어쩌면 우리는 보이지 않는 선을 그어 놓고 서로 넘지 말자는 침묵의 카르텔을 스스로 열심히 지키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가정의 평화를 위하여 내 삶의 안위를 위하여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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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16-01-08 2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는 내내 불편했습니다. 민망한 내용보다는 그 일들이 벌어지는 카르텔을 보면서요. 님이 말씀하신대로 이 영화가 영화로 끝날지, 아니면 현실로 이어질지는 아직은 모르겠네요. 다만 전자일 가능성이 크다라는 생각에 속상하기는 합니다.

책을베고자는남자 2016-01-09 1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계속 차곡차곡 쌓다 보면 언젠가는(?) 뭔가(?)가 일어날 지도 모르죠. 카르텔의 정해진 균형이 깨지는 날이 반드시 오리라 믿습니다. 그건 과거의 역사가 계속 증명하고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