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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모노
성해나 지음 / 창비 / 2025년 3월
평점 :
오랜만에 한 권의 책에 푹 빠져버렸다. 산책길에서 오디오북으로 먼저 듣기 시작한 성해나 작가의 소설집 『혼모노』는 드물게 딴 생각 없이 집중해서 듣게 되는 소설이었다. 순서대로 좋게 듣다 ‘혼모노’에서 더 집중했고,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에서는 전율이 일어나 듣기를 멈추었다. 이건 무조건 책으로 읽어야한다는 생각이 들어 그 자리에서 바로 온라인 서점에 들어가 주문했다.
이 책에 수록된 7편의 단편소설의 소재는 모두 익숙한 것이다. 지금, 아니면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우리에게 많은 고민과 갈등을 던져준 사회적이면서 개인적인 여러 이슈를 다루고 있다. 이 책의 매력은 평범한 소재들을 식상하지 않은 감성과 특별한 전개로 섬뜩하리만치 차갑게 사람을 각성시킨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생각지도 않은 반전이나 독한 문장이 있는 것도 아니다. 물 흐르듯, 조용히, 순조롭게 진행되면서도 단편하나를 다 읽고 나면 뭔가를 깊이 생각하게 만든다. 나부터 시작해 세상 모든 사람들 각자 한 명 한 명씩의 삶, 그로부터 비롯된 이 세상의 부조리함의 원인을 분석하게 된다.
‘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는 공적인 재능과 사적인 하마르티아의 연관성을 다루고 있다. 사람은 어디까지 도덕적이어야 하는 것과 한 번의 실수는 용서받을 수 있는가이다. 사과를 한다면 있었던 일이 없는 일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한 사람을 향한 비난의 수위와 그 실수로 영원히 매장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생각할 거리가 많다. 모든 일이 무마되었어도 피해자의 트라우마는 어떻게 치유될 수 있는지도…이 소설은 겉에서 보여지는 모습만큼 거기에 대응하는 소설 속 ‘나’로 대변되는 ‘팬덤’의 태도도 중요하게 작용한다. 그들의 무조건적인 옹호와 납득으로 가려진 진실은 치앙마이의 손발톱과 송곳니를 뺀 호랑이의 등을 쓰다듬는 것과 같은 모호함과 찝찝함으로 남아 각자의 양심 안에 숨을 뿐이다.
외국인이 보고 느낀 한국과 광화문 일대를 휩쓸고 있었던 태극기 부대는 그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남을까? 그들은 왜 거의 노인으로 구성되고, 성조기를 함께 지니고 다녔을까? 그들의 이해 못할 행동들과 떼 지어 악을 써대던 모습이 징글징글해 그곳을 가게 되면 눈살을 찌푸리며 쳐다보지도 않고 빨리 지나쳤었다. 한국어를 전혀 모르는 이민 3세대 듀이는 일로 한국에 와 잠깐 머문다. 산책삼아 나간 종로에서 만난 그들에게 듀이는 편견이 없었다. 그곳을 ‘이승만 광장’이라 명명한 그들이지만 듀이에게는 모두 친절하고 좋은 사람들이었다. ‘스무드’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본 어떤 모습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보여주는 동시에, 이념이나 편견을 떠나면 모든 인간은 좋은 사람일 수 있다는 역설이 있다. 나와 반대편에 섰던 그들에 대해 오래 생각해보게 되었다.
굿이나 점집은 이미 한물간 과거의 산물로만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스마트한 세상에서도 여전히 건재했고 그 힘은 엄청났다. 나약한 인간은 뭔가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주술과 신령의 기술은 지켜보는 사람들을 전혀 의식하지 않은 채 그저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인간들을 완벽히 장악했다. 그들이 맹목적으로 의지하는 무당이나 법사의 말과 행동은 어떤 기운과 힘으로 움직일 수 있는지 매번 궁금하다.
