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 말라
슬픔의 날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실은 늘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에 지나가고 지나간 것은 다시 그리워지나니
내가 유일하게 외우고 있는 러시아의 국민시인 푸시킨의 시다.
옛날부터 워낙 유명한 작품이라 자주 접하다 보니 저절로 외워졌다.
가볍게 들으면 삶에 대한 관조나 달관을 말하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읽으면 읽을수록 슬프다. 나만 그런가?
인생의 고초와 삶의 애환을 에둘러 말하며
자신의 운명을 자조하고 스스로 위로하는 것으로
짓누르는 삶의 무게를 덜려는 애달픈 몸부림이 안타깝다.
이 시가 나온 19세기 초 전제군주인 차르 시대의
러시아 민중들의 삶이란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뻔할 것이다.
지배계급에 의한 수탈과 가난, 각종 질병, 신분제의 속박에 의한 무기력 등
스스로 헤어나올 수 없는 운명의 굴레에 묶여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던
일반 민중들이 그냥 참고 견디며 버티는 것 외에 어떤 선택이 있었을까?
운명을 개척할 자유조차 없던 시대다.
운명이 곧 숙명이며 선택은 소수의 특혜인 세상에서
피할 지붕도 없고 꺼내 들 우산조차도 없어
쏟아지는 빗줄기를 온몸으로 맞으며
그저 애꿎은 하늘만 쳐다보며 구름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릴 수 밖에 없었던 가엾은 사람들이
비를 맞으며 읊조렸던 게 이 시이지 않았을까?
이젠 다르게 읽을 수 있는 세상이다.
달관과 관조로 비스듬하게 바라보지 말고,
시련이 지나가길 조용히 기다리지 말고,
지나간 뒤에 그리워질 추억보다는
달려드는 현실과 운명에 맞서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자유와 용기를 무기로
당당히 싸웠다는 자기만족의 무용담이 더 낫지 않을까?
그래서 여러 버전으로 읽어 보았다.
푸시킨과 그의 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죄송하게 생각한다.
〈현실 버전〉
삶이 그대를 속인다면 참지 말고 분노하라
슬픔의 날 참고 견딘다고 기쁨의 날이 저절로 오지는 않으리니
마음을 미래에 두는 한 현실은 늘 고통인 것
모든 것은 지나가도록 두지 말고 우리 힘으로 바꿔야 하네
〈불교 버전〉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 말라
슬픔의 날도 기쁨의 날도 다 그대 마음에 달렸나니
마음을 항상 현재에 두고 현실을 긍정하라
지나가는 모든 것에 최선을 다하되 지나간 것은 잊어버려라.
〈기독교 버전〉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 말라
슬픔의 날도 기쁨의 날도 다 하나님의 뜻이니
현재에 최선을 다하며 열심히 기도하라
모든 것은 순간에 지나가고 하나님의 왕국에서 영생을 누릴지니
〈노․장자 버전〉
삶은 이제 더 이상 나를 속일 수가 없다네.
슬플 일도 기쁠 일도 기대하지 않는다네
마음이란 세상사에서나 의미 있는 것
지나가는 것에 관심 없고 지나간 것은 더더욱 관심 없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