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우리는 돈 없이 살 수 없다. 돈은 지금의 세상을 정의할 수 있는 가장 큰 언어라고도 할 수 있다. 물질의 평가는 가격으로 결정된다. 합리적 가격 시스템은 편리해 전 세계적으로 통용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가치 평가에 ‘공급과 수요의 법칙’이라는 고전적 문법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제는 누구나 알고 있다. 공정한 가격의 기능과 기본 원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인위적이고 비도덕적인 개입, 거대한 자본의 은밀한 전쟁에 세계와 우리나라의 양극화는 점점 심해지고 있다.
[문제는 그런 가격이 급변할 때다. 가격이 급격히 흔들리면 질서가 무너지고 혼돈이 벌어지며, 우리가 견고하다 믿었던 것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가격은 급작스러운 대기근과 대규모 난민을 유발하거나 지배 계급을 갈아엎는다. 가격은 폭동과 혁명, 전쟁을 일으키고, 왕실과 경찰국가 그리고 외세의 침략에 자금을 댄다. 가격은 우리의 빗장을 열어 괴물을 풀어놓는다.
-p.15]
원제가 『PRICE WARS』인 이 책의 저자 ‘루퍼트 러셀’은 2010년대 전 세계를 강타한 무수한 혼란의 원인을 괴물과 다름없는 몇 명의 지도자와 가격 시장을 교란시키는 금융 투기로 보고 있다. 그는 아랍의 봄, IS, 브렉시트 투표, 우크라이나 전쟁, 베네수엘라, 미국 국경 지대의 위기를 따라가며 가격이 일으키는 마법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나비의 날갯짓과 단 한 알의 모래로도 연쇄 위기가 촉발될 수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되먹임의 고리가 된다.
2010년 아프리카 튀니지의 ‘무함마드 부아지지’의 분신으로 시작된 재스민 혁명은 빵 가격의 폭등이 계기가 되어 그동안 쌓인 문제점이 동시에 폭발된 것이었다. 아랍 전역으로 퍼진 민중의 분노는 정부의 과격한 진압으로 내전과 난민의 생성, 국가의 붕괴, IS의 발흥으로 이어졌다. 석유를 가진 비교적 여유 있는 산유국들은 국민들에게 보조금을 지급하고 식료품을 무료로 배급해 그들의 독재를 유지시켰다.
식량 생산이 전 세계 사람들을 먹일 수 있는 충분한 양이고, 원유 역시 산유국들이 감산하지 않았음에도 그 가격은 고공행진을 계속했다. 원자재 거래소에 모여 든 거대한 금융자본이 움직인 결과에 수많은 세계의 시민은 고통 받고, 극소수의 사람만이 돈 잔치를 벌였다. 자원이 풍부한 나라의 괴물 지도자들은 그런 투기꾼에 협력하고 자신의 권력을 더 강화시키며 거뜬히 살아남았다. 원자재 가격이 조금만 하락해도 그것이 주는 돈으로 권력을 유지하는 독재자들은 치명적인 타격을 받는다. 원자재 가격이 내려가지 않게 괴물들은 세계를 위협하고, 그 덕에 금융투기자의 재산은 엄청나게 불어간다.
투기자본이 벌어들인 비정상적인 돈은 다시 취약한 곳을 찾아 들어가며 악덕 사채업자가 된다. IMF, 세계은행, 미국 연준, 영국 영란은행은 투기자본을 위해 존재하는 곳이고, 각국의 중앙은행은 아무도 통제할 수 없는 곳이 되었다. 빌 클린턴, 버락 오바마조차 국민이 아닌 채권자들을 두려워했다.
[가격이 사용한 마법의 도구는 순식간에 증식하는 파생상품이라는 서류였다. 세계 경제에 질서를 부여하는 역할을 하리라 여겨지던 파생상품은 세 번의 폭발을 연달아 일으켰다. 2007년에는 주택에서, 2008년과 2010년에는 식량에서 전 세계를 가난과 굶주림에 빠뜨리는 충격파가 발생했다. 식량에서 일어난 세 번째 폭발은 결국 중동을 혼란의 가장자리 너머로 밀어넣었고, 공포로 가득한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
-p.107]
금융자본의 손실을 막고자 무분별하게 만든 파생상품과 원자재 인덱스펀드의 공매도, 헤지펀드는 그것과 직접 관계가 없는 먼 곳의 사람들을 난민으로 전락시키고, 아이를 키울 돈이 없는, 지독한 인플레이션에 시달리는 베네수엘라 여성들이 불임수술을 받게 한다.
요즘 웬만하면 커피 한 잔에 5000원의 가격을 지불해야 한다. 내가 체감하는 커피의 가격이 만만치 않은데도 정작 과테말라에서 커피를 재배하는 토레스(p.319)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불법으로 미국 국경을 넘으려고 했다. 기후의 변화로 인한 커피 녹병, 대출금에 따른 높은 이자를 감당할 수 없어서이다. 케냐도 마찬가지이다. 2018년 폭락한 커피 가격으로 그들은 자신의 땅을 지킬 수가 없었다. 내가 지불한 커피 가격은 도대체 누구에게 돌아가는가?
