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 강연 ‘플랑크의 양자론과 그리고 원자물리학의 철학적 문제점들’에서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양자물리학의 가장 심오한 의미 중 하나를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여기서 우리는 자연과학이 자연 그 자체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설명하고 이해하는 자연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의 중요성을 깨닫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주관성의 한 요소가 자연과학에 도입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 세계에서 일어나는 과정과 현상이 우리 관찰에 따라 달라진다고는 누구도 주장하지 못합니다 – 자연과학이 인간과 자연 사이에 서 있으며 아울러 우리가 인간 본성에 내재된 인식 개념 또는 기타 다른 개념들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이젠베르크가 암시했듯이 이 점은 단지 양자론에 국한되지 않고 보편적으로 적용된다. 지난 역사에서 명백히 드러났듯이 자연철학 또는 자연과학은 언제나 인간과 자연 사이에 서 있었다. 어떤 시대의 과학사상이든 그 시대 사람들에게 물리적 세계의 진리를 드러내지는 않는다. 다만 사람들이 역사상 그 시기에 세계를 어떻게 설명하고 이해하였는지를 드러낼 뿐이다.



우리는 세계 그 차제에 관한 궁극적인 진리를 향해 나아간다고 곧잘 여긴다. 하지만 수학적 예측치가 관찰된 실험 결과와 아무리 가깝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자연 자체의 실재보다는 자연에 대한 해석에 의존한다.”<서양과학사상사>
















“일반적으로 대상이 존재하고 주체가 그것을 인식한다고 본다. 하지만 유심론인 유식학파는 식(識)이 있기에 경(境, 외부에 존재하는 대상)이 존재한다고 본다. 따라서 경을 객관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꿈을 실재로 착각하는 것과도 같다. 경은 허망한 성격, 즉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 주관의 눈으로 대상을 바르게 보지 못하고, 항상 잘못 분별하는 것)’을 띠는 것이다. 이 허망함을 깨달아야만 ‘객관세계’에 대한 집착에서 해방될 수 있다..“<세계 철학사 2>
















“하이데거에게 현존재는 삶의 지향성인 존재를 망각한다. 그야말로 객관적인 대상 세계가 있다고 믿는다. 말하자면 현존재는 자기가 만든 산물을 산물인지 모르고 자연적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다 현존재에서 객관적인 대상 세계가 사라지는 어떤 체험이 발생한다. 바로 불안 체험이다. 불안은 어떤 것의 부정이 아니라 전반적인 무(無)에서 나온다. 하이데거는 불안 경험에서 우리가 자연 과학의 객관적인 세계로부터 해방되는 계기를 본다. 객관적인 세계가 무너지면 이 세계가 지향적인 삶의 세계임이 드러나면서 도구의 세계가 드러난다.”<현대 철학 아는 척하기>

















“자연에 보편법칙이 있다고 생각하면 이와 같이 왜 그런 법칙이 존재하는지, 혹은 누가 그런 법칙을 만들었는지에 대한 답을 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또 다른 문제도 생긴다. 인간이라는 생물종이 어떻게 우주에 존재하는 보편적 법칙을 이해할 수 있을까? 감각과 이성 모두 완벽하지 않은 인간이라는 생물종이 대체 어떻게, 왜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우주의 보편법칙을 이해하고 발견할 수 있을까? ‘우주의 보편법칙을 이해하는 인간’이라는 관념은 우연히 진화한 인간 존재에게 너무 많은 능력을 부여할 때에만 가능하다.



