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9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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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비판받을 수 있는 상황을 만든 사람을 일상에서 마주친다면, 우리는 더 이상 그를 상대하지 않거나 그 사람에게 굴레를 씌워 객관적으로 보기를 거부한다. 그러나 그런 사람을 소설에서 만나면, 잘 설명되어진 사연과 생각, 느낌, 이미지로 그때의 상황을 알게 되면, 오히려 더 잘 이해하고 동정하며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아마 이것이 소설의 힘일 것이다. 소설은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내가 모르는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이해하고 공감하게 해준다. 이것은 지금, 현실에서의 나를 성숙하게 만들며 사람과의 소통에 도움을 준다. 소설은 또한 나의 눈과 귀를 멀게 하여 희미하고도 흐릿하게 사람을 볼 수 있게도 한다. 객관적이고 비판적인 시각으로 봐야 할 것들을 두루뭉술하게 넘겨 버린다. 책을 읽어나가며 정확하게 내가 받아들이고 비판해야 할 것을 구분해야겠지만 쉽지 않다.

 

소스케오요네에게도 그렇게 사로잡혀 버렸다. 소설의 중반부까지의 이야기로 인해, “세상의 햇빛을 보지 못하고”, “희망의 그림자가 거의 비치지 않는 듯한이 부부에게 뒤늦게 객관성을 부여하기는 늦어버렸다. ‘나쓰메 소세키작가의 글의 힘과 문장의 아름다움에 몰입해 읽어 나가며, 소설 <()>을 통해 이미 알고 있지만 우리가 정한 도덕적이고 관습적인 잣대를 들이밀기엔 인간의 성정은 너무나 복잡하며, 운명이라는 괴물은 인식하기도 전에 이미 사람을 점령해 버린다는 것을 더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도쿄의 상당한 자산가의 아들이며 당대에 걸맞은 재인의 풍모를 갖추고 적이라는 말의 의미를 올바로 이해할 수 없는 낙천가였던 소스케에게 지금 그런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다. 대충 짐작은 가지만 무엇인지 확실히 알 수 없는, 분명 과거라는 것에 많은 지배를 받고 있는 소스케와 오요네부부는 무기력하고 의욕이 없이 살아간다. 그들 스스로 동굴에 들어 않아 처리해야 할 일들을 미루고 귀찮아하며 용기를 내지 못한다. 세상에 대한 관심을 끊고 활기 없이 서로만을 바라보며 쓸쓸하고 의좋은생활을 하고 있다.

 

[“우리는 그런 좋은 일을 기대할 권리가 없는 사람들 아닐까?” 하는 말을 과감히 내뱉는다. 아내는 그제야 눈치를 채고 입을 다물어버린다. 그렇게 두 사람이 묵묵히 마주 보고 있으면 어느새 자신들은 스스로 만든 과거라는 어둡고 커다란 구렁텅이 속에 빠져 있다. 그들은 자업자득으로 자신들의 미래를 덧칠해버렸다. 그러므로 자신들이 걷고 있는 앞길에서는 화려한 색채를 볼 일이 없을 거라고 체념하고, 오직 둘이서 손을 잡고 나아갈 생각이었다. -p51]

 

이 소설은 지금으로부터 거의 100년 전을 배경으로 메이지 시대의 화려한 변화를 거치며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모습을 다루고 있다. 소스케부부가 동굴 속에 갇혀 가난하고 숨죽이며 살아가고 있는 동안 소스케의 사촌인 야스노스케는 대학을 졸업하고 가다랑어 잡이 배에 석유 발동기를 장착하고, 잉크 없이 인쇄를 할 수 있는 기술 등에 자금을 투자해 사업을 하고 있다. 물려받은 재산이 많은 사무라이의 후예인 집주인 사카이역시 여유 있게 잘 살고 있다. 과거에 발목이 잡혀 주눅들어있는 소스케는 당당히 나서서 숙부에게 자신의 아버지의 재산을 돌려달라고 말하지 못한다. 낙인찍힌 사람의 소극적인 행동은 자신도 비참하게 하지만 동생인 고로쿠에게도 학업을 중단하게 만든다. 또한 그런 일에 편승해 도덕적인 잣대를 들이밀며 이용해먹는 숙모같은 사람들도 존재한다. 우리는 사람의 겉모습과 행동만을 보며 왜 그렇게 사냐고 비판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타인이 처한 상황과 생각에 온전히 들어가 보지 않으면 결코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지만 쉽게 그렇게 행동한다. 다른 사람들이 겪는 트라우마와 신경쇠약도 마찬가지이다. 겉으로 담담히 아무렇지도 않게 사는 모습도 그 속에 얼마나 많은 고통과 고독, 가난이 있는지 모른다.