[커피 시장은 기록적인 약세 포지션을 구축한 헤지펀드들의 ‘대규모 공매도’로 어려움에 빠져있다. -p.324
투기자들은 커피 가격을 끌어내림으로써 이미 혼돈의 가장자리에 있던 과테말라가 임계점을 넘도록 몰아붙였다. 게다가 과테말라의 경제를 떠받치는 커피 산업은 기후 변화로 더 불안정하고 취약해졌으며, 국제 커피 가격에 가해지는 작은 충격에도 더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생존에 필요한 임금을 찾아 떠나는 이민자가 급증한 것은 자명한 결과였다. -p.325]
『빈곤의 가격』은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라는 금융 파생상품의 위기로 시작된 전 세계적인 혼란의 원인을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저자가 직접 이론가들을 만나고, 현장으로 찾아가 취재한 사례들이 생생하게 적혀있다. 이 책에 씌어진 내용이 주로 2010년대에 일어난 사건이지만 지금 우리역시 영향을 받고 있으므로 그 원인은 중요하다.
전작인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와 마찬가지로 장 지글러의 《왜 세계의 가난은 사라지지 않는가》역시 세계의 불평등에 대한 이야기다. 저자는 손녀 조라와의 대화를 통해 지금 현재 우리가 겪는 불평등의 원인을 분석한다. 자본주의가 시작된 역사를 살펴보고, 자본주의가 어떻게 인간을 잠식해왔는지를 설명한다. 현장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자본주의가 주는 피해와 불평등을 여러 나라의 사례를 통해 보여준다. 소수만을 위한 자본의 힘과 결국 그것을 위해 다수가 희생되는 시스템에 대한 우려를 나타낸다.
자본주의시대뿐만 아니라 고대로부터 인간이 누리는 잉여가치는 결코 스스로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노예, 농노, 식민지 시대로 이어지는 수많은 수탈과 억압에 의해 거대 자본이 형성되었고 그것은 현대 금융자산의 밑바탕이 되었다. 눈에 보이지 않은 금융투기가 불평등을 가속화시키고 있다. 『빈곤의 가격』과 『왜 세계의 가난은 사라지지 않는가』는 똑같이 불평등의 가장 큰 원인을 금융투기자본으로 보고 있다.
소설가 김연수는 그의 단편소설인 ‘이토록 평범한 미래’에서
“하지만 이제는 안다. 우리가 계속 지는 한이 있더라도 선택해야만 하는 건 이토록 평범한 미래라는 것을.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 한 그 미래가 다가올 확률은 100퍼센트에 수렴한다는 것을(p.34)”라고 말한다.
우리에게 ‘이토록 평범한 미래’는 뭘까? 루퍼트 러셀이 튀니지의 카페에서 만난 한 남자는 “사람들이 원하는 건 기본 욕구를 채우는 거예요. 먹고 입을 것 말이예요(빈곤의 가격, p.387)”라고 말한다. 우리가 원하는 평범한 미래는 최소한 기본욕구 정도는 채우며 살 수 있는 세상이다. 그렇지만 금융투기가 계속되고 그들과 결탁한 괴물이 있는 한 우리의 미래는 암울할 뿐이다.
루퍼트 러셀과 장 지글러가 서술한 문제점들은 우리가 대충 아는 것이다. 그리고 그 거대한 힘들이 일으키는 돈의 파장에서 나 역시 자유로울 수 없다. 다만 나란 사람은 최소한의 영향만 받기를 원하는 이기적이고 소극적인 세계시민이다.
자본주의의 전복까지도 원하는 지글러가 내놓은 해결책은 지극히 소박하다. 그는 비아 캄페시나, 여성운동 모임, 그린피스, 아탁, 엠네스티 인터네셔널(p.168/188, ‘왜 세계의 가난은 사라지지 않는가’)같은 사회운동으로 연대하자고 주장한다. 1780년대 말, 경제 위기에 직면한 프랑스의 루이 16세는 삼부회를 소집한다. 프랑스의 가난한 자들과 불만 가진 자들의 요구 사항을 기록한 〈진정서〉가 작성되었지만 정작 민중은 직접 나서지 않고 부르주아 자본주의자들에게 그들의 일을 위임한다. 지글러는 이런 ‘민중의 소극성’을 우려한다.
[그러나 우리같은 집단을 삼부회가 받아들이게 된다면, 그 결정이 아무리 정당하다고 할지라도, 회의 진행을 방해하기만 할 것이다.....불쾌하기 짝이 없는 우리의 헐벗은 모습, 우리가 걸친 구역질 날 정도로 끔찍한 누더기를 보게 될 것이며 우리 몸을 뒤덮고 있는 이가 옮겨 붙을까 봐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신 영주들 사이에 우리의 대표를 보낼 마음이 없다. 비록 우리 역시 자연과 주님의 은총이라는 질서 속에서는 당신들의 형제이며 권리에 있어서 동등할지라도 말이다.
-p154/188, ‘왜 세계의 가난은 사라지지 않는가’]
이 두 책은 우리에게 현실을 인식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이미 우리나라도 혼란의 한가운데에 서 있고,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으면 포식자에게 잡아먹히고 말 것이다. 세계를 제패한 금융투기 세력은 국민에 대한 복지를 싫어한다. 채권자는 채무국의 국민을 쥐어짜 빌려준 돈을 회수해 가며, 그들의 절대적 도움이 필요한 정치가들은 그들에게 복종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양극단의 선택만 하는 우리들은 더욱더 정확한 인식을 해야만 한다. 평범한 미래를 위해 적어도 ‘민중의 소극성’만은 버려야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