이런 반론에 다른 논박도 있다. 자연의 법칙을 믿는 과학자들은 자연에 수학적 형태의 법칙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항변한다. 하지만, 예를 들어, 케플러의 제1 법칙도 행성 궤도가 타원에 가까울 뿐이다. 실제 자연을 아주 비슷하게 기술한 자연에 대한 근사일 뿐이다. 과학자들은 실제 복잡한 자연 세계의 여러 조건 중 특정한 조건에만 초점을 맞춘 뒤 과학법칙을 얻어낸다. 그래서 많은 과학법칙이 수학적 형태를 띠고 이다. 자연이 ‘수학이라는 언어’로 쓰였기 때문이 아니라, 자연에서 수학적 관계를 만족하는 특정한 변수들에게만 초점을 맞춰서 변수 사이에 연관 관계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과학은 법칙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낸다.’ 이런 의미에서 과학은 예술과 같이 창조적 활동이다.”<홍성욱의 STS, 과학을 경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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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를 돌이켜 보면 매 시기마다 문화가 같지 않았다. 이러한 문화적 차이는 개인 관심사와 행동을 서로 다르게 구성했다. 만약 특정 시기, 특정 문화가 개인감정을 중요하게 여기고 그 감정을 표현하는 어휘를 풍부하게 제공하면, 사람들은 자신 감정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며, 더 자유롭고 적극적으로 자신 감정을 표현했다. 이처럼 시대마다 문화가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우리가 이해한다면, 현대인이 중요하게 여기는 경험과 감정 역시 역사 산물임을 알 수 있다. 예컨대, "경험해 보지 않았거나 당해보지 않았다면, 말조차 꺼내지 마세요!"라는 우리 표현은 어느 시대에서나 항상 옳았던 말이 아니다.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현대인의 전형적인 특징이 '개인 경험을 소중히 여기는 습성'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경험해 보려고 새로운 땅과 풍경, 음식을 찾아 나서며, 집에서 억지로 지켜야 할 금기에서 벗어나고자 휴양지로 떠난다. 배낭 여행자는 맛있는 음식과 아름다운 풍경뿐 아니라 낯선 곳에서의 위험과 어려움, 불편함을 즐기고자 지구 반 바퀴나 돌아 여행하고, 그 고난을 소중히 간직한 채 집으로 돌아온다.” 우리는 이러한 우리 성향이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고대 로마인들은 분명 이러한 생각을 떠올릴 수 없었다.
















‘로마인들은 다채로운 삶을 체험하지 않기 위해 의식적으로 몹시 노력했다. 이들이 보기에 모험을 즐기는 사람이나 좋아할만한 이러한 욕구는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실제로 미지를 탐구하려는 '호기심'은 사악한 유혹으로 여겨졌기에 두려워하고 삼가 할 일로 간주되었다. 마술에 홀린 사람이나 이러한 악덕에 빠지며, 결국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것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어떠한 고대인도, 심지어 어떠한 고대 시인도 자신 느낌을 표현하지 않았다. 그리스-로마의 시(詩)에는 ‘나’라는 단어가 사용되지 않았다. 고대 시인은 ‘나의’ 사랑이나 슬픔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질투나 사랑 그 자체를 노래했다. 시인은 누구에게나 공통으로 적용되는 감정을 말한 것이지, 독자가 자신 개인감정 상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요구한 일이 아니었다. 고대인들은 개인 자신 감정을 표현할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고대 로마 시대 사람들만 이렇게 생각한 것이 아니라, 18세기 후반 낭만주의 ‘혁명’ 이전까지는 대부분 사람이 개인 경험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다. 근대 일본도 수많은 서양 책을 가져다가 번역하는 과정에서 가장 옮기기 힘든 단어 중 하나가 ‘individual’이었을 정도였다. 그렇다면, 인간은 수천 년 동안 전쟁을 벌였는데, 인간 경험의 정점인 개인 참전(參戰)도 나의 ‘진짜’ 감정이 아닌 단지 다수가 옳다고 믿는 상호 주관일 수 있을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치열한 전투에 참전한 미군 병사 중 약 50퍼센트는 바지에 오줌을 쌌으며, 약 25퍼센트는 똥을 쌌다고 인정했다. 제1,2차 세계대전과 한국 전쟁 같은 대규모 전투에서는 싸움 중 사망한 병사보다 정신 이상으로 후송된 병사가 더 많았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벌어진 이러한 현상을 ‘잃어버린 사단’이라고 부른 한 연구에서는 미군의 정신적 붕괴로 병력 50만 4천 명을 잃었다고 결론 내렸다. 이 인원이면 50개 사단을 편성할 수 있었다. 게다가, 전형적인 할리우드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과는 달리 현실은 전투에 온전히 교전하는 군인이 소수에 불과하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참전 소총병 85퍼센트가 너무 두려운 나머지 총을 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러한 연구들의 한계는 데이터가 주로 현대 전쟁 사례에 한정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전투에서 살인 시 정신적인 충격이나 감정적 손상을 입는 일은 대개 현재 우리 시대에 나타난 과장된 태도이며, 자신 스스로 초래한,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시대 문화에 영향받은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일 뿐이다. 18세기 이전에는 전쟁에 참전하여 살인을 하거나 심한 부상을 당해도 심리적 충격을 거의 받지 않았다.‘ 낭만주의 혁명 이전 병사들은 자신이 참여한 전투 경험에서 특별한 감정이나 교훈을 얻지 못했다. ‘병사들은 전투 경험을 아주 하찮은 일로 여겼으며, 고통의 시련을 감정적이거나 감각적으로 묘사하지 않았다. 또한, 고통에서 무언가를 배웠다는 기록이나 고통으로 인해 무언가 변했다는 말도 없다. 대신 “우리는 동지와 친구들 시신이 땅바닥에 똥처럼 널려 있는 것을 보아도 아무런 감흥이나 감화를 받지 못한다”와 같은 기록만 남아있을 뿐이다. 



