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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파란 눈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49
토니 모리슨 지음, 정소영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7월
평점 :
1931년도에 미국에서 태어난 흑인 여성이 1941년을 배경으로, ‘흑인’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자 했을 때 얼마나 하고 싶은 말이 많았을까! 대학에서 강의하며 랜덤하우스 출판사의 편집자로 일하던 ‘토니 모리슨‘이 직접 글을 쓰겠다고 결심한 것은 자신에게 내재된 경험과 감정을 언어를 통해 풀고, 정리하고 싶은 열망이 컸기 때문일 것이다. 뼛속까지 사무친, 뭉쳐지고 일그러진 무수한 얘기 중에 어떤 것을 꺼내 어떻게 전개해야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잘 전달할 수 있을지도 많이 고민했을 것 같다.
토니 모리슨은 자신의 첫 소설을 뻔한 내용으로 채우지 않았다. 작가는 억울하게 핍박받은 피해자로서의 흑인을 서술하기보다, 검둥이로 불리는 흑인 공동체 안을 먼저 들여다봤다. 1970년에 이 소설이 출간되었지만 토니 모리슨은 뒤늦게 1993년판에 서문을 덧붙인다. 서문에서 그녀는 작품을 쓴 의도와 구성방식을 설명한다. 작가는 바깥에서 받은 미움이나 증오로 인한 스트레스와 힘듦을 왜 안에서 풀려고 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남들의 멸시나 배척을 저항하거나 피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였을 때 초래되는 더 비극적이고 파괴적인 것에 작가는 관심을 가진다. 지독한 자기비하의 피해자는 둘 중의 하나가 된다. 위험하고 난폭한 성향의 기질로 자신보다 약한 공동체 안(여자와 어린이)을 공격하거나, 또는 자기 정체성을 포기하고 자아를 무너뜨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어린 나이나 성별이나 인종으로 인해 해로운 외부 영향력에 가장 저항하기 힘들 법한 인물의 삶으로 들어가려는 기획(p.8)’을 했다고 한다.
토니 모리슨이 던진 이 문제의식은 단지 흑인사회에서만 통용되는 것은 아니다. 어느 사회든지 보편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런 성향을 가지고 있다. 가정 형편이 좋지 않은, 폭력적인 환경에서 자란 사람(특히 남자)들이 자신의 가족을 파괴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자존감의 결여는 어린 아이의 자존감을 빼앗아 결국 폭력이 재생산되는 악순환을 양산한다. 다만 흑인이나 유대인처럼 민족 전체가 핍박받은 경우는 해결되지 못한, 뿌리 깊고 복합적이며 단단한 문제가 더 많을 것이다.
‘인생사 새옹지마‘나 ’전화위복‘이라는 말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 늘 나쁘거나, 좋은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안 좋은 일이 생겨 고통을 받다가도 그것이 극복되면 다시 살아갈 힘을 얻고 희망도 가질 수 있다. 그러다 행운이 찾아오면 웃을 일이 생기고 지난했던 과거는 자신을 성장시킨 밑거름이었다고 스스로 위로할 수 있다. 억울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공평하려면 우리에게 주어진 삶은 그래야만 한다.
하지만 여기 오하이오주 로레인에 사는 ‘촐리, 폴린 브리드러브’ 부부에게는 결코 그런 삶이 주어지지 않는다. 태어날 때부터 척박한 환경에서 자란 그들은 잠시 사랑(연민인지도 모른다)에 빠져 결혼하지만 곧 촐리는 바깥을 돌며 술을 마시기 시작한다. 집안의 생계를 책임져야 할 폴린이 일하러 가야할 곳은 백인의 집이다. ‘녹색과 흰색이 섞여있는, 문은 빨간색인 예쁜 집에 행복한 가족이 살고 있고, 어머니와 아버지는 웃으며 제인과 놀아주고, 강아지와 고양이가(p.17)’사는 흑인들이 동경하는 백인의 집에서 폴린은 마치 그곳이 자신의 집인 양 쓸고 닦고 열심히 요리를 한다. 촐리는 분노와 충족되지 못한 욕망을 아내에게 퍼붓는다.
당연히 촐리와 폴린은 싸운다. 남자가 가하는 일방적인 폭력에 여자가 되받아치며, 부부는 육탄전을 벌인다. 사태가 심각해지면 그들의 아들인 새미는 촐리의 머리에 프라이팬을 내리친다. 촐리는 정신을 잃고 그제야 싸움은 끝난다. 촐리는 자기 집에 불을 지르고 아내 머리를 후려친다. 그 가족은 나앉게 된다. 전형적인 불행한 집구석이다.
[내쫓기는 것과 나앉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내쫓기면 어딘가 갈 데가 있지만, 나앉으면 갈 곳이 없는 것이다.…나앉는다는 건 무언가의 끝이었다. 우리의 형이상학적 조건을 정의하고 보완하는, 돌이킬 수 없는 물리적 사실이었다.(…)당시 셋집살이를 하던 흑인 촐리 브리드러브는 자기 가족을 나앉게 만들었기에 인간적 배려가 미칠 수 없는 영역으로 스스로를 내던졌다. 짐승 무리에 합류한 것이다. 정말로 늙은 개, 뱀, 쥐새끼 같은 검둥이가 되었다.
