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적(敵)은
제국이나 자본이라고 불리지 않는다.
그것은 민주주의라고 불린다.”
- 알랭 바디우
대의(代議) 민주주의는 국민 정치권력을 선거로 한 사람 혹은 다수 대표자에게 양도하는 이념이다. 사람들은 대의 민주주의의 산실인 의회가 국민 의지를 실행하는 '공복'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 사정은 그렇지 않다. 헤겔 지적처럼 의회는 관료들 판단을 국민에게 알리고 마치 국민 자신이 결정한 것처럼 생각하게 만드는 정교한 장치다. 의회가 탄생한 역사를 보면 그러한 정교한 조작이 반영되어 있다.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지배계급은 ‘민주주의’란 단어를 몹시 혐오했다. 하지만 점차 세월이 지나자, 지배계급은 민주주의 운영 규칙을 자신들이 정할 수만 있다면 민주주의가 그리 큰 위협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게다가 나폴레옹(1769~1821)은 도시에서 어떠한 일이 일어나도 정보를 잘 통제하고 유언비어를 퍼뜨려 유권자들을 겁줄 수만 있다면, 선거에서 당당히 승리하고 자신이 민주적임을 몸소 증명했다.
1871년 파리 코뮌(역사상 최초 파리 시민들이 세운 사회주의 자치 정부) 때문에 프랑스는 민주주의를 도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부르주아는 딜레마에 빠졌다. 민주주의는 인민대중이 지배함을 의미하는데, 이들은 대체로 가난한 자들이다.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 특권층과 비특권층 간의 이해관계는 명백히 달랐다. 따라서 인민대중이 정치에 참여하면, 지배계급의 기득권이 훼손될 수 있었다. 하지만 민주화는 불가피해졌다. 비록 지배계급은 이러한 상황을 반기지 않았지만, 사회주의 혁명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민주주의를 도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민주주의 제도를 조작할 필요가 있었다. 가장 노골적인 조작은 의회 기능에 엄격한 한계를 부여하는 것, 특정 집단과 특정 기구에 특별 투표권을 부여하는 것, 상원을 통해 하원을 압박하는 것이었다.
영국 지배계급도 대중이 선거권을 획득해도 자신들이 국가 정책을 결정하는 일에 크게 지장이 없음을 점차 깨달았다. 국가 권력 대부분은 의회의 통제 범위 밖에 있었기 때문이다. 국가 권력은 비선출 조직인 군부나 경찰, 사법부, 행정부에 있었다. 이러한 국가 조직은 의회 활동을 규정하고, 마음에 안 드는 조치는 위헌으로 거부할 수 있었다. 의회는 대중이 지배계급을 압력 하는 창구가 되지 못하고, 대중의 대표자를 길들이는 수단으로 전락했다. 지배계급은 자신들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만 의원들이 요구사항을 제기하도록 강요했다.
이처럼 지배계급이 민주주의를 받아들였다고 해서 민주주의로 전향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민주주의 효과를 약화하려는 시도였다. 또한 정부와 언론인, 자본가, 금융가는 민족주의를 앞세워 지배계급과 피착취 계급이 공동운명체라고 주장했다. 한쪽이 호화롭게 사는 동안 다른 한쪽은 땀 흘려 일하거나 굶어 죽는데도 그들 모두 ‘한 배를 탔다’는 것이다. 그러한 조치로 지배계급에게 치명적인 위협으로 여겨졌던 선거권이 노동자 대표들을 길들이는 수단으로 바뀌었다.
무엇보다 영국 의회는 상업자본 뜻에 따라 선거가 좌우되는 상황을 창출하고자 하였다. 토리당(국교회와 지주계급를 대표)과 휘그당(비국교도와 상인을 대표) 중 어느 당도 의회가 국민 전체를 대표하는 기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단순히 왕실에 대해 자신들 특권을 보장하는 장치로 간주했다. 게다가 의회는 이러한 계급 성격을 계속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정치를 완전히 독점하던 휘그당과 토리당의 수십 개 가문은 장남을 상원에, 차남 이하 아들을 하원에 보내어 국가를 교대로 통치했다(대륙의 프랑스나 스페인과는 달리 영국은 귀족 특권이 장남에게만 상속되었다). 의원 3분의 2는 그냥 임명되었고 나머지 3분의 1만 유권자 16만 명가량이 선거로 뽑았는데, 그나마 일부 투표는 매수로 이루어졌다. 선거권을 부여하기 위해 지대 수입을 파악했던 호구조사는 처음부터 토지 소유 계층이 의회를 지배하도록 보장했다. 이처럼 영국도 프랑스에서처럼 선거권을 생득권리가 아니라 토지 소유에 근거했기에 하층계급을 민주주의에서 훨씬 쉽게 배제할 수 있었다.