당시 회고록을 남긴 사람들은 전투에서 얻은 경험을 개인적으로 특별히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첫 출정이나 적과의 첫 대치, 첫 대규모 전투, 처음으로 들은 포성, 처음으로 죽인 적군, 처음 목격한 전우 죽음, 첫 부상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이 자신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거의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당시 병사들은 적을 죽이는 것, 특히 최초 살인조차 아주 무심하게 다뤘으며, 때로는 농담처럼 회고하기도 했다. 부상으로 얻은 장애도 삶의 전환점이나 자아 발견의 관문으로 보지 않았다. 이 모든 일은 그저 또 한 차례 겪은 사고에 지나지 않았다. 포로 생활에서 겪은 고통이나 전우애 역시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았다. 더욱이 전쟁에 대한 환멸도 표현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한마디로 당시 병사들은 전쟁 경험에서 그 어떠한 깨달음이나 지식을 얻지 못했다. 그들은 몇 년 동안 직접 겪은 일보다는 전쟁에 대해 독서하고 담론을 나누는 일로 더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당시에는 "거기에 가보지 못한 사람은 이해하지 못한다"와 같은 상투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자신이 묘사한 사건을 독자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가정 하에 정반대의 상투어를 종종 사용했다. 예를 들어 포탄에 팔이 잘렸을 때 자신이 겪은 고통은 누구나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고 기록했다.‘

















그러다가 18세기 후반 낭만주의의 ‘개인 경험을 소중히 여기는 습성’이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을 휩쓸며 대중화되었고, 오늘날까지도 우리 감수성을 형성하고 있다. 철학자 이사야 벌린은 낭만주의를 서구 세계의 가치관과 역사 흐름을 근본적으로 바꾼 “가장 강력한 표현이자 증상”으로 평가했다. “낭만주의 중요성은 서구 세계에서 삶과 사유를 변모시킨 가장 거대한 최근 운동으로, 서구에서 가장 큰 의식 전환의 단일 사례이다. 이에 비해 19세기와 20세기 발생한 다른 모든 전환은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며, 그래 봤자 낭만주의 운동의 영향을 깊게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낭만주의는 모든 생각과 지식이 육체의 감각 산물이라고 보는 철학적 입장이다. 이에 따라 인간 정신과 영혼은 육체에 종속되어 있다고 여겨진다. 우리가 느끼고 생각한 것은 단지 외부 대상이 감각에 비추어진 일에 불과하다. 따라서 낭만주의는 개인 각자가 경험을 내세워 기득권에 도전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모든 사람이 동일한 육체적 감수성을 소유하고 있기에 경험만으로도 동등한 자질을 얻을 수 있다. 예컨대, 박사가 책으로만 읽는 내용을 문맹인 군인은 직접 경험하면 훌륭한 권위자가 될 수 있었다.‘
















인간은 낭만주의 철학과 같은 그 어떤 원대한 시대사상이 없더라고 ‘그냥’ 살수도 있다. 그냥 산다는 것이 잘못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그냥 살아본 적이 없다. 어떠한 사상이 뿌리채 뽑아버릴 수 없을 정도로 우리 안에 깊숙이 심어져 있기에 그냥 산다는 일은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국가가 전부라고 생각하여 국가를 위해 자신 인생 모든 것을 다 바친 사람들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러시아 일반 시민들이 그랬다. 그들이 경험했던 전쟁터는 몹시 참혹했다. "어느 날 백병전이 시작됐어...... 뭐가 기억나느냐고? '오도독오도독' 소리. 그 소리가 기억나......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사방에서 오도독오도독하는데, 사람들 연골이 으슬어지고 뼈마디가 뚝뚝 부러져나가는 소리였지. 그리고 짐승의 울음 같은 처절한 비명들...... 서로를 찔러 죽이고, 숨통을 끊어놓고, 뼈를 부러뜨렸어. 총검으로 입이고 눈이고 닥치는 대로 찔렀지...... 심장을 찌르고 배를 찌르고......" "독일군에게 잡혀간 우리 여성 간호병을 찾아냈지. 세상에, 눈알이 도려내지고 가슴이 잘려나가서는...... 놈들이 말뚝에 박아놓았더라고. 몸에 살을 에는 추위에 꽁꽁 얼어 새하얗고 머리는 완전히 백발이 되어 있었어. 그 아이는 겨우 열아홉 살이었어." 



