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역사를 돌이켜 보면 매 시기마다 문화가 같지 않았다. 이러한 문화적 차이는 개인 관심사와 행동을 서로 다르게 구성했다. 만약 특정 시기, 특정 문화가 개인감정을 중요하게 여기고 그 감정을 표현하는 어휘를 풍부하게 제공하면, 사람들은 자신 감정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며, 더 자유롭고 적극적으로 자신 감정을 표현했다. 이처럼 시대마다 문화가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우리가 이해한다면, 현대인이 중요하게 여기는 경험과 감정 역시 역사 산물임을 알 수 있다. 예컨대, "경험해 보지 않았거나 당해보지 않았다면, 말조차 꺼내지 마세요!"라는 우리 표현은 어느 시대에서나 항상 옳았던 말이 아니다.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현대인의 전형적인 특징이 '개인 경험을 소중히 여기는 습성'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경험해 보려고 새로운 땅과 풍경, 음식을 찾아 나서며, 집에서 억지로 지켜야 할 금기에서 벗어나고자 휴양지로 떠난다. 배낭 여행자는 맛있는 음식과 아름다운 풍경뿐 아니라 낯선 곳에서의 위험과 어려움, 불편함을 즐기고자 지구 반 바퀴나 돌아 여행하고, 그 고난을 소중히 간직한 채 집으로 돌아온다.” 우리는 이러한 우리 성향이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고대 로마인들은 분명 이러한 생각을 떠올릴 수 없었다.
‘로마인들은 다채로운 삶을 체험하지 않기 위해 의식적으로 몹시 노력했다. 이들이 보기에 모험을 즐기는 사람이나 좋아할만한 이러한 욕구는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실제로 미지를 탐구하려는 '호기심'은 사악한 유혹으로 여겨졌기에 두려워하고 삼가 할 일로 간주되었다. 마술에 홀린 사람이나 이러한 악덕에 빠지며, 결국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것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어떠한 고대인도, 심지어 어떠한 고대 시인도 자신 느낌을 표현하지 않았다. 그리스-로마의 시(詩)에는 ‘나’라는 단어가 사용되지 않았다. 고대 시인은 ‘나의’ 사랑이나 슬픔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질투나 사랑 그 자체를 노래했다. 시인은 누구에게나 공통으로 적용되는 감정을 말한 것이지, 독자가 자신 개인감정 상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요구한 일이 아니었다. 고대인들은 개인 자신 감정을 표현할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고대 로마 시대 사람들만 이렇게 생각한 것이 아니라, 18세기 후반 낭만주의 ‘혁명’ 이전까지는 대부분 사람이 개인 경험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다. 근대 일본도 수많은 서양 책을 가져다가 번역하는 과정에서 가장 옮기기 힘든 단어 중 하나가 ‘individual’이었을 정도였다. 그렇다면, 인간은 수천 년 동안 전쟁을 벌였는데, 인간 경험의 정점인 개인 참전(參戰)도 나의 ‘진짜’ 감정이 아닌 단지 다수가 옳다고 믿는 상호 주관일 수 있을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치열한 전투에 참전한 미군 병사 중 약 50퍼센트는 바지에 오줌을 쌌으며, 약 25퍼센트는 똥을 쌌다고 인정했다. 제1,2차 세계대전과 한국 전쟁 같은 대규모 전투에서는 싸움 중 사망한 병사보다 정신 이상으로 후송된 병사가 더 많았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벌어진 이러한 현상을 ‘잃어버린 사단’이라고 부른 한 연구에서는 미군의 정신적 붕괴로 병력 50만 4천 명을 잃었다고 결론 내렸다. 이 인원이면 50개 사단을 편성할 수 있었다. 게다가, 전형적인 할리우드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과는 달리 현실은 전투에 온전히 교전하는 군인이 소수에 불과하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참전 소총병 85퍼센트가 너무 두려운 나머지 총을 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러한 연구들의 한계는 데이터가 주로 현대 전쟁 사례에 한정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전투에서 살인 시 정신적인 충격이나 감정적 손상을 입는 일은 대개 현재 우리 시대에 나타난 과장된 태도이며, 자신 스스로 초래한,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시대 문화에 영향받은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일 뿐이다. 18세기 이전에는 전쟁에 참전하여 살인을 하거나 심한 부상을 당해도 심리적 충격을 거의 받지 않았다.‘ 낭만주의 혁명 이전 병사들은 자신이 참여한 전투 경험에서 특별한 감정이나 교훈을 얻지 못했다. ‘병사들은 전투 경험을 아주 하찮은 일로 여겼으며, 고통의 시련을 감정적이거나 감각적으로 묘사하지 않았다. 또한, 고통에서 무언가를 배웠다는 기록이나 고통으로 인해 무언가 변했다는 말도 없다. 대신 “우리는 동지와 친구들 시신이 땅바닥에 똥처럼 널려 있는 것을 보아도 아무런 감흥이나 감화를 받지 못한다”와 같은 기록만 남아있을 뿐이다.