1787년 미국 헌법제정회의에서 보여준 지도력으로 흔히 미국 헌법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제임스 매디슨(1751~1836)은 모든 시민이 투표할 수 있는 고대 직접 민주주의인 ‘순수한’ 민주주의를 비판했다. 시민들의 정념으로 폭압적인 의회가 만들어질 수 있다고 보면서, 그는 “모든 아테네 시민이 소크라테스였다 해도 모든 아테네 민회는 여전히 폭도의 모임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매디슨은 소수가 다수를 대표하여 민중의 정념을 숙고와 심의로 조정할 수 있는 대의정치 방식을 선호했다.
미국 건국 아버지 중 한 명인 해밀턴은 한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부자들이 가지고 있는 이점이 있습니다. 부자들 악행은 아마도 궁핍한 사람들 악행보다는 국가 번영에 더 이로울 것이며, 도덕적으로 덜 타락한 것입니다.” 해밀턴은 부유함이 대표 선발에 미치는 영향을 그 어떤 사람보다도 공개적으로 옹호했다. 그는 경제력이 역사적 위대함을 향해 나아가는 올바른 길이라고 여겼다. 따라서 그는 부유하고 용감하며, 근면한 상인들이 국가를 지도하길 바랐다. 18세기 미국의 대의 정부는 선거 그 자체만으로 귀족적/과두적 효과를 낳을 것으로 이미 알고 있었다.
형식상 하층계급이 선거에서 배제되지 않은 현대 대의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대중과 부자 의견이 갈릴 때는 부자 의견이 채택된다. 정치학자 벤저민 페이지와 마틴 길렌스는 이익집단과 부유한 미국인, 일반 시민 중에서 미국의 공공정책에 실제로 영향을 미치는 집단을 측정하는 방법을 고안했다. 두 사람은 1981년부터 2002년까지 일자리와 임금, 교육, 건강보험, 시민권, 경제 규제, 문화 관련 쟁점, 외교 정책과 같은 분야에 제안된 정책 약 2,000개를 분석해서 세 집단 중 어떤 집단이 최종 결과에 영향을 미쳤는지 살폈다. 그들은 “일반 시민은 연방정부 정책에 거의 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라는 결론을 얻었다. 조사 결과는 일반 시민 중 3분의 1 정도만 자기 뜻을 관철했다. 하지만 이조차도 그들 견해가 이익단체나 부자 견해와 일치할 때만 가능했다. 일반 시민은 정책 수립 과정에서 의미 있는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 그들 목소리는 부유하고 조직적인 이익집단, 특히 기업 목소리에 묻혀 아예 들리지 않는다. 이 연구를 통해 미국인 대부분이 느끼는 사실, 즉 자기 목소리는 중요하지 않으며, 일반 시민은 자기가 통치되는 방식에 대해 의미 있는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는 자연 상태를 가정하여 국가 성립과 대의 정치를 정당화한 철학자 토머스 홉스(1588~1679)의 사회계약론은 심오한 뜻이 있다. 철학자 안토니오 네그리(1938~ )는 인간이 자신의 정치권력을 다른 사람에게 양도한다는 홉스 주장을 다시 해석했다. 권력을 대표자에게 양도하는 순간, 우리는 권력이 없는 존재, 즉 글자 그대로 노예로 전락한다. 그리고 권력을 양도받은 대표자는 과잉된 권력을 가진 존재로 사람들 위에서 군림하게 된다. 자발적인 권력 양도가 ‘자발적인 복종‘으로 이어지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다. 그래서 대의 민주주의는 결코 민주주의적일 수가 없으며, 오히려 진정한 민주주의를 가로막는 심각한 장애가 된다. 루소도 영국식 의회민주주의를 최선의 사회 체제라고 보지 않았다. 선거란 시민의 권리인 동시에 약점이기 때문이다. “영국인은 스스로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커다란 착각이다. 그들은 의회 의원을 뽑는 동안에만 자유로울 뿐이다. 의원들이 선출되는 즉시 시민들은 곧바로 노예가 되어버린다.”