그들이 경험한 전쟁터는 이토록 참혹한데 그들은 기꺼이 스스로 지원에서 전장으로 갔다. “그저 전선으로 가고 싶다는 마음, 그게 다였어. 어떻게 히틀러가 모스크바를 차지하도록 보고만 있겠어?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지! 나만 그런 게 아니었어...... 내 또래 소녀들은 너나없이 모두 전선으로 가겠다고 나섰지. 우리는 우리만 애국심에 불타는 줄 알았어...... 우리만 특별한 경우라고...... 하지만 웬걸, 모병 사무소에 갔더니 글쎄 우리 같은 여자애들이 한가득인 거야. 세상에, 얼마나 놀랐던지! 심장이 뛰고 피가 끓어오르더라고. 나는 선발이 안 될까봐 가슴을 졸였어." "어머니한테 하나밖에 없는 외동딸이었는데도 어머니는 딸을 안쓰러워하기는커녕 오히려 딸이 전선에서 돌아온 일을 모욕으로 생각하셨지. 적과 싸우지 않는 것을.” 



전쟁은 이처럼 끔찍한데도 사람들은 왜 기꺼이 그 지옥에 갔을까? "우린 어렸을 때부터 '조국은 우리의 모든 것이다. 우리는 조국을 지켜야 한다'는 소리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자랐어. 그래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전선으로 가기로 결정한 거야. 내가 안 가면 대체 누가 가겠어? 나는 반드시 가야 했지....." "나는 '전선으로 갈 거예요, 전선으로 보내줘요! 전선으로!'라고 날마다 '전선, 전선' 노래를 부르며 고집을 꺾지 않았어. 실은, 포스터 글귀들의 영향이 컸어. '모국이 그대들을 부른다!' '전선을 위해 당신은 무엇을 했는가?' 눈만 뜨면 사방에 보이는 게 그 글귀들이었으니까. 노래는 또 어떤 줄 알아? '일어나라, 위대한 나라여...... 일어나서 죽기까지 싸우라......“
















상호주관인 시대사상은 낭만주의처럼 오랜 기간 서서히 형성될 수 있지만, 특정 권력의 선전과 선동으로 아주 단기간 내에 '세뇌'될 수도 있다. 철학자 죄르지 루카치는 선전과 선동이 인간을 '도취'시켜 비인간화하고, 이는 비윤리적이라고 말합니다. "도취는 하나의 기만이며 사기이다. 감정이입을 핵심으로 삼는 일은 일상적인 삶을 격하시킨다. 니체의 '디오니스적 도취'는 감정이입 반응의 극단적 형태이며, 개인 인격을 균열시키고 불안정하게 만든다. 이는 세계와 인간관계를 공허하게 만든다. 선전과 선동은 인간을 기만하는 위장된 오만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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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흔한 현재든 책이 귀한 과거든, 책을 읽을 줄 아는 사람에게는 책 읽을 기회만 다를 뿐, 책 읽는 방법은 항상 같을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우리가 상상하는 것처럼 예전 사람들이 우리와 같은 방식으로 책을 읽었다고 생각하면 오해일 수 있다. 독서란 단순히 숙련된 기술만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와 소통하며 주관적이고 적극적으로 의미를 해석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예전 사람들이 책을 어떻게 읽었는지 알아보는 일은 그들이 우리와 어떻게 다르게 느끼고 생각했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오늘날에도 글을 읽을 줄 안다고 해서 모두가 글을 잘 쓸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유럽 중세는 글 읽기와 쓰기에 더 큰 차이점이 있었다. 귀족에게는 글을 읽을 줄 아는 하인과 쓸 줄 아는 하인이 따로따로 적어도 한 명씩 있었다. '귀족이 편지를 읽는 일은 결코 없었다. 하인이 편지를 읽어주었다. 더욱이 글을 읽을 수 있는 하인이라고 해서 반드시 글자를 쓸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글쓰기는 글자에 관한 단순 지식 이상이 요구되는 서로 다른 기술이었다. 모든 글이 읽혀졌는데, 계산서도 누군가에게 큰 소리로 낭독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쓰는 ‘auditing(회계 감사)’의 어근 ‘aud-’에서 이런 듣기 관습을 엿볼 수 있다. 대수도원장은 일주일에 한 번씩 자신 계산서 내용을 들었다. 교황은 읽을 수 있었지만, 항상 자신에게 큰 소리로 편지를 읽어주도록 시켰다.

 


이러한 관습을 보면, “다른 사람들 앞에서 비밀이라도 되는 것처럼 글을 속으로 읽지 말라”는 경고가 암시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당시는 혼자서 책을 읽으면 이단 행위가 될 수 있는 분위기였다(15세기 잉글랜드가 특히 그랬다). 실제 소리 내지 않고 속으로 읽을 수 있는 사람은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암브로시우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놀라운 일이다. 그가 자신 눈을 책 위로 미끄러지듯이 굴리며 책을 읽을 때면, 그의 심장은 그 의미를 알아차렸지만 그의 목청과 혀는 움직이지 않았다.”
