 

작가는 그들의 과거를 소설 중반부의 끝 즈음에 밝힌다. 그 사실을 밝히기 전에 오요네가 세 번의 유산을 겪는 과정을 서술한다. 남자 작가인 소세키가 오요네의 심정을 묘사한 부분은 탄복할 만큼 절절해서 작가의 필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엄숙한 지배 아래에서 서 있던 몇 달 며칠의 자신이 신기하게도 똑같은 불행을 되풀이하도록 만들어진 어미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귓가에서 때아닌 저주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녀가 이불 속에서 삼칠일 동안의 안정을 탐할 수밖에 없도록 생리적으로 강요당하는 사이 그 저주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그녀의 고막을 울렸다. 오요네가 삼칠일 동안 편안히 누워 지낸 시간은 정말 비할 데 없는 인내의 3주일이었다. -p164]

 

소스케와 오요네의 과거의 사건은 생각보다 짧게 서술되어 있다. 난 그 점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남녀가 우연히 만나서 한 사람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몹쓸 짓을 하고, 그 모든 것과의 관계도 끊을 만큼 사랑에 빠질 수 있는 것은 이성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겨울 밑에서 봄이 머리를 쳐들 무렵에 시작되어 벚꽃이 다 지고 어린잎으로 색을 바꿀 무렵 모든 것이 끝나버린 그 일은 운명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그것은 적절히 그 자리에서 멈추어버릴 것이 되지 못한다. 그럴 수 있었다면 그 운명의 장난은 시작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눈에 부도덕한 남녀로서 부끄럽게 비치기 이전에 이미 불합리한 남녀로서 불가사의하게 비쳤던 것이다.....

그들은 창백한 이마를 순순히 앞으로 내밀고 거기에 불꽃과도 같은 낙인을 받았다. 그리고 무형의 쇠사슬에 묶인 채 손을 잡고 어디까지나 함께 보조를 같이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p189~190]

 

소스케는 둘이서 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을 때 그들의 그림자가 구부려져 절반쯤 토담에 비친 것을 기억하고 있다.’- 문 앞에서 시작된 그들의 사랑은 그들 스스로 문 안에 갇혀 있게 했고 세상의 문 밖이라는 유형지에서 평범한 파란의 시기를 보내게 만들었다. 그 경계에서 탈피하고자 소스케는 종교의 힘을 빌린다. 그러나 10일 동안의 선사에서의 소스케에게 주어진 공안은 허무하고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한다. 결국 그는 현실로 돌아가 정면으로 돌파해 안에서든, 밖에서든 자신 스스로 문을 열 수 밖에 없다.

 

절벽 바로 아래에 있는 소스케의 집은 햇빛도 잘 들지 않고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염려가 있다. 하지만 원래 대숲이었던 곳을 개간할 때 뿌리를 파내지 않고 그대로 묻어두어 땅은 의외로 단단하다고 한다. 소스케와 오요네가 용기를 내서 문을 연 그 곳이 금방 겨울이 올 정도로 그들을 힘들게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의 굳건한 사랑이 위태로워도 무너지지 않게 하는, 땅을 단단하게 지탱하는 뿌리처럼 견고하기만 하다면 괜찮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사랑은 무척이나 견고하다.

 

하이쿠를 사랑하고 많이 쓴 작가답게 이 책에는 아름다운 문장이 많다.

-푸른 하늘에 바람 불어 구름 사라지니, 수많은 보석을 모아놓은 듯한 달이 동쪽 산에 떠오르네.

-밖은 굵은 비로 갇혀 있다.

-이 쓸쓸한 하늘 아래로 젖으러 나가는 소스케에게...

-겨울 해는 짧은 하늘을 적나라하게 가로질러 서쪽으로 얌전히 떨어졌다.

 

가을은 아름답지만 악착같이 붙어있는 여름을 떼 내고자 비를 많이 불러오기도 한다. 촉촉하게 비 내린 다음날, 그만큼 햇빛의 색은 희미하고 바래져 있다. 그리고 또 비를 불러온다. 연거푸 가늘게 가을비가 내리던 날 읽은 나쓰메 소세키의 의 문장과 '소스케와 오요네는가을비와 함께 오는 차가운 안개처럼 내 마음에 스며들고 젖어 들었다.

 

[그들은 자연이 자신들에게 초래한 가공할 만한 복수 앞에 부들부들 떨면서 무릎을 꿇었다. 동시에 그 복수를 감수하고 얻은 서로의 행복에 대해 사랑의 신에게 향을 피워 올리는 일을 잊지 않았다. 그들은 채찍질을 당하면서 죽음을 향해가는 사람들이었다. 다만 그 채찍 끝에 모든 것을 치유해주는 달콤한 꿀이 발라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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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10-12 15:35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소세키의 문장은 정말 시처럼 아름다운거 같아요. 그래서 문장이 더 그림처럼 느껴지는것 같아요. 저도 둘의 과거의 일이 자세한 설명없이 간략히 묘사한 게 좋은거 같아요. 이미 지난 일을 들춰서 설명하면 오히려 작품의 흐름에 안맞을거 같다는 ㅎㅎ 많이 여운이 남는 작품인거 같아요 ^^