데이비드 흄은 인간이 결코 자유롭게 사회계약을 맺기 어렵다는 사실을 ‘가난한 농민들과 장인들의 사례’를 들어 설명한다. 다른 지역으로 떠나서는 결코 살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은 어떤 계약이든 달게 수용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만약 진정으로 사회계약이 가능하려면,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주어진 국가나 사회를 떠나서 살 수 있어야만 한다. 이 점이 바로 흄이 당시 유행하던 다양한 사회계약론 모두가 허구에 불과하다고 공격했던 핵심 근거다. 우리는 어떤 국가나 사회를 자율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국가나 사회에 맹목적으로 던져져 훈육되는 존재일 뿐이다.
홉스 사상은 표면상 ‘리바이던’이란 국가의 옹호가 아니다. 그의 철학은 바로 합리적인 계산으로[자유의지로] 자신 이익을 추구하는 개인이 계약을 통해 자신 주권을 ‘양도’했지만, 개개인의 내적인 힘[자유의지]이 전혀 정치에 반영되지 않는다는 의미다. 개개인의 집합은 그저 다중일 뿐이며, 국가라는 끈이 없다면 이 다중은 그저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는 구슬에 불과한 존재일 뿐이라고 홉스가 주장하기 때문이다. 홉스의 세계에서는 국가와 다중이 있을 뿐, 개개인들이 서로 간의 관계로 형성하는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홉스가 자신 이론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전제한 자발적 계약[자유의지]과 결과로 나타나는 반-개인주의[반-자유의지]가 홉스 정치철학의 핵심이다. .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1883~1950)는 유권자들이 정치가들의 영향력에서 독립된 정치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음을 발견했다. “정치 과정에 대한 분석에서 우리가 알게 된 것은 대개 진정한 의지가 아니라 ’가공된 의지’(manufactured will)다. 개인이 정치가들 제안과는 독립된 명확한 자기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가정하지 말아야 한다. 정치에서 대중의 선호는 정치가들 행위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역사학자 로버트 위브(1930~2000)는 대중의 참정권은 시민이 “개인의 자유의지를 토대로 사회적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권력을 쥐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고 설명한다. “보통 선거권과 다수결이라는 규칙은 그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개인이 국가를 형성한다는 이미지를 사람들 상상력 속에 불어넣었다.” 결국 ‘자유로운 인간이 자기가 살아갈 정치 형태를 스스로 결정하기 위해 투표장에 가는 장엄한 모습’은 그저 환상에 불과하다. 개인 선택이나 동의 행위 범위를 넘어 사람들 삶을 지배하는 권력 구조가 이미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생각하는 민주주의에 관해서 어려운 질문을 던져보라고 요구한다. 그는 선거가 결국 가장 뛰어난 인물을 뽑는 것이 목적이기에 귀족정 방식이라고 설명한다. 만약 민주주의의 진짜 의미를 다수가 통치하는 제도라고 간주한다면, 미국과 같은 선거제는 오늘날 일부 정치학자가 판단하듯 과두정에 가깝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저서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바람직한 정체(政體)와 그렇지 않은 정체를 구분하고 세부 정체에 우선순위를 부여했다. [바람직한 정체(왕도정>귀족정>금권정), 타락한 정체(민주정>과두정>참주정)]
“정체에는 세 종류가 있고, 그것들이 왜곡된 또는 타락한 형태도 셋이다. 세 종류의 정체란 왕도정체와 귀족정체 그리고 세 번째로 재산평가에 근거한 정체다. 세 번째 정체는 금권정체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해 보이지만, 대부분 사람은 혼합정체라고 부르곤 한다. 이들 가운데 최선은 왕도정체고, 최악은 금권정체다.
왕도정체가 왜곡된 것이 참주정체다. 참주정체는 왕도정체가 타락한 것으로, 사악한 왕이 참주가 된 것이다. 참주는 자신 이익을 추구한다. 참주정체가 세 가지 왜곡된 정체 가운데 최악임은 분명하다. 반면 과두정체는 치자들의 악덕으로 빚어져 귀족정체에서 생겨난다. 그들은 부를 가장 중요한 요소로 보기에 소수 사악한 자들이 권력을 장악한다. 끝으로, 민주정체는 금권정체에서 생겨나는데, 이 둘은 서로 이웃하기 때문이다. 금권정체도 다수자 지배를 목표로 하는데, 재산평가를 충족하는 자는 누구나 동등하기 때문이다. 이상이 가장 흔한 정체 변화다. 약간의 변화만 생겨도 그러한 이행은 아주 쉽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1892~1982)는 “지금까지 알려진 민주주의는 대중 전부가 아니라 일부 특권층만 자유롭고 평등했을 때 가장 융성했다“고 지적한다. ”일반인에게 민주주의 제도의 기원이며 표본이라고 간주되어 온 아테네 민주주의가 일부 특권층 사람들 사이에서 만들어지고, 또 그들의 특전이 되어 온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또한 근대 민주주의 전통의 창시자인 존 로크가 18세기 영국 휘그당에 속한 과두정치의 중요한 철학자이며 예언자였던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더욱이 19세기 영국의 민주주의의 전당(殿堂)이 소수 재력가에게만 선거권을 갖게 하는 방식을 토대로 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1883~1946)도 비슷한 지적을 했다. “민주주의는 여전히 시험 중에 있다. 이유는 부자들이 숫자 면에서 얼마만큼 대의(代議)를 하는가와는 상관없이 부자들 힘은 수적인 비율보다 항상 클 것이기 때문이다.”