19세기까지도 많은 사람이 책을 조용하게 읽을 수가 없었다. 큰 소리로 글을 읽지 않으면 언제나 본인이 읽는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다. 기도가 소리 내어 읽는 것과 연관이 있었다. 기도문에 적힌 글은 말해짐으로써 의미가 더해졌다. 성스러운 텍스트를 읽는 것은 정보를 얻는 것이라기보다 신의 지혜를 음미하는 일이었다. 읽기는 거의 명상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처럼 모든 저술의 읽기는 일종의 마술적 힘을 갖고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특히 성스러운 글은 더욱 그랬다. 문자를 통해서 독자에게 하느님 빛이 비춰지는 느낌이었다. 실제로 독서는 영적인 활기를 주는 신체 행위였다.



14세기 이전 유럽에서는 단어와 문장, 문단 구분이 거의 없거나 아예 없었다(로마시대에는 단어를 그냥 이어서 썼다). 그런 탓에 독서가 어렵고 큰 소리로 책을 읽어야 했다. 이 무렵 주어-동사-목적어 어순이 고정되었다. 이러한 글쓰기 변화가 자극이자 원인이 되어 문맹률이 크게 줄었다. 14세기 초 이르러서야 필기체가 개발되면서 단어가 분리되고 구두점과 장, 제목, 전후 참조 같은 장치들이 생겨났다. 이런 혁신이 독서 방식을 낭독에서 묵독으로 바꿔놓았다. 이러한 독서 혁명은 16세기에는 이미 상당히 진전되었지만, 글에 숙달되지 않은 수많은 일반인에게는 19세기까지 큰 소리로 책을 읽어야 했다.
















이후 묵독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었다. 비밀스럽게 글을 읽을 수 있게 되자 중세 말기에 이미 이교도적인 텍스트가 유통되고 비판적인 사상이 표현되었으며, 적당히 채색된 외설서가 유행했다. 이렇게 되자 독서를 점점 더 사적이고 내면적인 행위로 간주하게 되었다. 개인적인 성찰이 가능해졌고, 전통적인 사고방식과 집단적 사고 통제에서 벗어나 전복과 이단, 독창성, 개성으로의 새로운 흐름이 시작되었다. 이 시기 가장 중대한 심리 변화는 바로 개성의 등장이다. 이로 인해 자의식과 경쟁심, 고유성에 대한 관심이 증대했다. 자화상과 자서전, 일기가 많아진 것도 그런 현상을 반영하며, 마키아벨리의 <군주론>과 같은 ‘처세’ 관련 책이 늘어난 것도 마찬가지다. 















이 당시 글을 읽는 새로운 방식에 따라 사람들 마음속에 변화가 일었다. 이전과 달리 사람들 감성이 더 풍부해졌다. “성인 남녀들은 눈물을 많이 흘렸다. 신부가 그리스도의 수난과 최후 심판을 설교할 때면 몇 번씩이나 설교를 중단해야만 했다. 설교하는 사람과 설교를 듣는 청중 모두가 너무도 격하게 목메어 울었기 때문이다. 영국왕 에드워드 2세는 포로로 잡혔을 때 어찌나 많이 울었든지, 솟구쳐 흐르는 더운 눈물로 얼굴을 적셔 면도를 할 정도였다고 한다.”














폭력이나 화끈한 섹스 이야기, 심지어 특별한 스토리도 없는 여섯 권짜리 루소의 <신엘로이즈> 소설은 18세기 독자들을 압도했다. 당시 사회 모든 계층의 평범한 독자들은 흉금을 털어놓고 많은 눈물을 흘렸다. 애독자가 루소에게 보낸 편지에는 온통 울음뿐이다. 어떤 신부님은 친구들에게 같은 구절을 최소한 열 번에 걸쳐 크게 읽으면서 매번 눈물을 터뜨렸다고 한다. “감정과 울음으로 숨이 막히고 있다고 당신 루소에게 편지를 씁니다.” 어떤 남작은 그 책을 읽는 유일한 방법은 하인 방해를 받지 않고 마음 놓고 울 수 있도록 문을 잠가놓고 읽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또 어떤 사람은 건강이 너무 약해 감정을 견딜 수 없으므로 한 번에 단 몇 페이지씩만 읽었다. 당시 독자들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정신 세계 속에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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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기업은 단순히 사익(社益)뿐만 아니라 공익(公益)에도 기여해야 할 신탁(信託) 책임이 있다. 기업은 주주뿐 아니라 고객을 비롯한 대중 이익에도 부합하도록 운영되어야 한다. ‘미국은 건국 후 한 세기 이상에 걸쳐 기업이 이러한 기준을 준수하도록 법률로 규제했다. 각 주(州)는 기업이 공익에 도움 된다는 점을 입증하지 못하면 허가증을 내주지 않았다. 또한, 신탁 책임을 다하지 못한 기업은 폐업 처분을 받았다. 다른 기업을 인수하거나 시장을 독점하는 등 공정하지 않은 행위는 용납되지 않았다.’ 하지만 1890년대 이후 기업에 대한 태도와 관련 법률이 급속하게 변화했다.
















