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좋아하기에 책과 관련된 것은 무엇이든 나에게 흥미를 준다. 책 속에 책 얘기가 들어있으면 그 형식을 떠나 일단 관심이 간다. 책을 소재로 한 카툰 역시 매력적이다. 짤막하고 간결한 그림 속에 들어있는 위트와 유머, 많은 의미에 감탄한다. 별로 힘들이지 않게 읽을 수 있지만 거기에서 얻는 가성비는 다른 형식의 책보다 훨씬 높다. 독서 중 쉬어가거나 자투리 시간에 읽기에 적당해서 좋다.
톰 골드의 『카프카와 함께 빵을』도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다. 그렇지만 이 책은 생각보다 가볍지 않았다. 책과 관련된 거의 모든 것을 다루고 있어 깊이가 있었고, 작가의 글이 은유적이라 그것을 생각하고 납득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작가의 입장에서 글을 쓰고, 책을 출판하기까지의 고충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작품, 작가, 독자, 서점, 출판시장, 미디어, 미래의 독서 경향에 대해 비판적이고도 현실성 있게 서술되어 있어 공감뿐만 아니라 작가의 센스에 슬며시 웃기도 했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 있는 작가 소개에서 톰 골드의 카툰은 ‘세련되고 유머러스한 풍자가 녹아들어’ 전 세계 독자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다고 했는데 정말 맞는 표현이다.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에 연재된 카툰으로 구성된 이 책의 글과 그림은 모두 다 나름의 의미가 있어 버릴 것이 없었다.

나의 책장도 읽은 책보다는 읽을 작정이며, 시간 날 때 읽으려고 아껴 둔 책이 더 많다.

한 번씩 번역된 책을 읽을 때 책을 던지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작가는 주위의 모든 것을 깨부수고 싶겠지....

AI에 동물의 뇌를 직접 심는다는 소식도 들린다.(꼭 그래야만 할까?) 언젠가는 인간의 뇌도 심을 것이다. 미래엔 이북 리더기에 이런 헌책 모드가 들어있을지도 모른다. 작가가 상상한 기발한 생각으로 그치는 것이 아닌 실제가 될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어쨌든 어떻게 이런 멋진 생각을 해 낼 수 있는지! 작가는 언제나 위대하다.

책만으로 통했던 시대가 지났다. 찰스 디킨스가 살아 돌아오더라도 책만으로는 힘들 것이다.

제임스 조이스와 마르셀 프루스트는 언제든지 불쑥 나온다. 톰 골드 작가는 특히 제임스 조이스를 더 좋아하는 것 같다. 이북 리더기뿐만 아니라 언제든지 다른 용도로 사용되는 책!