루소는 스스로 법을 만드는 국민과, 자신을 대신하여 법을 만들어 줄 대표를 선출하는 국민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고 보았다. ‘대의정’과 ‘민주정’은 근본적으로 서로 다르다. 오늘날에는 대의 정부를 민주정에서 파생한 것으로 간주하지만, 18세기 후반에는 대의제에 따라 조직된 정부는 민주정과 확연히 다른 것으로 이해되었다. 오직 선거에 기초한 정부에서는, 공직을 가질 동등한 기회를 모든 시민이 가질 수 없다. 관직 배분 차이는 하찮은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의회에 농부보다 변호가가 더 많다는 점은 시시한 문제가 아니다. 변호가가 의회에 들어갈 기회를 더 많이 가지게 된다는 것이 농부에게 상대적으로는 무관심한 일이라 해도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몽테스키외, 루소 모두는 선거가 본질적으로 과두정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과두정은 선거가 사용되는 환경과 조건에서 파생된 것이 아니라, 선거 그 자체 속성에 기인한 것이라고 믿었다.
수많은 자료는 선거가 아닌 ‘추첨’[제비뽑기]을 민주정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소개하고 있다. 더욱 중요한 점은 추첨이 바로 민주적 선출 방법으로 묘사된 반면, 선거는 다소 과두정이나 귀족정인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추첨을 통해 집정관을 지명하는 것은 민주정이고, 선거에 의한 것은 과두정이다”라고 말했다. 추첨은 민주적이고 선거는 과두적이라는 생각은 우리 상식을 벗어난다.
몽테스키외도 추첨을 민주주의로, 선거를 귀족주의로 밀접하게 연관시킨다. 몽테스키외는 “추첨에 의한 선발은 민주정의 특성이요, 선거에 의한 선발은 귀족정 특성이다. 추첨은 누구의 감정도 상하게 하지 않는 선발 방법으로, 각각 시민에게 조국을 위해 봉사하고자 하는 희망을 준다”라고 썼다. 몽테스키외는 민족정이 추첨과, 그리고 귀족정이 선거와 어울린다는 사실을 하나의 불변적인 법칙으로 상정했다. 이 두 방법은 어떤 독특한 문화에 속한 것이거나, 어떤 민족에게만 한정된 산물이 아니다. 이 둘은 바로 민주정과 귀족정의 본질 그 자체에서 파생된 것이다.
루소 역시 <사회계약론>에서 추첨을 민주정으로, 선거를 귀족정으로 연결시킨다. 행정관을 선발하는 데에는, 어떤 방법을 사용할 것인지를 선택해야 한다. 이 질문을 다룬 구절에서, 루소는 몽테스키외 말을 인용하며, “추첨에 의한 선발은 민주정의 본질”이라는 그의 생각에 동의를 표한다. “추첨은 민주주의에 적당한 선발 방식이다. 추첨은 어떤 특정집단의 의지 개입 없이 행정직을 배정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민주정의 자유 원칙’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민주정의 기본 원칙은 시민이 통치자이자 피통치자라는 두 위치를 번갈아 가며 차지할 수 있어야만 한다. “자유의 형태는 다스리고 또 다스림을 받는 것을 번갈아 하는 것이다.” 민주적 자유는 내일이면 자신이 차지할 그 자리에 오늘 앉아있는 그 누군가에게 복종하는 것이다. 통치자는 입장을 바꾸어 지배받는 사람 처지에서 결정을 내리도록 유도된다. 피통치자 처지를 잘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정의를 외치는 것, 즉 권력에 있는 사람들에게 통치를 받는 사람들 처지를 상상해 보라고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들에게 그렇게 할 수단과 동기를 제공하는 것이 중요하다. 결과적으로 이 근본적인 원칙에 따르면 추첨은 합리적인 해결책이 된다.