‘1890년 록펠러가 소유한 스탠더드 석유회사는 체이스맨해튼 은행을 비롯한 여러 기업에 분산 투자를 하며, 이른바 ‘지주회사(holding company)’로 변모했다. 이러한 투자 방식으로 록펠러는 독점 금지법을 회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스탠더드 석유회사는 다른 주에 공장을 소유하거나 다른 주 기업 주식을 소유할 수 없었다. 록펠러는 아홉 명으로 구성된 신탁위원회를 통해 이 문제를 해결했다. 그에 따라 스탠더드 석유회사는 주식을 발행하는 대신 ‘트러스트’라는 신탁증서를 발행하는 회사가 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방식으로 록펠러는 독점 금지법을 위반하지 않고도 모든 산업을 석권할 수 있었다. 이 방식은 곧 다른 기업에도 전파되어 1890년대 초 기업 5,000개가 트러스트 300개를 구성하게 되었다. 가령, 모건의 철도 트러스트만 해도 거의 4만 마일에 이르는 철도를 소유했다. 이러한 트러스트와 거대 기업의 독점은 결과적으로 인위적 가격 상승과 경쟁 방지, 형편없는 임금 하락을 초래했다. 독점 기업은 노동자들 희생을 바탕으로 부당 이득과 정부 보조금을 통해 발전했다. 



이 같은 당시 분위기에 더해 1886년 미국 대법원은 해방 노예 권리를 보장하고자 만든 수정헌법 14조를 기업을 보호하는 취지로 해석하여 기업을 '법인(法人)'으로 규정하고, 기업도 개인과 같은 권리를 가지지만, 개인에게 요구되는 의무는 기업에 쏙 빠진 판결을 내렸다. 이 판결은 기업에 대한 태도를 급격하게 변화시키게 되었다. 예컨대, 미국 대법원이 국가 총 제당(製糖) 용량의 98퍼센트를 소유한 회사를 통상 독점이 아닌 제조 독점이라고 판단하고 반트러스트법(독점금지법)에 저촉되지 않는다고 판결을 내리고, ‘통상을 방해한’ 파업 노동자들을 구속시켰다.‘ ’대법원의 급진적 판결 이후, 기업들은 다른 기업을 매수하고 매각할 수 있게 되었으며 잘못된 내용으로 광고를 할 수 있는 언론 자유도 높아졌다. 또한, 기업들은 더 이상 공익을 고려할 의무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법인 기업은 자연인 시민과 같은 법적 권리가 있기에 대부분의 보통 시민은 시장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법률이나 정치 영역에서도 이들 거대한 기업과 대적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여컨대 대기업이 당신을 고소하면 당신은 국선 변호사를 선임할 수밖에 없겠지만, 대기업은 국내, 아니 세계 최고 법률사무소를 고용하여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법인과 자연인은 애초 서로 게임조차 되지 않는다. ‘현재 세계에서 상위 500개 기업 매출액은 전 세계에서 생산되는 재화와 서비스 가치의 거의 절반에 해당한다. 경제 수치로 보면, 세계 대표 기업들은 세계 대부분 국가보다 더 크다. 예컨대, 엑슨모빌이나 월마트, 로열더치쉘 등의 매출은 터키나 폴란드, 노르웨이, 사우디아라비아, 아일랜드, 핀란드, 남아프리카공화국, 포르투갈 등의 GDP보다 더 크다.’ ‘법인 기업 같은 추상적인 실체는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자신의 배타적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 게다가 법인 기업은 악성 부채에 제한적인 책임 같은 특수한 법적 특권까지 가지고 있다. 우리는 대기업이 살아 있는 모든 인격체와 같은 온갖 권리를 향유할 수 있지만, 동시에 우리 모두에게 강제되는 갖가지 책임에서 면제된다는 사실에 당연히 혼란을 느낄 수밖에 없다. 법인은 부와 규모에 기반하여 권력을 휘두르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을 일반 시민처럼 대접받고자 모든 권리를 달라고 주장한다. 국가 경제를 능가하는 규모로 영업을 펼치는 법인과 개별 자연인 사이 차이가 무엇인지조차 애매해지고 말았다. 법인에 대한 이루 말할 수 없는 혼란과 혼동이 도사리고 있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법인과 인간 삶 사이 어떤 것에 더 우선순위를 두느냐이다. 법인은 공익을 위해 운영되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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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23-03-29 22: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북다이제스터님 말씀처럼, 법인은 자연인보다 시장경제에서 절대적으로 유리한 상황에 위치한 듯 합니다. 최악의 경우 일단 해산하고, 새로운 곳에서 재설립하면 새로운 생명을 부여받는 소수 자연인의 경제적 껍데기인 법인에 대한 규제는 정치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북다이제스터 2023-03-30 11:31   좋아요 1 | URL
넵, 겨울호랑이 님 말씀처럼 ‘무소불위‘의 법인은 결국 정치적, 제도적으로 통제가이뤄져야 한다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그래서 몇 가지 방안을 챗지피티에게 물어보니, 미국은 오히려 정치가 법인을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이 된 것 같습니다. ㅠㅠ
˝2010년 미국 대법원은 법인이 개인처럼 정치 캠페인에 무제한으로 돈을 기부할 권리가 있다고 판결했다. 더욱이 개인은 선거운동에 얼마나 기부했는지 밝혀야 하지만, 법인은 공개할 필요가 없다.˝
법인에 돈을 받은 정치인이 법인 이익에 역행하는 제도를 만들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듭니다.ㅠㅠ
 
