당시 회고록을 남긴 사람들은 전투에서 얻은 경험을 개인적으로 특별히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첫 출정이나 적과의 첫 대치, 첫 대규모 전투, 처음으로 들은 포성, 처음으로 죽인 적군, 처음 목격한 전우 죽음, 첫 부상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이 자신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거의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당시 병사들은 적을 죽이는 것, 특히 최초 살인조차 아주 무심하게 다뤘으며, 때로는 농담처럼 회고하기도 했다. 부상으로 얻은 장애도 삶의 전환점이나 자아 발견의 관문으로 보지 않았다. 이 모든 일은 그저 또 한 차례 겪은 사고에 지나지 않았다. 포로 생활에서 겪은 고통이나 전우애 역시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았다. 더욱이 전쟁에 대한 환멸도 표현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한마디로 당시 병사들은 전쟁 경험에서 그 어떠한 깨달음이나 지식을 얻지 못했다. 그들은 몇 년 동안 직접 겪은 일보다는 전쟁에 대해 독서하고 담론을 나누는 일로 더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당시에는 "거기에 가보지 못한 사람은 이해하지 못한다"와 같은 상투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자신이 묘사한 사건을 독자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가정 하에 정반대의 상투어를 종종 사용했다. 예를 들어 포탄에 팔이 잘렸을 때 자신이 겪은 고통은 누구나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고 기록했다.‘
그러다가 18세기 후반 낭만주의의 ‘개인 경험을 소중히 여기는 습성’이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을 휩쓸며 대중화되었고, 오늘날까지도 우리 감수성을 형성하고 있다. 철학자 이사야 벌린은 낭만주의를 서구 세계의 가치관과 역사 흐름을 근본적으로 바꾼 “가장 강력한 표현이자 증상”으로 평가했다. “낭만주의 중요성은 서구 세계에서 삶과 사유를 변모시킨 가장 거대한 최근 운동으로, 서구에서 가장 큰 의식 전환의 단일 사례이다. 이에 비해 19세기와 20세기 발생한 다른 모든 전환은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며, 그래 봤자 낭만주의 운동의 영향을 깊게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낭만주의는 모든 생각과 지식이 육체의 감각 산물이라고 보는 철학적 입장이다. 이에 따라 인간 정신과 영혼은 육체에 종속되어 있다고 여겨진다. 우리가 느끼고 생각한 것은 단지 외부 대상이 감각에 비추어진 일에 불과하다. 따라서 낭만주의는 개인 각자가 경험을 내세워 기득권에 도전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모든 사람이 동일한 육체적 감수성을 소유하고 있기에 경험만으로도 동등한 자질을 얻을 수 있다. 예컨대, 박사가 책으로만 읽는 내용을 문맹인 군인은 직접 경험하면 훌륭한 권위자가 될 수 있었다.‘