오늘날 생각과는 달리, 시민이 권력을 행사한 대부분 정치제도에서는 추첨이 사용되었다. 추첨은 로마 시민 의회에서도 제한적이기는 했지만 일정한 역할을 담당했다. 중세와 르네상스 시기 이탈리아 공화국들에서는 추첨을 통해 행정관을 선발하곤 했다. 11세기와 12세기에 설립된 초기 이탈리아 코뮨에서는 행정관을 선발하기 위해 추첨을 사용했다. 공화주의 부흥의 중심지였던 피렌체에서, 공화주의 체제 핵심은 바로 추첨을 통한 행정관 선출이었다. 베네치아에서는 1797년 몰락할 때까지도 추첨이 계속 사용되었다. 추첨의 목적은 자신이 속한 파당 사람을 선택하는 도당들을 막기 위해 고안되었다. 피렌체인들도 공화정 기간 동안 다양한 행정관과 정무위원회 위원 선발에 추첨을 이용했다. 14세기 말 추첨은 행정관 선발에 공평성을 보장하고 파당을 막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추첨은 개인이나 당파에 의해 행정관이 선출이 조작되는 것을 막았다. 어느 누구도 추첨 과정의 단계를 통제하거나,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끌어낼 수 없었다. 추첨이라는 중립적이고 조작 불가능한 메커니즘이 바로 공정하다고 느끼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추첨이 평등하고 민주적인 특성이 있다는 신념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은 아니며, 실제로 15세기 말까지도 논란의 여지가 없던 사안도 아니었다. 오늘날 우리도 추첨을 괴상한 관습 정도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추첨은 통치에 특별한 재능이 없는 사람을 포함해, 무작위로 아무나 선발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따라서 추첨은 분명 결점이 많은 선출 방법이고, 추첨이 이제 사라진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같은 결론은 타당한지 의심해 보아야 할 주장이다.
고대 아테네 민주주의에서 모든 평의회위원들과 판사들 뿐 아니라 대부분 행정관은 전문가가 아니라 보통 시민이었다. 아테네인들은 각각의 정치적 기능은 비전문가에 의해서 수행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내린 가정은 만약 전문가들이 정부에 관여하게 되면 불가피하게 그들이 지배하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아테네인들은 아마도 집단적 정책 결정에서 다른 사람들이 가지지 않은 지식과 기술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권력의 한 근원이 되며, 법률적으로 그들 각각 권력이 어떻게 규정되든, 그러한 기술을 가진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이점을 갖는다고 판단한 듯하다. 전문가로 이루어진 평의회 또는 전문 행정관이 민회를 좌지우지할지도 모르고, 법정에서 전문가들은 다른 판사들의 중요성을 축소시킬 것이다.
마이클 샌델은 최근의 역사적 경험으로 봐도 “최고의 인재들이 저학력자 동료 시민들보다 통치를 잘한다는 생각은 능력주의 오만에서 비롯된 신화일 뿐”이라고 말한다. 1945년 윈스턴 처칠의 보수당을 눌렀던 영국의 클레멘트 애틀리(1883~1967) 내각의 장관 가운데 일곱 명이 탄광 갱부 출신이었다. 매우 유능하다고 평가받은 외무장관 어니스트 베빈은 전후 세계질서의 설계자 중 한명이었다. 그는 11세 때 학교를 중퇴하고 노동조합 지도자로 성장했다. 하원 의장과 부수상을 지낸 허버트 모리슨은 14세에 중퇴하고 지방정부에서 일하며 명망을 쌓았는데, 런던의 대중교통 시스템을 개발한 공로가 컸다. 보건부 장관 어나이린 베번은 13세에 중퇴한 뒤 웨일스에서 광부로 일했고, 장관이 되어서는 영국 국민의료보험 제도를 수립했다.
‘20세기 영국에서 가장 개혁적인 정권으로 평가되는 애틀리 정권은 노동계급에 힘을 실어주었으며, 애틀리 전기 작가는 ‘영국의 새로운 사회계약에 쓰일 윤리 언어를 마련했다’고 평가했다. 샌델은 “정책 결정이 ‘스마트하냐 우둔하냐’ 문제로 여겨질수록 ‘스마트한 사람(전문가나 엘리트)’이 결정하고, 일반 시민들이 토론과 결의를 하는 일에서 배제하는 게 옳다고 여겨지지 마련”이라고 ‘정치 엘리트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