‘혼모노(本物)’는 진짜, 진품, 실물을 뜻하는 일본어이다.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어떤 것에 광적으로 집착해 자신만의 세상에 빠져있는 사람을 의미하기도 한다. 가짜를 뜻하는 일본어는 ‘니세모노(僞物)’이다. 삼십 년 동안 장수할멈 혼령에 의지해 활동한 박수무당인 ‘나’는 한순간 예언의 힘을 잃어버린다. 말도 없이 장수할멈은 이웃 신애기의 몸으로 들어가 버렸기 때문이다. 무당도 인간이라 뭔가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진정한 혼모노는 장수할멈인가? 진짜처럼 보이는 것은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사람을 현혹시키며 광적으로 집착하고 믿게 만든다. 하지만 마지막 굿판에서 벌인 나와 신애기의 대결은 칼날과 작두에 의해 피를 쏟는 내가 승리한다. 혼모노와 니세모노가 묘하게 섞이며 정확한 경계를 흩뜨려버린다. 우리가 믿고 추종하는 것은 결국 확실치 않은 것이다. 진짜보다는 허상이 더 많은 기승을 부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소설집에서 가장 좋은 단편은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였다. 남영동 대공분실, 지금의 민주화운동기념관의 정확한 지번 주소는 서울 용산구 갈월동 98-8번지이다. 작가는 이곳에 위치한 건물을 통해 과거를 소환하며 인간이 생각해낼 수 있는 악의 최대치의 범위를 가늠하게 한다. 직접적인 고통을 보여주기보다 우회적 방법을 통해 더 잔인하고도 섬뜩한 공포와 거기에 희생되는 무고한 인간들을 상상하게 만든다.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아우슈비츠 수용소 반경 40M안의 주변 지역)’와 비슷한 맥락이었다.
고문대상자가 늘어날수록 그들을 수용할 수 있는 장소가 많이 필요하다. 인적이 드물며 아무도 그들의 고통스런 비명을 들을 수 없는 곳, 안에서 벌어지는 것과는 무관한 ‘국제해양연구소’나 ‘경동수련원’같은 이름이 필요한 건물의 설계를 겸임교수 여재화가 맡는다. 여재화는 성실하고 기본에 충실하지만 야망은 없는 제자 구보승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한다. 그때부터 구보승은 고문할 인간에게 최적화된 건물을 설계하기 위해 모든 열정을 쏟아 붓는다. 아우슈비츠의 소장이었던 루돌프 회스가 어떻게 하면 최대한 많은 인원을 한 번에 죽일 수 있는가에 대해 모든 생각을 집중했던 것과 비슷하다.
평범했던 구보승이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잘 수행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사회나 학교는 누구에게나 그런 것을 요구한다. 다만 거기에 ‘인간’이라는 요소가 들어있을 때 무엇이 옳은 것인가에 대한 딜레마를 우리는 항상 맞닥뜨린다. ‘인간을 위한다’는 것에 담긴 다양한 관점과 오류는 절대 하나로 완결될 수 없으며 결국 그것은 각자의 선택사항이 될 수밖에 없다. 고문대상자를 수용하기 위한 건물의 설계에서 약간의 인간미를 넣어 양심의 가책을 덜고자 한 여재화 역시 구보승과 다르지 않다. 어차피 그들의 목적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성해나 작가의 소설을 처음 읽었다. 1994년생, 31세인 이 젊은 작가가 정말 놀라웠다. 그동안 무엇을 얼마나 많이 했기에 이렇게나 다양하고 깊이 있는 글을 쓸 수 있는지 믿기지 않았다. 성해나의 이 소설들은 모두 사람으로 귀결된다. 읽으면서 많은 사람과 거기에 얽힌 상황들을 인식하고 생각했다. 나를 다시 돌아볼 수 있는 계기도 되었다. 지금의 나는 누구이며 무슨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으며 진짜로 살고 있는가에 대한 각성을 했다. 성해나 작가의 다음 소설이 기대된다.
[선생님, 제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인간에게는 희망이 필요합니다.
여재화는 흠칫했다. 이제껏 구보승이 밀어붙였던 합리와 대척점에 놓인 사고였다. 드디어 인간을 고려하다니, 독학하는 과정에서 건축의 기초를 깨달은 게 아닐까, 어렴풋이 유추하며 여재화는 안도했다.
그래, 자네 말이 맞아, 인간이 생활하는 공간에 창이 없어서는 안 되지.
네, 제가 선생님의 뜻을 미처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빛이 인간에게 희망뿐 아니라 두려움과 무력감을 안길 수도 있다는 것을요. 그래서 창이 필요했던 건데.…저는 완전히 반대로 생각했으니까요.…빛이 공간의 형태를 드러내 조사자에게 두려움을 심고 시간의 흐름을 느끼게 해 무력감을 안길 거라고.
희망이 인간을 잠식시키는 가장 위험한 고문이라는 걸 선생님은 알고 계셨던 거죠?
-p.191~192,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