인간은 낭만주의 철학과 같은 그 어떤 원대한 시대사상이 없더라고 ‘그냥’ 살수도 있다. 그냥 산다는 것이 잘못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그냥 살아본 적이 없다. 어떠한 사상이 뿌리채 뽑아버릴 수 없을 정도로 우리 안에 깊숙이 심어져 있기에 그냥 산다는 일은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국가가 전부라고 생각하여 국가를 위해 자신 인생 모든 것을 다 바친 사람들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러시아 일반 시민들이 그랬다. 그들이 경험했던 전쟁터는 몹시 참혹했다. "어느 날 백병전이 시작됐어...... 뭐가 기억나느냐고? '오도독오도독' 소리. 그 소리가 기억나......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사방에서 오도독오도독하는데, 사람들 연골이 으슬어지고 뼈마디가 뚝뚝 부러져나가는 소리였지. 그리고 짐승의 울음 같은 처절한 비명들...... 서로를 찔러 죽이고, 숨통을 끊어놓고, 뼈를 부러뜨렸어. 총검으로 입이고 눈이고 닥치는 대로 찔렀지...... 심장을 찌르고 배를 찌르고......" "독일군에게 잡혀간 우리 여성 간호병을 찾아냈지. 세상에, 눈알이 도려내지고 가슴이 잘려나가서는...... 놈들이 말뚝에 박아놓았더라고. 몸에 살을 에는 추위에 꽁꽁 얼어 새하얗고 머리는 완전히 백발이 되어 있었어. 그 아이는 겨우 열아홉 살이었어."
그들이 경험한 전쟁터는 이토록 참혹한데 그들은 기꺼이 스스로 지원에서 전장으로 갔다. “그저 전선으로 가고 싶다는 마음, 그게 다였어. 어떻게 히틀러가 모스크바를 차지하도록 보고만 있겠어?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지! 나만 그런 게 아니었어...... 내 또래 소녀들은 너나없이 모두 전선으로 가겠다고 나섰지. 우리는 우리만 애국심에 불타는 줄 알았어...... 우리만 특별한 경우라고...... 하지만 웬걸, 모병 사무소에 갔더니 글쎄 우리 같은 여자애들이 한가득인 거야. 세상에, 얼마나 놀랐던지! 심장이 뛰고 피가 끓어오르더라고. 나는 선발이 안 될까봐 가슴을 졸였어." "어머니한테 하나밖에 없는 외동딸이었는데도 어머니는 딸을 안쓰러워하기는커녕 오히려 딸이 전선에서 돌아온 일을 모욕으로 생각하셨지. 적과 싸우지 않는 것을.”
전쟁은 이처럼 끔찍한데도 사람들은 왜 기꺼이 그 지옥에 갔을까? "우린 어렸을 때부터 '조국은 우리의 모든 것이다. 우리는 조국을 지켜야 한다'는 소리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자랐어. 그래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전선으로 가기로 결정한 거야. 내가 안 가면 대체 누가 가겠어? 나는 반드시 가야 했지....." "나는 '전선으로 갈 거예요, 전선으로 보내줘요! 전선으로!'라고 날마다 '전선, 전선' 노래를 부르며 고집을 꺾지 않았어. 실은, 포스터 글귀들의 영향이 컸어. '모국이 그대들을 부른다!' '전선을 위해 당신은 무엇을 했는가?' 눈만 뜨면 사방에 보이는 게 그 글귀들이었으니까. 노래는 또 어떤 줄 알아? '일어나라, 위대한 나라여...... 일어나서 죽기까지 싸우라......“
상호주관인 시대사상은 낭만주의처럼 오랜 기간 서서히 형성될 수 있지만, 특정 권력의 선전과 선동으로 아주 단기간 내에 '세뇌'될 수도 있다. 철학자 죄르지 루카치는 선전과 선동이 인간을 '도취'시켜 비인간화하고, 이는 비윤리적이라고 말합니다. "도취는 하나의 기만이며 사기이다. 감정이입을 핵심으로 삼는 일은 일상적인 삶을 격하시킨다. 니체의 '디오니스적 도취'는 감정이입 반응의 극단적 형태이며, 개인 인격을 균열시키고 불안정하게 만든다. 이는 세계와 인간관계를 공허하게 만든다. 선전과 선동은 인간을 기만하는 위장된 오만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