-p.32~33]
그런 짐승 같은 환경에서 자란 그들의 딸 페콜라는 의지할 대상이 없다. 가족이 페콜라를 보호하거나 지탱해주지 않으므로 그녀는 당연히 자존감을 지킬 수 없다. 정체성의 혼란이 와 ‘인종적 자기혐오’를 나타내게 된다. 페콜라는 자신을 부정하며 노란 머리의, 얼굴이 하얀, 파란 눈을 가진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자기 본연의 모습에서 시작된 모든 것을 거부한다.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사람은 페콜라만이 아니다. 백인의 피가 섞여 있는 갈색 피부의 깡마른 여자들은 조용한 흑인 동네에 살며 집을 멋지게 가꾼다. 교회에 열심히 다니며 백인의 일을 세련되게 하는 법을 배운다. ‘펑키함’을 죽을 듯이 싫어하며, 자신의 몸에서 그것이 절대로 나오지 못하게 막는다. 그 여자들이 남자를 잘 수발할 것을 알기에 그것을 필요로 하는 남자가 그들을 선택해 결혼한다. 자신은 유색인이라 생각하며 검둥이를 혐오한다. 미묘하며 구분이 잘 되지 않은 자신의 검둥이 성향을 ‘언제라도 뭉개려고 늘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p.113).
이 소설의 화자인 클로디아와 그의 언니 프리다에게 주어진 환경 역시 그다지 좋은 것은 아니다. ‘신분과 계급 모두에서 소수자’인 건 페콜라와 마찬가지다. 그들의 부모는 노동으로 근근이 살아간다. 그들도 걸핏하면 매를 맞는다. 겨울날 가죽띠로 맞는 둔탁함보다 봄의 개나리와 라일락에서 꺾은 녹색 회초리로 맞는 쓰라림의 강도가 훨씬 강하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그들과 페콜라가 다른 점은 가족이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준다는 것이다. 그들은 가족에게 불이익이 닥치면 같이 맞서 싸운다. ‘나앉는 것‘의 두려움을 알기에 재산과 소유를 향한 갈망을 가지고 셋집살이에서 벗어나고자 악착같이 허리띠를 졸라맨다. 페콜라가 끔찍한 일을 당해 임신했을 때 클로디아와 프리다만이 아기의 안전한 탄생을 기원한다. 그들은 서로 의지할 수 있는 둘이었기에 사랑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 연대, 특히 여성 연대의 필요성을 그들이 보여준다.
똑같은 상황일 때, 인간의 행동은 왜 이렇게 다르게 나타나는지 매번 궁금하다. 누군가는 내부로 향해 자신의 분노를 폭력으로 분출하고, 다른 누군가는 내부에서부터 사랑하고 뭉치며 같이 저항하는지가?
촐리는 젊은 시절 덤불 속에서 어린 소녀와 성행위를 할 때 백인에게 발각되며 굴욕당한 경험이 있다. 그는 그때 자신이 느낀 충격과 무력감에 대한 분노를 그 대상인 백인에게 표출하지 않고 어린 소녀를 증오하며 경멸한다. 그 이후로 촐리는 모든 분노를 바깥인 아닌 내부로 퍼붓는다. 자신이 가진 트라우마로 인한 고통을 아내와 딸에게 푼다. 이런 일은 너무 많다. 나약하고 졸렬한 인간들이 자신보다 약한 사람을 대상으로 퍼붓는 폭력적 성향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이 책을 읽으면서 어릴 때 갖고 놀던 인형이 생각났다. 그동안 완전 잊혀 진 기억이었다. 누가 나에게 그 인형을 선물했는지 모르지만 인형의 생김새는 페콜라가 되고 싶은 모습이었다. 노란 머리에 파란 눈, 긴 속눈썹이 있고 예쁜 드레스를 입고 있는 인형을 눕히면 눈이 감기는 것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난 인형을 갖고 놀았지만, 똑같은 모습의 인형을 선물 받은 이 소설의 화자인 클로디아는 그 인형에 거부반응을 일으키며 인형을 망가뜨려버린다. 자연스럽게 흑인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백인에게 옮겨놓는 무심함을 클로디아는 경계한다.
토니 모리슨의 첫 장편소설인 『가장 파란 눈』은 촘촘하고도 아름다운 언어로 여러 감정을 표현한 글이다. 사계절로 구분되어 있으면서도 넘나드는 시점에 군더더기가 없다. 작가가 제기한 인종적 문제의식은 결국 보편적 인간 삶으로까지 확대되고 연결되는 역할을 한다. 다만 팽팽했던 전개가 소설의 후반부에 촐리와 폴린의 삶의 설명으로 전환되는 부분이 아쉬웠다. 긴장이 풀어졌다. 서문에서 말했듯이, 작가가 의도한 대로 되지 않은 느낌이다.
[그랬다.
흑인 여자아이가 백인 여자아이의 파란 눈을 갈망하고, 그 갈망의 중심에 자리한 참혹함보다 더한 것이 있다면 그런 갈망이 실현되었을 때의 끔찍한 폐해뿐이다.…그애가 받은 손상은 전면적이었다.…팔을 접어 손을 어깨에 얹은 채 파닥거렸다. 날아오르려 영원히 기를 쓰지만 그 헛된 노력이 기괴할 정도인 새처럼. 닿을 수 없는-볼 수조차 없는-마음속 계곡을 가득 채운 푸른 허공만을 응시하며, 날개는 있지만 땅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헛되이 파닥거리는 새. -p.2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