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혼곡
별들이 빛나는 드넓은 하늘 아래,
묘를 파서 나를 눕혀주오.
즐겁게 살았고 또 기꺼이 죽노니,
나 주저 않고 누우리.
그대가 나를 위해 새겨줄 묘비명은
여기 그가 누워 있노라. 그토록 갈망하던 곳에
선원이 집으로 돌아왔네, 거친 항해에서
사냥꾼이 집으로 돌아왔네, 거친 들판에서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생각은 많으나 동하지 않고
말은 많으나 몸과 같지 않으니
너하고 나는 인연이 아닌게지
삶을 관통하는 지혜를 찾으나
넘쳐나는 말과 생각뿐
두 손에 쥔 건 한 줌의 허위
끝없이 떠도는 갈망의 몸부림은
피고 지는 영겁의 윤회를
기어이 이고 갈 요량인가 보오
삶과 죽음은 종이 한 장
바람 한 점에도 넘어가네.
불현듯 찾아오는 바람 부는 순간
그것이 무엇의 손짓이든
그저 겸손하게 받아들일 뿐.
어느날 문득,
당신이 내게 와 한 송이 꽃이 된다면
난 사뿐히
날아가 그대 주위를 날겠소.
당신이 아득한 광야에 홀로 선 나무가 된다면
난 묵묵히
걸어가 그대 곁에 서겠소.
당신이 쏟아지는 빗줄기로 내려온다면
난 하늘을
우러러 온몸으로 맞이하겠소
당신이 아무런 이유 없이 나를 떠난다면
난 울면서
그대 오기를 한없이 빌겠소.
그러던 어느날 문득,
당신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나타난다면
난 달려가
그대의 다리를 붙잡으리다.
그러다 문득,
그 모든 것이 끝나는 그 날이 된다면
어느날 문득 그러했듯이
그대와 함께 끝나는 날이 되겠소.
하얗게 웃는 너의 얼굴이
오후의 햇살 속에 어슴푸레 사라지고
돌아서는 발길이 천만금 무겁구나
도로는 차들로 꽉 찼건만 왜 이리 휑한지
차창에 흩날리는 아내의 눈물 몇 방울
무거운 시간은 정지한 듯 아득한 귀갓길
식탁엔 먹다 남은 빵 한 조각
방금 일어난 듯 어질러진 이부자리엔
아직도 남아 있는 너의 웃음소리
잘 갔다 오렴
아빠는 너를 믿는다
손꼽아 기다리마
씩씩한 남자로 만날 날을
사랑한다 아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