『카프카와 함께 빵을』로 ‘아이스너상’ 최고의 유머 부문을 수상했다고 했는데 이 책에서 이 부분이 제일 이해하기 어려웠다.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다고 했더니 그레이스님께서
“허무주의적 실존주의.
죽음이 가장 실존적임.
존재를 증명할 방법이 도무지 없다고 생각.
차라리 불행을 느끼는 순간에는 존재느낌을 갖는다는,
그래서 삶이나 죽음이나 무에 무를 더한다.
그러므로 생을 마치는 순간만큼은 실존을 극단적으로 경험한다.
카프카가 벌레로 변신한 것도 그런 의미라고 해석하죠.“
라고 철학적으로 해석해주셨다. 역시 대단하신 분이다
단순히 나는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을 읽고 감동하면 그만이지만 ‘작가’라는 이름으로 사는 사람의 인생은 그리 간단하지 않을 것이다. 힘들게 글을 쓰고 어렵게 책을 출판하고, 독자들의 반응을 보고 그것으로 돈을 벌며, 만족하고 실패하고, 다시 새로운 작품을 구상하고.....똑같은 방식으로 되풀이되는 작가의 삶에는 엄청난 스트레스가 있을 것이다.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냐고 누군가는 얘기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뭔가를 창작해내는 고통만큼 힘든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도끼로 머리를 내려치는듯한 카프카적 신선함과 독창성으로 글을 쓰고 싶지만 그게 어디 쉽게 되는가? 끊임없는 창작의 고통은 죽어서야 끝날지도 모른다.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작년 에에올이 처음 개봉되었을 때 보고 싶었지만 기회를 놓치고, 올해 아카데미가 7개 부문에서 이 영화에 상을 줬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보러 갔다. 관객들의 입소문을 탔고, 아카데미에 많이 노미네이트되어 영화는 재개봉 되었다. 여우주연상을 받은 양자경의 수상소감도 좋았고 ‘가족’을 모티프로 한 영화라고 해서 기대되었다.
밀리의 서재에서 이 영화를 수입, 배급한 ‘워터홀컴퍼니’의 대표인 주 현씨가 <세상의 모든 에블린에게>라는 에세이를 연재중이다. 그의 말대로 이 영화는 “왁자지껄하고, 횡설수설하며, 엉뚱하고, 정신없고, 이상하고, 북적이고, 흔들리고, 괴랄하고, 불안하고, 비약하고, 휘청대는 영화”였다. 영화가 주는 메시지는 단순하고 이미 우리가 다 아는 것이다. 다만 실천이 어려울 뿐인데, 이런 내용을 2시간이 넘는 영상으로 표현하기위해 메타버스 기법을 동원하여 관객의 혼을 빼놓는다. 그렇지만 보통사람들의 메타버스답게 ‘버스-점프<평소에 하지 않을 이상 행동들(신발을 양쪽 바꿔 신는다, 일부러 종이에 손을 벤다 등)을 통해 다른 우주의 나와 연결되어 그의 기술을 빌려오는 것>’로 시공간을 넘나든다.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랑하는 사람과 미국으로 건너 와 세탁소를 운영하는 에블린은 어느새 투사가 되어있다. 식탁위에는 영수증이 쌓여있고 세무조사를 받기위해 그것을 정리해야하지만 손님들을 응대해야하고 몸이 불편해 미국으로 모셔 온 아버지의 식사를 준비해야한다. 외동딸인 조이는 동성애자이고 착하기만 한 남편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들은 에블린에게 뭔가를 계속 얘기하고 싶어 하지만 에블린은 그들의 말을 들어줄 여력이 없다......
조조영화 관람시간에 카페라떼 한 잔을 들고 오랜만에 혼자 영화를 보러갔다. 얼마 되지 않은 관람객중에 혼자 영화 보러 온 사람이 대다수였다. 영화가 시작되고 정신없는 스토리를 따라가느라 계속 집중해야했지만 나에겐 ‘투사 에블린’만 각인되었다. 주 현 대표의 에세이 제목인 <세상의 모든 에블린에게>의 제목처럼 내가 꼭 에블린같다는 생각을 했다. 영화는 에블린에게 우주의 곳곳에서 다르게 살고 있는 에블린들을 보여주며 지금과는 다르게 살라고 설득하며 에블린을 현실에 내려놓는다.
동그란 베이글안에 자신의 모든 것을 가두어버리는 무기력증과 허무주의에 빠지기 직전의 딸을 구하고, 언제나 ‘다정하게’ 살라는 철학적인 좋은 의미의 내용이었지만 결국 에블린은 자신이 운영하는 세탁소 안에 서 있게 된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겠고, 그 누구든 현명하게 이 세상을 잘 살려면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게 맞는데 결론은 다시 세탁소로, 엄마, 아내, 딸로 돌아 온 에블린에게 내가 본 것은 답답함과 먹먹함이었다. MZ세대가 특히 이 영화를 좋아했다고 했는데 그들이 본 것은 ‘엄마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사람’의 본질은 아닐 것이다.
작가, 엄마, 아버지, 직장인, 자영업자 등 자신이 선택했지만 전쟁같이 마주쳐야할 현실에서 다정하게, 긍정적으로 다른 사람을 배려하며 산다는 건 너무나 중요하지만 사실 힘들기도 하다. 바라지 않았지만 어느새 투사가 되어있는 자신이 타인처럼 느껴질 때도 많다. 그리고 언제나 현실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고 현실은 우리를 배반하기를 밥 먹듯이 한다. 누군가에게 어떤 이름으로 불리며 산다는 것, 그 이름에 걸맞게 일상을 기계적으로 나를 돌리며 살다보면 누구나 나사 하나를 빠뜨린 채 살게 된다. 지금의 현실이 무수한 과거의 선택과 결정의 결과라고 하지만 사실 그 순간 우리는 최선을 다했다.
한번쯤은 무기력과 허무주의에 빠져도 되지 않을까!
오늘만큼은 최선을 다해, 다정하게 살라고 얘기하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