페넬로페 2021-10-12 17:03   좋아요 3 | URL
특히 문의 문장이 참 좋더라고요.
내용도 그렇고 인물들의 분위기가 애잔해서 더 그런지도 모르겠지만요~~
방금 새파랑님 서재에 가서 문 리뷰 자세히 읽었는데 저와 느낌이 같은 부분이 있어 반가웠어요^^

새파랑 2021-10-12 17:56   좋아요 3 | URL
페넬로페님과 비슷한 느낌이었다니 영광입니다~!!
제목을 <문>으로 지은건 정확한거 같아요 ^^

레삭매냐 2021-10-12 16:06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고저 믓지십니다 -

꾸준한 소스키상 읽기!
존경하옵니다.

저도 닐거야 하는데...

페넬로페 2021-10-12 17:05   좋아요 4 | URL
소세키의 전작은 읽기가 힘들듯 해요. 몇 권만 더 읽고 다른 곳으로 넘어 갈 예정입니다^^

미미 2021-10-12 16:10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저도 페넬로페님이 써 주신 첫 문단때문에 소설 읽기를 더 좋아합니다. 그래서 소설에는 도덕의 경계가 없다고 표현하는것도 같고요. 저도 읽어보고 싶네요. 마지막 문단 (가을은 아름답지만...)시적이예요~♡♡

페넬로페 2021-10-12 17:07   좋아요 4 | URL
네, 그렇죠!
소설의 그런 장점으로 계속 읽어내는 것 같아요^^
소세키 작가의 분위기를 조금 흉내내어 봤는데 영 꽝입니다 ㅎㅎ

mini74 2021-10-12 16:13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앗 새파랑님에 이어 페넬로페님까지 소세키 장작을 태우시는겁니까 ㅎㅎㅎ 저도 소설의 힘에 동감~~합니다

페넬로페 2021-10-12 17:09   좋아요 6 | URL
장작 열심히 태우고 있는데 생각보다 쉽지가 않아요.
한 작가의 작품을 꾸준히 읽어내는 분들이 새삼 대단해 보입니다^^

새파랑 2021-10-12 17:56   좋아요 6 | URL
전 페넬로페님 따라 읽은것 뿐입니다~!!

scott 2021-10-12 18:01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이 작품은 소스케와 요오네의 삶을 하이쿠 시처럼 압축 시켜 놓은 것 같습니다
아내가 연달아 아이를 유산 한 후에 새 생명이 태어 났던 당시에 써서 인지
소세키 작품 중에 가장 애잔하고 따스한 느낌이 가득~

페넬로페 2021-10-12 20:18   좋아요 6 | URL
아무래도 작가의 그런 경험이 있어 더 애잔하게 쓰인것 같아요.
한번씩 책을 읽을 때 작품의 내용보다 문장에 더 끌릴 때가 있더라고요^^

붕붕툐툐 2021-10-12 23:1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소설 진짜 너무 좋아요. 소설의 힘에 공감합니다. 현암사 소세키 책이 올라올 때마다 언젠간 만나겠지 하고 있어요~ 문이라는 작품에 또 맘이 가네요~ㅎㅎ

페넬로페 2021-10-13 00:02   좋아요 2 | URL
소설의 힘과 매력때문에 끊임없이 새로운 소설이 나오고 우리는 흡입하듯 또 소설을 읽는 것 같아요.
토툐님의 ‘문‘을 읽고 난 후의 느낌, 넘 궁금합니다^^

바람돌이 2021-10-13 01:0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페넬로페님의 쓸쓸하고 의좋은 생활이란 표현이 훅 들어오네요. 소설의 분위기와 절묘하게 맞아들어갈 것 같은 느낌이에요.

페넬로페 2021-10-13 09:25   좋아요 2 | URL
‘쓸쓸하고 의좋은‘은 소세키 작가의 표현입니다.
이번 책은 모든 곳에서 작가의 문장과 표현이 돋보였어요.
제가 특히 이 책에 몰입해서 저만의 느낌인지는 모르겠지만 느낌들이 참 좋더라구요!

서니데이 2021-10-13 21:0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한 세기 전 사람들은 지금과 많이 다른 생활이었을거예요. 그렇지만 그 때 사람도 지금 사람도 각자 자기 시간을 살면서 여러가지 어려움을 만나는 것은 달라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페넬로페님 잘읽었습니다. 좋은밤되세요.^^

페넬로페 2021-10-14 01:33   좋아요 1 | URL
네, 그 어디서나 어려움은 존재하고 그러한 것을 겪는 사람의 마음은 항상 추운 겨울 한복판에 있는것 같아요.
서니데이님,
오늘은 일교차가 심하네요.
항상 건강 유의하시고 목요일이 된 오늘도 행복하시기를 바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