“통상 낡은 것처럼 보이고 실제로 낡은 것이라고 주장되는 이른바 전통은, 그 기원을 따지고 보면 극히 최근의 것이며 종종 발명된 것이다.



홉스봄 교수가 엮은 이 책은 우리가 피상적으로 알던 ‘오랜 전통’의 허상을 여실히 드러내준다. 홉스봄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새로운 국경일, 의례, 영웅이나 상징물들이 대량으로 만들어지는 등 ‘전통 창조’가 유럽에서 집중적으로 일어났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문제는 그런 발명된 전통이 역사와 동떨어져 있으며 정치적 의도에 의해 조작되고 통제된다는 사실이다.



영국의 황실의례가 대표적인 예다. 이 책은 특히 이 시기 유럽에서 전통의 창조가 ‘현재’의 필요를 위해 과거 이미지를 만들어낸 예를 추적하며, 만들어진 전통이 어떻게 역사적 사실로 자리잡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정치인들에 의해 국민국가 권위와 특권을 부추기기 위해 사용되었는지를 보여준다. 나아가 이 책은 집단적 기념행위가 국민 정체성을 형성하기 위한 ‘전략’이었으며, 신호와 의례가 사람들로 하여금 만들어진 ‘공식 기억’을 믿도록 하는 데 의도적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도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특히 19세기 말, 20세기 초라는 시기에 전통이 만들어진 이유는 무엇인가? 홉스봄은 이 시기 유럽이 산업경제가 도래하고 도시화가 전개되며 국민국가가 대두하는 와중에서 급변하고 있었다고 진단한다. 사람들은 급변하는 사회에서 안정을 필요로 했고 그것이 전통이 창조되어야 할 이유였다는 것이다. 게다가 당시는 선거 민주주의가 확산되고 대중정치가 출현한 시기다. 이때 국가는 어떻게 신민들이나 구성원들의 복종과 충성심을 확보하고 유지할 것인가, 혹은 그들 눈에 어떻게 정당하게 비칠 것인가라는 유례없는 문제에 직면했으며, 엘리트는 스스로를 대중과 연결시키기 위해 의례나 레토릭 그리고 상징물을 필요로 했는데, 그것이 전통 창조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홉스봄 교수는 신생국이건 역사가 오랜 국가건 모두 오래 된 과거를 요구하기 마련이라고 지적한다. 1870년대 이후 유럽 각국은 ‘전통의 발명’이라는 견지에서 의미심장한 몇 가지 발전을 보였다. 첫째는 초등교육 발전으로 대부분 선진 유럽 국가들이 초등교육 의무제를 도입하고 자국 역사와 국민적 전통을 아동들에게 주입시켰다. 두 번째는 공식 의례의 발명인데, 프랑스에서 1880년 바스티유의 날이 국경일로 제정되고 <라 마르세예즈>가 국가로 지정되었으며, 영국에서는 빅토리아 여왕의 즉위 50주년 기념행사(1887)와 60주년 기념행사(1897)가 대단히 성공적으로 치러졌다. 세 번째는 공공 기념의 대량 생산으로, 수많은 기념물이 이 때 건립되었다. 현재 유럽 대도시들을 장식하는 수많은 동상과 건축물이 그 결과다.



