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유리잔이다.
늘 조심스럽게 다뤄야 하고 조금만 부주의하면 깨져버리는
약하디약한 유리잔
바닥에 떨어져도 깨지고, 어딘가에 부딪혀도 깨지고, 다른 잔에 부딪혀도 깨지고
심지어 같은 유리잔과 부딪혀도 깨지고 마는 유리잔이다.
어쩌면 마치 깨지려고, 깨지기 위해 태어난 존재 같다.
‘왜 난 플라스틱이나 스테인레스잔처럼 강하게 태어나지 못했을까?’
유리잔은 한없이 그들이 부러웠다. 그에게 강함이란 결국 생명의 길이니까.
그러던 어느 날 옆자리에 대충 여러 개로 포개져 있던 밥그릇이 말을 건넨다.
유리잔아 내 꼴을 봐라. 난 사기그릇이라 잘 깨지진 않지만
너처럼 이쁘진 않단다. 그저 밥이나 담고 말지.
아무도 우리에게 다른 걸 요구하진 않는단다.
그렇지만 넌 뭔가 우리보다 더 특별해 보여.
넌 파티 같이 특별한 날에만 등장하잖아
먼저 투명한 유리잔은 내용물이 훤히 보이기에 좋잖아.
아름다운 색깔의 음료를 담고 있는 유리잔의 영롱함이란 얼마나 환상적인가
또 잔을 부딪칠 때 쨍! 하고 울리는 소리가 좋아서 건배용으로 좋고
유리잔 특유의 얇으며 차가운 감촉도 이유가 될 수 있겠지.
또 유리잔이 주는 다양한 디자인의 예술적 자태도 장점이잖아.
밥그릇의 말을 들은 유리잔은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 내가 비록 약하지만 좋은 점도 많아
저 밥그릇은 튼튼하지만 그저 밥만 담고 말잖아.
난 특별한 존재야. 사람들은 특별한 날에 날 찾잖아
유리잔은 평생 한탄만 했던 자신의 인생에도 특별한 점이 있다는 걸 깨닫고
삶에 대한 욕구가 불끈 치솟았다.
그래, 앞으로 열심히 살아야겠다. 난 특별한 유리잔이야
유리잔은 새삼 자신의 삶을 다시 새롭게 보기 시작했고
비관으로 일관했던 과거를 잊고 앞으로 행복할 날만 꿈꾸었다.
그러던 며칠 후 유리잔은 평생을 노심초사 그렇게 조심했건만
결국 안주인의 부주의로 깨지고 만다.
산산조각으로 깨져버린 유리잔 조각의 눈에
저 멀리 밥그릇이 혀를 차는 게 보였다.
그게 유리잔 조각이 쓰레기통에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본 세상이었다.
유리잔만이 가지는 존재의 의미가 충분하기에
약하지만 아직까지 살아남았다.
유리잔은 강해서 살아남은 게 아니고 이뻐서 살아남은 것이다.
나는 유리잔이다.
약하게 태어났고 언제 깨져 생을 마감할지 모르는 위태한 인생이지만
그 특유의 감성과 미적 자태로 삶의 의미와 존재의 가치를 담고 있는
그래서 특별한 날에 사람들이 사랑하는 유리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