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5월, 한가람 미술관에서 ‘라울 뒤피전(展)’이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뒤피는 내게 생소한 화가였다. 검색해보니 뒤피는 1877년 프랑스 르아브르에서 태어나 1953년에 생을 마감한 작가였다. 현대사의 굴곡을 고스란히 겪은 사람이겠다는 생각이 드는 동시에, 그 당시에 워낙 유명한 화가가 많았는데 ‘뒤피의 그림은 어떨까?’라는 호기심도 생겼다.
직접 본 뒤피의 그림은 뭔가 익숙한 느낌이 들면서도 특이했다. 그림에서 받는 느낌이 독특해 생각보다 뒤피의 그림 앞에 오래 머물러 있었다. 그림뿐만 아니라 뒤피가 만든 작품이 엄청 다양해 이 작가의 이력이 남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지껏 다닌 전시회장에서 이렇게 다양한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 것을 본 건 처음이었다. 뒤피가 디자인한 옷을 입은 마네킹까지 있을 정도였다. 영상으로 보는 파리 시립 현대미술관의 <전기 요정>도 멋있었다.
라울 뒤피는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의 르아브르에서 9남매중 둘째로 태어났다.(p.25) 가정 형편이 어려워 14세에 브라질 커피 수입상에 취업해 일찍부터 일을 해야만 했다. 그 뒤 미술학교를 다니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책의 삽화, 장식 미술, 직물 패턴 디자인, 일러스트, 연극 무대 세트와 의상 담당 등 다양한 창작 활동을 했다. 1937년, 파리 만국박람회를 위한 <전기 요정>이라는 제목의 250개의 패널로 된 거대한 벽화도 그린다. 그때 스페인 대표로는 피카소가 참여했었다. 피카소는 이때 ‘게르니카’를 출품했다. 나치 독일과 소련도 참여해서 신경전을 벌이며 경쟁을 했다.
프랑스 노르망디 해변에 있는 르아브르는 모네가 유년과 소년시절을 보낸 곳이기도 하다. 그곳에서 모네는 외젠 부댕을 만나 인상주의 화풍에 대한 기틀을 다졌었다. 르아브르 태생인 뒤피도 당연히 처음에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는다. 모네는 평생 인상주의에 머물며 그 속에서 자신의 그림을 발전시켰지만, 뒤피는 세잔의 그림에 더 영향을 받아 인상주의에서 야수파로, 그 뒤 입체파의 화풍까지 가져온다. 뒤피의 그림은 이 세 가지가 섞여 있어 묘한 느낌을 준다. 뒤피는 르아브르와 노년에 정착한 남프랑스의 바다를 좋아했다. 그래서인지 뒤피의 그림엔 바다가 많다. 르아브르와 생트-아드레스의 해변, 여러 곳에서의 레가타(요트 경기)를 소재로 한 그림엔 뒤피가 얼마나 바다를 사랑했었는지를 알 수 있을 정도로 정겨움과 따뜻함이 있다.
마담 뒤피의 초상화(p.211~225)
대부분 화가의 아내는 화가의 뮤즈이자 모델이 되어준다. 뒤피는 패션디자이너인 외제니-에밀리엔과 결혼하지만 나중에 별거를 했다. 그 후 베르트 레이즈를 만나 동거한다. 뒤피는 이 두 여인의 초상화를 많이 그렸다. 예술가와 사는 것은 어떤 것일까? 여러가지 어려움이 많을 것이다. 자신의 모습이 이렇게 그림으로 남겨진다는 것이 좋지만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결혼생활에 예술만 존재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좋을라나? 그림으로 남겨져 누군가가 계속 나를 쳐다봐 주는 것이?
20, 21, 24, 63, 68, 71, 76세, 뒤피의 자화상(p.55~63)
뒤피는 어린 나이에 직업전선에 뛰어들어야 했고, 세계 제 1차, 2차 대전을 겪은 사람이다. 노년엔 류마티스 관절염에 시달렸다. 그의 삶에 분명 힘든 시기가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작품에 인류의 재앙이나 자신의 병도 담기길 원치 않았다.(p.342)’
나는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시선,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은 오로지 작가가 결정할 몫이라고 생각한다. 예술이 꼭 시대를 그대로 묘사할 필요는 없다. 폭력과 폐허 속에서도 아름다움과 환희는 분명 존재한다. ‘라울 뒤피’라는 예술가가 안주하지 않고 계속적인 변화에서 자신만의 ‘뒤피스타일’을 완성해가는 모습에 그저 감탄한다.
이소영 작가의 책, 『이것은 라울 뒤피에 관한 이야기』는 제목 그대로 뒤피에 관한 이야기가 풍성하다. 뒤피의 전 생애에 걸친 작품에 대한 설명이 잘 되어 있고, 그림도 많이 수록되어 있어 전시회에서 보지 못한 뒤피의 그림을 감상하기에 좋았다.
[그가 남긴 말인 “삶은 나에게 미소짓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삶에 미소지었다”, “내 눈은 추한 것은 지우게 되어 있다”하는 문장을 곱씹어 보면 그가 죽는 날까지 그림에 고통과 슬픔보다는 희망과 행복, 낙관을 담고 싶어했음을 알 수 있다. 뒤피의 삶과 작품을 보면 세상은 끝끝내 아름다울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p.343]
『동물 시집』 표지와 내지(p.190~192)
1911년 뒤피는 기욤 아폴리네르의 『동물 시집』의 삽화를 목판화로 그린다. 이 책의 목판화는 별면 삽화 4점과 텍스트에 들어가는 삽화 26점, 총 30점으로 구성되어 있다.
1880년에 태어나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3일 앞두고 전쟁에서 입은 상처와 스페인 독감으로 사망한 기욤 아폴리네르의 『동물 시집』은 하나의 에피소드이다.(‘알코올’, 열린책들, 황현산 옮김, 역자 해설 중에서) 30편의 짧은 시와 30편의 목판화가 실려 있는 이 책의 내용은 동물들의 특징과 가치, 이미지들을 상징과 비유를 통해 서술되어 있다. 오르페우스의 등장과 그의 노래와 리라 소리를 듣기 위해 모여 든 동물들을 표현했다. 보통의 언어로 쓰여진 시가 아니라서 그런지 작가 자신의 주석과 번역자의 주석이 함께 있다.
평소에 시를 잘 읽지 않기에 ‘라울 뒤피’가 아니었다면 이 책을 읽지 않았을 것이다. 아폴리네르의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동물이 주는 상징이나 신화를 조금 알고 있으면 좋지만, 그런 것을 떠나 그냥 읽어도 그 의미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어떤 시에는 위트도 있어 재미있다. 이번에 토끼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하나 알게 되었는데 산토끼의 암컷은 이중임신이 가능하다고 한다.
[고양이
내 집에 두고 싶은 것 :
사리를 아는 여자 하나,
책 사이를 거니는 고양이 한 마리,
하루도 거르고는 살 수 없는
사계절의 친구들.
-p.19]
사리를 아는 여자는 어떤 사람일까? 역자의 해설에서 아폴리네르는 세상을 떠나기 6개월 전에 결혼했고 고양이는 집에 두지 못했지만 친구들은 늘 많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