1870년과 1914년 사이에 태어난 ‘신생국’인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은 대체로 영국식 모델에 기초해서 국가 수도를 정하고, 국기, 국가, 국경일을 제정했다. 이런 전통에서 영국은 가장 앞선 전범을 보였는데, 1740년에 만들어진 영국의 <신이여 국왕을 보호하소서(God save the king)>가 세계 최초의 국가(國歌)이기 때문이다. 국기는 1789년 프랑스 혁명 당시 나타난 삼색기가 선례가 되었다. 만들어진 전통에서 무엇보다도 핵심적 역할을 하는 것은 기념행위다. 기념행위는, 그것이 없다면 일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일시적일 수밖에 없는 집단적 기억을 안정화시키려는 계산된 전략이다. 그것은 과거로 하여금 현재에 돛을 내리게 하고, 시간이 멈춰 있을 수 있다는 환상을 만들어낸다. 1870년 이후 거행된 기념행위는 한 가지 면에서 그 이전과 다른 양상을 보였다. 예를 들어, 이전까지는 엘리트 중심이던 왕실의례가 이번에는 대중을 겨냥해서 거행되었다는 사실에 그 새로움이 있었다. 대중 민주주의 시대에 군주는 모든 신민의 집합체와 직접 관계를 설정해야 했던 것이다. 문제는 19세기 기념행사들이 대체로 민중을 ‘위한’ 것이었지만 민중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집단적 정체성과 전통의 창조에 대한 관심은 1980년대 들어 포스트모더니즘과 ‘언어적 전환(linguistic turn)’이라는 새로운 사조에 의해서도 촉진되었다. 이 두 사조는 역사적 서술의 중립성에 대한 역사가들의 무비판적 믿음에 종지부를 찍었다. 포스트모더니즘 시각에서 볼 때 역사적 사료는 진리가 아니라 하나의 텍스트에 불과하며, 역사적 사실에 근거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된 서술은 실은 권력 의지에 의해 구성된 담론일 뿐이다. 게다가 마르크스주의가 주장한 바대로 확고한 경제적 토대와 그 위에 구성되는 상부구조에 대한 확신이 사라지면서 ‘사실’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게 되었다. 그 결과 랑케 이래 역사학을 지배해 온 실증주의가 도전받게 되었으며, 역사가들은 과거를 기억하는 것과 과거를 역사적으로 이해하는 것 사의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역사가가 내세우는 모토는 과거가 ‘실제로 어떠했는가’를 찾아내는 작업이 아니라, ‘왜 우리가 지금 하는 것처럼 과거를 개념화하는가’에 집중되었으며, 과거 사실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왜 기억되는가’를 밝히는 것으로 변한 것이다. 역사는 이제 일종의 ‘공공 기억’ 학문적 권위 세례를 받은 과거의 재현”이라고까지 말해진다.



근대 들어 국가가 어떻게 신민들이나 성원들의 복종과 충성, 협력을 확보하고 유지할 것인가, 혹은 어떻게 해야만 그들 눈에 정당하게 비칠 것인가라는 유례 없는 문제들이 제기되었다. 국가가 개인으로서 신민 또는 시민들과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고받게 되는 정규적인 관계들이 점점 더 핵심적인 문제로 떠올랐다는 바로 그 사실로 말미암아, 한때 사회적 종속관계를 폭넓게 떠받쳤던 낡은 장치들은 취약해지는 경향이 있었다. 과거에는 한 통치자 아래에서 상대적인 자율성을 누렸던 집합체나 법인체, 하지만 역시 자기 구성원을 통제하면서 정상에서 버티던 더 높은 권위에 잇닿아 있는 권위 피라미드가 사회 위계를 성층화했고, 그런 구조에서 각 계층은 합당한 자리를 온전히 차지할 수 있었다. 어쨌거나 계급이 관등을 대체하는 것과 같은 종류의 사회적 변형들로 말미암아, 그런 낡은 구조는 침식되었다. 국가와 지배자가 직면한 문제들이 더 첨예하게 제기된 경우는 명백히 신민들이 시민, 즉 제도적인 차원에서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정치행위 – 비등한 예로 선거의 경우 -의 주체로 변형된 경우였다. 그런 문제들이 한층 더 첨예해진 경우도 있었는데, 말하자면 대중으로 시민 정치운동이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인 지배체제의 정당성에 의도적으로 도전했을 때, 혹은 상위에 군림하는 몇몇 다른 인간집단체 – 가장 일반적으로 계급, 교회, 민족체 -에 한계를 설정함으로써 국가질서와 양립할 수 없음을 위협적으로 시위할 때가 바로 그런 경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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